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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퍼온글]은 '16.5.03. '빠알리공부모임'에 실린 <나무>님의 글 입니다.
* 제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부분이, 붓다께서 지적하신 '心의 개발' 입니다. 여기 인용문이 그러한 '心의 개발'에 중요한 포인트를 지적해 준다고 보아서 매우 중요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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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 전통에서 불교를 공부해오다가 니까야 경전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진작부터 니까야 경전을 읽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기존 번역이나 해석이 흡족하지 않아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고, 니까야 원문을 열람할 수 있는 세월을 기약하며 그동안 빠알리어 공부를 준비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비로소 빠알리 경문을 독해하는 걸음마를 떼었으니, 니까야 경전을 갓 읽기 시작한 초보불자라 하겠습니다.
기존 해석이나 번역을 걷어내고 느리게나마 낱말 하나하나 짚어가며 삼가 원문을 배견하올 제, 우리의 교주 석가모니 부처님께 삼가 천정례 만정례를 올리지 않을 수 없으며, 삼장을 결집하셨던 오백아라한, 그리고 이 성전을 수호하시고 전하시기 위하여 목숨 바쳐 전법하시고 구법하셨던 출가비구들과 성자들께 삼가 경배를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세의 한 시대 일개 미천한 불자로서, 이천여년 불교 전래사의 이 땅, 한글을 사용하는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업을 지으며 살아왔던바, 이 귀중한 성전이 우리 말로 함께 읽혀질 수 있는 시절에 감사를 드리며, 기존 해석전통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니까야 경전의 원뜻을 모색하려는 이곳의 시도가 참으로 반갑기만 합니다.
비록 제가 빠알리 원문을 더듬더듬 읽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살펴보니 길따라님을 제외하고는 제가 다른 분들에 비해 빠알리 독해에 약간의 비교우위가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수행이나 교학상으로 빠알리 원문에 대한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싶으면 간혹 가다 글을 올려 함께 논의하며 배우고 싶습니다. 많은 가르침 부탁 드리겠습니다.
다만 제가 니까야 경전을 이제야 읽기 시작한 탓에 전체적인 교학구조를 놓친 채 서술하는 경우가 잦을 것으로 예상되므로, 동학들께서는 이러한 저의 부족한 점을 늘 유의해서 읽어주시길 바라며, 부족하나마 “니까야 경전으로 니까야 경전을 풀이”하는 동학들의 여정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가입인사를 겸해서, 상윳따니까야 47.8, “요리사 경”에서 언급되는 “相(nimitta)”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카페에서 이 경을 처음 접했을 때 대번에 번역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더구나 수행을 하시는 분들은 물론 교학을 하시는 분들께서도 각자 “相”에 대한 이해가 선입견에 가깝게 고착되어 있어서, 이 경을 읽는데 더 장애가 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경에서 “相”에 대해 말씀하시는 바를 바르게 새겨보자는 의도에서 공개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하며, 교학적ㆍ수행적 차원보다는 내용파악과 빠알리 원문에 비중을 두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기 주인의 표정을 살피지 못한다”
“자기 주인의 표정을 살피지 못한다”(각묵스님 번역)의 원문은 “sakassa bhattu nimittaṃ na uggaṇhāti”입니다.
아시다시피, 스리랑카 사본 셋은 모두 “bhattassa(음식의)”이며 미얀마 사본 하나만 “bhattu(주인의)”입니다. 그리고 PTS와 제6차결집에서는 스리랑카 사본들을 따라 모두 “음식”을 택했지만, 각묵스님은 미얀마 사본을 따라 “주인”을 택해 번역했습니다.
이하 경문에서 이와 같은 엇갈린 독법이 시종합니다. 즉 여타 사본 및 교감본에서는 “음식”이라는 낱말로 경의 텍스트가 구성되었지만, 미얀마 사본과 각묵스님 번역에서는 “주인”이라는 낱말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래서 경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이 엇갈립니다.
자기 주인의 相을 살피지 못한다. (미얀마 사본, 각묵스님 번역)
자기 음식의 相을 살피지 못한다. (스리랑카 사본 셋, PTS, 제6차결집)
그리고 음식과 관련한 대목을 읽어보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런데 이 어리석고 슬기롭지 못하고 능숙하지 못한 요리사는 다음과 같이 자기 주인의 표정(sakassa bhattu nimittaṃ)을 살피지 못한다. ‘오늘은 이 국이 내 주인의(bhattu sūpeyyaṃ) 구미에 맞았다. 이것을 집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이것을 많이 집었다. 이것을 격찬했다. 오늘은 신 것이 내 주인의 구미에 맞았다. 신 것을 집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신 것을 많이 집었다. 신 것을 격찬했다(…)’라고. (각묵스님 번역)
그러나 위 번역문의 “주인” 대신 “음식”으로 읽고서 엇갈리는 대목을 고쳐 번역해 보겠습니다. (“sūpeyyaṃ”은 “수프, 조미”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런데 이 어리석고 슬기롭지 못하고 능숙하지 못한 요리사는 다음과 같이 자기 음식의 相(sakassa bhattassa nimittaṃ)을 살피지 못한다. ‘오늘은 나의 이 음식조미(bhattasūpeyyaṃ, 즉 助味)를 맛있어 했다. 이것을 집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이것을 많이 집었다. 이것을 격찬했다. 오늘은 나의 신 음식조미를 맛있어 했다. 신 것을 집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신 것을 많이 집었다. 신 것을 격찬했다(…)’라고.
어느 번역문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나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요리사가 자신이 만들어 차려올린 음식이 신 것인지 짠 것이지 매운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그 조리 특성이나 상태, 즉 “相”을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주인이 짠 것을 좋아하는지 싱거운 것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쫓겨나겠지요.
더구나 어느 음식에 주인의 손이 많이 가고 격찬했다면, 굳이 주인의 표정을 살피지 않더라도 어느 음식을 좋아했는지는 분명합니다. 따라서 “자기 주인의 표정을 취하지 못한다”는 텍스트는 내용상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2. “그는 그 표상을 취하지 못한다.”
먼저, 각묵스님의 번역문입니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리석고 슬기롭지 못하고 능숙하지 못한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그는 이처럼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물지만 마음은 삼매에 들지 못하고 오염원들은 제거되지 않는다. 그는 그 표상을 취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여기 현명하고 슬기롭고 능숙한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그가 이처럼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 때 마음은 삼매에 들고 오염원들은 제거된다. 그는 표상을 취한다.
위의 밑줄 친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봅니다.
tassa kāye kāyānupassino viharato cittaṃ na samādhiyati, upakkilesā na pahīyanti. so taṃ nimittaṃ na uggaṇhāti.
그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자로 머물면서 그의 마음은 삼매에 이르지 못하고 오염들은 버려지지 않는다. 그는 그 相을 파악하지 못한다.
tassa kāye kāyānupassino viharato cittaṃ samādhiyati, upakkilesā pahīyanti. so taṃ nimittaṃ uggaṇhāti.
그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자로 머물면서 그의 마음은 삼매에 이르고 오염들은 버려진다. 그는 그 相을 파악한다.
“uggaṇhāti”가 “취한다”는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파악하다”, “포착하다”는 의미의 뜻을 갖기도 합니다. 요리사 경의 경우 “파악하다”는 의미로 보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tassa kāye kāyānupassino viharato”는 6격 절대구로서 “kāyānupassin(신수관하는 자)”라는 명사를 살려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반적으로 -in, -ant, -vant 등의 접미사가 붙으면 일반 형용사에 비해 의미가 강화됩니다. 즉 때때로 신수관하는 것이 아니라 신수관하는 자로서의 모습이 완연히 갖춰졌다는 의미가 부여됩니다. (이것은 제가 경문을 읽으면서 갖게 된 개인적 견해입니다.) 그런데도 마음(citta)이 삼매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는 얘기이므로, 수행에 있어 “相”을 파악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각묵스님의 “그가 이처럼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 때”라는 번역은 6격 절대구를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각묵스님의 번역은 해석전통은 차치하고라도 구문분석이나 불변사 처리가 예상외로 엉성합니다. 니까야 경전을 읽으시는 분들은 역경하신 분들께 늘 감사를 표하는 한편으로, 늘 이점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3. “그 相”은 무엇인가?
경은 “현명하고 슬기롭고 능숙한 비구는” 신수심법 수관시에 “그 相을 파악한다(taṃ nimittaṃ uggaṇhāti)”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수심법 수관이 열거되고 나서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각묵스님 번역)
비구들이여, 이러한 현명하고 슬기롭고 능숙한 비구는 지금ㆍ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묾을 얻고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얻는다. 무슨 이유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 현명하고 슬기롭고 능숙한 비구가 이와 같이 자기 마음의 표상을 취하기 때문이다.
이 인용문의 밑줄 친 문장을 “자신의 마음의 相을 파악하기 때문이다(sakassa cittassa nimittaṃ uggaṇhāti)”로 옮겨놓고 보면, 요리사 경에서 말하는 “相”의 의미가 좀더 분명해집니다.
결국 요리사 경에서 언급되는 相은 (1)신수심법 수관시 마음의 상태와 관련한 “그 相”과 (2)正念正知(마음챙김과 알아차림)를 얻었을 때의 “자신의 마음의 相”으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두 相을 파악하는 것이 현명한 비구라고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신수심법 수관시에는 “마음이 삼매에 이르지 못하거나 이르는 상태(相)”, “번뇌가 버려지지 못하거나 버려지는 상태(相)”를 파악하는 것이고, 정념정지를 얻은 때에는 “자신의 마음의 [入定한] 상태(相)”를 파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의미를 엄밀하게 검토하자면, (1) 마음이 고요하지 않고 오염들에 덮여 있다면 마음이 아직 계발되지 않은 상태이며(그래서 “그 相”으로 언급), (2) 마음이 고요해지고 오염들이 걷혀지고 있다면 마음이 계발되어가는 상태이며(그래서 “그 相”으로 언급), (3) 마음이 入定하고 오염들이 걷히면 비로소 마음이 계발된 상태라고(그래서 “자신의 마음의 相”이라고 언급)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요리사 경에서 말하는 相과 다른 경에서 언급되는 相이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요리사 경에서만큼은 요리사가 만든 “음식의 조미상태”, 즉 비구 자신의 “心의 入定”, “心 계발”과 관련한 의미로 보고 싶습니다.
4. “心(citta? ceto?)”이란 무엇인가?
앞서 인용한 경문에서 “마음”이라 언급한 것은 빠알리어 “citta”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경에서 말하는 “citta”는 무엇이며, 이것이 “ceto”와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기 위해, 이하 서술에서는 편의상 “ceto”를 “마음”, “citta”를 “心”이라 칭하고서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경에서 말하는 “心”이 삼매에 들고 오염(=번뇌)들이 걷힐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지요. 많은 분들께서 수행을 통해 체득한 바를 바탕으로 “번뇌와 마음”을 “구름과 허공”에 빗대어 이야기하시는 바는, 결국 “心 계발”, “入定”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며, 그 이후로 엄청난 공부여정이 기다리고 있다고 봅니다.
心의 入定(=삼매에 듦)으로 청정한 心이 계발되었을 때 일상의 행주좌와에서 번뇌들이 한 가닥 향연香煙처럼 혹은 옅은 안개자락처럼 스윽스윽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수일간 속속들이 관찰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념처와 관련한 “心 계발”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즉 요리사 경에서 말하는 “자신의 心의 相을 파악한다”가 가리키는 자리라고 봅니다. “心 계발”을 처음으로 확연히 체득하면 일생에 경험해보지 못한 청정함과 지복감이 함께하는 까닭에 그 위치를 오판하는 경우가 왕왕 있으므로, 공부인은 수습차제에서 “心 계발”이 위치하는 지점을 경증을 통해 명확히 확인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심우도로 비유하자면, “心 계발”은 “소를 보다(見牛, ceto)” 내지 “소를 얻다(得牛, citta)”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때 “소”는 心이 아니라, 心이라는 허공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오개(五蓋)”라는 오염입니다. 이 말은 곧 “心이 계발”되어야 비로소 오개를 순조롭게 관찰할 수 있다는 얘기이며, 평소에는 오개는커녕 범부 차원의 달뜬 욕망과 거친 분노덩어리만 겨우겨우 관찰하게 됩니다. 그것도 사후적으로. 그런 의미에서 “오개”는 범부가 언제든 손쉽게 관찰할 수 있는 수준의 번뇌가 아니라고 봅니다. “오개”를 탐욕, 분노, 졸음, 후회, 의심 등등의 거칠고 투박한 범부의 언어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소”를 “오개(五蓋)”로 보면, 이후 소를 길들이는 여정(목우)과 기우귀가, 망우존인, 인우구망이 완벽하게 맞아들어갑니다. 즉 목우는 “오개를 놓치지 않고 관찰할 수 있는 단계”, 기우귀가는 “따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오개가 저절로 관찰되는 단계”, 망우존인은 “오개가 완연히 걷히고 心만 있는 단계(心의 不動)”, 인우구망은 “오개도 사라지고 心도 沒하는 단계”, 즉 선가에서 말하는 “거울을 깨는 단계”입니다. (“거울을 깨고 오너라, 너와 더불어 서로서로 볼 것이니!”) 그 이후는 각자 알아서들 참구하시고…
그러면, “마음(ceto)”은 무엇일까요? 다름아닌 “오개를 관찰해내는 과정”, “心을 계발하는 여정”, “見牛”, 혹은 “心과 관련한 움직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의 경문들을 보시지요.
vivaṭena cetasā sappabhāsaṃ cittaṃ bhāveti. (SN v.263; SN 51.11)
[오개가] 걷힌 마음(ceto)으로써 환히 빛나는 心(citta)을 계발한다.
so abhijjhaṃ loke pahāya vigatābhijjhena cetasā viharati, abhijjhāya cittaṃ parisodheti. (DN i.71; DN 2)
그는 세간에 대한 붙듦을 버리고서 ‘붙듦을 떠난 마음(ceto)’과 함께 머물고 붙듦으로부터 心(citta)을 청정하게 한다.
te cetasā anupariyeti moggallāno mahiddhiko. cittaṃ nesaṃ samannesaṃ vippamuttaṃ nirūpadhiṃ. (SN i.195; SN 8.10)
대신통력의 목갈라나가 마음으로써(cetasā) 그들(=아라한들)을 두루 돌아 그들의 心을 살펴보니 완연히 해탈되고 取에서 떠나 있었다.
nāhaṃ, bhikkhave, aññaṃ ekadhammampi samanupassāmi yena anuppannaṃ vā uddhaccakukkuccaṃ nuppajjati uppannaṃ vā uddhaccakukkuccaṃ pahīyati yathayidaṃ, bhikkhave, cetaso vūpasamo. vūpasantacittassa, bhikkhave, anuppannañceva uddhaccakukkuccaṃ nuppajjati uppannañca uddhaccakukkuccaṃ pahīyatī”ti. navamaṃ. (AN i.4; AN 1.19)
나는, 비구들이여, 이 마음의 고요(cetaso vūpasama)만한 그 어느 一法도 보지 못하나니, 이 법(=마음의 고요)에 의하여 아직 일어나지 않은 도거ㆍ악작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거나, 혹은 이미 일어난 도거ㆍ악작은 버려진다.
心이 고요해진 자(vūpasanta-citta)에게는, 비구들이여, 이렇듯 아직 일어나지 않은 도거ㆍ악작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며, 그리고 이미 일어난 도거ㆍ악작은 버려진다.
마지막 인용문을 보시면, “마음(ceto)”과 관련해서는 추상명사 “고요(vūpasama)”를 쓰고, “心(citta)”과 관련해서는 과거분사 “이미 고요해지다(vūpasanta)”를 씁니다. (“이미”라는 부사는 과거분사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번역에서 추가했습니다.) 이와 같은 용법은 “마음해탈(ceto-vimutti)”과 “이미 해탈된 心(vimutta-citta)”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러므로 지나가는 김에 언급해두자면, “마음해탈ㆍ혜해탈(ceto-vimutti, paññā-vimutti)”은 해탈의 전체여정(시작부터 마무리까지)과 관련한 술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의 고요(cetaso vūpasama)”는 접속사 “혹은”으로 연결되고(“일어나지 않거나, 혹은 버려진다”), “心이 고요해진 자(vūpasanta-citta)”는 접속사 “그리고”로 연결된다(“일어나지 않으며, 그리고 버려진다”)는 점에 유의하시면, “마음(ceto)”은 “心을 계발해가는 과정”과 관련된 술어이며, “心(citta)”은 “心이 계발되어 오개가 속속들이 관찰됨”과 관련된 술어라는 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은 다름아닌 요리사 경에서 말하는 “자신의 心의 相을 파악하는 것”과 관련한 얘기입니다. 나아가 사념처수행(=계발) 내지 염처수행(=계발)은 이 “心의 相의 파악”, “心 계발”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