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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을 ‘애지사화집’에 드리운 오색 궁륭
김명원(시인 대전대 교수)
‘나’의 여럿 됨으로 만드는
‘우리’가 한데 어울려 만나는 공간들에서는
문학의 이본들이 만들어진다.
- 장석주
프롤로그
문학이라는, 그중에서도 시라는 공간을 사유한다. 시가 언어로 발아하고, 미적 형상화의 구체적인 방법들에 의해 이미지라는 꽃을 피우며, 상징체계의 줄기와 잎을 내어 전체성을 포집해서 의미라는 열매를 맺기까지의 숱한 과정들은 시인이 축조해낸 공간에서 가능한 것이다. 시인이 담보하는 인식의 대지는 아기자기하게 좁은 골목이나 음습한 지하 골방이기도 하고, 반하여 드넓은 시베리아의 광야나 미확인된 우주 너머이기도 하다. 시인은 나름대로 천차만별인 자신만의 질료로 각기 다른 형식과 기법의 시를 건축한다. 공간 기호로 내면화한 창문을 내고, 열린 구조를 표방하기 위해 벽을 허물거나 혹은 외부와의 단절을 시도하려 모든 문들을 암호로 봉쇄하기도 한다. 이런 시에서 독자들은 심원한 휴식을 느끼기도 하고, 난해한 미로에 엉킨 채 불편을 호소하기도 하며,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날카롭도록 새로운 상상력에 탄복하기도 하는 것이다.
‘사화집’이란 시인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공동 시마을 같은 것, 자신들이 지은 집을 전시하는, 말하자면 ‘시들의 전시회’인 셈이다. 다양하게 건축된 시들이 마음껏 뽐내며 서 있는 전시회장을 돌면서 독자들은 어느 시의 집부터 맛볼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시집을 받아들었을 때는 일관성 있게 배치된 한명 뿐인 시인의 시 공간에서 숙연해지고 권태로워질 수도 있겠지만 사화집은 단연코 아니다. 시의 색깔도 다 다르고 시의 외형도 다 다르고 심지어 시가 보유하는 언어의 평수도 모두 다 다르다. 시인의 문패도 다 다르며 시가 지향하는 주제도 각기 다 다르다. 둘러볼수록 흥미롭고, 찾아들수록 재미있다. 그러니 시를 방문하는 발걸음에도 속도가 붙는다. 한 시인의 시집을 읽는 시간이 그 시인이 배태한 창작의 시간에 비례할 수밖에 없어 느려진다면, 사화집을 읽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각자의 시인들에게 분산되므로 빠르고 가벼울 수 있다. 사화집이 보유하고 있는 최대의 장점으로 인하여 독자인 나는 경쾌해진다.
애지사화집 『능소화에 부치다』(2012)는 명징한 구조물들로 벅차다. 사화집 안에 구축 된 시의 공간에는 강병길, 강서완, 권순자, 김바다, 김연종, 김정원, 김종옥, 김지요, 김진길, 김현식, 박정옥, 박종인, 안이삭, 유현서, 이시경, 장이엽, 조영심, 조옥엽, 최용훈, 황경숙, 이현채 시인 등의 시 작업 현장도 공개되고 있는데, 저 먼 바다도시 통영(김바다)에서부터 어둔리(김종옥)를 거쳐 도심의 노래 주점(이현채)까지 다채롭다. 그래서 그들의 붓 발자국을 따라 궤적을 그리다 보니 꽤나 긴 여정이었던 듯싶다. 모든 시인의 시들을 다 마음에 품었으나 지면의 한계로 일부 시인의 시 집만 소개하는 것을 애석해하는, 성하의 오후다.
유리 도시 속의 타자들
시란 너무도 다의적인 생산물이다. 쓰는 이(시인)와 읽는 이(독자)의 관점과 인식, 그리고 사유의 깊이에 따라 숱한 몸(해석)으로 채색되는 변종물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의 중요한 근간根幹이 있다면, 그것은 ‘재현’과 ‘표현’과 ‘언어’의 구조를 지탱하는 건축물로서의 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현실 재현으로서의 시는 당연히 메시지의 강렬한 힘을 비축하여야 할 것이고, 표현으로서의 시는 문학적 형상화와 리듬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할 것이며, 언어 기능으로서의 시는 기호가 함의하는 상징이나 알레고리의 배면을 그림자로 드리워야 한다.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과부하를 받거나 결핍되면 시의 역동적인 생명감은 태어나지 않는다. 시는 긴밀한 구조로 형성된 긴장 속에서 피어나는, 입체적인 미학을 꿈꾸는 연유이다.
자연스러운 현실 재현과 명징한 표현, 그리고 치밀한 언어의 정수를 고스란히 담아서 시가 얼마나 견고할 수 있는가를 첫 시집 『도배 일지』를 통해 보여주었던 강병길 시인의 「그리하여」 연작시들을 사화집 첫 입구에서 만나게 되었다. 강시인은 「그리하여」 연작시들에서도 시인의 사유가 어떻게 육화되는 지를 잘 그려내고 있었는데, 이는 ‘그리하여’라는 부사가 함의하고 있듯이 작용과 반작용을 거쳐 통합의 세계로 독자들을 밀어 올리려는 추동력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상과 범상, 개인과 우주, 제약과 해체, 관습과 일탈 등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체의 이중성과 그 틈 사이에서 ‘그리하여’는 탄생한다. 수많은 이유와 숱한 변명을 구실로 삼는 우리는 자신 안의 타자들과 싸우고 화해하다가 결국 그렇게 하여서, 그러한 결과로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하여’ 스스로에게 승복하고 만다. 이보다 좀 더 타자들을 향한 적극적인 수용이라는 면에서 강서완의 「속도의 식욕」에는 잔인한 유쾌함이 스며있다. 약육강식의 엄정한 법칙 하에서 먹이 사슬의 가장 우위를 차지하는 인간은, 초원을 누비며 오로지 먹고 먹히는 살육 대신 편안하게 냉동고에다가 쇠고기 닭다리 봉지를 보유한 우리는 과연 포만의 행복을 느끼는가. 시인은 식욕의 속도를 알레고리로 엮어 질문하고 있다.
소금쟁이 지나간 동심원이 사라지듯
통증 없는 연극은 지나간다
냉엄한 순례의 나이테가 찰나로 벗겨진다
(중략)
사랑의 맹세를 두고 간 얼굴
제 그림자를 갖지 않는 강에 몸을 던진 얼굴
흙을 파던 삽을 물려준 얼굴
뻘에서 뻘에 박힌 돌이 된 얼굴
산수를 즐기려다 풍경이 된 얼굴
사막에서 낙타의 등에 소금을 싣는 얼굴
얼굴의 상처에 주름진 얼굴들이
어깨를 잇대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험적 경험들로 색깔을 나누거나
뇌두의 잠령을 헤아려보는 나도
매순간 얼굴이 바뀌는 편이다.
- 강병길, 「변검變瞼 -그리하여 20」 일부
잘근잘근 부순 꽃의 살점이
나의 내장을 순례하네요
나는 날마다 너이고
나를 먹은 너이고
나를 뒤쫓는 너를 먹는 거룩함에
라라, 속도가 붙어요
- 강서완, 「속도의 식욕」 일부
‘변검變瞼’은 중국 전통극 중 하나로 연기자가 얼굴에 쓴 가면을 순식간에 바꾸는 마술과 비슷한 공연이다. 변검을 관람하며 「변검變瞼 -그리하여 20」 의 시적 화자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공연자의 얼굴처럼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수많은 타자들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수많은 타자들의 얼굴은 곧 나의 얼굴들이며, 이를 자인하는 순간 공연은 끝나고 연극과 일상은 하나가 된다, 「속도의 식욕」에서도 “나는 날마다 너”이며 “나를 먹은 너”이기도 하는 해방구를 통해 단일한 ‘나’의 시원적 억압을 해제하고 주체의 타자성을 긍정하는 자유의 실현을 도모해낸다. 피터 브룩스가 시의 궁극적인 목적이 타자성의 회복이라고 말한 근거도 여기에서 모색될 수 있다. 강병길과 강서완의 시로써 우리가 즐거워진다면, 시인이 구축한 열린 공간과 탈억압의 구조 속에서 시인과 공유하고 공감하는 순간들이 여럿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노란 알약은 편두통의 과녁을 명중하지 못한다
동행하던 벼락두통이 관자놀이까지 솟구친다
불면의 그림자가 천장에 박혀있다
허기진 눈알이 나를 노려본다
- 김연종, 「사소한 징후들」 일부
티브이는 늘 그와 함께 했다
담배는 긴 날숨의 통로
소주 한 병으로 밤의 독을 녹여내며
수면제를 먹고 돌아누우면 또 하루가 왔다
(중략)
그가 부재중인 방에는
간만의 방문객들이 플래시를 터뜨렸다
창을 비집고 들어 온 봄햇살이 읽어내는
삶의 기록은 간결하고도 진부했다
전형적인 孤獨死의 풍경
- 김지요, 「무명氏는 부재중」 일부
김연종의 「사소한 징후들」이나 김지요의 「무명氏는 부재중」은 모두 현대인들의 불안 의식에 기반을 둔다. 이들 암울한 시의 집에 사는 주인공들은 모두 확인되지 않은 막연한 대상으로 인해 편두통을 앓고 있거나 고독사를 감행한다. 불안의 대상이 막연하다면 이는 대상이 부재해서라기보다는 대상 자체가 표상의 질서를 벗어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안은 주체가 이런 대상에 따라 취하는 리비도적인 입장에 따라서 그 대상에 의해 파생된다. 이 두 작품은 보이지 않는 불안에 대해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며, 언어로서 자기 동일화되지 않는 불안에 의해 시의 집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 균열은 현전이 부재의 흔적들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을 증명해내고 있다.
균열이 일어나기 용이한 유리 집의 절속면絶續面은 이현채의 「유리 도시」에서 강열하게 드러난다. “유리로 만든 아이들이 유리처럼 반들거리며 자라나는 빌딩 숲”에서 ‘유리’라는 문제적 심급은 시 공간을 절망의 과잉과 욕망의 결핍이라는 두 계열로 나누고 있다. 유리 도시에서는 이성만으로 훈육된 인간을 만들어서 프로이트의 ‘광학기계’로, 들뢰즈 · 가타리의 무한히 변형 가능한 ‘기계적 배치’로 미끄러트린다. 이현채는 이를 유리 도시로 명명하고 유리를 경계로 하여 나뉘는 대조적인 세계를 가감 없이 열거하여 제시하고 있다. 유리琉璃는 결국 유리遊離의 질감으로 감각화한다. 이처럼 차갑고 쌀쌀한 비감은 김현식의 「나침반」에서도 발견된다. “멀어질수록 커져만 가는 강력한 자장이 새벽안개처럼 휘감아 돌 때/ 나침반의 끝은 떨리는 이파리로 외로움을 타전했다// 나침반의 떨림도 끝내 극점에 도달하지 못하였다”에서 ‘나침반’은 화자 자신이다. 생의 목표점을 향하여 평생을 도움닫기하며 살아가야 하는 나침반의 존재는 항상 도달하는 존재가 아니라 도달하기 위해 떠는 미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현서의 「능소화에 부치다」에서처럼 “수직의 낭떠러지를 맨주먹 맨발로 오”르며 비가적인 도시의 삶을 굳건히 지탱해야 한다는 환기구를 발견할 즈음, 또 하나의 비상구에서 희망의 담론을 본다. 유리 도시에 드리운 불길한 기운 속에서 “씹고 씹고 곱씹다 뱉어낸 질긴 꿈들이// 길게 목을 빼다 살쾡이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차마 놓을 수 없는 끈질긴 기다림”으로 이어지는 조옥엽의 「쓰레기통」에서 드디어 유리琉璃·遊離 도시의 건강성이 강인한 생명력으로 회복되는 연유이다.
으밀아밀한 시 창작실의 시인들
애지사화집 『능소화에 부치다』를 구성하고 있는 시인들의 시 창작실은 실로 이채롭다. 시인들은 저마다 치밀하게 기하학적인 구도로 설계한 시의 연과 엄밀하게 끌질한 행간에 앉아 그들의 시를 구상하고 시를 배치, 재배치하면서 수정을 가했을 것이다. 시를 얻고 시를 가공하고 시를 완성하고 퇴고해간 그들의 집필실은 가혹하리만치 개성이 넘친다. 권순자는 「목련정진」에서 “떨며 참았던 설움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지점을 시 창작의 산실로 제시하면서, 마침내 눈부신 겹겹의 봄빛이 타올라 통점에 번지는 전율로 시가 빚어졌음을 고지한다. 그러기에 시의 말미에 이르러 ‘세상을 향한 울음’이 ‘세상을 얻은 득음’으로 환치되는 순간에서 시는 한 편의 목련으로 감연히 피어난다. 권순자의 「목련정진」은 시가 어떻게 해서 개화하였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말하자면 시 제작 공개 현장인 셈이다. 시창작의 고뇌를 좀 더 심도 있게 펼쳐 보이는 시로는 최용훈의 「물의 집합방정식」이 있다. 그는 “문득, 같은 객관적상관물이더라도 화자마다 객관객체가 달라서 시는 정형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쾌해졌지만, 언어자체는 깊이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시편들에서 삶에 대한 어떤 깊이가 느껴진다 해도 시어가 축조하는 이미지들은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강조하며 “대강만으로는 시가 될 수 없음을 직시하라”고 시론을 펼치고 있다. 얼마나 강인한 골격으로 축조된 최용훈표 시창작실인가. 사고의 전방위적 전환의 유연성이 그의 시 공간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순간이다.
하지만 바로 뒤이어 황경숙 시인이 의도하는 논리의 반전이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시는 기의에서 빠져 달아나려는 허망을 도모할 때 오히려 기의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황경숙은 「테리가타」에서 “어둠의 입구에서 종일 짠 거미의 베일이 홀연 사라질 때 Y는 거울을 본다. X의 입술 어깨 골반 무릎이 차례로 깨어난다. 이윽고 빈집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Y는 시인이고, X는 시이다. 시인인 Y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시 X를 통해 발현하려고 한다. 허나 시인 Y가 주술로 주문한 시 X의 입술 어깨 골반 무릎이 차례로 깨어나지만, 문제는 결과적으로 ‘빈집’이 된다는 데 있다. 시가 시를 배반하고 시인을 배반하고 프로이트가 ‘운라임리히’라고 부른, 범주화를 피해 달아나거나 익숙한 체제를 거부하는 양식으로서 이 시가 도전하는 모험은 이 부분이다. 바로 자신의 시 창작실을 ‘빈집’으로 만든 새로운 방식으로서의 시 쓰기인 것이다. 미소니즘에 맞서는 이상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시인은 성공하고 있다.
이런 성공담 뒤편에는 물론 무수한 노력담이 존재한다. 조영심은 「말씀」에서 “사흘 꼬박 밤낮없이/ 말의 뼈를 고아본다”면서 시의 언어가 얼마나 극심한 언어 제조 과정을 거쳐 탄생되는 것인지를 증명해 보이고 있으며, 김진길은 「밤톨줍기」에서 “소소리 솟은 나무/ 득음의 찰나,/ 그/ 찰나”로 시가 태어나는 순간을 정제된 시어로 비유하여 묘파하고 있다. 시는 무한한 과정의 역경을 새기고 발생하는 절체절명의 득음이다. 그 완결판 소리를 줍기 위해서 시인들은 시와 고투하다가 시에게 끝내 지고, 시로서 다시 탄생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시인은 사라지고 시가 남는 집, 자신의 화신인 시마저 홀연히 떠나 독자를 향해 사라지는 집, 시인들의 시 창작실이다.
나는 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중략)
삐뚤어지게 앉아 바람 길을 열어주고
삐뚤어지게 엎드려 진달래뿌리와 손가락 걸고
삐뚤어지게 누워 잎사귀를 흔들어주면
구석구석 골고루 햇빛 비쳐들 터이다.
잔가지 사이사이로 주먹별이 내려올 터이다.
모난 돌이 돌탑을 받쳐주듯
나를 고여 주는 삐뚤어진 생각의 작대기 두드리며
삐뚤어지게 뛰어가 시를 부르고
삐뚤어지게 서서 밀어줄 테다
- 장이엽, 「삐뚤어질 테다」 일부
소리의 진원지는 울음이어서
멀리서도 흘러내리지 않는다
(중략)
체언이나 조사가 생략된 풍경이
뚝, 뚝, 분절음으로 끊어져
책갈피처럼 나른하게 쌓였다
새떼처럼 한 방향으로 쓰러진다
- 박정옥, 「소리의 풍경」 일부
이름을 부르자
아기가 울음을 터뜨린다
- 이시경, 「오카리나」 일부
문학의 효용성이 여럿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으뜸은 작가가 체험한 ‘떨림’을 독자에게 전이轉移하는 것일 게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떨림판 같은 것이 있어서 좋은 글을 읽으면 그 떨림판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공명을 일으키게 된다. 바로 이 공명작용으로 문장의 본령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 한유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라는 명문일 터, 「송맹동야서」는 한유가 ‘맹동야’라는 지인을 떠나보내면서 위로하기 위해 쓴 글로, 6백30여 글자로 이뤄진 문장 가운데 ‘명鳴’자가 39번이나 나온다. 한유는 지극한 문장의 전제요건을 ‘대범물부득기평칙명大凡物不得其平則鳴’으로 요약하고 있다. 문장의 ‘울림鳴’이라는 신비한 현상이 ‘불평不平’, 즉 평형을 잃은 상태로부터 비롯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무릇 물物이란 그 평형을 얻지 못하면 우는 법으로 풀과 나무의 소리 없음도 바람이 이를 흔들면 울고, 물의 소리 없음도 바람이 이를 움직이면 우는 법이니, 그것이 도약하는 것은 이를 격발하기 때문이요, 쇠와 나무도 소리가 없건만 어쩌다가 그것을 두들기면 운다는 것이다. 여기서 물物이란 객관 사물 일반을 가리킨다. 사물의 보편적 원리로서 그것이 본시 유지하고 있던 평형의 정지 상태를 상실하면서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지는데서 울림이 생겨난다는 이치이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평형을 잃으면 울리는 현상이 내재해 있다. 한유는 “사람이 말을 하는 이치 또한 그러하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은 연후에야 제대로 말을 할 수 있는 법이다. 노래함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요, 소리를 내어 우는 것은 가슴 속에 품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무릇 입에서 나오는 것이 소리로 되는 것은 그것이 모두 평형을 잃은 까닭이다. 음악이라는 것은 가운데 맺힌 바가 있어서 밖으로 새는 것을 말한다. 잘 우는 것을 가려 뽑아 그것을 빌려 울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가슴 속에는 창고 같은 것이 있어 그 속에 차마 말하지 못할 사연들이 오랫동안 저장되어 있다가 그것들을 더 이상 가둬두지 못하여 부득이不得已한 지경에 이르러 급기야 터져 나올 때만이 비로소 참된 언어와 진실한 글로 된다는 의미이다. 가슴 속에 맺힌 바鬱於中가 있어 맺힌 긴장을 이겨내지 못하고 북받쳐 오를 때야말로 제대로 된 시가 되는 것이니, 어쩌면 시인이란 제대로 우는 자일 것이다. 장이엽은 「삐뚤어질 테다」에서 “나는 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고 자신의 생애가 ‘불평不平’, 즉 평형을 잃은 상태로부터 비롯되었다고 고지하고 있다. 이런 불평의 자세는 오히려 사물과 평형을 이루는 자세를 습득하게 하는데, 바로 “비뚤어지게 앉아 바람 길을 열어주고/ 삐뚤어지게 엎드려 진달래뿌리와 손가락 걸고/ 삐뚤어지게 누워 잎사귀를 흔들어주”는 행위로 드러난다. 이런 평형 유지를 위한 배려로 “구석구석 골고루 햇빛 비쳐들 터”이며, “잔가지 사이사이로 주먹별이 내려올 터”, 시인은 “삐뚤어지게 뛰어가 시를 부르”겠다고 선언한다. 한유는 하늘의 이치, 곧 보편적 원리를 끌어들여서 ‘불평즉명不平則鳴’을 설명하는데, “하늘의 때라는 것도 그러하여, 잘 우는 것을 가려 뽑아 그것을 빌려 울게 하는 것이다. 새로 하여금 봄날에 울게 하고, 우레로 하여금 여름날에 울게 하며, 벌레로 하여금 가을날에 울게 하고, 바람으로 하여금 겨울날에 울게 하는 것이니, 네 계절이 서로 맞물려 밀듯 빼앗듯四時之相推奪 하는 것은 반드시 평형을 얻지 못한 바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여기에서 인간의 언어와 문장, 음악과 예술은 보편적 우주론과 만나게 된다. 문장을 다루거나 노래 부르는 행위를 자신의 소명으로 삼는 자는 이러한 이치를 통해 선택된 자로서, 문사의 말은 또한 그 중에서 더욱 정묘한 것이며, 더욱이 잘 우는 자를 가려 뽑아 그를 빌려 울게 하는 것이라고 한유는 결론을 낸다. 결국 시인은 잘 우는 자로 가려 뽑힌 자擇其善鳴者로서 하늘을 대신하여 우는假之鳴 존재인 것이다.
박정옥은 「소리의 풍경」에서 시가 어디에서 발원하였는지를 제시한다. “소리의 진원지는 울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울음’은 “멀리서도 흘러내리지 않는”는 고형화된, 화석화된, 요지부동의 시적 존재감으로 드러난다. 소란스러운 시 제작 과정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체언이나 조사가 생략된 풍경”이며, “뚝, 뚝, 분절음으로 끊어져/ 책갈피처럼 나른하게 쌓”여 “새떼처럼 한 방향으로 쓰러진” 현장이다. 시는 그렇게 만들어지고, 시는 그렇게 사라지며, 또 시는 그렇게 남는다. 이시경은 「오카리나」라는 악기를 통해 시의 탄생을 부각시킨다. 시는 사물과의 대자 형식에서 ‘울음’으로 태어나 자신의 존재를 구원한다는 것을 “이름을 부르자/ 아기가 울음을 터뜨린다”로 표현하는 대면적 진실이라니! 이보다 더 짧고 굵게 시의 원지성原地性을 표현해 낼 수가 있겠는가.
시인이라는 존재는 이러하듯 ‘불평’의 감각을 체화하여 고통을 통감하게끔 운명적으로 선택되어진 존재이며, 그 고통을 울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천형이며 축복이고, 저주이자 아름다운 의무를 지닌 자들인 셈이다. 어긋나 있는 사물과 우주의 측면에 기대어 하늘을 대신해 울어주는 자, 바로 시인이다. 시인들은 평형이 깨질 때마다 어쩌지 못하는 번민으로 온 몸을 울며, 그 울음을 시로 옮기는 불평즉명자이다. 정지용의 시론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안으로 열熱하고 겉으로 서늘옵기란 일종의 생리를 압복시키는 노릇이기에 심히 어렵다. 그러나 시의 위의威儀는 겉으로 서늘옵기를 바라서 마지않는다”는 것, 이 문장처럼, 눈물을 지혜롭게 다스리는 힘이 없이 시로서 잘 노래하기는 쉽지 않을 터, 눈물을 그저 격정 어린 감정의 습도로만 표출하기에 시는 단호하며, 그렇다고 눈물을 훔친 뒤의 냉정만을 그려내기에 시는 섭섭할 것이기 때문이다. 차지만 넘치지 않는 힘, 울음을 터뜨리려는 심정과 울음을 견디려는 팽팽한 긴장, 북받쳐 오르는 뜨건 회한을 대상화시키려는 고도의 애씀, 아슬아슬한 경계의 복판, 여기에서 시의 위의가 굳혀질 것이다. 겉으로는 서늘하나 시의 핵에서는 불의 언어들이 녹아내린다면! 심히 아파 떠는 어느 날이 그 시의 열기에 가만 따뜻해질 수 있다면! 시인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울음에, 그 울음으로 빚어진 시에,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에필로그
애지사화집 『능소화에 부치다』를 읽는 내내 활력으로 충만했다. 애지사화집을 가득 채운 시인들이 제시한 시 건축물들이 기꺼웠던 까닭이었는데, 첫째는 참여 시인들 모두가 고정된 개념과 관념으로부터의 확실한 일탈을 보여주고 있는 신선함 때문이었고, 둘째는 추구하는 세계가 판이한 시인들이 구축한 설계도면의 다채로움 때문이었고, 마지막으로는 이 사화집이 현 문단 사화집의 기준점이 될 거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사화집에 참여하는 시인들은 시의 공동체를 꿈꾸는 시인들이다. 자신의 시를 시의 아크로폴리스로 들고 나와 자신이 구축한 시 집을 공개한 자들이다. 2010년대에 이르러 시가 더욱 골방 문학으로 숨어들고, 자폐적인 신음과 기생하는 언어로 소외를 자청할 때 기꺼이 자신의 시를 시인들 서로에게 타전하며 시의 푯대를 현실에 튼실하게 세운 자들이다. 그러기에 사화집은 보편적인 거리에서 시의 존재감을 대중에게 외친다.
시를 아직도 믿고 있는 독자들이여. 시를 자신만의 밀실에서 제작하고 자기 감상에 몰두하고 자기도취에 빠진 일부 시인들이여. 시의 집은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시의 집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 속에서 전체화 되는 인간 삶의 복합성을 제시하는 공유 공간이어야 한다. 시는 시대를 담보하고 사회를 대변해야 하는 소명을 스스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불평不平한 사물들의 울음을 진증하게 들어서 기록하고, 그 울음의 숙명을 존재화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는 연유이다.
어떤 장식이나 구사도 필요 없이 정직하게 드러나는 노출콘크리트를 건축물의 질료로 선택하듯 정신적인 응축과 기율로서 언어의 골격과 뼈대가 그대로 진솔하게 드러나게 한 시들이 즐비한 애지사화집 시마을을 나서며, 사화집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와 그 중에서도 애지사화집이 제시해야 하는 새로운 시 문학의 방향성에 대해 즐겁게 고민하는 시간이다. 장마가 시작 되려는지 습도가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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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명 원
* 충남 천안 출생
* 이화여대 약학과 졸업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 1996년 《詩文學》으로 등단
* 시집 『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 『달빛 손가락』 등
* 노천명문학상, 성균문학상,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대전시인협회상 등 수상
*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