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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배우 출신 정치인. 제16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바 있다. 호는 우석(隅石).
1937년 5월 8일, 일제강점기 당시 경상북도 대구부(現 대구광역시)에서 아버지 강병오와 어머니 김연주 사이의 3남 1녀 중 삼남으로 출생했다. 다만, 아버지 강병오에게는 본처가 아닌 두 번째 부인이었으며, 전처 사이에 자녀들이 여러 명 있다고 한다.
본명은 강신영이었으며, 데뷔할 때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썼다. 이후에 정치를 하면서 본명을 강신성일로 고쳤다. 선거에서 본명을 써야 하는데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본명 강신영으로 나섰다가 유권자들이 신성일인 줄 몰라서 표 손해를 많이 봤다는 게 개명의 동기.
많은 스캔들과 말년에 보여준 구세대적 모습 때문인지 많은 한국 영화사 걸작에 그의 이름이 있음에도 그의 전성기를 경험한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다만 한국 영화사 최고의 스타라는 데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다.
2. 활동
2.1. 배우 활동
1960 ~ 70년대를 대표하는 미남이자 최고의 인기 배우. 젊은 시절이나 나이 든 후 모습이나, 2000년대 시각으로 보아도 걸출한 미남임에는 별 이견이 없다. 젊은 시절엔 한국의 알랭 들롱이라고 불리웠다. 아니, 당시 서양 미남의 대명사던 알랭 들롱과 비교되는 한국 미남의 대명사가 신성일이었을 정도였다.
전성기에는 하루를 넷으로 나누어 영화를 동시에 네 편씩 겹치기로 찍기도 했다. 총 524편(추정)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이 중 54편을 아내인 엄앵란과 함께 했다. 유명세나 인지도, 출연작으로 본다면 현재의 탑 인기 남자배우 5명은 합친 정도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출연료도 단연 탑급으로 당시 배우 출연료 1위를 차지 했으며 2위와는 무려 7배나 차이가 날 정도였다. 1960년대 배우 출연료가 보통 18,000원이었는데, 신성일 혼자 45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대근의 인터뷰 증언.) 당시에 그를 출연시키려는 제작사에는 출연료를 현금으로 자루에 담아와서 집 앞에서 줄을 섰을 정도라고 한다. 현역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엄청난 수입에 비해 재산은 얼마되지 않았는데 신성일은 선거를 비롯해 돈을 버는 족족 다 써버렸기 때문. 특히 필름 국산화에 나섰다가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어 경제적으론 재기 불능에 빠졌다. 반면 신성일 다음으로 출연료가 높았던 신영균은 강직한 성격답게 낭비벽이 없고 여자 문제도 깨끗하여 착실히 돈을 모은 덕에, 신성일과 똑같이 정계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연예계 최고의 부자로 남아 있다.
그의 연기력에 대해 일부 평론가들은 평가가 박하다. 신성일의 마지막 출연작인 <야관문: 욕망의 꽃>을 본 관객들이 '이런 전설급 원로배우의 연기가 이다지도 발연기였다니'라고 한결같이 혹평한 데서 알 수 있듯, 발성도, 억양도 좋은 편이 아니다. 후시녹음의 최대 수혜자.
하지만 그렇게 폄하하는 것은 후시녹음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후시 녹음을 기본으로 하는 중화권 드라마 영화에서도 연기력이 떨어지면 다 표가 난다. 신성일은 뛰어난 연기력은 아니었으나 다작을 하면서도 편차없는 연기를 보여줬다. 그렇기에 1960-1970년대 수많은 한국 영화 명작 리스트에 그의 주연작이 있는 것이다. 동시녹음 시대에도 그의 명성은 계속되어 1980년대 <길소뜸> 이후 자신의 목소리로 연기를 시작한 이후에도 각종 유력 시상식에서 상을 수상할 정도로 평가도 좋았다.
그러나 정치 외도를 거치면서 공백기의 영향탓인지 발 연기가 심해졌다. 1980년대에는 곧잘 사용하던 표준어도 나이가 들수록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구 출신이다 보니 사투리가 무척 심해서, 대부분 성우 더빙으로 처리했다. 신성일의 목소리 전담은 1960년대에는 성우 이창환이 맡았다가, 1970~80년대에는 성우 이강식이 맡았다. 참고로 이창환은 원래 라디오 드라마 등에서 인기를 끌던 성우로, 신성일 성우 전담이 되고부턴 신성일이 엄청난 다작을 하다보니 자연히 이 분도 엄청나게 바빴다고 한다. 전성기 이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처음으로 본인 목소리를 녹음한 영화는 '오늘은 왕'으로, 이후 드물게 신성일의 본 목소리로 나온건 '이상의 날개'의 이상, '코리언 커넥션'의 형사와 '증발'의 중정부장, '레테의 연가', '길소뜸', '달빛 사냥꾼', '야관문: 욕망의 꽃' 정도였다.
한창 영화배우로 전성기를 날리던 시절에는 영화에만 집중하며 TV 드라마에 일절 출연 안 하기로 유명했지만, 예외적으로 반공 드라마에 여러 번 출연한 적이 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 주력하였던 반공 드라마, 반공 영화 출연을 안 하면 일감이 끊길 수도 있던 시절이라서,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어쨌든 본격적인 TV드라마 출연은 여자의 남자가 최초였다. 그 후 1994년 KBS 주말연속극 딸부잣집에 특별 출연해 대기업 회장이자 냉혹한 아버지를 연기했다.
2012년 3월 10일 세바퀴에 출연했으며, 종편인 TV조선의 토크쇼 노코멘트란 프로에서도 나왔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참으로 생소한 광경이었다.
당대에 인기가 워낙 대단해서인지 그와 이름이나 이미지가 비슷한 남자 배우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은 신일룡(본명 조수현), 동향(영덕) 출신인 신영일(본명 정인식)은 그를 모방한 인물들. 특히 신영일은 신성일이 직접 발탁해서 신영일이란 이름을 지어주었고 국회의원 보좌관에 이르기까지 평생 그와 함께 했다. 김지미, 신성일에서 한 글자씩 따서 이름을 지은 배우 겸 제작자 한지일(한소룡)도 신성일의 영향을 받은 이 중 하나.
전성기에는 주로 극장쇼가 수입원이었는데 항상 현미, 최희준이 신성일, 엄앵란과 함께 했다고 한다. 당시 신성일, 엄앵란의 영화 OST를 꼭 여자는 현미, 남자는 최희준이 불렀기 때문이며 후에 현미가 홀몸이 되었을 때도 현미의 자녀들을 신성일이 각별하게 아꼈다고 한다.
2.2. 정치 활동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정계 입문을 노렸고, 5공화국 시절인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민주정의당 봉두완 후보와 민주한국당 김재영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본인 말에 의하면 법에 따라 본명인 강신영으로 선거에 나갔는데 유권자들이 배우 신성일인지 몰라서 표를 안 줬다고 한다.
이후 이름을 강신성일로 개명하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대구광역시의 동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해당 지역구 현역 의원이던 자유민주연합 김복동에게 밀려 다시 낙선했다. 4년 후인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대구광역시 동구에 출마하여 마침내 당선되었다. 16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던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에 서명한 사실도 있으며 의원 활동을 하던 중 뇌물수수를 하는 바람에 임기가 만료된 후 실형을 선고받았다.
여담으로 국민의힘의 강석호 전 의원이 그의 조카다.
3. 구설수
미남으로 소문난 그는 맨발의 청춘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엄앵란과 결혼했다. 이 엄앵란과의 결혼식은 당대 최고 톱스타 둘의 결혼이라 어마어마한 화제가 되어 이 결혼식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가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심지어 이를 노리고 지방에서 전문 소매치기단까지 같이 상경했다가 잡힌 게 뉴스가 된 적이 있다.
하지만 많은 여자와 불륜 관계를 맺었으며, 그 과거사를 자서전으로 써낸 적이 있었다. 2011년 발표된 이 자서전에서 자신의 엄청난 과거사를 여과없이, 그것도 상대 여성의 신상을 숨기지 않고 공개해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다만 이미 그 여성과의 연애사는 유명한 일이었고, 자서전 이전에 지승호와의 인터뷰집에서도 밝힌 바 있다. 문제는 자서전 출간 이후 그 부분을 세일즈 포인트로 정하며 이미 사람들에게 잊혀진 일을 다시 들춰내 화제거리로 만든 것이었다.
사실 동시대 배우들의 회고록이 90년대 이후 발굴되면서 나름 화려했던 경력들이 공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신상옥 감독의 예처럼 본부인에게 잘못했다는 식으로 덮거나, 최은희처럼 본인에게는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일이지만 밝히거나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이전에도 엄앵란은 시사 프로에 나올 때마다 "요즘 여자들은 너무 쉽게 이혼한다. 참고 살아야지. 나라면 5, 6번은 이혼을 해야 했다."는 발언을 수시로 하였는데 그게 사실이었다. 신성일의 자서전 공개로 엄앵란은 보살의 영역에 이르렀다. 그나마 2018년 현재에서는 완전히 별거 상태이다. 참고로 MBC 프로그램인 사람이 좋다에 출연한, 신성일의 막내딸(이름은 강수화)은 엄앵란에게 '아버지에게 애인이 생겼으니까 완전히 이혼하자.'고 말했다. 증거 기사. 또한 '둘은 결혼해서는 안 되는 사이였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그는 부부는 별개의 인격체라며 자신들처럼 사는 것이 미래 지향적인 부부의 모습이고 불륜 공개에 대해 엄앵란에게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이후 Y-STAR와의 인터뷰에서 그간의 불륜 폭로 발언이 자신의 자서전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욕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며 엄앵란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2016년 부인 엄앵란이 건강프로그램 촬영 도중 유방암이 발견되어 수술 및 치료의 일련 과정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프로에서 아내의 입, 퇴원과 뒷바라지 전부를 손수 맡으며 그 동안의 행보에 대한 논란이 어느 정도 사그러진 것과 동시에 중, 노년 시청자들의 애증어린 공감을 얻었다는 평을 받았다.
2017년엔 폐암 3기인 것이 밝혀졌을 당시에는 위로의 댓글보다는 그의 행적에 대한 비판 및 비난 댓글이 상대적으로 많았으나, 2018년 11월 4일, 사망 소식이 기사화가 된 이후에는 고인에게 조의를 표하고, 아내인 엄앵란과 가족에게 위로를 표하는 댓글이 훨씬 더 많았으며, 고인의 행적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자중시키는 댓글들도 주류를 이루었다. 물론 이는 살인자나 매국노급이 아니라면 웬만큼 잘못을 해도 고인을 욕하지 않는 문화 때문이지, 그의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쪽으로 여론이 전환된 건 아니다.,
고인의 죽음 후에, 고인이 투병 중, 엄앵란과 신성일의 발언이 다시 회자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엄앵란 "우리는 동지, 멋있게 죽어야 돼", 신성일 "마지막까지 엄앵란과 함께 하고 싶어"
4. 사망
2017년, 폐암 3기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생존률은 40%였다고. 생전에 본인은 담배를 피우기는 했지만 1980년대에 이미 끊었고, 집에서 부모님의 영전을 모시면서 항상 향을 피웠는데 그게 폐암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부계의 유전인 것 같다.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가 폐결핵 3기였다'라며 가족력도 있는 것 같다고 밝힌 적이 있다. 2018년 3월에 '사람이 좋다'에 나온 바에 따르면 다행히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으며 또 10월 말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해 건재함을 보여주는 근황이 전해졌지만 결국 2018년 11월 4일 새벽 2시 30분에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참고로 말기암 환자 대부분은 거동도 못할 뿐더러 삐쩍 마른 채 사망하는 케이스가 대부분이지만, 그의 경우에는 사망 2주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을 때도 비교적 건강해 보였고 삐쩍 마른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빠르게 회복되는 기색이 보였다고... 아마 갑작스럽게 사망한 케이스였을 확률이 높다.
2018년 11월 3일 19:30분 경 언론을 통해 그의 사망 속보가 떴는데, 이후 응급실에 입원한 상태지만 사망은 아니라는 정정 기사가 떴다. 가족과 영화배우협회 측은 신성일이 응급실에 입원해 위독한 상황에서 가족들이 장례식장을 미리 예약했던 것인데 한 기자가 사망으로 기사를 적고, 다른 기자들은 그걸 확인해보지 않고 다들 베껴서 기사를 냈기에 불필요한 오보 해프닝이 벌어진 것. 신성일의 조카인 강석호 의원도 "가족들이 응급실에서 만일을 대비해 마음을 다잡고 있다"고 밝혔다.
언론 보도 후 7시간 뒤인 2018년 11월 4일 오전 2시 30분 경 화순전남대학교병원에서 아들 강석현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82살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장지는 그가 말년을 보낸 경상북도 영천시 괴연동에 있다.
5. 여담
2009년부터 계명대학교 연극예술과 특임교수로 재직했다.
자택에 도둑이 든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아들 강석현은 배우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드라마, 영화 제작자로 일하는 중이다. 강석현은 클래지콰이 멤버 알렉스의 고모부인 미래통합당 국회의원인 강석호의 사촌동생이 된다.
막내 딸 강수화도 한 때 광고 모델로 활약한 적이 있다.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이목구비가 준수하게 예쁘다.
둘째 형이 1969년 대한민국 공군이 세계 4번째로 F-4D를 인수할 때 직접 조종간을 잡고 대구기지로 착륙시킨 강신구 예비역 공군 소장(1934 ~ 2002)이다.
젊었을 때 스포츠카를 좋아해서 포드 머스탱을 직수입해 탔다고 하며, 처음 경부고속도로 추풍령에서 부산 방면 도로가 개통되었을 때 서울에서 부산을 향해서 주행하고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고 있었다. 추풍령 쯤에서 반대편에 빠른 속도로 지나간 차를 발견한 박 대통령이 "저거 누구야?"했더니 박종규 당시 경호실장이 "영화배우 신성일입니다."라고 했더니, 박 대통령이 "그 친구 오래 살라고 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제임스 딘처럼 사고내지 말고 조심히 운전하라는 말이었던 것. 그도 그럴게 신성일 본인이 서울-부산을 2시간 반에 주파했다고 하니 아무리 차가 없고 규제도 미비하던 때라 한들 150을 넘는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렸다는 것이니 김갑수가 당시 신성일이 타던 빨간 머스탱이 유명했다며 탑기어에서 스피라를 소개할 때 언급한 적 있었다.
2000년대 신동아에서 영화평론가 심영섭과 했던 인터뷰를 보면, 그는 역대 여배우와의 베드신을 언급하며 몸매 품평도 해댔다. 심영섭은 그게 거슬렸던 건지 다른 원로 배우 인터뷰에서도 이를 언급하면서 신성일을 은근히 깠다. 신동아에서 시리즈로 기획한 원로 배우 인터뷰였는데, 여배우에게 저렇게 대놓고 무례한 발언을 내뱉은 건 거의 신성일밖에 없기는 했다.
영화판에서 폭력을 수시로 휘둘렀는데, 영화배우 정윤희의 뺨을 때린 적이 있으며 장미희에게 면전에서 '못생겼다'고 면박주기도 했다고 한다. 방송인 썬킴이 미국에서 신상옥 감독의 연출부에서 일하던 시절, 증발이라는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신성일이 전날 술을 먹고 촬영 시간에 지각한 배우들을 불러다가 일렬로 세워놓고 뺨을 때리는(...) 장면을 봤다고 한다. 그 자신 역시 박노식에게 폭행을 당한 전력이 있다.
학창 시절에는 서울대학교 입학을 목표로 둘 정도로 우등생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계가 깨져 집안이 풍비박산난 후 서울로 상경하여 청계천에서 호떡을 팔아서 모은 돈으로 재수, 삼수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던 서울대 농대 출신인 인기 가수 손시향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나 반갑게 다가오는 신성일을 손시향은 오랜만이야 한 마디 하고 어깨만 툭치고 지나가게 된다. 그에 충격을 받은 신성일은 공부를 그만두고 신상옥과 관련이 있던 한국배우학원에 들어가게 된다.
배우 김수미를 도운 적이 있었다. 신인 시절 영화 촬영 중 감독이 예정에 없던 노출을 요구했는데, 감독의 노출 강요에 곤란해하던 김수미를 신성일이 도왔다. 그는 감독에게 "신혼여행 다녀온 새색시에게 갑자기 벗으라고 하면 벗겠냐. 촬영 접자"고 말하면서 감독과 김수미의 갈등을 무마시켰다.
사망하기 몇 년 전부터는 경상북도 영천시 괴연동에 자신의 이름을 딴 성일가를 직접 짓고 혼자 살았다고 하며 그 뒤에 본인의 장지(葬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