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톨스토이
어느 날 한 저택에서 몇몇 사람들이 모여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이야기를 하는데, 아쉽게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행복하다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았다고 자랑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분주하게 살았다고 했으며 이웃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음을 고백했다.
그들의 고백은 한결같았다. 죄 가운데 비그리스도인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살아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살고 있는 거죠?” 한 청년이 외치듯 말했다.
“왜 스스로 부정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힘이 없는 건가요? 사치와 연약함, 물질적인 풍요, 또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 짓는 교만함 때문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명예와 부를 추구하면서 기뻐하는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도시로 몰려들어 수많은 쾌락거리에도 불구하고 권태롭고 우울하며, 자책하다가 후회하며 죽어갑니다.”
“왜 그렇게 살아갈까요? 스스로 삶과 하나님이 주신 선(善)한 것들을 망쳐 가면서 살고있습니다. 더 이상 지금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하던 공부도 그만둘 것입니다. 지금처럼 불평하며 똑같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갈 뿐이니까요, 지금 제가 가진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시골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노동을 배울 것입니다. 제가 배운 지식이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제도나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족처럼 함께 살아가면서 나눌 것입니다.”
“네, 저는 결심했습니다.”
청년은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던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습니다.
“그럼, 그러한 도전은 가치 있는 일이긴 하지.” 청년의 아버지가 말을 이어갔다.
“경솔하고 무분별한 것이기도 하구나. 네가 인생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란다. 선(善)으로 보이는 것은 세상에 참 많단다.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이미 다져진 길을 잘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지. 새로운 길은 선각자들만이 만들어 갈 수 있단다. 네게 인생의 새로운 길이 쉽게 보이는 것은, 아직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것은 경솔함과 젊은 혈기에서 나온 것인 줄 안다. 너의 충동적 행동을 절제시키고 잘 지도할 필요가 있는 것 같구나. 노인들의 지혜를 얻으려면 청년들은 노인을 잘 따라야 하겠지. 네 앞에는 창창한 앞날이 놓여 있단다. 한창 자라고 발전해 가는 중이지. 학업을 마치고 세상 물정을 익히도록 해라. 네 두 발로 우뚝 서서 견고한 확신을 가져라. 그런 다음 네 스스로 새로운 길을 갈 만큼 힘이 있다고 생각될 때 그때 출발해라. 그러나 지금은 스승들에게 순종하고 새로운 길을 나설 생각을 하지마라.”
청년은 조용해졌고 나이 든 사람들이 아버지 말에 동의했다.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한 중년 남자가 청년의 아버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청년들이 경험이 부족하고, 인생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때 실수를 반복하며, 결심한 것들이 확고하지 못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양심에 반하고,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고 공감하고, 이러한 삶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습니다. 저 청년의 경우는 자칫 현실적이지 못하여 실패할 수 있겠지만, 이제 청춘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제가, 오늘 저녁 저 청년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제 삶은 행복하지 않고 전혀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경험이나 이성, 어느 것도 다를 바 없어요. 더 이상 무엇을 바라고 살아야 할까요. 아침부터 밤까지 가족을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지만 그 결과는 더욱 타락한 삶을 살아가고 점점 더 죄악 가운데 빠져 가는 삶을 보여줄 뿐입니다. 기족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가족의 삶은 달라지는 게 없어요. 가족을 위해 올바른 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오늘 청년이 제안한 것처럼 제 삶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고 늘 마음속에 생각해 온 이유입니다. 말하자면 아내와 아이들로 인한 끊임없는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제 영혼이 원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제야 저는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며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라는 말씀의 뜻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가 말을 채 끝내기 전에 그의 아내와 그 자리에 있던 여자들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좀 더 일찍 그런 생각을 하시지.” 나이가 지극한 여자가 말했다.
“당신에겐 인생의 멍에라는 게 있어요. 사람들은 가족을 부양하는 일이 힘들게 느껴질 때 당신처럼 일을 그만두고 영혼을 구원하고 싶다고 말하지요. 그것은 잘못되고 비겁한 행동이에요. 그럼요! 결혼한 남자는 가족을 이끌고 경건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어야 해요. 물론 당신 자신의 영혼만 구원하는 것이 훨씬 쉽겠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하셨어요. 그러나 당신의 태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꼴이에요. 그래선 안돼요. 결혼한 남자는 자신이 짊어진 절대적 의무를 피하려고 해선 안돼요. 가족들이 자라서 각자 살아갈 정도로 자립한 다음이라면 다르겠지만. 그렇더라도 강요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나 앞에 말했던 그 남자는 동의하지 않았다.
“가족을 포기하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아이들이 세상적인 방식으로 양육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방금 우리들이 나눈 것 처럼 나만의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는 방식 말입니다. 일찍부터 배고픔과 노동, 그리고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에 익숙하게 자라고, 사람들과 형제자매가 되어 살아가도록 양육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가진 부와 다른 이들과의 차별적 지위를 누리는 것들을 버려야 하는 겁니다.”
“자신이 경건한 삶을 살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어요.” 그의 아내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젊었을 때 하고 싶은 것들을 실컷 누리고 즐겼으면서 이제 와서 아이들과 가족에게 고통을 주려는 거죠? 아이들이 편안하게 자라도록 놔 놔두세요. 당신이 억지로 요구하지 않아도 훗날 아이들이 알아서 원하는 삶을 찾아가도록 말이에요!”
남편은 입을 다물었고, 나이가 지긋한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결혼한 남자가 가족을 위해 제공해 오던 것을 갑자기 박탈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입시다. 자녀들을 교육시키려면 모든 것을 중단하기보다 그것을 끝내는 것이 더 나은 게 사실입니다. 아이들이 성장한 후에는 자신들에게 최상이라고 생각되는 길을 선택할 테니까요. 가장인 남자에겐 죄를 짓지 않고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노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저는 지금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날마다 배를 채우기 위해 먹고 마시고 또 쉼을 누리는 삶의 반복이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제 제 자신이 역겹고 혐오스럽기까지 합니다. 이제 그런 삶을 버리고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 얼마 안 남은 삶이지만 죽는 그날까지 하나님이 명하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노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노인의 조카딸이자 대모(代母)가 자리에 있었는데, 노인은 그녀와 그 자녀 모두에게 후원자로서 특별한 날이 되면 선물을 주곤 했다. 노인의 아들 역시 그 자리에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노인의 생각에 반대했다.
“안됩니다.” 그의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는 평생 열심히 일해 오셨고 이제 편히 쉬셔야 할 때입니다. 지난 육십 년간 나름대로 삶의 습관을 지켜 오셨는데 지금 그것들을 바꾸려 해서는 안 됩니다. 쓸데없이 스스로 힘들게 만들 필요 없습니다.”
“맞아요.” 그의 조카가 거들었다.
“숙부님은 환경이 바뀌면 더 불편해질 뿐 아니라 건강이 안 좋아지실 겁니다. 불평이 늘어나고, 그러다 보면 전보다 더 죄를 짓게 될 수 있지요.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모든 죄인을 용서하시는 분이세요. 숙부님처럼 친절한 노인은 말할 것도 없지요.!”
“아무렴, 그런데 왜 하필 당신이 그래야 하는거요?” 같은 연배의 노인이 말을 거들었다.
“당신과 나는 이제 얼마 못 살 텐데, 왜 굳이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단 말이오?”
“참 알 수 없는 일이네요!” 여태껏 조용히 있던 한 손님이 소리쳤다.
“참 묘한 상황이군요! 지금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처럼 삶을 사는 것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속물적인 악한 삶으로 인해 영혼과 육체가 고통당하고 있음을 하소연 했구요. 그런데 정작 현실적으로 실행에 옮겨야 할 상황이 되자 자녀를 혼란하게 해서는 안 되고, 경건한 풍속에서 양육되어서도 안 되고, 과거의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바뀌어 버리네요. 결혼한 남자는 그의 부인과 자녀를 힘들게 하면 안 되고, 경건한 방식이 아니라 과거의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노인이 되어서는 아무것도 새로 시작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군요. 그들은 새로운 것에 익숙해져 있지 않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국 우리 중 누구도 올바르게 살아갈 가능성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저 말만 늘어 놓을뿐 ...... “
출처 : 톨스토이 단편집 빛이 있을 때 빛 가운데로 걸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