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강의(經史講義) 12 ○ 논어(論語) 5 병오년(1786)에 정만석(鄭晩錫), 송상렴(宋祥濂), 장석윤(張錫胤) 등의 대답을 뽑고, 정미년(1787)에 윤영희(尹永僖), 윤광안(尹光顔), 이희관(李羲觀), 신서(申潊) 등의 대답을 뽑았다
[ 선진(先進)
덕행(德行) 구절에 나열한 십철(十哲)에 대해, 정자(程子)는 “진(陳) 나라와 채(蔡) 나라에서 부자를 따랐던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기(傳紀)를 상고해 보건대, 염유(冉有)는 애공(哀公) 3년에 계강자(季康子)의 부름을 받았고 애공 11년에도 계씨(季氏)를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청(淸) 땅에서 싸웠는데, 진 나라와 채 나라에서 어려움을 당한 일이 애공 6년에 있었다면 바로 염유가 노(魯) 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에 해당되니, 필시 부자를 따라 진 나라와 채 나라에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들이 혹 “이 구절은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장(章)이 되어야 한다. 단지 문하에 온 여러 사람들을 범범하게 논한 말일 뿐이지 이 열 사람이 모두 진 나라와 채 나라에까지 부자를 따라다녔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학설이 과연 맞는 말인가?
[정만석이 대답하였다.]
참으로 이 학설을 범범하게 논한 말이라고 한다면, 자고(子羔)의 효성(孝誠)과 공서적(公西赤)의 재능(才能)과 자천(子賤)의 정치(政治)와 증자(曾子)의 적전(適傳)으로서도 아울러 참여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의심스러운 일이 되니, 아마도 정자의 학설을 정설로 삼아야 할 듯합니다. 염유가 노 나라에서 벼슬살이한 연월은 기록한 자가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여기, “남용(南容)이 백규(白圭)를 하루에 세 번씩 거듭 읽으니 공자가 그 형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고 하였다. 여기에 근거하면 부자가 남용에게서 취한 것은 근언(謹言)에 있다. 공야장(公冶長)에는 “공자가 남용을 두고 이르기를,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버려지지 않을 것이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형벌을 면할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형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근거하면 부자가 남용에게서 취한 것은 근행(謹行)에 있다. 하나의 일인데 기록이 각기 다른 것은 어째서인가?
[정만석이 대답하였다.]
언(言)과 행(行) 두 가지는 서로 안팎이 되니, 참으로 언(言)을 잘 삼가면 반드시 행(行)에도 삼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집주》에 굳이 공야장의 글을 끌어다가 풀이를 한 것입니다. 여기서 물샐틈없이 치밀한 주자 말씀의 절묘함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장이 물은 선인(善人)과 맹자가 말한 선인(善人)이 같은가, 다른가? 맹자에 근거하면 선인 위에 다시 ‘선(善)을 자기 몸에 소유함을 신(信)이라고 한다[有諸己之謂信]’라는 것이 있는데, 이 장의 《집주》에는 장자(張子)의 말을 실어서 “비록 성인이 이루어 놓은 법을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또한 악에 빠지지는 않고 선을 몸에 잘 간직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장의 선인은 곧 맹자가 이른바 신인(信人)이고 ‘하고자 할 만한 것을 선(善)이라고 한다[可欲之謂善]’라는 것에 견주어 볼 때에 다시 한 등급을 더 나간 것인가? 주자는 《맹자집주》에서 유저기(有諸己)의 뜻을 풀이하기를, ‘악취(惡臭)를 싫어하듯이 호색(好色)을 좋아하듯이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대학》의 자겸(自慊)의 공부이고 물격지지(物格知至)의 뒤에 있는 것이니, 어찌 바탕은 아름답지만 학문은 하지 않은 사람에게 견주어 의논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장자(張子)의 말이 이러하다. 어째서인가?
[송상렴이 대답하였다.]
장자가 이른바 ‘유저기(有諸己)’라는 것은 단지 그 타고난 바탕의 아름다움을 말한 것일 뿐이니 맹자가 논한 신인(信人)과는 높낮이가 아주 다른데, 선유 진력(陳櫟)은 이에 맹자를 인용하여 장자(張子)의 말을 풀이하였으니, 잘못된 것입니다. 대개 이 장에 이른바 선인이란 말은 오로지 타고난 바탕을 가지고 말한 것이고, 《맹자》에 논한 바의 여섯 등급의 사람은 모두 학력(學力)의 높낮이를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같지 아니한 까닭입니다.
위는 선진편(先進篇)이다.
[先進]
德行節所列十哲。程子以爲從夫子於陳蔡之人。然攷之傳紀。冉有於哀公三年爲季康子所召。至哀公十一年。尙爲季氏帥師戰淸。而陳蔡之難。乃在哀公六年。則正當冉有仕魯之時。必無從夫子在陳蔡之理。故說者或謂此節。當別爲一章。秖是泛論及門諸子之辭。非謂此十人皆從於陳蔡也。此說果得之耶。
晩錫對。苟以此節爲泛論之辭。則子羔之孝。公西
赤之才。子賤之政。曾子之適傳而竝不得與者。洵屬可疑。恐當以程子之說爲正。至若冉有仕魯之年月。則安知非記者之有誤乎。
此云南容三復白圭。孔子以其兄之子妻之。據此則夫子之有取於南容。在於謹言也。公冶長篇云子謂南容。邦有道不廢。邦無道免於刑戮。以其兄之子妻之。據此則夫子之有取於南容。在於謹行也。一事而所記各異者何也。
晩錫對。言行二者。相爲表裏。苟能謹於言則可知其必謹於行。故此章集註。必引公冶長篇文而釋
之。此可見朱子盛水不漏之妙矣。
子張所問之善人。與孟子所言之善人。同歟異歟。據孟子則善人之上。復有有諸己之謂信。而此章集註載張子之說曰。雖不踐成法。亦不蹈於惡。有諸己也。然則此章之善人。卽孟子所謂信人。而視可欲之謂善。更進一等歟。朱子於孟子集註。釋有諸己之義曰。如惡惡臭如好好色。此乃大學自慊之工。而在物格知至之後。豈可擬議於質美未學之人。而張子之言如是者何也。
祥濂對。張子所謂有諸己。只言其生質之美而已。
與孟子之論信人。高下顯殊。而先儒陳櫟乃引孟子以解張子之言誤矣。蓋此章所謂善人。專以生質言。孟子所論六等人。皆以學力高下言。此其所以不同也。以上先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