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3대산(채계산 강천산 회문산)
회문산을 다녀왔어요
회문산은‘큰지붕’으로 불리다가 홍문대사(洪成文)가‘회문산가’를 지은 이후 회문산이라 불려졌다고 전한다.
순창의 회문산이라고 하면 우리의 아픈 역사 이데올로기 중심에 있던 곳으로 가장 먼저 새겨지네요.
이태의 소설 남부군에서 전반부 이야기가 이곳 회문산에서 전개되고 그것을 영화로 만든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도 이곳 회문산에서 시작이 됩니다.
여순사건이나 제주 4.3항쟁사건등으로 진압을 피해 산으로 숨어든 이들이 유격투쟁을 벌이다가 토벌작전으로 거의 소멸되었는데 전쟁과 함께 다시 신빨치산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낙동강까지 밀리던 전선이 서울을 수복하고 이때 조선 노동당이 피할곳이 없어 모두 산악 지대로 숨어 들었는데 이 시기에 전주에 있던 조선노동당 전북도당도 회문산으로 들어가서 전북도당 유격사령부로 자리하게 됩니다.
회문산에서 활동한 빨치산의 숫자는 대략 500명 내외로 추산되고 있는데 전성기때는 탱크병단과 피복공장, 그리고 이념교육과 군사훈련을 전담하는 노령학원이라는 훈련소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이 후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의하여 51년 3월로 회문산 빨치산은 막을 내리고 살아남은 소수 인원들은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는 남부군에 흡수되어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순창 관하의 전 지서(요즘의 파출소)가 빨치산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것이 52년 2월이라고 하니 그 뒤로도 이들의 저항이 얼마나 거세었는지 짐작할 수 있네요.
이곳 순창 지역만 하여도 빨치산과의 교전으로 엄청난 인원이 희생이 되었는데 그 와중에 우리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만 하여도 1,000명이 넘어 빨치산에 의한 희생자보다 많다고 하는 아픈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네이버에서 퍼옴)
6.25 양민 희생자 위령탑
이곳 상사화는 시들어 가네요
회문산은 1846년 천주교 병오박해 때 김대건 신부 일가가 피신했던 곳이며, 구한말 최익현 선생과 임병찬·양윤숙 의병대장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장소다.
미친년머리 풀 위에 앉아 쉬어갑니다
한국전쟁 중에는 조선로동당 전라북도 도당 위원장 방준표가 이끄는 조선인민유격대가 회문산에 아지트를 설치하여 국군과 격전이 있었다. 이 당시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을 당했다. 이 때문에 희생자를 위한 위령탑과 빨치산 사령부를 재현한 비목공원이 세워져 있다. '한국의 5대 명당'으로도 불려 암반 위에까지 묘지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갱정유도를 창시한 도조가 1954년 혹세무민과 대한민국 전복 혐의로 구속되면서 심한 구타를 당해 사망했을 정도입니다. 이후 신도들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자급자족형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지리산 청학동 마을이 대표적입니다. 증산교 창시자가 회문산을 아버지산으로 여기며 신성시했고. 조선 말기에 조정의 박해를 피해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 숨어 살기도 했습니다.
다음 산행지를 지리산 삼신봉 청학동 삼성궁으로 갑니다
첫댓글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