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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9. 23
세기의 장례식이 끝났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은 ‘60년을 준비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치러졌다. 지난 9월 19일 아침 11시 왕실 직할 성당인 런던 웨스터민스터사원에서 시작해 런던의 관문 히드로공항 근처 여왕의 주말 거처인 윈저성에서 계획대로 오후 4시30분 끝이 났다. 500여명의 해외 국가 정상 조문객들과 국내 주요인사 2000여명의 의전을 기계처럼 해낸 영국 정부의 저력은 칭찬받을 만했다.
12일간의 국장 기간 동안 한국은 물론 전 세계 언론들이 수많은 여왕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그런데 한국 언론의 여왕 기사들 중에는 고소를 금치 못할 기사가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에서 기록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오보 몇 개만 언급하고자 한다.
정치적 고려로 밸모럴성을 골라 숨졌다고?
가장 백미는 여왕이 왜 스코틀랜드 북부인 하이랜드 평원 안에 위치한 밸모럴성에서 숨을 거두었는가에 관한 기사이다. 한국 여러 매체에는 여왕이 밸모럴성을 굳이 골라서 서거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바로 스코틀랜드 독립을 말리고자 하는 고도의 정치적 고려가 숨겨진 마지막 애국이라는 해석이었다. 동일한 내용의 기사 중 가장 심한 제목은 ‘英 여왕 스코틀랜드 서거는 기획된 것… 北 아오지 비슷한 곳’이었다. 여왕이 자신이 언제 죽을지 미리 알고 굳이 밸모럴성을 골라 스코틀랜드 국민에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는데 밸모럴성이 있는 애버딘은 오지 중의 오지라는 것이었다. 기사는 거기서 더 나아가 영국 왕족은 자신이 언제쯤 죽겠다는 걸 예상해 대비하고 죽는다고까지 했다. 과연 이게 가능한 이야기인가? 국제 토픽에 날 만한 발언을 한국 유수 언론들은 거르지 않고 기사로 다루었다.
여왕이 매년 8~9월 두 달을 스코틀랜드 애버딘 근처 밸모럴성에서 지내는 것은 오래된 관례이다. 여왕의 고조모 빅토리아 여왕도 밸모럴성을 ‘지상의 천국’이라고 여기면서 항상 여름휴가를 보냈다. 여왕이 밸모럴성에서 휴가를 보내는 두 달 동안 여왕의 공식 거주지인 런던 버킹엄궁은 일반인에게 입장료를 받고 공개한다. 여왕의 내실만 빼놓고 거의 대부분의 장소를 개방한다. 그 대금으로 1992년 11월 화재로 탄 윈저성 수리비를 지금도 보태고 있다. 수리비는 당시 금액으로 3650만파운드였는데 현재 금액으로는 7550만파운드(약 1200억원)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화재가 나서 여왕이 속이 상해 있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여왕의 거처를 위해 또 국민 혈세가 낭비되느냐는 논쟁이 벌어졌다. 여왕은 중신들과 상의해 수리비의 상당 부분을 왕실에서 충당하기로 했고 그래서 나온 궁여지책이 세계 어디에도 없는 왕궁 개방이었다. 당시 화재는 여왕의 개인 예배실에서 시작되어 외빈 접대실인 성조지홀 등을 비롯해 여왕 접견실까지 모두 태웠다. 지금은 말끔히 수리되어 전혀 알아볼 수 없지만 화재가 난 당시 상황은 아주 끔찍했다.
자신의 집이 불탄 것은 가족이 세상을 떠나는 일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화재가 났던 1992년은 여왕의 96년 삶에서 가장 힘든 해였다. 화재뿐만 아니라 맏아들 찰스가 다이애나와 이혼했고, 둘째 아들 앤드루도 퍼기와 이혼을 했다. 그래서 여왕은 자신의 즉위 40주년 축하 기념식에서 1992년을 ‘끔찍한 해(Annus Horribilis)’라고 말할 정도였다.
어쨌든 여왕은 스코틀랜드 한복판에 위치한 아름다운 밸모럴성에서 여름을 보내다가 우연히 세상을 뜬 것이지 작정한 일이 아니다. 밸모럴성이 위치한 애버딘을 ‘한반도의 아오지 같은 곳’이라고 언급한 것도 기가 막혔다.
애버딘은 스코틀랜드 도시 중 3위인 50만 인구를 가진 대도시다. 더욱이 북해 유전을 관리하는 중점도시로 한국 회사들의 발걸음도 잦은 곳이다. 애버딘이 아오지 같은 곳이라니! 한국 언론은 이런 해괴망측한 발언을 거르지 않고 흥미 위주로 실었다.
▲ 지난 9월 19일 찰스 3세 등 왕족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웨스트민스터사원의 장례식장을 떠나는 여왕의 운구 행렬. / 뉴시스
57년 만의 유해 공개가 아니었다
다른 오보는 ‘윈스턴 처칠 이후 57년 만의 유해 공개’다.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기사는 이번 여왕의 유해 공개가 1965년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국장 이후 57년 만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이전에 한 번 더 있었다. 2002년 3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모친, 즉 조지 6세 부인인 엘리자베스 여왕의 장례식 때도 웨스터민스터홀에서 유해 공개를 했다. 당시 3일간 약 22만명이 조문을 했다. 비록 의례 장례(ceremonial funeral)였지만 거의 국장 수준이었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조지 6세의 부인이자 여왕의 모친은 103살까지 살면서 영국 국민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거의 국장 수준의 의례 장례는 마거릿 대처 전 총리, 다이애나 공주, 여왕 남편 필립 공의 서거 때도 치렀다. 그러나 이들은 유해 공개 조문은 받지 않았다. 대처 전 총리 서거 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국장을 허락했으나 본인이 생전에 고사했고, 필립 공도 국장을 본인이 거부했었다.
‘유해 공개(lay in state)’를 국장으로 해석한 오보도 있었다. 영어 ‘in state’는 ‘위엄을 갖추고, 당당하게, 정식으로, 정장하여’라는 뜻이 있다. 굳이 해석을 하면 ‘위엄을 갖추고 누워 있다’이다. 말 그대로 유해 공개를 한다는 뜻이다. 원래 유해 공개는 러시아 지도자들 장례처럼 관 뚜껑을 열어놓고 조문객이 고인의 얼굴을 보게 한다. 그러나 영국은 보통 관 뚜껑을 닫고 조문객을 맞는다. 이번에도 여왕의 관은 닫혀 있었다.
중세 영국에서는 주요 인물의 장례식을 하려면 지방에서 가족과 친척 친지가 와야 하는데 그때까지 시신을 온전하게 보관할 수가 없어 납으로 밀봉된 관에 시신을 넣고 대신 관 위에는 고인의 모습을 조각한 모형을 만들어 올려 놓았다. 그 전통에 따라 왕실의 관 내부 역시 납으로 만들어져 밀봉돼 있다. 외부 공기가 내부로 들어가 부식되지 않게 하고 내부의 냄새가 밖으로 새 나오지 않게 납을 쓰는 것이다. 일반인의 장례식에는 보통 양쪽 합쳐서 6명이 관을 들지만 이번에 여왕의 관은 8명이 들었다. 납 땜 때문에 관이 무거워진 탓이다.
여왕의 유해 공개는 성자일스성당을 시작으로 템스강변의 웨스트민스터홀에서 4일간 진행됐다. 이 기간 25만명의 일반 국민들이 조문했다. 국장을 비롯한 주요 장례의 유해 공개는 모두 웨스트민스터홀에서 한다. 웨스트민스터홀은 영국 역사의 주요 장면마다 등장하는 현장이다. 정복왕 윌리엄 노르망디 공의 아들 윌리엄 2세가 1097년 공사를 시작해 단 2년 만에 완공한 건물로 역사가 1000년이 다 되어 가는 곳이다. 1533년 영국이 로마 가톨릭과 이별하고 성공회를 만들게 된 계기를 제공한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 앤 볼린 여왕의 대관식 대연회, 1535년 헨리 8세의 이혼을 반대하며 목숨을 잃은 영국의 양심과 신념의 상징 토머스 모어 대법관의 재판, 1554년 여왕이 되기 전에 모함을 받은 엘리자베스 1세 재판, 1649년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참수당한 찰스 1세 왕의 재판이 다 여기서 열렸다. 그야말로 영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영면 장소는 교회 지하가 아니라 예배실이다
여왕이 영면할 장지에 관한 오보도 있었다. 한국의 한 언론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열흘 뒤 국장 치르고 윈저성 내 교회 지하에 영면’이란 제하의 기사가 나왔는데, 제목은 물론 ‘교회 지하에 영면’이란 내용도 오보이다. 여왕의 장지는 지하 묘당(Royal Vault)이 아니다. 윈저성 내 영국 왕 직할의 성조지 예배당(chapel) 신도석(nave) 북쪽 벽에 위치한 조지6세 기념 예배실(chantry)이 정확한 장소 표기다. 작년에 영면한 필립 공의 경우 본래 성당 지하 묘당에 안장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여왕의 장례식 후 필립 공의 유해를 담은 관이 올려져 조지 6세 기념 예배실 바닥 여왕 옆에 나란히 묻혔다. 이 조지 6세 기념 예배실은 이름이 말해주듯 1952년에 작고한 여왕의 아버지 조지 6세와 2002년에 영면한 여왕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여왕, 여동생 마거릿 공주의 분골이 묻힌 가족 묘지이다.
영국 언론은 윈저성의 조지 6세 기념 예배실이나 이와는 별개인 성조지 예배당을 모두 ‘채플’이라고 부른다. 종교적인 의미로 채플은 주임 사제와 본당 신자가 없는 곳이다. 이를 성당(church)으로 부를 수는 없다. 원래 윈저성의 성조지 채플은 번성하던 성당으로, 윈저성의 왕족과 시종들이 이곳에서 미사를 드렸다. 한창 번성하던 시절 역대 주임 사제(Dean of Windsor) 중에는 크리스토퍼 렌이 있었다. 그의 동명의 아들이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성폴성당을 비롯해 런던 시내 52개 성당을 설계한 17세기 영국 최고의 설계자이다.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와 윈저성 내 신자들이 줄어들면서 상주 주임 사제가 없어지자 그냥 채플(chapel·예배당)로 불리고 있다. 그렇게 보면 여왕의 영면 장소인 조지 6세 기념 예배실을 예배당이라고 불러서도 안 될 듯하다. 가로 3m, 세로4 m의 12㎡(3.6평) 넓이를 채플이라고 부르기도 우습다. 그래서 성조지 채플은 예배당, 조지 6세 기념 채플은 예배실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의 장례식을 마친 후 여왕의 관은 예술품 같은 복장의 근위대 호위 아래 37㎞에 이르는 장의차 수송 행진 끝에 성조지 예배당에 도착한 뒤 하관미사(committal service)가 열렸다. 이때 성조지 예배당 성가대석에는 여왕의 친족들이 앉아 있었고, 신도석에는 영국의 최고위직 인사들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외국 정상 500여명이 착석했다. 여왕 친족들이 앉아 있던 양쪽 성가대석(choir) 중간 바닥에 여왕의 유해가 놓여 있었는데 그 바로 아래 지하에 묘당이 있다. 거기에는 헨리 8세와 헨리 8세가 못내 그리워한 제인 세이무어 여왕, 찰스 1세 등 10명의 영국 왕과 왕족 40명이 안치되어 있다. 성조지 예배당도 에드워드 4세 때인 1475년에 공사를 시작해 헨리 8세에 의해 완공된, 역사가 500년이 넘는 건물이다.
성조지 예배당은 왕실 지정 예배장소로도 쓰인다. 장례식뿐 아니라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열기 힘든 소규모 결혼식, 세례식 등 영국 왕족의 중요 행사가 모두 여기서 열린다. 여왕의 막내인 에드워드 왕자의 결혼식, 2018년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 결혼식도 이곳에서 열렸다. 왕실의 웹사이트에는 성조지 예배당을 ‘왕들이 지었고, 왕족이 지금 모습을 만들었으며, 여전히 왕실 행사와 개인적인 특별한 순간을 위한 장소’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조지 예배당은 다른 의미로도 특별하다. 가톨릭과 성공회의 모든 성당은 교구를 관장하는 주교에 속해 있다. 그러나 여왕의 장례식이 거행된 웨스트민스터사원과 성조지 예배당은 영국 왕의 직할이다. 이를 일러 영어의 ‘기이하다(peculiar)’라는 뜻의 단어를 써서 ‘왕의 직할 성당(Royal peculiar church)’이라고 부른다.
▲ 지난 9월 19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운구 행렬이 윈저성에 도착하고 있다. / 뉴시스
찰스가 왕이 되기를 기다린 기간이 제각각인 이유
성조지 예배당이 위치한 윈저성은 1066년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 노르망디 공이 건설을 시작해 1070년 완공한 건물이다. 이후 증축이 계속돼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빅토리아 여왕을 비롯해 역대 왕들이 시내 버킹엄궁에서 생활하다가 주말이나 쉴 때는 윈저성으로 왔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주말에는 윈저성을 주로 이용했다. 히드로공항 근처라 상공에 항공기가 지나다녀 다소 소음이 있으나 주변보다 높은 언덕에 위치해 경관이 아주 훌륭하다. 영국에서 가장 입장료(26파운드 50펜스·4만2400원)가 비싼 고궁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성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계적 명문학교인 이튼칼리지가 있다.
찰스 3세 왕이 왕세자 직위를 언제 받았느냐는 문제를 놓고도 틀린 내용들이 있었다. 원래 영국의 왕세자는 ‘웨일스 공(The Prince of Wales)’이 되는 순간부터 효력을 갖는다. 여왕의 부친 조지 6세가 승하하는 순간 3살이었던 찰스는 여왕의 맏아들로 왕위 승계 확정자(Heir Apparent)가 되었고 10살인 1958년 왕세자를 뜻하는 웨일스 공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정식 웨일스 공은 20살이 되던 해인 1969년 7월 1일 웨일스 카나본성에서 TV로 중계된 책봉식 때 되었다. 그래서 찰스가 왕이 되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렸는가 하는 질문에는 논쟁의 여지가 다분히 있다. 여왕이 군주가 되는 때부터 계산하면 70년을 기다린 셈이고, 웨일스 공에 서임된 10살부터 치면 63년, 웨일스 공으로 정식 책봉된 때부터 치면 53년을 기다린 셈이다. 그래서 어느 것도 딱히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격식을 따지는 영국인들은 정식으로 웨일스 공이 된 1969년부터 따져 53년이라고 말한다. 어찌 되었건 찰스 3세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기다린 왕세자이고, 가장 늦게 왕이 된 왕세자이다.
한국 가전제품들이 영국 왕실로부터 ‘품질을 인정받아’ 로열 워런트(Royal Warrant)를 받았다는 보도도 잘못된 내용이다. 사실 영국 왕실이 주는 로열 워런트는 품질과는 상관이 없다. 문제는 워런트(warrant)라는 단어가 갖는 ‘보증한다, 확인한다’라는 뜻 때문에 생긴다. 수색영장의 영어는 ‘search warrant’인데 여기서는 ‘보증한다’가 아니라 ‘확인한다’는 뜻이다. 영국 왕실의 로열 워런트 휘장에서의 워런트 역시 해당 제품의 품질을 왕실이 보증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냥 왕실에 해당 물품을 공급하고 있다는 확인과 그에 따른 감사의 표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워런트라는 영어 단어가 갖는 복수의 의미가 주는 혼동을 이용해 왕실과 업체가 교묘하게 마케팅에 이용하는 셈이다.
로열 워런트는 단순한 ‘공급 확인 인증서’다
로열 워런트를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공급 확인 인증서’다. 5년 동안 왕실에 제품을 공급하고 나면 워런트를 신청할 자격이 주어진다. 물론 워런트 기간이 끝난 후 그동안 제품의 뭔가에 왕실의 불만이 있으면 더 이상 연장이 안 된다. 품질이 좋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한국에서 얘기하는 온갖 테스트를 거친 다음 수여하는 KS 마크 인증 같은 제도는 절대 아니다.
로열 워런트 수여 주체는 지금까지 여왕의 모친, 여왕, 필립 공, 찰스 왕세자 이렇게 4개가 있었다. 하지만 앞의 3명이 서거한 후 이제는 찰스 왕의 워런트와 아들 윌리엄 왕세자의 워런트 2개만 남게 됐다.
41억명이 시청한 여왕의 장례식 경비에 대한 결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영국 언론은 2002년 여왕 모친 장례식 경비 540만파운드(약 86억4000만원)의 최소 5배는 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거의 400억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 경비에서 가장 큰 부분은 경비 인력 인건비다. 1997년 다이애나 장례식 때도 500만파운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800만파운드(128억원)나 들었다.
경비가 얼마가 들었든 세기의 장례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끝이났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조문객과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히드로공항 옆까지 37㎞에 이르는 여왕 근위대의 장의차 수송 행진은 거의 예술 같았다. 연변 어디에도 시민들이 없는 곳이 없었다. 방송의 추정으로는 여기저기서 200만명이 어떤 형태로든 장례식에 참여했다고 한다. 호화스럽지만 과하지 않은 여왕 근위대의 진홍색 군복 행렬은 영국인 특유의 격식과 복장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했다.
여왕이 돌아가신 날은 오랜만에 연 이틀 비가 흠뻑 쏟아져 몇 달에 걸친 가뭄이 해갈됐다. 영국인들은 여왕이 선물을 주시긴 했으나 하늘도 슬픈가 보다고 말했다. 영국 언론에는 여왕의 유해 공개가 시작되는 날 윈저성과 버킹엄궁, 웨스터민스터사원 상공에 뜬 무지개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하늘에서 보내는 여왕의 축복인 듯하다는 말들도 나왔다.
권석하 / 재영칼럼니스트·‘두터운 유럽’ 저자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