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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388. [역경의 열매] 김현자 <1-13> “더 늦기 전 여성운동 경험 후대에 전하고파”
아흔 문턱 오니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하나님 함께 해주신 시간들에 감사
노란 저고리에 자주빛 치마를 곱게 차려 입은 김현자 전 국회의원(가운데)이 2009년 새해 첫날 가족들과 함께한 모습이다. 김 전 의원 왼쪽이 딸 오혜련씨, 오른쪽이 큰며느리 윤혜선씨.어느새 나도 아흔 문턱에 와 있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대과 없이 지금까지 잘 지내온 것에 감사할 뿐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올해 기력이 떨어져 밖에 나가진 않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나는 동네 노인복지회관에 ‘출석도장’을 꼬박꼬박 찍었다. 중국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전혀 몰랐던 외국어를 한두 마디 알아듣는 것은 기뻤다. 내가 중국어를 배운다고 하면 다들 되물었다. “그걸 이제 배워서 뭐하려고요?” 실용적 목표가 있어서 도전한 건 아니었다. 이웃 나라 말에 대한 관심이었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즐거움을 위해서였다. 외국어 공부가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10여년 전부터 수필 쓰는 모임에도 매주 나갔다. ‘목연회’다. 매월 셋째 목요일에 수필 쓰는 이들이 서울 인사동에 모였다. 함께 점심을 먹은 뒤 각자 써온 글을 읽고 품평을 하는 자리였다. 이 모임에 가면 문우들은 묻곤 했다. “오늘은 어디 다녀오셨어요?” 나는 ‘라인 댄스’를 배우고 중국어 강의를 듣고 왔다고 답하곤 했다.
그러면 다들 “정말 대단하세요”라며 놀라워했다. 나는 활기찬 노년이 좋다. 목연회는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국내 숙박 여행을 했다. 잘 때 따뜻하게 신을 수 있는 수면양말을 문우들에게 가져가 나눠준 적이 있다. 함께 간 이들은 “글 쓰기도 힘드실 텐데 어떻게 이런 걸 다 챙겨오세요. 호호호”하며 기뻐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밝게 웃는 걸 볼 때 행복하다.
사랑은 그런 작은 것에 있는 것 같다. 작은 아들 내외가 같은 아파트 한동에 살고 있다. 자주 나를 찾아온다. 딸은 매 주말 와서 말벗이 돼준다. 고마운 일이다.
지난주 딸은 ‘역경의 열매’ 연재 요청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처음엔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더 늦기 전에 내 자녀와 손자녀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남기고, 여성 후배들에게 내 경험을 들려주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이들을 많이 만났고, 근사한 기회를 과분하게 누렸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6·25 전쟁 후 YWCA에서 일했고, 국회의원이 된 뒤 이태영(1914∼1998) 박사 등과 함께 여성 관련 법 개정에 힘썼다. 치열했던 시간이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 시간들도 쏜살같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지금 기뻐하고, 감사하고, 사랑해야 할 이유이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구 중 하나다. 창밖으로 청명한 가을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오늘에 감사한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현자 <1> "더 늦기 전 여성운동 경험 후대에 전하고파"
* [역경의 열매] 김현자 <2> "네가 아들이었다면…"이 귀에 박힌 어린 시절
* [역경의 열매] 김현자 <3> 해방 후 아펜젤러 선교사의 딸에게 영어 배워
* [역경의 열매] 김현자 <4> 이대 YWCA회장 활동 중 '몸조심' 협박편지
* [역경의 열매] 김현자 <5> 임시수도 부산에 내려가 미국 유학 여권 받아
* [역경의 열매] 김현자 <6> 흑인 친구의 눈물 통해 인종차별 높은 벽 실감
* [역경의 열매] 김현자 <7> 6·25 전쟁 중 세계기독청년대회에 참가
* [역경의 열매] 김현자 <8> YWCA 간사로 전국 대학생 하령회 준비 보람
* [역경의 열매] 김현자 <9> 흑인 청소년들에 조카 피살뱟…뱟"예수 가르침대로 용서"
* [역경의 열매] 김현자 <10> 세계YWCA 실행위원 당선… '자고 나니 유명'
* [역경의 열매] 김현자 <11> "에스더처럼 나라 구하자" 정치참여 제안 수락
* [역경의 열매] 김현자 <12> 8명뿐인 여성의원, 가족법 개정 위해 매일 머리 맞대
* [역경의 열매] 김현자 <13> 여성운동 선두에 섰던 아흔 무렵, 더 감사하고 더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
◇약력=△1928년 전북 김제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1949), 미국 컬럼비아대 사범대학원 수료(1952) △세계YWCA 실행위원, 한국전문직 여성클럽(BPW) 창립회장, 유엔세계여성대회 한국수석 대표, 11·12대 국회의원, 한국여성정치연맹 총재, 여성가족부 정책자문위원 등 역임 △YWCA대상(2003) △현 한국YWCA연합회 명예연합위원, 서울 영락교회 권사
***[역경의 열매] 김현자 <2> “네가 아들이었다면…”이 귀에 박힌 어린 시절
끝내 밖에서 아기 낳아들인 아버지, 참기만 하는 어머니에게도 반발심
김현자 전 국회의원(뒷줄 오른쪽)은 딸만 셋인 집의 차녀로 태어났다. 1935년 이리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 언니,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나는 1928년 전북 김제시 죽산면에서 태어났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부잣집이라고 했다. 땅도 적잖게 있고 머슴도 여럿 있었다. 동네에서 하나밖에 없는 유성기와 라디오가 있었다. 라디오의 안테나 높이는 10m는 족히 됐다.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 기계에서 나는 신기한 소리를 듣기 위해 모여 들었다.
우리 집은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 사랑채, 바깥채가 있었다. 사랑채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고 김석준)가 계시고, 바깥채에는 머슴들이 살았다. 안채에는 할머니가 기거했다. 나는 언니, 할머니와 주로 지냈다. 어머니(고 은애정)는 아버지의 방보다는 할머니의 방에서 우리와 자는 날이 많았다.
“네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내가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들은 말이었다. 아버지는 장남이었다. 가문의 대를 이으려면 우리 부모님이 아들을 낳아야했다. 집안의 큰 바람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만 줄줄이 낳았다. 나는 둘째 딸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남아선호사상이 극심했던 그 시절,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자는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동진수리조합이라는 일본 회사에 다니던 아버지는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했고 머리가 영특했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셰익스피어 전집 등이 꽂혀있었다. 지식인이었다.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아버지보다 다섯 살 위인 어머니는 한글을 깨친 정도였다. 아버지의 눈에는 어머니가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와 별거했다.
어느 날 곱상하게 생긴 젊은 여자가 갓난아기를 안고 우리 집에 왔다. 어머니를 보더니 대뜸 그 아기를 안겼다. “형님, 이 아이를 부탁합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묵묵히 받아 들었다. 아버지가 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앗(첩)을 보는 것도 자신의 운명이라고 여기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애처로웠다.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아버지에게 화가 났다. 칠거지악이라는 명목으로 여자를 옥죄는 사회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어머니는 순종하고 인내했다. 그 시대 모든 어머니들처럼. 지금도 어머니라고 하면 ‘인(忍)’ 자가 먼저 떠오른다. 나는 외도하는 아버지와 인내하는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으로 가사를 멀리하고, 공부에 집중했다.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는 어진 성품을 가진 분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진 못했지만 조부모뿐만 아니라 삼촌과 고모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셨고 나는 모태신앙인으로 태어났다. 내가 댓살쯤 됐을 때 성탄절을 맞아 식구들이 김제 죽동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때 내가 강단 위에 올라가 캐럴 독창을 했다고 한다. 어떤 노랫말이었을까.
‘예수님 오신 밤, 어린 딸이 십자가 아래에서 캐럴을 부른다.’ 그걸 지켜보던 나의 어머니. 마음이 늘 가난했던 여인. 자주 눈물짓던 아낙. 기도하던 내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래도 어머니는 인생의 짐을 주님께 의탁하고 살아오셨다. 하나님의 은혜다.
***[역경의 열매] 김현자 <3> 해방 후 아펜젤러 선교사의 딸에게 영어 배워
입학 때 일본어로 수업하던 대학, 방학 중 8·15 맞아 활기 되찾아
이리여고 2학년 때 의자매를 맺었던 언니와 함께한 김현자 전 국회의원(왼쪽). 당시 이리여고는 일본인이 다수였기 때문에 조선인들끼리 더 의지하며 지냈다.“센진노 구세니.” 이리여고에 다니던 시절 일본인 동급생들은 나를 보며 이렇게 입을 삐죽거렸다. ‘조선인 주제에’라는 뜻이었다. 이리여고는 일인 여학교였다. 일본인들과 일본어로 공부해야 하는 곳이었다. 나는 일어 작문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작문을 써내면 일본인 교사가 칭찬을 하고 다른 반에 가서 내 글을 읽어주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동급생들은 나를 못마땅해 했다.
제 나라 없는 서러움이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렘 4:19) 여고 시절 내내 주눅들어 지냈다. 소수의 조선 여학생들은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1941년 말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됐다. 사회 전체가 전시체제로 바뀌었다. 근로봉사라는 명목으로 모 심기 등을 하러 다녔다. 여고 졸업 후 1945년 초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경성여대. 현재의 이화여대다. 일제가 ‘이화’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했던 때다.
첫 학기, 한국인 교수들이 서툰 일본어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일제의 황민화정책 일환이었다. 여교수들은 ‘몸뻬(고무줄 바지)’를 입고 수업을 했다.
고교와 다르지 않은 대학의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그해 여름 방학, 고향에 있는 동안 8·15 해방을 맞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교명이 복원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두달만에 다시 간 학교는 전혀 다른 곳 같았다.
나는 조국의 해방이 감격스러웠다. ‘이화’라는 이름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입김으로 축출 당했던 교수들도 돌아왔다. 박마리아 김활란 김영의 장영순 김신실…. 여교수들의 활기가 나를 들뜨게 했다. 600여명의 재학생 중에는 여고를 갓 졸업한 이도 있었지만 중국 만주 등으로 떠났다가 해방을 맞아 모국으로 돌아온 이도 있었다. 조병옥 여운형의 딸도 있었다.
나는 영문과였다. 동기 중엔 이효재도 있었다. 여고 시절 영어를 거의 배우지 못했던 우리는 기초부터 배워야 했다. 영문과 교수 중에는 김상용(1902∼1951)의 인기가 최고였다.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오/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구름 꼬인다 갈 리 있오/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왜 사냐건 웃지요.’
유명한 그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오(1934)’다. 김 교수는 수업 시간에 짙은 눈썹에 사색 잠긴 깊은 눈으로 영시를 외우곤 했다. 나를 포함한 동급생은 거의 모두 그런 그의 모습에 굉장히 매료됐다. 학생들은 주로 한복을 입고 다녔다. 나는 어머니가 분홍, 자주색으로 물들여준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받쳐 입었다.
3학년 때부터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딸 엘리스와 자넷 C 헐버트 선교사 두 분이 우리에게 영어 회화를 가르쳤다. 본토 발음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궁핍했던가. 해방 직후 이북에서 갑자기 송전을 중단했다. 남한 전체가 한동안 암흑 속에 지내게 됐다. 전기가 없으니 물이 안나오고 물이 안나오니 난방도 안되고 화장실도 쓸 수 없었다. 식량도 부족했다. 기숙사 식당에선 일주일에 서너 차례 밥 대신 멀건 우거지죽이 나왔다.
***[역경의 열매] 김현자 <4> 이대 YWCA회장 활동 중 ‘몸조심’ 협박편지
신탁통치 지지하던 좌파 소행 추정… 김옥길 사감 “외출 자제하라” 당부
1949년 이화여대 영문과 재학시절 김현자 전 국회의원(오른쪽)이 동기인 이춘란 최윤애 라영군 이정순과 함께 교정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해방 직후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둘러싼 이념 대립은 우리 민족을 분열시켰다. 여운형 장덕수 김구 등과 같은 애국지사들이 양 진영 테러 분자의 흉탄에 쓰러졌다. 지식인과 학생들 역시 좌우로 나눠져 첨예하게 대립했다. 초기 좌우 모두 신탁통치에 반대했으나 좌익 계열은 찬성으로 돌아섰다. 민족의 운명은 열강의 이해에 휩쓸려가고 있었다.
당시엔 연희전문 학생들이 모두 이화여전 교정을 가로질러 통학했다. 시위를 할 때도 우리 학교 교정을 지나가면서 학생들을 불러냈다. “이전 학생 나오라.” 그러면 공부하던 학생들이 박수를 치면서 시위대에 합류했다. 나는 시위에 가담하지 않는 소수 학생에 속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회주의에 동조하기 어려웠고, 광복한 조국의 ‘또 다른 지배’를 선뜻 수용할 수 없었다.
1947년 후반쯤 기숙사 사감이었던 김옥길 선생이 나를 포함해 학생 몇 명을 불렀다. “일제시대 말 해체됐던 이화여대 안의 YWCA를 재건하기로 했다.” 그때 나는 YWCA라는 기독여성단체를 처음 알게 됐다. 영문과 학과장이던 박마리아 선생의 권유로 재건된 YWCA 회장을 맡게 됐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
회장이 된 뒤 성경을 매일 읽었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유물사관을 담은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YWCA 임원들은 기독교 특강 등을 준비했다. 김재준 이환신 강원용 목사 등이 자주 초빙됐다. 특히 예리한 통찰과 웅변으로 청년들을 사로잡은 강 목사는 경동교회를 중심으로 ‘신인회’를 조직해 기독학생운동을 지도했다. 나도 그의 제자가 돼 모임에 참석했다.
어느 날 내게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발신인 칸에는 ‘친우로부터’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날과 같이 과학문명이 발달한 세상에서 미신인 기독교를 믿고 YWCA 회장을 하다니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오. 당장 기독교를 버리시오. 그리고 ○○일까지 본관 현관에 ‘신탁통치 절대지지’라고 크게 써 붙이시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상에 해로울 줄 아시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좌파를 지지하는 학생들의 협박으로 추정됐지만 발신자를 확인할 길은 없었다.
“당분간 수업시간 외에는 외출을 하지 말아라.” 김옥길 사감은 이렇게 당부했다. 신앙 때문에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얼마 동안 근신한 뒤 나는 예전처럼 YWCA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미국 YWCA에서 파견된 박에스더 선생이 우리를 지도했다. 하와이 태생의 그녀는 미국에서 생활할 때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를 받기도 한 재원이었다. 늘 명랑하고 긍정적이었다.
여름방학 때 YWCA와 YMCA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하령회에 참가했다.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남녀가 원을 만들어 춤을 추게 됐다. ‘남녀유별’ 관념에 익숙한 나는 도저히 남학생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박 선생 등이 “괜찮다”며 설득했지만 나는 울상이 돼 뒷걸음질쳤다. 결국 검지 하나만 내밀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1949년 7월 졸업 전까지 대학에서 훌륭한 스승들을 만나고 여성문제 등 사회에 눈 뜨며 크게 성장했다.
***[역경의 열매] 김현자 <5> 임시수도 부산에 내려가 미국 유학 여권 받아
이리여고서 영어교사 하던 중 뉴욕 YWCA본부서 초청장
김현자 전 국회의원(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은 1951년 3월 이리여고 교사로 부임하자마자 미국유학을 가게 됐다. 당시 교사들과의 기념사진.이화여대 졸업 무렵 동기들의 최대 관심은 결혼이었다. 이미 3분의1 정도는 결혼을 위해 중퇴한 상태였다. ‘결혼을 하지 않고 김활란 박사나 박에스더 선생처럼 당당하게 사회 활동을 할 거야.’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같은 학교 동기 김봉화와 나는 박에스더 선생의 제안으로 서울 명동의 YWCA에서 수습간사로 일하게 됐다. 1949년 7월 졸업 후 명동 YWCA 숙소로 짐을 옮겼다.
우리는 화로에 불을 피워 밥을 지어 먹었다. 그야말로 ‘자취’였다. 미·소 양국이 설정한 군사분계선인 38선을 기준으로 국토가 분단된 뒤 이북에서 월남하는 이들이 나날이 늘어났고 서울 거리는 인파로 넘쳐났다. 나와 봉화는 천막촌에 사는 월남가족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짝짜꿍’ 등의 노래와 놀이를 가르쳤다.
이듬해 6월 화창한 일요일, 라디오에서 북한 공산군이 남침했다는 긴급 보도가 전해졌고,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국군은 철통같은 태세를 갖추고 수도 서울을 사수합니다. 국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각자의 자리를 지켜주기 바랍니다.” 하지만 바로 이튿날 한강 철교가 끊겼고 서울은 하룻밤 만에 공산 치하가 됐다. YWCA 건물도 붉은 완장 두른 낯선 사람이 점령했다.
박 선생은 미군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고, 만삭이던 YWCA 최예순 회장은 해산한 지 사흘 만에 납북됐다. 나는 언니와 지내다 불안한 마음에 서울역 근처 김재준 목사의 집을 찾았다. “목사님,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요?” 많은 말씀을 하진 않았지만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잠깐의 대화 후 작별 인사를 했다. 김 목사는 “몸조심 하라우”하시며 작은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종이를 펴봤다. 굳은 분유 한 덩어리였다. 눈에 뜨거운 것이 고여 왔다. ‘당신도 배를 곯고 계셨을 텐데….’ 인생의 어떤 순간에 받은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답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 분유 덩어리 조각이 그렇다.
고향 전북 이리에 피신해 무료하던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이리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와달라고 했다. 1951년 3월 개학식에서 부임 인사를 하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우체국에 들렀더니 우체부 한 사람이 내게 두툼한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이 영어 편지 누구에게 온 건지 봐주세요.” 그 고장 사람들은 내가 영문과 나온 것을 다 알았기에 부탁한 것이었다.
발신인과 수신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미국 뉴욕 YWCA본부가 내게 보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수습간사를 위한 유학 서류였다. 초청장과 장학금증서 등 여권 수속에 필요한 일체의 서류가 있었다. 여권을 발급 받기 위해 임시수도 부산으로 내려갔다. 어딜 가나 피난민이 있었다.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모든 언덕과 산은 판잣집으로 뒤덮여 있었다.
거리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이상하리만큼 활기찼다. 한국인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여권 발급 면접은 당시 외무부 장관이 직접 했다. 그때는 장관이 인터뷰할 만큼 유학생이 희귀했기 때문이다. 여권을 내게 건네준 실무자가 말했다. “당신은 20세기 행운아요.” 나는 그렇게 유학을 가게 됐다.
***[역경의 열매] 김현자 <6> 흑인 친구의 눈물 통해 인종차별 높은 벽 실감
‘신세계’ 같은 미국생활에 문화충격… 채플시간 6·25 참상 전하다 눈물만
김현자 전 국회의원(가운데)이 스잔(오른쪽)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부총무 및 일본 유학생 마키노와 함께 1951년 미국 미시간주 칼라마주대학에서 열린 WSCF 세미나에 참석했다.부산 수영비행장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노스웨스트항공사가 1주일에 2차례 정기운항을 시작한 직후였다. 나는 분홍색 저고리에 검정 비로드(벨벳) 치마 차림이었다. 지갑 등 소지품을 둘둘 말은 보자기를 옆구리에 꼈다. 뉴욕 공항에는 박에스더 선생이 마중 나왔다. 현지 신문에는 한국전쟁이 매일 집중 보도되고 있었다. 미국 YWCA 국제부 직원들은 전쟁에서 빠져나온 나를 동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미국의 모습은 내게 ‘문화 충격’이었다. 피난 보따리, 고아들이 떠도는 거리, 간간이 들리는 포성 등 전쟁에 익숙하던 내 눈과 귀 앞에는 그야말로 신천지가 펼쳐졌다. 하늘 높이 치솟은 빌딩, 거리를 매운 자동차 물결, 상점에 쌓인 물건들…. ‘우리 민족은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데, 지구 한편에선 이렇게 풍요롭게 사는구나!’ 유학 초기 이런 생각으로 잠을 뒤척였고, 눈물로 베개를 적실 때가 많았다.
미국에 가자마자 켄터키주 브리아대학에서 열린 수련회에 참석했다. 채플시간에 한국전쟁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 슬픔이 복받쳤다.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결국 눈물만 흘리다 내려왔다. 참석자들은 내 눈물을 통해 전쟁의 참상과 고통을 느꼈다고 했다.
나는 여성을 배려하는 미국의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 문화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건물에 들어갈 때 남자가 여자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길을 걸을 땐 남자가 차도 쪽에 서서 여자를 보호했다. 여자가 방에 들어오면 남자들이 모두 일어나 인사를 했다. 처음엔 그런 대접에 낯설어 한참 쭈뼛거렸다.
하지만 미국처럼 풍요롭고 자유로운 사회에 ‘거대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951년 여름 YMCA와 YWCA 콘퍼런스에 참여했을 때다. 페니라는 흑인 여학생과 나는 친해졌다. 대회를 마친 뒤 기차역까지 동행했다. 마침 저녁 시간이었다. 나는 걸으며 말했다.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가면 어떨까?”
페니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페니가 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페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물 줄기가 그녀의 볼을 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놀라 이유를 물었다. “미안해. 난 너를 좋은 식당에 안내하고 싶은데, 널 데려갈 수가 없어. 좋은 식당엔 흑인이 들어갈 수가 없거든. 흑인전용 식당은 초라해서 널 데려가고 싶지가 않아.”
나는 페니를 위로했다. “나도 백인이 아니야.” 우리는 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역 대합실에도 ‘백인전용(Whites Only)’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역사 밖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승차를 할 때도 페니는 흑인에게 지정된 맨 뒤의 객차를 타야 했다. 지정된 객차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페니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그날 인류 역사에 선연한 차별의 아픔 한 가지를 목격했다.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주님, 페니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언젠가 이 인종 차별의 벽을 허물어주소서.’
***[역경의 열매] 김현자 <7> 6·25 전쟁 중 세계기독청년대회에 참가
각국 참가자들 나에게 “어머, 불쌍해”… 귀국후 부산으로 옮긴 YWCA서 일해
1952년 말 인도에서 열린 세계기독청년대회에 참가했을 때다. 한 참가자가 끌어주는 인력거에 올라탄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나는 컬럼비아대 사범대학원과 뉴욕 유니온신학교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종교교육 과정을 공부했다. 당시 유니온신학교에는 폴 틸리히, 라인홀드 니버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 교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한 학기에 6과목씩 수강했고 제법 좋은 성적을 받았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세계기독청년대회에 세계YWCA 대표로 참가하게 됐다.
독일 등 유럽 각국을 순방하고 인도에서 열리는 청년대회에 참석한 뒤 태국 등 아시아를 돌아 53년 2월 넉 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이었다. 14개국 YWCA 사무국을 방문했다. 말하자면 ‘세계일주’였다. 1952년 10월 말 미국 뉴욕 항을 떠나던 날 컬럼비아대에서 만났던 유학생 오기형씨 등이 나를 배웅했다. 그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유학 중 내게 청혼했고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독신으로 지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저 사람과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뉴욕 항에서 퀸 엘리자베스호에 올랐다. 길이 300m가 넘는 이 배는 극장, 무도회장, 수영장 등을 갖춘 초호화 여객선이었다.
방문국 중 독일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전후 복구가 진행 중이었지만 거리도 사람도 침울했다. 독일YMCA에서 독일과 미국 대학생들의 토론이 있었는데, 미국 학생들은 형식적으로 참여했으나 독일 학생들은 진지했다. 전기 시설이 복구되지 않은 독일 사무실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한 독일 학생이 말했다.
“이 방은 이렇게 어둡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슴에는 태양보다 밝은 빛이 있습니다. 우리는 머지않아 세계를 밝힐 것입니다.”
부족함 없는 미국 청년들보다 초라한 독일 청년의 말이 더 와 닿았다. 우리 조국의 상황과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기독청년대회에는 2차 세계대전 후 처음으로 세계 각국의 기독청년들이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40여개국에서 300여명이 참여했다. 한국에서는 강원용 목사 등이 참여하려 했으나 정부가 허락하지 않았다. 인도가 6·25전쟁 중 중립국을 자임했다는 것이 빌미가 됐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지나친 관심을 받는 사람이 됐다. “어머, 불쌍해”하고 누군가에게 귀엣말을 하는가 하면 내가 지나갈 때 “코리아” “코리아”를 연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비참한 기분이었다. 전 세계 신문이 연일 한국전쟁을 보도하고 있었다.
비자투흐트 세계교회협의회(WCC) 총무는 “전쟁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은 이들이 화해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화목제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연설했다. ‘내가 화목제가 되는 길은 무엇일까.’ 고민했다. 귀국 후 전쟁으로 부산 남포동으로 사무실을 옮긴 YWCA에서 일하게 됐다. 종종 사무실 근처 자갈치시장에 나가곤 했다. “아지매, 여 쫌 보이소. 진짜 싸예!”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는 강인함과 활력이 있었다. 전쟁의 그림자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침울한 독일 사람들과도 달랐다.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고전 10:13).” 나는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시련을 이길 힘도 주셨다는 것을 믿고,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다.
***[역경의 열매] 김현자 <8> YWCA 간사로 전국 대학생 하령회 준비 보람
美유학중 청혼했던 오기형씨와 재회… 한경직 목사 주례로 영락교회서 결혼
김현자 전 국회의원과 오기형 전 연세대 교수는 1953년 11월 한경직 목사의 주례로 서울 영락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사진이 여성잡지 ‘여원’에 실렸다.미국에서 내게 청혼했던 오기형씨는 연세대 교수로 임용됐다. 그는 귀국한 내게 다시 청혼을 했다. 그의 구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장애에 부딪혔다. 박에스더 선생의 만류였다. “결혼하면 YWCA 일을 못하게 돼. 2년 동안 훈련받은 시간이 아깝지 않니? 다시 생각해보렴.” 일과 결혼생활을 양립하기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내게 큰 기대를 걸었던 박 선생으로선 큰 실망이었던 것 같다. 나는 “훈련받은 기간의 최소 두 배 이상을 일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얘기했지만 박 선생은 내 말을 미덥지 않아 했다. 결국 오씨가 박 선생을 만났다. “결혼 후에도 현자씨가 YWCA에서 일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돕겠습니다.” 박 선생은 그제야 우리 결혼을 축복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YWCA에서 파티를 열었다. 그땐 축의금이 없었다. 작은 선물을 하나씩 가져왔다. 가장 많은 품목은 유기그릇이었다. 선물 중에는 바가지 한 개, 빨래비누 한 장도 있었다. 우리 결혼의 청첩인은 백낙준 연세대 총장과 박마리아 YWCA연합회 회장이었다. 1953년 11월 한경직 목사의 주례로 서울 영락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 결혼식은 장안의 화제가 됐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남녀의 결혼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결혼식 사진은 잡지 ‘여원’ 창간호에 실렸다. 신혼집은 동숭동 2층 양옥 전세였다. 남편은 이 집에 ‘기독학생협동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대학생들의 모임 장소로 개방했다. 서울대에 다니는 시조카 오인호, 그의 친구 이원홍(전 문공부장관), 선교사 리 쿠퍼와 벤 셀든도 자주 왔다.
이듬해 나는 첫 아들 준호를 낳았다. 남편이 57년 연세대 부산분교 학장으로 임명돼 부산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동숭동에서 지냈다. YWCA 간사로 일하는 동안 매년 전국 대학생 200여명이 참여했던 대학생 하령회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YMCA와 YWCA 공동 하령회였다. 내가 준비한 첫 하령회에 대해 YMCA대표인 남학생은 “‘빠다(버터) 냄새’가 난다. 우리는 ‘된장국’을 원한다”고 했다.
너무 미국적이라는 불만이었다. 다양한 오락 프로그램이 그런 느낌을 준 것 같았다. YWCA 간사 동기 김봉화는 반바지를 입었다가 곤욕을 치렀다. “미국서 온 처녀 선생이 다리를 다 드러내놓고 다닌다”는 것이 큰 흉이 됐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전체적으로 매우 기독교적이었다. 50년대 하령회 주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건설하자’ ‘책임지는 그리스도인’ ‘기독자의 용기’ ‘대학생과 소명’ 등이었다.
“전쟁으로 페허가 된 이 땅에 우리는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 민족에게 전해야 합니다.” 청년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역사적 사명에 불타올랐다.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전 11:9).” 그 청년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고 헌신했다고 믿는다.
당시 참가자 중에는 나중에 시민운동의 개척자로 일한 강문규 전 YMCA 사무총장이 있었다. ‘버터 냄새’가 난다고 했던 김봉호씨는 후일 국회의원으로 해후하기도 했다.
***[역경의 열매] 김현자 <9> 흑인 청소년들에 조카 피살뱟…뱟“예수 가르침대로 용서”
아들 잃은 시숙, 선처 요구하고 성금… 美 장로교 감동적인 이야기 영화로
30여년 동안 YWCA의 성장 기반을 마련했던 박에스더 선생(1902∼2001·가운데)은 여성 직업훈련과 지도력 양성에 힘썼다. 김현자(오른쪽 끝) 전 국회의원에게도 늘 따뜻했다.남편이 연세대 부산분교에서 일하는 3년 동안 나는 부산YWCA에서 일했다. 1958년 4월 남편의 제자가 신문을 들고 황급히 사택으로 찾아왔다. 남편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신문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정치학 공부를 하던 조카 오인호가 흑인 청소년들에게 피살됐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인호는 남편의 큰 조카로 오기병 장로의 장남이었다. 시댁은 기독교 내력이 깊었다. 시아버지 오현경은 중국 훈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기독교 교우단 ‘훈춘한민회’ 재무부장을 지냈다. 가족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미국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의 나라가 아니었던가.’ 아주버님은 영도교회 장로였다. 고민하던 시숙이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예배 후 그가 입을 뗐다.
“며칠 동안 기도하며 ‘흑인 아이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생각했어요. 아이들은 인호에게 원한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이들을 용서하기로 결심했소. 미국 당국에 가해자들을 최대한 관대하게 처분해달라고 하겠소. 그 아이들을 교회가 돌볼 수 있도록 우리 가족이 성금을 보냅시다.”
가족들은 동의했다. 남편은 이 결정에 따라 미국 필라델피아시장 등 관계자에게 편지를 썼다. ‘하나님이 우리의 슬픔을 기독교적으로 승화시킬 것이라 믿습니다.…소년들을 선처해주시기 바랍니다.…석방 후 소년들을 선도하는데 쓰이도록 소정의 성금을 보냅니다.’ 언론은 ‘원수를 사랑하는 가정’이라며 뜨거운 반응을 보였고 미국 장로교는 이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했다. 이런 용서와 사랑은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일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전쟁 후 복구가 시급했지만 집권당인 자유당은 권력을 잡는 데만 혈안이 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진행했고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를 ‘부정’이 난무하게 만들었다. 문맹자나 연로한 사람에겐 아예 투표용지를 주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에게도 용지가 나오지 않았다. 투표장에서는 무효표를 만들어내고, 개표 집계를 조작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났다. 이어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 가족이 권총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장남이 부모를 먼저 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부통령 당선자의 부인 박마리아 선생은 나를 처음 YWCA로 이끌어준 분이었다. 당시 YWCA 회장이자 이화여대 부총장이기도 했다. 4·19혁명으로 이 대통령이 하야했지만 혼란은 계속됐고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우리 부부는 그 사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나는 이화여대 YWCA 지도간사로 부임했다. 임명장은 대학으로부터 받고, 급여는 YWCA가 지급하는 형태였다. 내 사무실은 대강당 입구에 있었다. 박에스더 선생은 교수들을 불러 조촐한 환영행사를 열어주었다. 나는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일주일에 3∼4시간 교양영어를 가르쳤다. 당시 이대 YWCA는 회원이 1000명에 가까웠다.
***[역경의 열매] 김현자 <10> 세계YWCA 실행위원 당선… ‘자고 나니 유명’
‘세계기구 진출’ 당시 큰 뉴스 거리… 노동·인권 등 관련회의에 적극 참여
YWCA 실행위원으로서 가족법 개정을 촉구하는 강연회에 참석한 김현자 전 국회의원(왼쪽에서 네 번째)이 1973년 사회자의 발언을 듣고 있다.이대 YWCA 학생들은 전담 간사의 부임을 기뻐했고 수시로 내 사무실을 방문했다. 당시 YWCA 회장은 수학을 전공하는 장상(77·전 이대 총장)이었다. 그의 너털웃음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명랑하게 만들었다. 장상은 깊은 신앙과 폭넓은 사고력을 갖추고 있었다. 장상은 수업만 끝나면 내방에 왔다. “네 전공이 수학이냐, YWCA냐?” 수학과 교수들이 장상에게 그렇게 물을 정도였다. 졸업을 앞두고 장상이 나를 찾아왔다. “전 수학과를 졸업한 뒤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요.” 나는 적극 찬성했다. 장상은 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나중에 이대 총장이 됐다.
전쟁 후 전쟁고아와 미망인 구호사업에 주력하던 YWCA는 1960년대 이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교양강좌, 사회문제 연구모임을 발전시켜 나갔다. 나는 이 무렵 YWCA 유급 직원에서 자원봉사자가 됐다. “내가 학교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엄마가 집에 있었으면 좋겠어.” 친정 어머니가 세 자녀 준호, 강호, 혜련을 돌봐주셨지만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다. 건강도 썩 좋지 않았다.
“더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박에스더 선생은 나의 요청을 받아주었다. 실제 나는 자원봉사자로 YWCA 일을 계속했고, 71년에는 가나에서 열린 세계 YWCA 대회에서 세계 YWCA 실행위원으로 당선됐다. 실행위원은 20명이었다. 귀국해보니 유명인사가 돼 있었다. “청와대 육영수 여사가 축하한다고 전화를 했어. 네가 대단한 사람이 된 거냐?” 어머니의 얘기였다. YWCA에서도 축하 행사를 열었다. 누군가 세계기구의 위원이 된다는 게 큰 뉴스거리였다.
그땐 내국인의 해외 진출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70년대 김포공항은 지금 국내 여객기 청사의 4분의 1 크기도 되지 않았다. 2층 옥상에는 송영을 위한 전망대가 따로 있었다. 가족들은 그 전망대에 서서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손을 흔들며 환송했다.
실행위원이던 내가 회의와 행사 참석차 외국으로 떠나고 돌아올 때면 박 선생이 다른 직원들과 비행장에 나와 꼭 환송해주었다. 박 선생은 가슴에 코사지(꽃송이)를 달아주고 “잘 다녀오라”고 말하며 포옹해주었다. 남편도 그 자리에 늘 있었다. 떠나는 사람은 환송객이 손을 흔드는 가운데 천천히 걸어 비행기로 걸어갔고, 탑승 직전 되돌아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얼마나 훈훈한 광경인가. 거대한 지금의 인천공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세계 YWCA는 군축, 평화, 교육, 보건, 난민, 노동, 인권 등 유엔이 다루는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뤘다. 나는 실행위원 회의에 활발하게 참여했지만 한 가지 주제는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어려웠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였다. “사업주들이 외국인 노동자의 불법체류 등 신분적 약점을 악용해 인권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상황에 대해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독일에서 일하는 한국인 간호사와 광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유린 문제도 심각하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라고 하셨다. 주를 대하듯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을 대한다면 나중에 주님이 크게 칭찬하실 텐데….
***[역경의 열매] 김현자 <11> “에스더처럼 나라 구하자” 정치참여 제안 수락
하나님이 우리편 돼 주실 것을 믿고 11대 의원으로 여성계 숙원에 관심
1981년 여성계 대표로 11대 국회에 진출한 김현자 전 국회의원(가운데)이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을 하고 있다.YWCA 실행위원회 회의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1978년쯤이다. 영국 런던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를 탔다. “잠시 후 이 비행기는 모스크바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러시아(당시 소련)를 경유하는 비행기였던 것이다.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반공(反共)이 국시였다. 그땐 공산국가를 여행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관계자가 기내에서 승객의 여권을 모두 회수했다.
‘러시아 당국이 나를 적성국 국민으로 분류하고 억류하면 어떡하지?’ 공항 대기장에 들어갔다. 다리가 오들오들 떨렸다. 다행히 40여분 만에 탑승안내 방송이 나왔고, 나는 별일 없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박순양 총무에게 소련을 경유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YWCA 실행위원으로 일하는 8년 동안 나는 전 세계를 다니며 여성 문제를 포함한 전 세계적 이슈에 대해 공부했다.
국내 정세는 위태로웠다. 박정희 대통령이 79년 총탄에 숨지고 이듬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광주에서는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다. 군부는 시민들을 잔혹하게 진압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나는 YWCA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중순 김행자 이대 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당시 신군부의 입법위원이었다. “점심을 함께 합시다. 다른 입법위원도 동석한다”고 했다. 대학 교수들이 주로 입법에 참여하고 있는 줄 알았다. 식당에는 남성 2명이 있었다. “어느 대학에서 오셨어요?”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김 교수가 당황하며 “이분들은 군인 출신”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쿠데타를 주도한 신군부의 요인 권정달과 이종찬씨였다.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새 정당의 발기인으로 참여해주십시오.”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광주 시민들을 무참히 짓밟고 권력을 장악한 군인들과 함께 한다고? 말도 안 된다.’ 참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김 선생이 여성계를 대표할 적임자로 선정됐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수락하기 곤란합니다. 정치를 해본 적도 없고, 제 성격에 맞지도 않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YWCA가 여성의 정치참여를 얼마나 외쳐왔던가.’ 바로 이틀 전에도 한국여성단체협회가 ‘정책 결의 기구에 여성을 참여시켜 달라’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하지 않았던가. 며칠 뒤 김정례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장이 우리 집을 직접 찾아왔다. 나와 같은 신앙인으로 평소 매우 절친하던 이였다.
“김 선생, 우리 새 정당에 가서 함께 일해 봅시다. 구약의 에스더처럼 나라를 구합시다.” 내 손을 꼭 쥔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제안을 수락했다. 하나님은 민족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고 한 에스더의 편이 돼 준 것처럼, 우리 편이 돼 주실 걸 믿기로 했다.
하지만 그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가 정치를 할 수 있을까. 친구들이 실망하진 않을까?’ 나는 모선을 떠나 망망대해로 나간 조각배가 된 기분이었다. 81년 민정당 전국구 후보 21번을 받았고, 김 회장과 함께 11대 국회의원이 됐다. 나는 가족법 개정 등 여성계에서 숙원하는 사안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역경의 열매] 김현자 <12> 8명뿐인 여성의원, 가족법 개정 위해 매일 머리 맞대
동성동본 불혼·호주제 철폐 노력 무위로… 존경하던 이태영 박사 질타에 상처받기도
이태영 박사와 김현자(오른쪽) 전 국회의원이 1986년 여성잡지 ‘여원’ 주관으로 가족법 개정에 대해 대담하고 있다.초선의원이던 나는 1981년 한 여성잡지에 ‘동성동본 불혼제도’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가족법 개정의 필요성을 담은 글을 기고했다. 얼마 뒤 당 대표가 나를 호출했다. “요새 가족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여기저기 강연을 하고 다닌다지요?” 나는 강연이 아니라 글을 썼다고 대답했다. “당내에서는 사견을 함부로 말해선 안 됩니다. 당은 가족법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것이니 김 의원도 그러지 마세요.”
나는 대신 우리나라의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 가입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우회적인 노력이었다. 협약에는 여성을 차별하는 가족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주는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대하 1:10).” 노신영 외무장관에게 가입을 촉구했고, YWCA 등의 여성단체를 통해 정부에 진정서를 내게 했다. 84년 한국은 91번째 가입국이 됐다.
12대 국회 초기 한국여성개발원법을 발의했다. 일부 남성의원은 “그러면 ‘남성개발원’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나는 “거의 모든 국가기관이 남성 위주의 남성기관 아닌가요”라고 응수했다. 여성의원들은 2년여 만에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여성의원들은 정부에 여성 장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나는 대정부질의를 통해 제2정무장관을 여성으로 임명할 것을 정부에 건의했고, 이는 88년 받아들여졌다. 큰 보람이다.
이태영(1914∼1998) 박사는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가정법률상담소 설립자다. 이 박사를 필두로 모인 60여 여성단체는 1980년대 가족법 개정을 적극 추진했다. 여성계는 동성동본 불혼제는 혼인의 자유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남계 혈족만을 기준으로 하는 성차별이라고 주장했다. 또 남성만을 호주로 규정하는 호주제는 여성을 남성 종속적 존재로 전락시킨다고 역설했다.
11대 국회에는 나를 포함해 여성의원 8명이 있었다. 당은 이 논의 자체를 기피했다. 여성의원들은 당 간부를 개인적으로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반응은 가지가지였다. “개인적으론 찬성하지만 유림과 문중들이 반대해요.” “가족법 개정에 찬성하면 지역구에서 표가 다 떨어져요.” 여성의원들은 매일 내 방에 모여 고민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여성계에서 질타의 목소리가 연일 터져 나왔다. 이태영 박사는 노기 띤 목소리로 전화를 하거나 찾아왔다. “왜 가족법 개정안에 서명 안하는 거유. 당신이 제일 앞장서야지. 이건 여성을 배신하는 거요. 안 되더라도 내보기라도 하라우.” 나는 이 박사에게 12대 국회가 맨 먼저 이 문제를 다룰 것이라고 했지만 “12대 국회의원 공천을 못 받게 될까봐 안 하는구먼”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존경하던 분의 말에 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12대 국회에서 여성의원들은 가족법 개정안에 대해 61명의 찬성 서명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엔 전국 유림들이 들고 일어났다. 3000여명이 국회의사당 앞으로 몰려왔다. 여성의원들은 욕설 담긴 편지와 전화에 시달렸다. 12대에서도 이 법안은 상정되지 못했다. 가족법은 89년에 일부 손질됐고 동성동본 금혼제와 호주제는 2005년에야 폐지됐다. 비록 우리가 결실을 보진 못했지만 초기 여성의원들의 노력이 폐지를 위한 물꼬를 텄다고 믿는다.
***[역경의 열매] 김현자 <13·끝> 여성운동 선두에 섰던 아흔 무렵, 더 감사하고 더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
노년은 하나님께 돌아갈 준비하는 시간… 회혼식 못하고 먼저 떠난 남편 그리워
김현자 전 국회의원이 결혼 50주년을 기념하는 2003년 금혼식에서 남편 오기형 교수(왼쪽)의 팔짱을 끼고 입장하고 있다.30년 만에 실시된 1991년 첫 지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여성계는 기대에 부풀었다. 여성의 정계 진출이 활발해질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여성의 당선 비율은 0.9%에 그쳤다. 선거 이튿날 김정례 전 보건사회부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도 미국처럼 정치연맹 같은 단체를 만들어 여성들의 의회 진출을 도웁시다.”
그렇게 한국여성정치연맹이 탄생했다. 97년엔 내가 총재를 맡기도 했다. 아직도 국회의 여성의원 비율은 20%에 미치지 못한다. 여성들의 의회 진출을 활발하게 하려면 선거구를 대선거구로 만들고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해야 한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이 제도를 통해 여성의 의회 진출 비율을 50% 전후로 끌어올렸다.
돌아보면 2003년은 참 특별한 해였다. 사회활동 면에서 ‘나의 친정’과 같은 YWCA에서 주는 대상을 받았고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주는 제3회 비추미 여성대상도 받았다. 여성지위 향상과 공익 증진에 기여했다는 공로였다. 결혼 50주년을 맞아 금혼식도 했다. 행사 당일 남편은 자녀들이 맞춰준 새 양복에 보타이를 매고 싱글벙글하던 게 눈에 선하다. 행사 마지막 순서엔 3대가 모여 합창을 했다.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손님 중 한 분은 내게 “회혼식 때도 불러주세요”라고 했다.
하지만 회혼식은 할 수 없었다. 남편이 2008년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반세기 이상을 함께 살았어도 먼저 떠나간 그가 왜 이렇게 그리울까. 우리 부부는 매일 새벽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했고 대화를 나눴다. 남편은 나의 사회생활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줬다. 자녀들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더 크다. 내가 잘 돌봐주지 못했는데도 모두 하나님 안에서 잘 자라줬다.
어릴 때부터 로봇에 관심 많던 장남 준호는 미국 버클리대 유학 후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있다. 차남 강호는 미국 드렉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구조공학 전문가로 일한다. 딸 혜련은 전업주부로 지내다 지난해부터 각당복지재단 이사로 일하고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자녀들은 주일예배를 드린 뒤 우리 집에 모여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다.
이젠 모이기 어렵다. 내가 기력이 너무 떨어졌다. 집 밖으로도 거의 나가지 않는다. 이태 전이다. 1년에 서너 차례 여고 동창회 모임이 있었다. 20명 정도가 모이는 자리였다. 나보다 2년 선배도 한 분 계셨다. 오랜만에 만날 반가운 얼굴을 떠올리며 약간 들뜬 기분으로 가는 모임이었다. 그날도 그렇게 택시에 올랐다. 그런데 그날은 늘 다니던 식당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스무 번도 넘게 드나들었던 식당인데….’ 절망감을 안고 귀가했다. 늙는다는 건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노년이란 하나님께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신 33:27)
곧 울긋불긋한 잎사귀들이 우수수 떨어질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우리 모두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자기 전에 항상 이렇게 기도한다. ‘주여, 오늘 내게 이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이 땅에 있는 동안 모든 것을 더 깊이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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