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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고요한 침묵의 궁
이 도 연
조선의 5대 궁궐 답사를 하고 나니 이제 남은 것은 종묘다. 드디어 오랜 시간 보수를 마치고 문을 연 종묘를 찾아간다.
삼고초려라도 하듯 세 번째 와서야 왕조의 혼이 깃든 종묘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공교롭게 두 번다 화요일에 이곳을 찾은 탓이다. 대부분 박물관이나 궁궐이 월요일 휴관하는 데 반해 이곳은 화요일이 휴관이다.
종묘의 정문이 바라다 보이는 큰 도로 앞 하마비에서 종묘 참배를 시작한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리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신령한 장소임을 알리는 비석의 퇴색된 언어 앞에 한가롭고 평안한 노인이 경계석에 걸터앉아 졸고 있다.
필자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고 고개 숙여 종묘로 향한다.
사람들의 공간과 혼들의 공간을 분리하는 금천교를 건넌다. 말라버린 금천교 바닥 수맥은 멸망한 왕조의 흔적처럼 땅속 깊이 스며들어 건조하다. 바닥의 화강암이 은빛 광선을 산란하여 눈이 부시다.
넓은 공간 여기저기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파란 하늘 에 걸린다. 숲속은 더없이 푸르다. 금천교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면 종묘 제례를 위해 이곳을 찾는 왕들이 마셨다는 어정御井이 보인다.
오백 년 세월 비밀을 봉인하듯 굳게 잠겨있다. 어정의 수심이 8m 정도로 가뭄이 심하게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차고 맑은 물이 넘쳐흘렀다고 한다. 어정의 뚜껑을 열고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이 들어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자신의 엉뚱함을 꾸짖으며 종묘 정문으로 향한다.
종묘 정문 현판은 걸려 있지 않으나 문헌에 따르면 창엽문蒼葉門 이라고 한다. 조선 개국 일등 공신인 정도전이 지었다고 한다. 세세손손 종묘와 사직이 번성하여 푸르러 숲을 이루라는 뜻이다.속설에 의하면 창엽문의 한자 획수가 모두 27획이다. 조선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국운이 다하여 멈춘 왕조의 수가 또 한 27대에서 끝났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조선을 개국하며 정도전은 조선의 국운을 이미 예언한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아마도 우연의 일치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창엽문蒼葉門 형태가 일반 궁궐 문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일반 궁궐의 문이 폐쇄형인 것에 비해 종묘의 문은 상부가 홍살문 형태인 살창으로 되어있다. 왕들의 혼령이 자유롭게 드나들라는 배려란다. 그냥 지나칠법한 것임에도 세심하게 만든 유가 사상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종묘 정문에서부터 유가 정신의 깊은 의미를 발견한다. 문지방을 넘자, 또 다른 갈등에 발걸음을 옮기기가 벅차다.
신과 왕의길 삼로가 그것이다. 박석으로 잇대어 만들어진 길은 걸어야 할 인물이 이미 정해져 있다. 중앙은 신로神路 이며 좌우측은 왕의 길인 어로御路와 세자의 길이 다. 길은 푸른 숲을 가로질러 왕들이 잠든 깊은 정전으로 향하고 있다.
현세를 사는 사람의 길이 없으니 난감할 따름이다. 길은 길이니 그냥 무시하고 걷자니 왕조 오백 년 깊은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 우측 흙길로 발길을 돌린다.
사람의 길은 어디로 가야하나, 왕이 종묘제례를 올리기 전에 친히 내린 향과 축문, 폐백을 보관하던 곳이 향대청이다. 그곳은 제관들의 길로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향대청은 제례를 진행하기 전에 준비하고 제관들이 길게 대기하던 뜰이다. 지금은 종묘제례 의식에 관한 각종 예와 방법 등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드오실'과 '지오실' 공간으로 나누어 종묘를 찾는 사람들에게 종묘를 이해하기 쉽게 편의를 제공하는 공간을 겸하고 있다.
향대청을 나와 있는 듯 없는 듯 그냥 지나가기 쉬운 뒤쪽 공민왕 사당을 엿본다. 대부분 사람은 향대청 옆으로 이어진 부속 건물로 인식하고 지나쳐 나온다. 서쪽에 자리 잡은 종묘 정전을 바라보며 지어진 누각을 지나 남쪽으로 공민왕 사당이 있다.
사당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썰렁한 느낌은 무엇일까? 자세히 보니 신주가 없다. 위패가 모셔져 있지 않은 사당은 뭔가 부족하다. 하기야 왕씨 제사를 이씨왕조가 지낼 까닭이 없다. 조선왕조 사당에 공민왕 사당은 무슨 의미인가, 고민은 생각의 꼬리를 문다.
공민왕은 원나라 복식을 하고 원의 노곡공주였던 고려 왕후와 함께한 어진이 모셔져 있다. 공민왕 어진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설화에 의하면 굳이 이곳에 공민왕 사당을 지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날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공민왕 어진이 이곳에 떨어져 사당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억측 같은 설화가 말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을 건국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역성혁명의 당위성을 침묵으로 말하는 것이다. 고려 정신을 이어가지만, 새로운 조선이 나아가야 하는 이유를 고려 사당을 통해서 역설하고 있다. 승자의 역사는 빛으로 거듭나고 패자 역사는 설화 속에 잠든다. 그것은 진리다.
공민왕 사당은 가볍지만 조선이 나가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한편, 생각하니 혁명으로 무너트린 고려에 대한 조선의 소박한 양심 같아서 마음이 짠하기까지 하다.
공민왕 사당을 나와 종묘 안에 유일한 산자의 공간인 재궁으로 간다. 재궁은 3개 동으로 왕이 머무는 어숙실 공간과 전날 도착한 왕과 세자가 몸을 정갈하게 하는 어욕실이 있다. 맞은편에는 세자가 머무는 공간이 어욕실을 마주 보고 있다.
오백 년 세월을 더듬어 이곳을 거쳐 갔을 왕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스쳐 지나간다.
세자가 없는 왕은 이곳에서 선대왕들에게 몸 둘 바를 몰라 고개를 숙였다. 종묘의 정전에 자신의 위패를 올리기 어려워 영녕전에서 혼을 묻어야 했다. 후사가 없는 왕은 이곳에서 슬퍼서 울었고, 선대왕들에게 면목이 없어서 아무도 모르게 홀로 울었다.
왕과 세자는 재궁에 머물며 기름진 음식이나 과한 찬을 들이지 않았다.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여 선대왕을 우러르며 존경했다.
길게 늘어진 노송이 담벼락을 건너 한낮의 뜨거운 볕을 품고 있다. 제례가 있던 그날 왕의 얼굴과 왕 앞에 머리 조아리며 아비의 행실을 따라 했을 세자의 불편한 진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깊은 밤을 경건하게 보냈을 왕들의 무거운 그림자를 생각한다. 하나의 왕조가 멸하고 또 하나의 왕조가 깊은 잠을 자고 있을 종묘의 정전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길은 남로와 동로가 있다. 정전의 정문으로 가는 남로는 신神의 길로 이어진다. 선대의 왕들을 우러르기에 부족함이 많았던 후대의 왕은 신로로 가기보다 선대왕이 그러했듯이 어로라 이름 지어진 동로를 택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으리라!
좌우로 늙은 노송의 그늘을 어깨에 짊어지고 동로로 발길을 잡는다.
길게 이어진 박석을 밟으며 걷는 발걸음 끝에 전사청을 마주한다. 대리석은 백색 광선이 바닥을 두드리면 눈이 부시지만, 박석은 따가운 햇살을 난반사해서 눈이 편하다.
전사청 앞자락에서 왕은 왕판위에서 걸음을 멈춘다. 조금 낮은 세자로에서 뒤따르던 세자는 세자판위에서 왕의 거동을 살피며 조아린다.
전사청 앞뜰 찬막단은 사십여 가지의 진상 제물을 확인하는 곳이다. 바로 옆 희생단은 제물로 쓰일 동물들 상태를 살핀다. 이로써 종묘 제례를 위한 마지막 점검을 마친다.
제관들의 손과 눈으로 이상 여부가 확인되면 왕은 마침내 정전의 하월대를 밟고 상월대로 올라선다. 상월대를 오르는 소맷돌에는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이미 왕은 구름을 밟고 선계로 올라서는 것이다. 이곳에서 종묘사직을 받드는 왕의 위용은 빛이 난다. 선대로부터 겸손하고 신하들 앞에서 존엄하다.
왕의 발자취를 따라 종묘의 정전과 마주한다. 순간 숨이 막히는 전율을 느낀다.
하월대 가로 109m. 세로 69m로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 건축물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우리나라에서 경주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가장 먼저 등재된 건축물이기도 하다.
중후한 무게감과 압도하는 침묵으로 정중동 그 자체의 모습이 중후하다. 백제 온조왕의 궁궐 건축을 김부식은 검이불루 화이불치 儉而不陋 華而不侈라 극찬하였고 훗날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이를 조선 궁궐의 미학이라 말했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은 절제되고 단아한 미학이다.
종묘는 혼령들의 궁전이다. 일반 궁전에 비해서 더욱 검소하고 단순하다. 단순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깊고 고요한 절제된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109m 정 대칭으로 길게 벌린 건물 양 끝에 서월랑과 동월랑이 대칭을 이룬다. 서쪽과 동쪽 월랑은 월대 쪽으로 흘러내리듯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가슴 높이의 높고 넓은 월대를 품에 안은 어미 새의 깃털같이 포근하다.
예술적 미학을 한층 더 끌어 올린 모양새다. 세계적인 건축가들도 감탄하며 파르테논 신전과 비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찌 혼령이 모두 떠난 텅 빈 파르테논 신전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오백 년 혼령을 모시는 제례 의식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종묘 공간은 더욱 신령하다.
신주를 모신 각 실의 대문들이 조금씩 비틀어진 것마저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한다. 불일치함의 일치라 말할 수 있다. 혼령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만든 통로다.
세종 조에 이르러 5칸이던 재실이 모두 차자 영녕전을 건립한다. 4대에 걸쳐 왕의 업적을 평가하여 불천위(不遷位), 즉 업적이 큰 왕은 신위를 옮기지 않고 영원히 종묘의 정전에서 제사 지낼 것인지 별묘(別廟)인 영녕전에 모실 것인지 결정한다.
명종 대 이후 왕조가 늘어나면서 신주를 모신 방도 오백 년 세월이 지나며 증축과 신축을 거듭했으나 일정한 건축 양식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다.
이렇게 멋스러운 조상의 얼을 마주하는 일은 감동 그 자체다. 글 쓰는 자의 가슴에 감동의 불덩어리가 끓어오른다. 단아하고 절제된 건축의 미학과 침묵으로 새 왕조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을 선대 왕조의 깊은 뜻을 헤아리며 나도 모르게 시 한 수를 읊조린다.
종묘, 고요한 침묵
오백 년 숨결이
깊은 지층 아래 고요히 잠든 혼령의 집
하마비 아래 옷깃 여미고
선대로부터 면면히 흐르는 위업을 우러른다
종묘와 사직을 품어 이 땅을 지키려던
왕조의 기운은
이제. 텅 빈 뜨락 사이 침묵의 바람으로
머물러 있구나
봄날 꽃잎은 덧없이 날리고
세월은 무심히 정전 박석을 훑고 지나는데
되돌아보니 역사의 무게 회한이라
스러져간 왕조 영혼
깊이 잠든 이곳
단청 빛깔은 여전히 푸르고 선명하니
선조의 자애로운 숨결로
대대손손 찬란한 복락 누리게 하소서
정전에 모신 왕의 신주가 19분이며 영녕전에 모신 분이 태조 이성계의 4대 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포함하여 16분을 모셨다.
조선왕조 27대의 숫자와 맞지 않은 것은 후대에 왕의 아버지를 추존하여 모신 경우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장조로 추존하여 영녕전에 모셨다. 영녕전 마지막 16실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를 모셨다고 한다.
왕으로서 지존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대군으로 밀려나 종묘에 봉안되지 못한 비운의 왕도 있다.
요즘 새롭게 조명되는 단종의 경우 삼촌인 세조에 의해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으나 241년이 흐른 숙종 대에 이르러 복원되어 이곳 영녕전에 모셨다. 그러나 연산군과 광해군 두 분은 영원히 종묘에 모실 수 없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종묘를 선조에 이어 5년간 종묘를 건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종묘에 들지 못했다.
또한 정전 앞에 공이 큰 신하의 위패를 모시는 공신전이 있다. 그러나 조선을 건국한 일등 공신인 정도전 또한 공신전에 들지 못했다. 이방원에게 살해당하고 정치적 배척을 당한 것이다. 역사는 늘 승자의 것이라는 생각을 각인한다.
퇴색된 대군의 혼령을 위로한다. 역사는 때로는 매몰찬 한겨울 칼바람 같기도 하다.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왕조는 사라졌으나 종묘와 사직을 위한 혼령은 이곳에 남아 이 땅을 침묵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세종대왕이 직접 지었다는 종묘제례악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월대위 휑한 공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왕조의 세월을 추모하는 경건함이 깊게 스며든다.
고개 숙여 지난 왕조 혼령들의 강령을 기원한다.
평안하여 비로소 깊이 잠드소서!

첫댓글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