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대학 출신 작가 작품>
손녀와의 약속
박기옥
# 손녀와의 약속
글줄이 도통 잡히지 않는다. 절필 수준에 이르렀다. 글감도 제대로 낚아채지 못한다. 한 단락은커녕 한 문장도 써 내려갈 자신이 없다. 코로나 관련 글을 써보려했으나 여러 사람이 다뤘기에 내키지 않았다.
'한 달에 한 편은 꼭 쓰자.'는 연초에 다짐은 허공에 사라졌다. 스스로 한 약속을 허물었다. 남을 향한 회초리는 매운데 나에게는 순해지니 고약한 일이다. 어떡하면 글쓰기에 심리적 부담을 가질 수 있을까. 얼른 떠오른 것이 초등학교 시절 숙제였다. 선생님께 신용을 얻으려면 밤샘을 해서라도 숙제를 하지 않았던가. 우둔한 머리를 굴렸다. '옳지'. 중학생인 손녀에게 숙제를 내달라 해야지. 할배 체면을 구기지 않으려면 약속은 지켜야 할 터.
"얘야, 할배에게 숙제 하나 내주면 안 되겠니? 제목은 네 맘대로다." 배수진을 친 속 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히히 웃는다.
"그럼 좋아요. 두 가지 제목을 숙제로 내겠심더."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 '끼니' '거울' 둘 중, 할배 맘에 드는 것 고르세요." '끼니', 배고팠던 시절이 떠올랐다. 글감은 많겠지만, 이런 부류의 글은 너무 우려먹어 진부할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나름 사유를 캐낼 수 있을 것 같아 '거울'로 결정했다.
제목 '거울'
요즘은 거울 앞에 서기가 더럭 겁이 난다. 최근 거울 속에 나타난 나의 모습이다. 머리에 자북 앉은 서리는 눈썹까지 내려왔다. 주름의 골은 깊어지고, 눈까풀은 처져 가뜩이나 작은 눈을 단춧구멍처럼 만들었다. 눈 아래 비곗덩이는 볼록렌즈처럼 불거지고, 입언저리엔 팔자 주름이 깊이 팼다. 아담애플이 목줄기 아래위로 움직일 때마다 탄력 잃은 피부는 원점 회귀를 포기한 듯 구심력을 잃었다.
거울은 우리 생활에 떼 놓을 수 없는 소품이다. 현관·안방·거실·차 안에도 분신처럼 따라붙는다. 우리나라 거울 역사는 고조선 때였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내가 처음 마주한 거울은 초등학교 입학 전·후이다. 그때의 거울은 유리 조각 뒷면에 은박 물질을 칠했다. 그것을 본받아 깨어진 교실 유리창을 주워 담뱃갑 은종이를 붙이곤 했다. 어렵사리 구한 거울을 벽면에 붙이고 창호지로 몇 겹씩 발랐다. 거울을 깨뜨리면 재수가 없다는 말에 따라 조심스레 다뤘다.
아버지께서 거울 앞에 서신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날마다 머리를 감고 비녀를 꽂았지만, 거울 앞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길쌈과 바쁜 농사일을 차치하고라도 누나들의 성화에 거울을 차지하지 못했을 터다. 아침이면 위로 세 누나는 거울 쟁탈전을 벌였다. 둘째 누나는 허리까지 칠렁이는 댕기머리를 땋으며 거울과 더불어 살다시피 했다. 나도 사춘기에 들어서며 거울 앞에 서는 횟수가 잦았다. 또래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고자 누나들이 사용하는 구라분을 몰래 바르다 혼난 일이 한두 번이 아녔다.
거울이 세상에 나오기 전, 자신의 모습은 물에 비춰 보았다고 했다. 선인들은 물속에 나타난 물체에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 '사자와 토끼'란 이야기가 그 예다. 사자의 저녁 끼니로 예약된 토끼가 거울의 원리를 이용하여 위기에서 벗어난 우화이다.
‘ "사자님, 사자님보다 더 무서운 동물이 나타났어요. 그놈이 동물의 왕이 된대요.“
"뭐라? 나보다 더 강한 놈은 세상에 있을 수 없어." 토끼가 사자를 유인한 곳이 깊은 우물이었다. 우물 속에는 털을 세운 놈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눈알을 부라리며 사자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성 난 사자는 놈을 제압코자 우물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선인先人들은 거울 속에 비췬 사물에 혼비백산魂飛魄散했으리라.
몇 해 전, 유네스코에 등재된 청정지역인 티베트 구체구를 관광했다. 육천 미터 가까운 설보정 설산의 눈 녹은 물이 내려 호를 이룬 쪽빛 호수는 거울처럼 맑았다. 호수는 주위에 둘러친 단풍과 파란 하늘을 오롯이 품에 안았다. 한 점 티끌도 허용치 않았다. 조물주가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만들기 전, 태고의 모습이 이처럼 청정하지 않았을까. 명경지수는 바람에 가늘게 출렁이고, 덩달아 호 속엔 어설픈 나그네가 날일日 가로曰로 일렁인다. 나란 존재가 그렇게 맑아 보일 수가 없었다. 이처럼 영과 육이 때 묻지 않았으면 더없이 좋으련만,
사회는 혼탁해졌지만 모든 것이 맑아졌다. 눈 감고 아옹 하는 세상은 지나갔다. 작은 거래에도 변칙을 징계한다. 컨트롤타워의 감시망은 일거수일투족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첨단 의술은 몸속에 장기들을 거울처럼 들여다본다. 로봇의 예리한 눈은 환부를 귀신같이 집어내고, 갈아 끼우기가 예사다. 나의 내면을 송곳처럼 투시한다면 어떤 형상일까. 단언컨대, 마음 밭에는 탐욕의 덩어리가 얽히고 설켰을 것임은 자명하다.
손녀가 던진 숙제 제목이 왜 거울인지, '거울을 갖다 대고 내면을 살펴보라'는 준열한 메시지가 담겨 있지나 않을지 곱씹어 봐야 할 일이다.
(《수필문예》 제19집, 2020. 수필문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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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프로필
《수필과 비평》 등단
영남수필문학회, 대구수필가협회, 대구수필가 비평작가회의 회원
수필문예회, 경산문협 회장 역임
제1회 갓바위스초리텔링 최우수상 수상. 제2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최우수상 수상.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4회 수상. 경북문협 작가상 수상.
수필집 《고쳐 지은 제비집》 《소금세례》 논픽션 소설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
pko30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