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을 맞추다 / 심묘락 4.
1. 넓은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는 이곳은 나의 옛 직장이다. 봄이 되면 개나리, 진달래, 목련, 매화, 철쭉 등 온갖 봄꽃들이 앞다투어 핀다. 남문으로 들어서면 작은 구름다리가 있다. 구름다리 중간쯤에 서면 눈높이에서 활짝 핀 목련 꽃송이들과 마주하게 된다. 오래된 나무다. 보통은 나무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게 마련이지만, 이곳에서는 다리 높이 덕분에 목련과 눈을 맞출 수 있다. 마치 꽃구름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생생한 느낌을 준다.
2. 이른 봄, 목련이 만개할 때 구름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병원을 찾는 환자에게는 잠시나마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위로를, 관광객들에게는 잊지 못할 봄의 기억을 선사하는 특별한 장면이 된다. 붉은 벽돌의 근대건축물인 선교사 주택과 교회의 높은 첨탑이 하얀 목련과 어우러지는 모습은 단정하고도 고요하다.
3. 그래서인지 해마다 봄이면 사진작가들과 시민들이 즐겨 찾는 출사지가 된다. 또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목련이 필 때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질 때의 추함이 글의 소재로 자주 쓰이기도 한다. 수필가인 신경외과 Y교수님의 글에도 구름다리 위의 목련 이야기가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나에게도 오래 마음에 남아 있는 출사지이며, 글의 소재가 될만한 곳이다.
4. 내가 사진에 관한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입사 후 3년쯤 되었을 때였다.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던 직장상사의 권유로 직장 내에서 활동하는 사진동우회에 가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여러 부서의 직원들이 모여서 사진을 촬영하고, 함께 공부하고 의견을 나누며 친목을 도모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한 달 월급을 투자해 카메라도 장만했다. 한 달에 한 번씩 풍경 좋은 곳으로 출사를 나갔고, 출사 후에는 작품평가회도 열렸다. 나는 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꾸준히 참여하며 배우려고 노력했다. 근무 일정이 겹쳐 참석하지 못할 때면 아쉬움이 컸다, 배우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5. 사진은 빛의 예술이라 하지 않던가. 쉬는 날이면 새벽도 마다하지 않고 일찍 일어나 출사를 나섰다. 해 질 무렵도 좋았다. 빛을 따라 움직이겠다고 마음도 먹었지만, 마음만으로 부족한 예술적 감성이 갑자기 자라나는 것은 아니었다.
6.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로 예술성을 논할 수는 없다. 사진이 실제 존재했던 순간을 담아내는 예술이기에, 그 순간이 예기치 않게 우리의 마음을 파고드는 정서적 울림을 지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지 날리는 골목길의 탁한 공기, 우연히 스쳐 간 어떤 낯선 사람의 시선, 정처 없이 흔들리는 바람과 빛의 떨림, 예기치 못한 그림자의 각도, 한순간 살아있는 긴장감까지 담아낼 수 있는 감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감각을 지니지 못한 채, 제대로 배울 기회조차 충분히 얻지 못했다. 차츰 열정이 식어갔고, 늘 주변만 맴돌게 되었다.
7. 사진은 이미지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설득하는 작업인 동시에,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와 철학도 담아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야 하며, 실패와 상처의 아픈 기억까지도 작품 속에 녹여 내고 승화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스스로 예술가로서의 역량이 부족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를 완전히 드러내는 일이 더욱 부끄러웠다. 그것이 오랫동안 사진작가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중심에 서지 못하고 주변에 머물러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8. 이미지로 표현하는 일과 글로 표현하는 일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글쓰기 공부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글쓰기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은 Y교수님의 권유였다. 신경외과 집중치료실, 삶과 죽음이 서로의 숨결을 느끼듯 맞닿아 있는 그곳에서 나는 오래도록 마음이 마른 채 숨이 가빠져 있었다. 그때 Y교수님은 조용히 말해주었다. 글은, 상처 입은 마음이 스스로를 어루만지는 또 하나의 손길이 될 수 있다고.
9. 미루고 미루던 글공부를 퇴직 후에야 시작하게 되었다. 글공부를 시작한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수필은 결국 나를 향해 걸어가는 길이다. 글로 지나간 기억도 불러오고, 스쳐 간 시간과 만나 그때 다 하지 못했던 기억들에 말을 건네고, 아팠던 상처들과 마주 앉아 조용히 손을 잡고 치유해 나아가는 작업이다.
10. 나에게도 이런 기억들이 없을 리 없지만, 나는 그것들을 제대로 불러내지 못했다. 아직 나를 찾아 떠나는 순례길을 나서지 못한 채,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동안의 삶이 너무 평탄하여 기억이 희미해졌거나, 한편으로는 여유 없이 살아오느라 돌아볼 틈이 없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나의 부족함을 알기에 나를 완전히 드러내어 고백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글공부한다고 수필작가들 사이에서 몇 년을 머물렀지만, 여전히 중심에 서지 못하고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11. 사진에서도, 수필에서도 늘 주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붙잡지 못한 장면들처럼, 미처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처럼 그렇게 지나갔다.
12. 얼마 전, 사진 촬영을 위한 여행을 다녀왔다. 사진 공모전을 위한 촬영대회에도 참가했다. ‘사진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도 들었다. 잊고 있던 감각들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13. 이제 마음속 불씨를 다시 살려 보려 한다. 기뻤던 일, 견디기 힘들었던 기억, 간직해 두었던 비밀 같은 마음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자. 그리고 그것들을 글로 써 내려가 보자.
14. 문득 그 구름다리가 떠오른다.
눈높이에서 목련과 마주 서 있던 그 자리. 아직 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피었다가 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사이 어느 순간에, 나는 다시 그 다리 위에 서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머물러 볼 생각이다.
첫댓글 또 하나의 일 앞에 서, 전공과는 다르게 오랫동안 주변으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마음을 봄꽃보는 자세로 글을 만드셨네요. 기본 수상의 경험도 많으신데 겸손의 글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런 똑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중심에 서는 일은 만분의 일에 불과한 일인데 굳이 중심에 서야할까요? 그저 차곡차곡 걸어갈 뿐입니다. 글쓰면서 얻는 나의 기쁨과 깨달음을 사랑할 뿐이구요.
나아가기로 하셨기에 다져질 것입니다. 응원합니다.
사진도 수필도 삶에 대한 태도와 철학이 있어야한다는 말에 공감 120%입니다. 전 글쓰면서 자신의 태도를 많이 고치고 있거든요.
감사합니다.
중심에 서기 보다는 합류한다는 표현이 맞겠지요.
사진이든 글쓰기던 모두 초점이 딱 맞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부끄러울 뿐입니다.
@심묘락 합류... 좋습니다.
사진 취미도 있어시군요.
글쓰기와 함께 발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고뇌하며 열심히 하시려 애쓰는
마음이 애뜻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늘 주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
"이제 마음속 불씨를 다시 살려 보려 한다."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늦게 뛰어든 사람은 주변에 머물기만 하는 사람도 부럽지요.
저를 돌아보게 하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