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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부자(附子) (: 미나리아재비과 오두, 투구꽃)
기미(氣味)는 신감(辛甘)하니, 엄(醃: 소금에 절이다)한 것은 크게 함(鹹)하느니라. 성(性)은 대열(大熱)하니, 양(陽) 중의 양(陽)이니라. 유독(有毒)하느니라.
인삼(人蔘) 황기(黃芪) 감초(甘草) 흑두(黑豆) 녹두(綠豆) 서각(犀角) 동변(童便) 오구(烏韭) 방풍(防風)을 외(畏)하느니라.
그 성(性)은 부(浮)한 중에 침(沈)이 있고, 주(走)하여 불수(不守)하니 제경(諸經)으로 잘 주(走)하므로 주(酒)와 그 공(功)이 동(同)하다 하느니라.
표리(表裏)의 침한(沈寒), 궐역(厥逆) 한금(寒噤)을 제(除)할 수 있고 온중(溫中) 강음(强陰)하며, 오장(五臟)을 난(煖)하고 양기(陽氣)를 회(回)하니 구얼(嘔噦) 곽란(霍亂), 반위(反胃) 열격(噎膈), 심복(心腹)의 동통(疼痛), 창만(脹滿) 사리(瀉痢), 지체(肢體)의 구련(拘攣), 한사(寒邪) 습기(濕氣), 위한(胃寒)의 회충(蛔蟲), 한담(寒痰) 한산(寒疝), 풍습(風濕)의 마비(痲痺), 음저(陰疽) 옹독(癰毒), 구루(久漏) 냉창(冷瘡), 격양(格陽) 후비(喉痺), 양허(陽虛)의 이변불통(二便不通) 및 부인(婦人)의 경한(經寒)의 부조(不調), 소아(小兒)의 만경풍(慢驚風) 등 증(證)을 제(除)하느니라.
크게 인화귀원(引火歸源)하여 허열(虛熱)을 제복(制伏)하니, 인삼(人蔘) 황기(黃芪)를 조(助)하여 공(功)을 이루고 특히 백출(白朮) 지황(地黃)을 도와(:贊) 효(效)를 건(建)하는데 좋으니라.
표증(表證) 리증(裏證)을 막론(:無論)하고 단지 맥세(脈細) 무신(無神)하고 기허(氣虛) 무열(無熱)하면 당연히 급(急)히 사용(使用)하여야 하느니라.
따라서 우박(虞搏)이 이르기를 "부자(附子)는 웅장(雄壯)한 질(質)을 품(稟)하여 참관탈장(斬關奪將: 성문을 부수고 장수를 빼앗다)하는 기(氣)가 있으니, 보기(補氣)하는 약(藥)을 인(引)하여 십이경(十二經)으로 행(行)하게 하여 산실(散失)한 원양(元陽)을 추복(追復)하고, 보혈(補血)하는 약(藥)을 인(引)하여 혈분(血分)에 들어가 부족(不足)한 진음(眞陰)을 자양(滋養)하며, 발산(發散)하는 약(藥)을 인(引)하여 주리(腠理)를 개(開)하므로 표(表)에 있는 풍한(風寒)을 구축(驅逐)하고, 온난(溫煖)한 약(藥)을 인(引)하여 하초(下焦)에 달(達)하므로 리(裏)에 있는 냉습(冷濕)을 거제(祛除)한다." 하니라.
오수(吳綬)는 이르기를 "부자(附子)는 음증(陰證)의 요약(要藥)이니, 상한(傷寒)이 삼음(三陰)으로 전변(傳變)하거나 중한(中寒)에 음(陰)을 협(夾)하여 비록 신(身)에 대열(大熱)이 있어도 맥(脈)이 침(沈)하면 반드시 써야 한다. 궐냉(厥冷)하고 맥(脈)이 침세(沈細)하면 반드시 더욱 급(急)히 써야 한다.
퇴음(退陰) 회양(回陽)하는 힘(:力)과 기사(起死) 회생(回生)하는 공(功)이 있다. 근세(近世)에 음증(陰證) 상한(傷寒)을 왕왕(往往) 의사(疑似)하여 감히 쓰지 못하다가 음극(陰極) 양갈(陽竭)을 직접 기다렸다가 비로소 쓰니, 이미 지(遲)한 것이다. 또한 협음(夾陰)한 상한(傷寒)으로 내외(內外)가 모두 음(陰)이면 이를 버리고 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이를 구(救)하겠는가?" 하니라.
이 두 사람의 말은 모두 지언(至言)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느니라.
오직 잉부(孕婦)는 복용을 기(忌)하여야 하니, 하태(下胎)가 심(甚)히 속(速)하기 때문이니라.
총연(葱涎)과 합(合)하여 이(耳)에 색(塞)하면 또한 농(聾)을 치료(治)할 수 있느니라.
제법(製法)에 대한 변(辨):
부자(附子)를 제(製)하는 법(法)에서 고(古)의 것을 상고(:稽)하면 동변(童便)을 단용(單用)하여 자(煮)하는 경우, 강즙(薑汁)이나 염수(鹽水)를 쓰는 경우, 감초(甘草) 황련(黃連)을 쓰는 경우, 여러 미(味)를 모두 겸용(兼用)하는 경우가 있으니, 그 중의 적합 여부(:宜否)를 당연히 가장 자세히 변(辨)하여야 하느니라.
부자(附子)의 성(性)은 열(熱)하면서 강급(剛急)하고, 주(走)하면서 불수(不守)하느니라.
토착민(:土人)들은 거듭 염(鹽)에 절이므로(:醃) 그 미(味)가 함(鹹)하고 성(性)은 강(降)하느니라. 그런데 요즘 이를 사용하는 것은 정히 그 열성(熱盛)을 써서 원양(元陽)을 회(回)하고 비신(脾腎)을 보(補)하며 인삼(人蔘) 황기(黃芪) 숙지황(熟地) 등의 공(功)을 행(行)하려는 것이니라.
그런데 만약 황련(黃連)으로 제(制)하면 어찌 이를 빌려(:藉) 회양(回陽)하겠는가? 염수(鹽水)로 제(制)하면 도리어 그 강(降)하는 성(性)을 조(助)하느니라. 만약 동변(童便)으로 제(制)하면 반드시 그 뇨기(尿氣)를 면(免)하지 못하니, 그 강(降)을 더 조(助)할 뿐만 아니라, 비기(脾氣)가 대허(大虛)하면 극(極)히 쉽게 구얼(嘔噦)케 하여 그 취(臭)를 한 번만 맡아도 곧 오심(惡心)하여 동(動)하게 하느니라. 이 약(藥)이 구(口)에 들어가기도 전에 먼저 그 해(害)를 받으면서 또한 침강(沈降)은 더욱 속(速)하게 되니, 어찌 비(脾)에 달(達)하겠는가?
오직 강즙(薑汁)으로 한 번 제(制)한 것만이 매우 통(通)하느니라. 다만, 신(辛)으로 신(辛)을 조(助)하니 화평(和平)이 흠(欠)한 것 같지만, 만약 음한(陰寒)의 직중(直中) 등의 증(證)에 그 열(熱)을 쓰려면 이 법(法)이 좋은 것이니라.
만약 상용(常用)하여 그 보(補)하는 성(性)을 얻으려면 강즙(薑汁)을 쓸 필요는 없느니라.
자(煮)하는 법(法):
만약 침창(浸脹: 담그고 불리다)하여 자(煮)하지 않으면 그 심(心)은 반드시 익지(:熟) 못하게 되느니라.
침창(浸脹)하여 자(煮)하면 그 심(心)은 익지만(:熟) 변(邊)의 피(皮)가 이미 너무 익어서(:太熟) 그 성(性)을 실(失)하게 되느니라.
쪼개서(:破) 4개로 만들어 자(煮)하여도 균(勻)하지 않느니라.
또한 자(煮)하면 반드시 즙(汁)이 있게 되니, 즙(汁) 중으로 거(去)하는 성(性)이 또한 많으니라.
이들은 모두 제(制)하는 법(法)을 득(得)한 것이 아니니라.
제(製)하는 법(法):
감초(甘草)의 양(量)에 불구(不拘)하고 대약(大約)하여 사용하니, 부자(附子)의 다과(多寡)를 참작하여 사용하느니라. 감초(甘草)를 극(極)히 농(濃)하게 달인 달달한(:甛) 탕(湯)에 먼저 며칠(:數日)을 침(浸)하고 피(皮) 제(臍)를 벗겨버리며(:剝去) 네 덩이(:四塊)로 자르느니라(:切). 또한 농(濃)한 감초(甘草)의 탕(湯)을 다시 붓고(:添) 다시 2~3일 침(浸)하고는 비틀어(:捻) 연하게 되었으면(:軟透) 꺼내고, 썰어서(:咀) 편(片)을 내고는, 노구솥(:鍋)에 넣고 문화(文火)로 덖어(:炒) 건(乾)하게 하면 생숙(生熟)이 균등(勻等)하게 되니, 구(口)로 씹어서(:嚼) 랄미(辣味: 얼얼한 맛)가 있을 정도까지 하느니라.
만약 초(炒)를 너무 건(乾)하게 하면 너무 익어서(:熟) 전(全)으로 랄미(辣味)가 없게 되고 아울러 그 열성(熱性)도 전부 실(失)하게 되느니라. 따라서 제(制)가 태과(太過)하면 단지 부자(附子)의 명(名)만 쓰는 것일 뿐이니, 효(效)와 불효(不效)를 험(驗)할 수가 없게 되느니라.
반드시 감초(甘草)를 사용하는 것은 부자(附子)의 성(性)이 급(急)하여 감초(甘草)를 얻은 후에라야 완(緩)하게 되기 때문이고, 부자(附子)의 성(性)이 독(毒)하여 감초(甘草)를 얻은 후에라야 해(解)하기 때문이며, 부자(附子)의 성(性)이 주(走)하여 감초(甘草)를 얻은 후에라야 심비(心脾)를 익(益)하기 때문이고, 부자(附子)의 성(性)이 산(散)하여 감초(甘草)를 얻은 후에라야 영위(營衛)를 조(調)하기 때문이니라.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마치 인(仁)으로 제(濟)한 후에 그 용(勇)을 이룬다는 것에 불과(不過)할 뿐이니라.
만약 급(急)히 사용하려면 두꺼운 종이(:厚紙)에 싸서(:包裹)하여 감초(甘草)의 탕(湯)에 적셔서(:沃) 외(煨)하거나 자(炙)하여 유연(柔軟)하기를 기다렸다가 절개(切開)하고 다시 종이에 싸서 자주 적시고 또 자(炙)하니, 익을 정도까지 하느니라. 또한 면(麵)에 싸서 외(煨)하여도 통(通)하느니라.
만약 음한(陰寒)에 직중(直中)하여 궐역(厥逆)으로 위(危)하게 되어 완(緩)하여 제(制)에 불급(不及)하면 포부(炮附: 물에 불리고 잿불로 구운 것)를 단용(單用)하고 다른 제(製)를 쓸 필요가 없느니라.
독(毒)을 변(辨)하기:
부자(附子)의 성(性)은 강급(剛急)하면서 열(熱)하니, 제(制)하여 사용할 때 실의(失宜)한다면 무독(無毒)이라 말하기가 어려우므로 제(制)하는 법(法)을 알아야 하느니라.
천하(天下)의 제독(制毒)에서 화(火)보다 더 묘(妙)한 것은 없으니, 화(火)가 제독(制毒)할 수 있는 까닭은 능히 물성(物性)을 바꾸기(:革 고치다) 때문이니라. 따라서 기(氣)가 화(火)를 만나면 그 기(氣)를 실(失)하게 되고, 미(味)가 화(火)를 만나면 그 미(味)를 실(失)하게 되며, 강(剛)한 것은 그 강(剛)이 바꿔지고(:革), 유(柔)한 것은 그 유(柔)를 실(失)하게 되느니라.
따라서 부자(附子)를 제(制)하는 법(法)은 단지 백수(白水)로 달여서 극(極)히 익히면(:熟) 또한 전적(:全)으로 랄미(辣味)를 실(失)하고 아울러 그 열성(熱性)을 모두 실(失)하여 형(形)이 마치 나복(蘿葍)과 같아서 식(食)하여도 되니, 무슨 독(毒)을 족히 염려(:慮)하겠는가?
요즘 제(制)할 때 반드시 감초(甘草)를 쓰는 것은 그 성(性)은 존류(存留)시키면서 그 강(剛)은 유화(柔和)시키는 것뿐이니라.
요즘 사람들은 단지 부자(附子)를 외(畏)할 줄만 알지, 너무 그러하면 무용(無用)하다는 것은 모르니라. 따라서 유독(有毒)한 물(物)을 식(食)할 때는 단지 극(極)히 익도록(:熟) 제조(制造)하면 곧 당연히 무해(無害)하게 되느니라. 곧 하돈(河豚)이나 생해(生蟹)의 속(屬)과 같이 사람에게 병(病)이 있게 하는 것은 모두 덜 익어서 생(生)의 성(性)이 미진(未盡)하기 때문이니라. 따라서 유독(有毒)한 물(物)을 식(食)할 때는, 모두 이를 인하여 유추(類推)할 수 있느니라.
약제(藥劑) 중에서 단련(煅煉)하여 쓰는 것은 또 어째서 그러한가?
물(物)이 화(火)의 단(煅)을 거치면 그 미(味)가 모두 함(鹹) 삽(澁)하게 되니, 단(煅)을 쓰는 까닭은 그 생(生) 강(剛)한 성(性)을 거(去)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함(鹹) 삽(澁)한 미(味)를 쓰려는 것이니라. 성(性)이 유(留)하는지 성(性)이 유(留)하지 않는지의 중(中)에는 각기 적합한 여부(:宜否)가 있느니라. 따라서 당연히 연단(煅煉)하여 쓸 경우, 모두 이를 인하여 유추(類推)할 수 있느니라.
또 약(藥)의 성(性)이 독(毒)한데도 어째서 피(避)하지 않는 것인가?
본초([本草])에서는 어떤 것은 유독(有毒)하고 어떤 것은 무독(無毒)하다고 하는데, 나는 심(甚)히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데, 독(毒)이 없는 약(藥)은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니라.
따라서 열(熱)한 것은 열독(熱毒)이 있고 한(寒)한 것은 한독(寒毒)이 있으니, 만약 써서 부당(不當)하고 사람을 병(病)하게 하는 것은 독(毒)이 아닌 것이 없느니라. 곧 집안(:家)에서 항상(:常) 쓰는 차(茶) 반(飯)은 본래 모두 사람을 양(養)하는 정미(正味)이지만, 과용(過用)하거나 오용(誤用)하여도 능히 사람에게 독(毒)이 되니, 하물며 치우친 미(味), 치우친 성(性)을 가진 약(藥)은 어떠하겠는가?
다만 독(毒)에는 대소(大小)가 있고 사용에는 권의(權宜)가 있으니, 이는 살피지 않으면 안 될 뿐이니라.
하물며 부자(附子)의 성(性)은 비록 유독(有毒)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대독(大毒)은 없고, 단지 제(制)에 그 법(法)을 얻고 사용에 그 의(宜)를 얻으면 무슨 독(毒)이 있겠는가?
요즘 사람들은 그 묘(妙)를 알지 못하니, 아울러 인삼(人蔘) 숙지황(熟地)조차도 모두 외(畏)하느니라.
인삼(人蔘) 숙지황(熟地) 부자(附子) 대황(大黃)은 실로 약(藥) 중의 사유(四維)인데, 병(病)에서도 이를 외(畏)하느니라.
그 세(勢)가 용용(庸庸: 평범하고 보잘 것 없다)의 것으로 제(濟)할 바가 아니니, 이 4가지 약물(:四物)이 아니면 안 되느니라. 만약 물러서기만(:逡巡) 한다면 반드시 잘못함이 그 일(:事)이 될 것이니라. 요즘 사람들은 반드시 부득이한 상황에 직접 다다른 후라야 부자(附子)를 사용하게 되니, 일(:事)을 이미 제(濟)할 수 없느니라. 일(:事)을 제(濟)할 수 없으면서도 도리어 이를 죄(罪)로 여기니, 부자(附子)가 진실로 폐(廢)하여야 할 약물(:物)이겠는가?
탄식(:嗟)하리로다! 사람의 생(生)하는 바는 양기(陽氣)일 뿐이고 정기(正氣)일 뿐이니라. 사람의 사(死)하는 바는 음기(陰氣)일 뿐이고 사기(邪氣)일 뿐이니라.
인삼(人蔘) 숙지황(熟地)는 치세(治世)의 양상(良相)이고 부자(附子) 대황(大黃)은 난세(亂世)의 양장(良將)이니라.
병(兵)에는 오래 쓰면 안 되므로, 양장(良將)은 잠시 사용하는 것이니라. 난세(:亂)이라도 치료(治)를 소홀히(:忘) 하면 안 되니, 따라서 양상(良相)은 결(缺)하면 안 되느니라.
하물며 부자(附子)는 비록 열(烈)하여도 그 성(性)은 양(陽)을 부(扶)하니 망초(芒硝) 대황(大黃)에 비(比)할 바가 아니니라. 망초(芒硝) 대황(大黃)은 완(緩)한 것 같지만 그 성(性)은 음(陰) 설(泄)하니 또한 부자(附子) 육계(肉桂)에 견줄(:例) 바가 아니니라.
화원화(華元化: 화타))가 이르기를 "그 양(陽)을 득(得)하면 생(生)하고 그 음(陰)을 득(得)하면 사(死)한다." 하였느니라.
내경([內經])에 이르기를 "문호(門戶)가 불요(不要)하면 창름(倉廩)이 부장(不藏)한 것이다. 수(守)를 득(得)하면 생(生)하고 수(守)를 실(失)하면 사(死)한다." 하였느니라.
요즘 사람들은 망초(芒硝) 대황(大黃)을 마치 평탄한 길(:坦途)을 밟듯이 사용하고, 인삼(人蔘) 부자(附子) 숙지황(熟地)를 뱀이나 전갈(:蛇蝎)을 보듯이 사용하느니라. 이것이 어리석은 것인가? 지혜로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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