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년도 : 2023년
제42회 수상자 : 박원명화
수상 작품집 : 『달빛 사랑』
대표 작품 : 달빛 사랑
달빛 사랑
달빛 내리는 밤길을 걷자니 어머니 생각이 난다. 온 세상의 어둠을 밝히듯 그때도 등불 같은 달빛이 발아래 쏟아져 내렸다. 자식이라면 목숨줄이라도 내놓을 것처럼 절대적인 사랑을 주셨던 어머니, 늦둥이 막내를 유난히 안쓰러워하며 노심초사 감싸기만 했던 모성은 학교에 보내고도 미덥지 못했는지 내 책가방은 언제나 언니 손에 들려 보냈다. 공부야 잘하든 못하든 무슨 상관이랴. 막둥이가 학교 가는 것만도 기특해 마지않던 어머니는 나를 응석받이로만 키웠다.
졸업하고 스무 살 넘어 직장에 다닐 때도 어둑어둑해질 무렵이면 동네 버스정류장에 나와 무작정 나를 기다리시곤 하셨다. 불빛이 흔치 않던 그 시절, 어둠이 내린 골목길을 혼자 걷노라면 한기 같은 무섬증이 일어났다. 누군가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공포는 인적 드문 길에서 들리는 사람의 발걸음 소리였다. 어둠이 내린 밤길에 무서움을 달래려 달빛 벗 삼아 가다가도 저만치 마중 나온 희미한 어머니의 그림자가 보이면 한순간 긴장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 시절 겁쟁이인 나를 지켜준 건 달빛이었고 마중 나온 어머니였다.
저 높은 밤하늘에 누가 쟁반같이 둥근 달을 걸어 놓았을까. 이처럼 밤이 그윽하고 아름다운 것도 하얀빛이 내뿜은 신비함 때문이었을 터, 어머니에게도 달빛은 딸의 길을 밝혀주는 수호신이었을 것이다. 달 없는 캄캄한 밤이면 괜한 두려움에 젖어 온갖 방정맞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어디선가 들었던 소문과 가상이 현실로 수반되어 가슴 조이던 일도 막연한 내 상상력에서 발달한 신경성 증후군이었는지도 모른다.
달은 세상 모든 걸 밝혀주는 등불이 되기도 했지만, 신령이나 정령 등으로부터 어떤 재앙이나 불행을 막아주고 지켜주는 믿음의 존재이기도 했다. 달 밝은 보름날이면 어머니는 뒤란 장독대 앞에 정화수를 떠 놓고 가족의 안녕과 자식 잘되기를 바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빌곤 했다. 그러고 보면 달빛과 정화수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어떤 종속적 관계인지도.
잠 안 오는 날, 우연이라도 박 덩어리 같은 하얀 달빛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먼먼 그리운 냄새가 가슴으로 파고든다. 달빛의 색채는 오래 바라볼수록 신비롭고 오묘하다. 붓으로 흩뿌린 듯한 묵화 빛에 둘러싸인 흰색의 도드라진 광채는 세상 모든 걸 다 포용해줄 것같은 너그러움과 아련한 정감이 흐른다. 그래서일까, 달빛을 보고 있으면 외롭고 가슴 시린 밤의 향기가 느껴져 괜스레 눈물이 난다.
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뜨고 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초승달에서부터 시작해 토실토실 살 오른 보름달이 되기까지 달빛의 신비로운 풍경에는 이상한 힘이 들어있어 나도 모르게 겸허한 마음이 우러난다. 달빛이 모든 예술의 꽃으로 피고 지는 것도 감성을 부추기고 심신을 쉬게 해줄 서릿발 같은 청결함에 기대고 싶은 심리적 반응이 아닐까. 그러기에 삶이 버겁고 힘들 때 우리는 신을 찾아 기도하듯 달빛을 수호신 삼아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고 빌었는지도.
잠 안 오는 밤,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달빛이 어릿어릿 비춰오면 거실로 나가 창밖 하늘을 기웃거린다. 운 좋게도 풍성한 보름달을 볼 때면 따뜻하고, 포근하고, 까슬까슬한 쾌적함 같은 달밤의 운치를 만끽하곤 한다. 달에서 풍기는 특별함이랄까. 야한 빛도 아니면서 마음의 정감을 건드리는 은은하고 격조 높은 배경이 연상된다. 달빛은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명화가 되고, 소리 없는 동화 속 이야기를 만든다.
지금도 나는 둥근 달에서 따뜻하고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을 찾곤 한다. 살아생전 내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주었던 것처럼 가끔 달을 향해 소망을 비는 것도, 어쩌면 달빛이 나를 보호해 줄 거라는 것도 오래전 뿌리 내린 심리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늘 곁에 있는 소중함에 대한 감사의 마음, 그게 곧나를 편안케 하는 행복이지 싶다.
수상 소감 : 박원명화
앞으로 더 잘 쓰라는 격려로
받습니다.
수상 소식을 듣고는 긴가민가 싶어 다시 확인을 한다. 그동안 어렵고 힘들었던 일들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붕 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슴을 쓸어내린다. 공자님이 이르기를 ‘아침에 도를 깨우친다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진리를 보통 사람들이 깨닫고 산다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글도 그렇다.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나는 매양 그 자리인 것처럼 고뇌하고 갈등한다.
글을 쓸 때마다 내가 겪은 체험의 사실보다 헛된 욕망을 갈구한다. 내 안의 피어나는 욕망은 화려하고 슬프고 어지럽다. 무엇을 찾는 것인지 나 자신도 모른 채, 눈에 익은 상투적인 언어로 치장하느라 가끔은 본래의 주제에서 벗어나 개념 없이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글 쓰는 일에 집착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 문학을 동경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것이 내 삶의 숙명이듯, 쓸쓸함을 채워야 한다는 현실과 상상의 복잡미묘한 감정의 편린에서 오는 모순된 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서랄까.
한국수필문학상은 수필가라면 누구나 선호하고 받고 싶어 하는 권위 있는상이다. 그런 큰상이 내게 주어졌다는 게 아직도 꿈인 듯 어리벙벙하다. 20년을 키운 문학의 꽃밭이 이제야 활짝 피어나는 것이런가.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축하한다는 박수갈채가 쏟아져 들어온다. 상을 주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더 잘 쓰라는 무게로 느껴진다.
불교에서의 인과 법칙에 따르면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진리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오랜 노력의 결과인 것 같아 반갑고 기쁘고 흐뭇하다. 글쟁이로 산다는 게 내 인생 가장 큰 복인 듯싶다. 보잘것없는 내이 야기를 들어주는 이도 있고, 푸념 같은 내 삶을 비춰 줄 수도 있으니 이보다 더한 행복한 인생이 어디 있으랴.
오늘 내가 이 상을 받기까지 사랑의 힘을 보태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하며 아울러 심사해주신 세 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박원명화 99522511@hanmail.net
청주출생. 월간 『한국수필』 등단(2003).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사)국제펜한국본부, 문학의 집 서울 회원. 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총장,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사임당시문회 부회장 겸편집장. 자서전 강사. 작품집 : 수필집 『남자의 색깔』, 『길 없는 길 위에 서다』, 『풍경』, 『개인날의 낭만 여행』, 『디카, 삶을 그리다』, 『달빛 사랑』 외 다수. 수상 : 제9회 한국문인협회 작가상, 제2회 연암기행수필문학상, 제39회 일붕문학상, 제15회 한국문학 백년상.
심사평
심사위원|유혜자ㆍ지연희(글)ㆍ최원현
제42회 한국수필문학상 심사를 맡으며 한국수필 문단 필자들의 역량이 날로 향상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이 경중을 재단하기 어려울 만큼 선명한 주제와 적절한 소재로 문장을 다듬어 의미를 개진하는데 손색이 없었다는 점이다. 여섯 분의 응모자들 속에서 예심을 거쳐 이은희의 수필집 『불경스러운 언어』와 박원명화의 수필집 『달빛 사랑』을 본심에 올려놓고 심사위원 모두 만장 일치로 제42회 수필문학상 수상자를 확정지었다.
박원명화 수필집 『달빛 사랑』 중 「달빛 사랑」은 어둠 속 달빛의 서정을 모성의 깊은 사랑으로 빛을 밝히고 있다. 늦둥이 막내를 유난히 안쓰러워하며 노심초사 감싸기만 했던 어머니는 자식을 위하는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으셨던 분이다. 어머니는 어둠 내린 밤이면 막내딸의 귀가를 근심하여 골목길을 걸어 딸을 마중하곤 했다. 무서움을 딛고 걸어오던 길목 저만치 달빛을 맞으며 마주한 모녀의 환한 얼굴은 달빛만큼이나 빛나지 않았을까 싶다. 정겨운 모녀가 걸어가는 뒷모습이 만월 아래 아름다운 그림자를 그려놓았으리라 생각한다. ‘이처럼 밤이 그윽하고 아름다운 것도 하얀 달빛이 내뿜는 신비함’ 때문이었을 것이라며 박원명화는 달빛 예찬을 한다. 또한 지난 시절 달빛은 어머니와 딸의 길을 밝혀주는 수호신이었음을 필자는 회고하고 있다. ‘잠 안 오는 날 우연이라도 박덩어리 같은 하얀 달빛을 마주할 때면 먼먼 그리운 어머니 냄새가 가슴으로 파고든다.’는 아름다운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 그러므로 ‘달빛’과 어머니라는 절대적인 대상을 설정하여 이 수필은 독자의 가슴에 면면이 스며들게 한다. 문학은 어떤 눈부신 감동으로 독자의 시선을 끌어낼 수 있을까 고뇌해야 한다고 했다. 박원명화의 달빛 사랑은 ‘달빛’ 아래 고즈넉한 모녀는 귀가를 따뜻하게 짚어내고 있다.
전통과 권위의 한국수필문학상 수상을 하는 두 분께 축하를 보내며 좋은 작품들임에도 이번 수상에 들지 못한 분들에겐 다음의 기회가 분명 주어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끝
첫댓글 박원명화 선생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