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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춤추는 천하 (1)
제나라 북쪽으로 연(燕)나라가 있고, 또 그 동쪽으로 산융(山戎)이라는 오랑캐 부족이 있었다. 산융의 영토는 지금의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로서, 발해만 북쪽 일대이다. 천진(天津)에서 동북쪽으로 약 150km 더 올라가면 천안(遷安)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바로 그 곳이 산융의 도읍지였다.
당시에는 그 곳을 영지(令支)라고 하였다. 산융을 일컬어 영지국(令支國)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중국의 유명한 관문인 산해관(山海關)과 매우 가깝게 위치한 곳이다.
지금이야 교통이 발달해서 험지(險地)라고 할 수 없지만, 당시 그 곳은 산과 강으로 가로막힌 험지 중의 험지였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 그래서 중원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는 무풍지대였다. 주왕조가 강성했던 주무왕, 주성왕 시절에도 그 곳에만은 힘이 미치지 못해 그대로 방치할 정도였다.
이렇듯 멀고 험한 지리적 요건을 이용하여 영지국(令支國)은 주왕실에 조공을 바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틈만 나면 중원을 침범하여 곡식과 가축과 백성들을 약탈해가곤 하였다. 특히 그들은 이웃 나라이자 국력이 약한 연(燕)나라를 자주 침공하는 바람에 연나라로서는 걱정이 그칠날이 없었다.
지난날 연(燕)나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남쪽인 제나라를 침략하였다가 정나라 세자 홀(忽)에게 혼쭐이 난 오랑캐가 바로 이 산융, 즉 영지국(令支國)이었던 것이다.
이 무렵, 영지국의 임금은 밀로(密盧)였다.
임금이라고 하니까 상당히 거창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실은 그렇지도 않다. 이 당시만해도 산융을 비롯한 소수 민족들은 부족국가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여러 부족장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도자 정도로 생각하면 적당할 것이다. 여기서는 편의상 그냥 임금이라고 하겠다.
그는 제환공(齊桓公)이 패공이 되어 중원의 여러나라를 규합한다는 소식을 듣고 은근히 걱정을 하였다.
"듣자하니 중원에서는 바야흐로 제나라가 패업을 이루어 여러 제후국을 통합하여 주왕실에 대한 충성을 도모하고 있다고 한다. 아직 제환공의 힘이 이 곳 북쪽까지는 닿지 않고 있으나, 만일 그의 영향력이 북방까지 미치게 되어 연나라가 국경을 굳게 방비한다면 우리는 대관절 어디서 곡식을 충당할 것인가?"
이때 영지국의 모신(謨臣)이자 장수인 속매(涑買)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큰소리쳤다.
"주공께서는 근심하실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제환공(齊桓公)이 비록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남방의 초(楚)나라를 제압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결코 이 곳 북쪽까지 신경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연(燕)나라가 제환공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주공께서 정히 근심이 되신다면 이번 기회에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와 제나라의 통로를 끊어버립시오. 그리하면 연나라는 중원에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청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 생각이다."
이리하여 영지국 임금 밀로(密盧)는 융병 1만 군을 이끌고 연나라를 향해 쳐들어갔다.
연(燕)나라는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공이 큰 소공(召公) 석(奭)에게 분봉한 제후국으로 지금의 북경(北京) 일대를 영토로 하고 있었다. 땅은 넓었으나 워낙 척박하고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어 문화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게다가 동쪽과 북쪽으로 이족들이 둘러싸고 있어 늘 그들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이 무렵, 연나라 임금은 연장공(燕莊公)이었다.
연장공은 군대를 동원하여 방어에 나섰으나 물밀듯 쳐들어오는 융병의 기세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에 그는 사자를 샛길로 보내 중원의 패자로 부상한 제환공(齊桓公)에게 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제환공 22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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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