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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의 진실
나는 인간들이 도무지 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해 버렸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만 봐도 알 수 있는게 머리에 쓴 베일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눈으로 보고도 모른다. 비슷한 구석기 비너스 조각상이 많은데 말이다. 고대에 왕은 신과 동일시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살아있는 신이다. 마누라가 신이면 남편도 신이잖아. 그러다가 칼맞은 사람은 카이사르다.
괴베클리 테페 돌기둥에 팔이 조각되어 있는데 얼굴은 없다. 인간이 신의 얼굴을 보면 안 된다. 황제의 면류관도 얼굴을 감추는 장치다. 조선왕조 의궤의 왕과 왕비 그림에도 빈 가마를 그려놓는다. 왕을 보면 안 된다. 몰래 보다가 쳐맞은 신하가 한 둘이 아니다. 신臣이라는 글자 자체가 눈을 내리 깔은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와이프의 어원은 '깁'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과부 보쌈을 할때 어디로 가는지 알면 자기 집으로 가버리잖아. 고대 납치혼 흔적이다. wife는 고대 영어 wǣfan (감싸다, 옷을 입히다) 고대 노르웨이어 vífa (가리개/감싸다)와 관련이 있다. [이 설은 논쟁 중이다.] 계집이라는 말이 깁, wife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백 퍼센트는 아니라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얼굴이 없는 이유로는 베일 가설이 유력한 가설은 된다.
영화 오디세이는 트로이의 목마와 불타 무너지는 건물을 비추며 “청동기 시대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며 엔딩 자막이 올라간다. 그리스군은 왜 10년간 트로이를 정복하지 못했는가? 오디세이는 왜 10년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는가? 놀란은 뜬금없이 '청동기 시대는 끝을 맺었다'고 새로운 학설을 주장한다. 누구도 하지 않은 말을 한다. 놀란의 개인적인 주장인가?
개인적인 해석을 왜 영화에 집어넣어? 그런데 말이다. 인간들이 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해 버렸다면? 과감하게 질러야 한다. 필자의 오디세이 가설은 이렇다. 바다민족은 이집트 측 기록일 뿐이며 이집트는 바다민족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이집트는 바다 민족의 정체를 모른다. 정체를 모르니까 바다민족이라고 얼버무린 것이다. 왜 피해가 없었지?
그게 중요한 단서다. 바다민족은 이집트에 없는 것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바다민족 가설은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이 갑자기 사라진 그리스 문명을 보고 놀라서 창작한 것이다. 갑자기 모든 도시가 불타고 모든 인간이 사라졌다. 초토화 되었다. 그리고 500년간 누구도 공백을 메우지 않고 방치했다. 막강한 이집트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 람세스 시대에 히타이트와 이집트가 시리아를 두고 결전을 벌여 이집트가 패배하지만 람세스는 자기가 이겼다고 기록한다. 히타이트는 이집트를 털어먹을 정도로 강력하다.
2. 바다민족이 출몰하여 히타이트와 그리스, 미케네가 망하고 람세스가 이집트를 겨우 방어한다. 바다민족설은 람세스의 주장이다. 그런 이름의 민족은 없다. 해적이라면 몰라도.
3. 유럽과 중근동의 청동기 문명이 통째로 망하는데 중요한건 아무도 그 공백을 메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웃나라의 불행은 내나라의 행복인데 이 경우에는 그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왜? 임자없는 땅을 보고도 주워먹지 않은 이유는?
4. 학자들이 바다민족을 주장하는 이유는 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다민족에 의한 청동기 문명 몰락설은 가설에 불과하다. 흙으로 구워진 히타이트 점토문자로 보면 인근 도시들이 원군을 요청하고 있지만 자기도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다급한 내용이 있다.
5. 바다민족의 활동 시기와 트로이 멸망 시기는 정확히 겹친다.
지중해의 청동기 문명은 키프로스의 구리와 아프가니스탄의 주석으로 만드는데 무역로를 히타이트와 트로이 연맹이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구리가 갑인데 점차 주석이 갑으로 바뀐다. 갑을이 바뀌자 구리를 가진 그리스가 주석을 가진 트로이를 친다. 그러나 트로이에는 주석이 없다. 트로이의 전쟁과 오디세이의 방랑은 합쳐서 20년이다. 고대에 20년은 길다.
고대인이 20년짜리 프로젝트를 못한다.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인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주석 공급이 먼저 끊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리스인들은 주석이 난다는 가상의 섬을 찾아다녔다. 나중에 영국의 주석을 가져오지만 그것은 훗날의 일이다. 오디세이가 바다를 헤매고 다닌 이유는 주석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유럽의 서쪽 끝단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우리에게 주석을 가져다준다는 '카시테리데스(Cassiterides, 주석의 섬들)'*라는 섬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곳을 직접 가 본 목격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헤로도토스의 역사]
주석을 무역한 페니키아인 곧 나중의 카르타고인이 아프리카를 돌아다녔기 때문에 오디세이 해적 일당은 페니키아 상인의 무역로를 따라 지중해 일대를 수색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주석을 아프리카에서 찾을 수 없다. 그렇다. 오디세이 일당이 바다민족이다. 페니키아 상인은 주석 산지를 비밀에 붙였다. 존재하지도 않는 주석의 섬이 그리스에 알려져서 허탕쳤다.
주석 산지를 찾지 못한 그리스인들이 발악적으로 트로이 주변 도시를 불태우고 다녔다. 그러다가 결국 자기네 발등을 찍은 셈이 된다. 키프로스의 구리를 수입하던 히타이트가 멸망하자 그리스의 구리 수출은 중단되었고 서로 해적질을 하다가 사이좋게 멸망한다. 바다민족의 활동이 중요한게 아니고 이후 이집트와 앗시리아가 빈집털이를 못했다는게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가 망했으면 이집트와 앗시리아가 빈집털이를 해서 중근동을 장악해야 하는데 그냥 500년이 역사에서 삭제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무역로가 끊어져 구리와 주석은 기존에 쓰던 것을 녹여서 재활용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가 모든 도시를 불태운 이유는 주석을 얻지 못하자 그냥 조금 남아있는 청동기를 탈탈 털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자기네들끼리 쌈박질하게 된다. 청동기 문명은 통째로 불태워진다. 히타이트가 운철을 쓰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철기문명이라고 보기 어렵다. 바다민족 이후 4~500년이 지난 기원전 7세기에 이집트에서 철기가 시작되고 200년이 지나 유럽에 철기가 전해지며 기원전 6세기에 중국에도 철기가 등장한다. 철기가 등장한 이유는 구리와 주석이 없어서다.
이상은 필자의 가설이다. 중요한건 오디세이의 십년 방황이 설명된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 오딧세이는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10년이나 걸려서 돌아왔는가? 찾고 있는게 없어서다. 페니키아 상인이 가본 곳은 다 가보느라고 10년이나 걸린 것이다. 청동기를 구할 수 없게 되자 패닉에 빠져서 발작적으로 전쟁을 벌인 것이며 청동기가 없어서 정복자가 없어졌다.
나는 인간들이 도무지 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내 눈에 뻔히 보이는게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신라의 차칠왕 문제도 같다. 신라의 왕과 왕자가 소속 부가 다른 이유는 왕이 갈문왕과 6왕을 임명했기 때문이다. 사탁부의 왕이 왕자를 탁부의 수장으로 임명하는 식이다. 이는 유목민 관습이다. 6촌이 발전하여 6왕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내물왕 시대에 재지세력이 광개토대왕의 남정과 겹쳐 경주로 끌려와 왕의 호칭을 쓰게 허용하는 대신 자신은 마립간(대왕, 매금왕)으로 위격을 올린 것이다. 이후 태종 무열왕이 갈문왕과 6부왕을 없애버렸다. 6부왕은 임명직 이다. 갈문왕이 임명되는데 갈문왕보다 낮은 왕들이 세습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경주 중심가에 150여년 만에 150개의 무덤이 조성된다.
조문국, 사벌국, 달벌국, 압독국 등의 지방 왕들과 옥천 보은 등의 마한 왕이 경주로 끌려와 6부왕 자리에 올라 지들도 나름 왕이라며 각자 무덤을 썼기 때문이다. 이들이 소비한 물자는 그들이 경주로 끌려오기 전에 살던 지방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다가 토지가 부족해지자 태종무열왕이 왕놀이를 금지시켰다. 6부 왕들은 촌장 지위로 되돌아갔다고 봄이 타당하다.
신 구조론
열역학이 왜 열일까? 일역학이 아니고 말이다. 일을 추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열은 통계와 확률을 따른다. 단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양 한 마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양떼가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있다. 메뚜기 한 마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메뚜기 백마리는 가는 길이 정해져 있다. 양을 분자로 바꾸면 열과 같다. 분자 하나로 보면 일이다.
일은 운동을 반영한다. 운동은 힘을 반영한다. 운동은 앞쪽과 뒤쪽이 있다. 힘은 이기는 쪽(오른쪽)과 지는 쪽(왼쪽)이 있다. 입자는 속(중심)과 겉(주변)을 반영한다. 질은 닫힌계의 안과 밖을 반영한다. 에너지는 방향성이 있다. 질은 밖에서 안으로, 입자는 속에서 겉으로, 힘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운동은 앞에서 뒤로 간다. 량은 멈추므로 방향이 없다.
일은 추적 가능하다. 열역학에서 일역학(운동)으로, 힘역학으로, 입자역학으로, 질역학으로 상승해야 한다. 열은 무질서도 증가 방향으로 이동한다. 계의 밖>안, 체의 겉>속, 각의 오른>왼, 선의 앞>뒤, 점의 위치>외부로 간다. 공유>사유가 무질서도 증가 방향이다.
1. 자기소개 말투
2. 이겨먹기 프레임걸기 말투
3. 내재적 질서 말투
깨달음은 내재적 질서를 얻는 것이다. 방향은 공유의 방향이다. 개인은 방향이 없지만 집단은 방향이 있다. 공유하기 때문이다. 가운데를 쳐다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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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존재가 있었으니 모든 것은 씨앗이 된다. 자연의 모든 가능성을 포괄한다.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은 존재다. 존재는 변화의 사건과 불변의 사물을 동시에 의미한다는 점이 각별하다. 존재는 변화의 존存과 불변의 재在를 아우른다. 사건이 시간의 존存이라면 사물은 공간의 재在다.
1. 존재는 변화와 불변을 통일한다.
2. 사건은 시간의 변화를 반영한다.
3. 사물은 공간의 불변을 반영한다.
변화에 주목한 사람이 헤라클레이토스라면 불변에 주목한 사람은 파르메니데스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먼저다. 철학은 변화의 사유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탈레스의 물 일원론이 변화와 가깝다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설은 불변을 발전시켰다. 플라톤은 양자를 변증법적으로 통일하고 있다.
구조론은 양자를 통일한다. 그런데 변화가 먼저다. 사건이 먼저다. 사건이 존재 자체의 내재적 질서라면 사물은 인간의 관측 방식이다. 사건이 배후에서 돌아가는 영사기라면 사물은 극장의 스크린과 같다. 플라톤은 불변의 경직된 이데아가 아니라 변화의 역동적인 이데아를 찾아야 했다.
변화는 크고 불변은 작다. 사건은 크고 사물은 작다. 전체는 크고 부분은 작다. 원인은 크고 결과는 작다. 집합은 크고 원소는 작다. 파동은 크고 입자는 작다. 연속은 크고 불연속은 작다. 변화가 실이라면 불변은 실의 매듭이다. 실이 매듭보다 크다. 실은 연속되어 있고 매듭은 불연속이다.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이나 양자역학의 여러가지 성질은 이 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파동이 간섭하면 입자다. 파동은 입자를 낳지만 입자는 파동을 낳지 않는다. 서구에 없는 것은 사건에 대한 관점이다. 사건 개념을 영어로 번역할 수 없다. 서양인의 사고에 사건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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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단위다. 단위는 변화의 단위, 사건의 단위, 의사결정의 단위다. 태초에 의사결정이 있었다. 사건이 사물을 낳는다. 낳음의 질서가 있다. 그런데 모른다. 인류가 사물은 아는데 사건을 모른다. 낳음을 모른다. 영어에 사건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다. event가 있지만 이는 행사를 뜻한다.
공간의 사물과 대비되는 시간의 사건 개념이 없다. 사건은 불이 번져가듯 자생력이 있다. 영화가 흥행하듯 바이럴 타고 날아간다. 사건은 낳음에 의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음 단계로 이어진다. 기승전결로 뻗어가며 점점 커진다. 이를 나타내는 생각이 서구정신에 없다. 철학이 죽은 이유다.
1. 사물은 전체와 부분이 있다.
2. 사건은 원인과 결과가 있다.
3. 수학은 집합과 원소가 있다.
사물의 단위는 전체와 부분이 있다. 사건의 단위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수학의 단위는 집합과 원소가 있다. 사실 이 셋은 같은 것이다. 사물은 사건의 결과 측에 주목한 것이다. 사물은 사건의 일부다. 사물은 사건의 하부구조다. 수학의 집합이 사건이라면 원소는 사물이다. 철학의 첫 단추다.
사물은 전체와 부분이 있다. 부분단위가 원자라면 전체단위는? 전체를 가리키는 단위 개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다. 인류는 여기서 막혔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생명은 세포가 부분단위라면 몸뚱이는 전체단위다. 집은 벽돌이 부분단위라면 건물은 전체단위다. 원자에 대칭되는 것은?
에너지나 질량은 인간의 측정방법일 뿐 존재의 단위가 아니다. 존재 자체의 내재적 질서를 반영하지 않는다.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원자 단위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원자론은 당연히 단위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적 당위일 뿐 인간이 발견한 자연의 질서가 아니다.
우리가 소립자나 기본 입자를 부분단위로 치지만 그것은 가정에 불과하다. 얼버무리는 말이다. 양자역학의 성과는 물질의 입자 단위를 부정한다. 입자는 파동의 간섭이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초끈이론이 필요한 이유다. 입자가 매듭이면 그 전에 매듭을 낳는 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 생물의 부분단위는 세포다. 집의 부분단위는 벽돌이다. 벽돌은 원자다.
2. 생물의 전체 단위는 개체다. 집의 전체단위는 건물이다. 건물은 모른다.
세상이 멸망하고 모든 지식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딱 한 문장만 전할 수 있다면 무엇을 전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리처드 파인만의 대답은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원자는 단위다. 단위가 중요한데 인류는 단위를 모른다. 원자의 자궁을 말해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단어가 단위다. 단어 반대편에 문장이 있다. 문장이 단어의 자궁이다. 단어가 부분단위라면 문장은 전체단위다. 문장이 집합이면 단어는 원소다. 원자가 단어라면 문장에 해당하는 것은? 원소가 있는데 집합이 없다. 원자의 자궁이 없으면 원자의 존재는 부정된다. 그래서 구조론이다.
부분단위가 있는데 전체단위가 없다는 말은 경사에 내리막은 있는데 오르막은 없다는 말과 같다. 작은 원자가 있으면 큰 무엇도 당연히 있어야 한다. 작은 것이 사물이라면 큰 것은 사건이다. 사건이 원자의 자궁이다. 사건이 사물을 낳고, 파동이 입자를 낳고, 실이 매듭을 낳는게 구조론이다.
존재의 부분단위는 양자역학에 의해 깨졌고 전체단위는 인류 중에 생각해 본 사람이 없다. 사물단위에 막혀 있으니 사건단위, 수학단위로 나아가지 못한다. 인류 중에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사유한 사람이 없다. 플라톤 이후 인류는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잘못된 첫 단추에 막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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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츠만을 자살하게 만든 연속과 불연속의 사유도 중요하다. 볼츠만은 원자론의 불연속성을 지지했지만 마흐를 비롯하여 당시 학계의 주류는 연속성을 주장했기에 충돌했다. 우주는 연속인가 불연속인가? 우주는 입자인가 파동인가? 원자론이 입자적 사고라면 끈이론은 파동적 사고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우주가 연속인 것을 알고 있다. 동시에 우주가 불연속임을 알고 있다. 직관이 충돌하는 이유는 경험 때문이다.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는 것은 연속이다. 생물이 한 마리씩 있는 것은 불연속이다. 볼츠만은 절충을 시도했고 아인슈타인은 입자파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사건은 연속된다. 사물은 단절된다. 우리가 불연속의 사물은 아는데 연속의 사건은 모른다. 물질은 불연속이고 에너지는 연속이다. 연속과 불연속은 사건의 원인 측을 보느냐 결과 측을 보느냐 관점 차이에 불과하다. 존재는 연속이지만 불연속이다.
에너지의 방향성은 연속에만 적용된다. 불연속은 방향이 없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므로 방향이 있다. 사물은 독립하므로 방향이 없다.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왜 작지? 전체는 연속이고 부분의 합은 불연속이다. 연속의 에너지 흐름이 끊어졌으므로 그만큼 작아졌다.
간단하다. 원인으로 보면 연속, 결과로 보면 불연속이다. 전체로 보면 연속, 부분으로 보면 불연속이다. 집합으로 보면 연속, 원소로 보면 불연속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존재하려면 탄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탄생하려면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연결되어야 한다.
어떻게 연결되지? 공유에 의해 연결된다. 사슬은 마디를 공유한다. 그만큼 더 작은 공간을 차지한다. 그만큼 더 효율적이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작은 이유는 그 효율성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효율적 배치 자체도 에너지의 일부를 구성한다. 적은 공간을 차지하면 질량이 더 무겁다.
연속이 먼저다. 연속이 불연속을 낳는다. 불연속은 연속에서 떨어져 나와야 하므로 불연속하려면 먼저 연속이 있어야 한다. 선은 연속이고 점은 불연속이다. 점은 선이 끊어진 단절점이다. 입자는 파동이 간섭해서 탄생하고 부분은 전체를 쪼개서 만들어진다. 반드시 탄생의 자궁이 있다.
불변은 변화를 중단시켜 만들어진다. 불변은 변화를 생산할 수 없지만 변화는 불변을 생산할 수 있다. 멈춤은 움직일 수 없지만 움직임은 멈출 수 있다. 움직임 둘이 나란한 것이 멈춤이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팽이는 멈춘듯 하다. 동은 내부에 움직임을 감추지만 정은 동을 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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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사건이다. 사건이 빛이라면 사물은 그림자다. 인류의 사유는 여태 플라톤의 동굴을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인류가 꿰지 못한 철학의 첫 단추는 변화를 격발하는 사건의 완전성이다. 사건을 일으키려면 내부에 질서가 갖추어져서 의사결정이 가능해야 한다. 낳음의 자궁이 있어야 한다.
암수가 교미하면 새끼가 나와야 한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터야 한다. 유황과 적린이 만나면 불꽃이 튀어야 한다. 변화를 격발하지 못하면 사건이 아니다. 인류에게는 사물과 사건을 구분하는 관점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 적당한 말조차 없다. 사건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없어서 번역이 안 된다.
event는 주사위를 한 번 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일회성 행사다. 사건이 기승전결로 이어지며 점점 커지는 성질을 담을 수 없다. 에너지의 뻗어가는 기세를 반영하지 못한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야 한다. 클립 하나로 시작하여 교환을 거듭하여 마침내 집을 구하는게 사건이다.
사물이 인간의 관측단위라면 사건은 객체 자체의 내재한 질서의 단위다. 사물이 소대, 중대, 대대의 단위라면 사건은 장교, 부사관, 사병의 의사결정 단위다. 병사만 많이 모은다고 소대가 중대 되고, 중대가 대대 되는게 아니다. 장교는 별도로 육성해야 한다. 사물은 커지고 사건은 작아진다.
사물단위 - 인간의 관측형태.. 소대, 중대, 대대. 모으면 숫자가 커진다.
사건단위 - 내부 의사결정 구조.. 장교, 부사관, 병사로 명령계통이 내려간다.
우리가 존재를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는 도무지 초딩 수준의 기초가 안 되어 있다. 이 정도면 망해 있다고 봐야 한다. 존재가 무엇인지 기초부터 하나씩 설명해야 한다면 슬픈 거다. 존재가 사건이며 그것은 낳음의 연결이며 낳을 수 있는 구조가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깨달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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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단위는 집합과 원소다. 원소가 숫자라면 집합은 뭐지? 없다. 사물은 부분으로 원자설이 있지만 반대편에 전체를 나타내는 개념이 없고 수학은 숫자의 반대편에 집합을 나타내는 개념이 없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수학은 집합론이 있지만 부실하다. 집합은 공리 뒤에 숨는다.
철학은 존재의 사유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망했다. 객관화 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관점은 인간의 관측법이지 존재 자체의 내재적 질서가 아니다. 수학 역시 사물의 관점을 따르고 있다. 원소는 숫자가 있는데 집합은 그 무엇이 없다. 집합은 공리로 선언되지만 우격다짐이다.
사물의 전체와 부분, 수학의 집합과 원소,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같다는게 보편성이다. 집합은 숫자의 원인이다. 원인은 공유다. 수학의 집합은 어떤 조건에 따라 대상을 분명하게 정할 수 있는 객체들의 모임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조건이 뭐냐? 조건을 멋대로 정하고 집합이라고 우긴다.
집합의 조건은 공유다. 형제는 부모를 공유하는 집합이다. 국민은 국토를 공유하는 집합이다. 그 부분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는 수학을 새로 써야 한다. 세상에 단위가 존재하는 것은 공유하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공유를 통해 전달된다. 의사결정은 공유의 해제로 일어난다.
사건이 사물을 낳는 방법은 공유다. 끈이 매듭을 낳는 방법은 공유다. 지금까지 인류의 수학은 결과 측 접근이다. 숫자는 집합되는게 아니고 쪼개지는 것이다. 1과 2를 더해서 자연수가 되는게 아니고 어미가 새끼를 하나씩 낳아서 자연수가 된다. 1과 2를 더하는 것은 외부의 관측자다.
인류는 부분단위 원자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반대편의 전체단위 존재를 말하지 않는다. 원소는 아는데 집합은 모르쇠다. 관측자의 개입 때문이다. 원자의 근거는 없다. 원자는 인간과 객체를 일대일로 대칭시킨 것이다. 인간과 대칭구조가 만들어졌다. 인간과 공유하는 집합이 탄생했다.
이미 집합이 생겨버렸으므로 집합을 규명하지 못한다. 관측자인 인간과 객체가 서로를 공유하므로 객체 내부의 공유를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집합에 관측자 자신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돼지셈을 한다. 소풍을 온 돼지가 자신은 빼고 셈하므로 항상 한 마리가 모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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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가 모여서 집합이 되는게 아니고 집합이 깨져서 원소가 된다. 소가 한 마리, 두 마리 모여서 소떼를 이루는게 아니고 어미소가 새끼를 한 마리, 두 마리 낳은 것이다.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다. 모체에서 빠져나가는게 마이너스다. 우리가 마이너스의 세계관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존재는 낳음이다. 낳는 것은 어미다. 원자에 앞서 원자의 어미가 먼저다. 원소에 앞서 집합이 먼저다. 결과에 앞서 원인이 먼저다. 시간적인 순서가 있다. 공간의 사물이 아니라 시간의 사건에 주목하는 관점을 얻어야 한다. 그렇다면 서열이 있다. 전체와 부분, 원인과 결과, 집합과 원소다.
자궁 - 전체, 원인, 집합
아기 - 부분, 결과, 원소
전체가 먼저다. 원인이 먼저다. 집합이 먼저다. 어미가 먼저다. 어미가 낳기 때문이다. 원자론을 주장하기 앞서 원자의 자궁을 말해야 한다. 원소를 말하기 앞서 집합을 말해야 한다. 결과를 말하기 앞서 원인을 말해야 한다.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은 존재다. 존재가 모든 사유의 자궁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논증을 인용하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생각한다가 아기라면 존재한다는 자궁이다. 아기가 있다는게 자궁이 있다는 증거다. 그림자가 있다는게 빛이 있다는 증거다. 부분이 있다는게 전체가 있다는 증거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불가분이기 때문이다.
대칭은 축을 공유한다. 공유가 사유에 앞선다. 태초에 공유가 있었다. 공유는 연속이다. 태초에 연속이 있었다. 공유가 사건을 격발한다.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 원소나 원자는 그렇게 태어난 아기다. 아기가 자궁을 앞설 수 없다. 생각이 존재를 앞설 수 없다. 어미보다 먼저 난 자식은 없다.
오른팔이 있으면 왼팔도 있다. 오른팔과 왼팔은 몸통을 공유한다. 우주는 공유다. 원자가 사유라면 완전성은 공유다. 우주는 공유와 공유의 해제다. 공유의 해제는 곧 사유다. 사물의 전체와 부분, 사건의 원인과 결과, 수학의 집합과 원소는 공유와 사유의 관계다. 공유가 사유를 낳는다.
세상은 왜 공유와 사유로 나뉘는가? 세상은 변화하고, 변화에는 에너지가 필요하고, 에너지의 공급자가 있기 때문이다. 새끼곰을 봤다면 보이지 않아도 주변에 엄마곰이 있는 것이다. 에너지의 공급자가 없이 탄생하는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탄생의 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
1. 모든 존재하는 것은 탄생의 경로가 있다.
2.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존재를 담보하는 것은 객체 내부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이다.
존재의 단위는 완전성을 반영한다. 완전성은 변화의 가능성이다. 자체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능동적으로 사건을 격발할 수 있어야 한다. 인과법칙을 반영해야 한다. 자체 엔진을 가져야 한다. 엔진은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반영해야 한다. 닫힌계 안에 축과 대칭의 구조가 있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외부의 작용에 반작용하여 자신의 위치를 방어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한 구조가 내재되어 있다. 그것이 의사결정 메커니즘이다. 사물의 전체와 부분 사이, 사건의 원인과 결과 사이, 수학의 집합과 원소 사이에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메커니즘이 있다.
원인> 메커니즘> 결과
전체> 메커니즘> 부분
집합> 메커니즘> 원소
우리는 원인과 결과 두 단어로 해결보려고 하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의 방향성을 반영하려면 먼저 그 방향을 정해야 한다. 에너지는 그냥 가는게 아니고 길을 만들고 간다. 메커니즘은 닫힌계 안에 대칭과 축의 공유로 되어 있다. 공유하면 효율적이다. 효율성이 에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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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안에 멈춘 것은 없다.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팽창하므로 존재는 상호작용을 멈추지 않는다. 겉보기 멈춤은 움직임이 나란한 것이다. 변화를 격발하는 것은 내부 메커니즘이다. 내재적 질서가 있다. 메커니즘은 공유를 사유로 바꾼다. 모든 사건의 모든 원인이 공유라면 모든 결과는 사유다.
메커니즘이 깨지는 차례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차원으로는 4, 3, 2,1, 0차원이 된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 전체와 부분, 집합과 원소의 이항대립을 알지만 이는 활과 화살 밖에 모르는 것과 같다. 의사결정 구조가 있다. 궁수도 있고, 활몸도 있고, 활시위도 있고, 화살도 있고, 과녁도 있다.
인류가 모르는 것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다. 부분의 합이 왜 전체보다 작은지 인류는 모른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비대칭을 원인과 결과의 대칭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연속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포함관계다. 량은 운동에, 운동은 힘에, 힘은 입자에 포함되므로 자를 수 없다.
존재의 메커니즘을 모르는 인류가 그럭저럭 여기까지 굴러온 것은 열역학 1, 2법칙 때문이다. 1법칙은 부분을 담당하고 2법칙은 전체를 담당하니 전체와 부분을 모두 커버한다. 이 법칙을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적용하지는 못하고 있다. 전체는 연속되므로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사실을 모른다.
1법칙 불연속성 - 부분의 합은 전체와 같다.
2법칙 연속성 -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인류는 열역학의 보편성을 사용하지 못한다. 말로는 열역학이 보편적인 진리라고 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열역학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민주당 내부 무질서도 증가를 열역학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질의 원인과 량의 결과 사이에서 입자, 힘, 운동을 모르기 때문이다. 메커니즘을 모른다.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큰 이유는 공유의 연속성 때문이다. 무질서도 증가 이유는 사유의 불연속성 때문이다. 변화는 선공유 후사유의 법칙을 따른다. 공유는 효율적이고 사유는 비효율적이다. 공유가 사유를 이기는 것이 의사결정이다. 의사결정 과정에 공유가 사유로 바뀌는게 무질서도 증가다.
우리는 대칭구조를 모른다. 축을 공유한다는 것을 모른다. 시간의 앞뒤는 알지만 공간의 좌우는 모른다. 좌우는 대등하지 않다. 에너지가 실리면 오른손이 왼손을 이긴다. 이기는 손을 오른손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안밖대칭> 겉속대칭> 좌우대칭> 전후대칭> 각자대칭의 방향과 순서를 모른다.
의사결정은 방향전환이며 방향전환은 현재의 공유상태를 깬다. 불변이 가장 효율적이다. 움직이면 비효율이 발생한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이유는 움직이기 이전 상태가 더 효율적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움직이기 이전 상태가 비효율이면? 그 경우는 이기지 못하므로 움직이지 못한다.
1. 원인이 효율적이면 이겨서 변화하며 효율이 변했으므로 결과는 비효율 곧 무질서도 증가다.
2. 원인이 비효율이면 져서 변화에 실패한다.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은 변화하지 않거나 변화해서 무질서해지거나다. 바람 빠진 풍선은 움직이지 못한다. 만약 움직였다면 반드시 바람이 빠진 것이다. 바람이 빠졌다면 그 이전에 풍선에 압력이 걸려 있었다. 압력은 공유된다. 풍선 내부의 모든 분자는 압력의 영향을 받는다. 풍선을 빠져나가면 압력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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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주의와 기계론은 존재가 불연속이라는 전제 하에서 성립한다. 우주는 연속이다. 연속은 공유다. 공유는 분할되지 않는다. 분할되지 않으므로 환원은 불가능하다. 파동은 움직이고 움직이는 것은 축이 있으며 축은 쪼개지지 않으므로 우주는 근본적으로 환원되지 않지만 계통 안에서 환원된다.
환원 - 결정론, 불연속, 입자, 공간, 1법칙.. 부분의 합은 전체와 같다. 작용의 변화
비환원 - 확률론, 연속, 파동, 시간, 2법칙..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자발적 변화
인류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토론해 왔지만 바보 짓이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입자와 파동의 문제도 같다. 공간은 환원되고 시간은 환원되지 않는다. 1법칙은 환원되고 2법칙은 환원되지 않는다. 열역학 1, 2법칙과 라임을 맞추어 환원 1, 2법칙으로 명명한다. 법칠을 둘로 나누면 간단히 해결된다.
우리는 1법칙과 2법칙을 모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적용하는 분야가 다르기 때문이다. 1법칙은 작용에 의한 변화를 다루고 2법칙은 자발적 변화를 다룬다. 자연의 저절로 일어나는 변화는 2법칙을 따르고 인간에 의한 작위적인 변화는 1법칙을 따른다. 환원주의도 같다. 환원되는 것만 환원된다.
자연은 저절로 움직인다. 물은 저절로 흐르고, 나무는 저절로 자라고, 우주는 저절로 팽창한다. 모든 저절로 되는 것은 2법칙이다. 누가 개입해서 되는 것은 1법칙이다. 이 차이를 명확히 구분해주지 않기 때문에 헷갈린다. 사물은 불연속이므로 누가 개입해야 되고 사건은 연속이므로 저절로 된다.
연속 - 저절로 된다. 원인, 전체, 집합, 파동.. 2법칙의 비환원 대칭축
불연속 - 작용해야 된다. 결과, 부분, 원소, 입자.. 1법칙의 환원 대칭
대칭에는 축이 있는데 우리가 이 부분을 놓친 것이다. 축은 공유된다. 모든 공유되는 것은 쪼갤 수 없다. 형제는 엄마를 공유한다. 엄마를 쪼갤 수 없다. 공유되는 것은 환원되지 않는다. 세상은 집합과 원소다. 환원되는 것이 원소라면 환원되지 않는 것은 집합이다. 낳음의 자궁을 쪼갤 수는 없다.
저절로 되는 것은 내부에 구조가 있다. 대칭과 축이 있다. 뇌터의 정리와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에 따라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에너지 대칭의 법칙이라 해야 한다. 에너지 보존에서 공유되는 대칭 축은 논외다. 축은 대칭된 둘이 공유하는 것이다. 축의 역할을 고려하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된다.
사물 1법칙 대칭성 - 에너지는 보존된다. 전체와 부분의 합은 같다. 작용과 반작용은 같다. 원소를 설명한다.
사건 2법칙 대칭축 - 에너지는 방향성이 있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원인은 결과보다 크다. 집합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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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집합과 원소, 원인과 결과, 전체와 부분이다. 우리가 놓친 것은 공유다. 원소는 집합을 공유한다. 결과는 원인을 공유한다. 부분은 전체를 공유한다. 원자설의 쪼개지지 않는 성질은 공유를 말하려 한 것이다. 공유를 쪼개면 공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쪼개지지 않는게 아니라 쪼개면 안된다.
구조는 공유결합 메커니즘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라는 다섯가지 공유형태가 있다. 질은 4차원이고 량은 0차원이다. 차원은 공유도를 나타낸다. 우리는 4차원을 쉽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입체가 공유하는게 4차원이다. 자동차가 도로를 공유하고 PC가 인터넷을 공유하는게 사차원이다.
개별적인 존재는 3차원이고 연속된 존재는 4차원이다. 손흥민은 3차원이고 손흥민이 소속된 팀은 4차원이다. 존재가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성립시키는 것은 공유하기 때문이다. 공유가 없으면 외력의 작용을 이길 수 없다. 반응할 수 없다. 자신의 위치를 방어할 수 없다. 그 경우는 그냥 통과된다.
뉴트리노가 초당 1천억개나 엄지손톱을 통과하고 있지만 우리는 지각하지 못한다. 반작용을 못한다. 그냥 지구를 관통한다. 뉴트리노 입장에서 지구는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은 유가 아니라 무다. 우리가 물질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반작용을 하기 때문인데 반작용은 전자기력에 의해서 일어난다.
전자기력은 공유결합에 의해 일어난다.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의 힘은 대부분 전자기력이며 그것은 공유결합이다. 원자 둘이 전자 하나를 공유하므로 강하게 결합된 것이다. 남녀 둘이 자녀 하나를 공유하므로 부부가 결합된다. 마찬가지로 구조는 대칭이 축을 공유하므로 일어나는 공유결합이다.
구조는 공유결합 메커니즘이다.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공유결합과 공유해제가 있다. 집합과 원소가 아니라 공유결합과 공유해제다. 전체와 부분이 아니라 공유결합과 공유해제다. 세상은 다섯 가지 형태의 공유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존재 내부의 자체 질서를 이루고 이겨서 의사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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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입자, 힘, 운동, 량 구조는 수학의 차원과 통한다. 그런데 방향이 반대다. 우리가 아는 차원은 점을 더하여 선이 되지만 구조 차원은 선을 쪼개어 점이 된다. 점은 선이 끊어지는 단절점이다. 선은 면이 쪼개지는 절단선이다. 면은 입체가 쪼개지는 절단면이다. 입체는 계가 쪼개지는 절단체다.
수학의 차원은 발산되어 무한대의 수렁에 빠진다. 선은 길이와 상관없이 무한대로 쪼개진다. 점은 무한대로 짧은 선이다. 점이 무한대로 짧은 선이라면 점과 선의 구분은 없다. 점과 선을 구분할 수 없는데 선이 점의 집합이라면 모순이다. 공유라는 개념이 없는 수학의 차원은 잘못 정의된 것이다.
수학의 차원 개념은 원리적으로 오류임을 보였다. 선은 점의 공유, 면은 선의 공유, 입체는 면의 공유, 4차원은 입체의 공유다. 닫힌계 내부에 압력이 걸려서 여럿이 하나처럼 행세하는게 공유다. 메뚜기 한 마리는 마음대로 가지만 백만 마리는 일제히 한 방향으로 간다.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다. 방향은 공유방향이다.
방향이 중요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자연에 3, 2, 1, 0 차원은 없다. 자연에는 오직 4차원이 존재할 뿐이며 나머지는 변화를 설명하는데 필요한 개념이다. 우리는 4차원을 볼 수 없다. 우리는 0차원을 보는 것이며 나머지는 추론된다. 선은 테두리선인데 그것은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약속이다.
4차원 - 변화를 격발한다.
3, 2, 1차원 - 변화를 설명한다.
0차원 - 인간의 감각기관이 포착한다.
에너지의 전달경로 때문이다. 전구는 발전소와 연결되어야 하고 수도꼭지는 수원지와 연결되어야 한다. 에너지의 전달 경로가 없는 존재는 불성립이다. 수학의 3, 2, 1, 0차원 개념은 에너지 전달 경로가 빠져 있다. 편지에 주소가 없는 셈이다. 전화기는 있는데 전화번호가 없어도 전화기인가?
수학의 차원은 발산되어 10차원, 26차원 계속 나온다. 백차원, 천차원, 무한차원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4상의설은 발산되어 8상, 16상, 32상, 64상의설 나오는 것과 같다. MBTI도 새끼를 쳐서 64유형이 나왔다. 조만간 인공지능을 시켜서 128유형을 만드는 사람 나온다. 발산되면 망한다.
공유의 반대말은 모순이다. 구조 차원을 공유도를 정의할 수 있지만 모순도로 정의할 수도 있다. 차원이 높을수록 모순되고 불안정하다. 구조 차원은 4차원 뿐이며 4차원은 모순이고, 모순이면 깨지면서 변화를 일으킨다. 변화를 단계별로 관측하는 것이 차원이다. 변화가 진행된 정도가 차원이다.
변화는 0차원에서 공유가 해제되어 모순이 사라지므로 멈춘다. 점은 단절점이다. 에너지가 단절되므로 변화는 멈춘다. 구조는 얽힘이다. 얽히면 공유하고, 공유하면 효율적이고, 효율적이면 이기고, 이기면 의사결정한다. 반대편을 보면 구조는 풀림이다. 풀리면 무질서해진다. 엔트로피 증가다.
사건의 원인 측이 얽힘이면 결과 측은 풀림이다. 존재는 얽혀 있고 자발적 변화는 언제나 풀리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실이 우연히 풀릴 수는 있어도 저절로 감길 수는 없다. 공유가 해제될 수는 있어도 공유하게 될 수는 없다. 우주의 기본 힘이 공간을 확보하여 안정되려고 하는 척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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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을 대칭으로 이해하지만 대칭은 축을 공유한다. 축은 비대칭이다. 나눗셈이 안 된다. 곤란해졌다. 인류는 무시하기로 했다. 원래 인간들이 나눗셈에 약하다. 인류가 오랫동안 12진법을 쓴 것은 12가 나눗셈이 잘 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곤란한 사정을 만나 눈가림으로 우회한 것이다.
세상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다. 곱셈이 아니라 나눗셈이다. 부분을 모아서 전체를 이루는게 아니라 완전한 전체가 복제하여 부분을 낳는다. 세상은 원자의 집합이 아니라 낳음의 복제다. 어미는 자식을 낳고 활은 화살을 낳는다. 그런데 인류는 덧셈과 곱셈을 좋아하고 뺄셈과 나눗셈을 싫어한다.
세상은 변화다. 우리는 불변을 선호한다. 주역의 역은 변화다. 탈레스는 물의 변화가능성에 주목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을 변화로 설명했다. 철학은 변화에서 시작되었다. 주역의 역易은 해와 달이니 시간의 변화다. 세상이 변화이고 변화가 뺄셈, 나눗셈이라는 것은 고대인들도 알고 있었다.
인류는 변화를 외면했다. 변화는 대칭을 통과한다. 대칭은 불변처럼 보인다. 여당을 야당으로 막아 교착시키면 변화는 멈춘다. 인류는 거기서 안정감을 느꼈다. 전체와 부분, 원인과 결과, 집합과 원소의 대칭에서 불변을 찾으려고 한다. 그것이 대칭축을 가진 변화의 조절장치라는 사실은 외면했다.
노는 양쪽에 붙어 대칭이지만 키는 하나이므로 비대칭이다. 인류는 노 두개로 보트를 저으려고 한다. 두 개의 바퀴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하나의 바퀴축으로 도약하지 못한다. 하나의 엔진을 찾지 못한다. 갤리선은 두 개의 노로 가지만 범선은 하나의 키로 간다. 인간은 하나로의 도약을 두려워한다.
하나는 조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형제가 둘이면 경쟁을 붙여 조절할 수 있는데 외동아들은 말을 안 듣는다. 진리는 대칭된 둘이 어우러져 비대칭의 조절장치 하나를 만든 것이다. 조절장치를 찾으면 차원의 도약이 일어난다. 더 높은 세계로 올라선다. 더 높은 세계로의 초대에 겁먹지 말아야 한다.
인류는 대칭의 덫에 갇혀 비대칭으로 도약하지 못했다. 에너지 공급 루트를 확보하지 못했다. 외부 에너지를 차단해놓고 쇄국하면서 안정감을 느꼈다. 벽을 깨뜨리고 높은 세계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으로 존재는 모두 설명되었다. 비로소 사유할 수 있다. 메커니즘을 벌여놓고 공란에 채우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