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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078. [역경의 열매] 조규환 (1-17) 54년전 동창생이 예견했던 고아 돌봄의 길
얼마 전 오래된 서류들을 정리하다가 54년 전에 고등학교 동창이 써 준 편지를 찾았다. 훗날 목사가 된, 나보다 세 살 아래인 이재형군이 졸업식 때 준 것이었다. 누렇게 바래고 군데군데 얼룩이 진 편지지만큼이나 ‘이런 게 있었나’ 할 정도로 내 기억 역시 가물가물했다.
‘군(君)은 대한(大韓)에 부모 없는 고아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할 수 있겠지. 그들은 아버지를 부르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네. 나는 믿네. 군은 그들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어 줄 것을.’
깜짝 놀랐다. 내가 평생 고아들과 함께 지내게 될 줄, 그때 그 친구는 어찌 예견했을까. 나의 평소 생각과 삶의 모습을 보며 어떤 예감이 들었던 것일까.
나는 1933년 황해도 옹진군 은동리라는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나라의 기운이 참혹하게 기울고, 우리 집안 가세도 기울 대로 기운 때였다. 할아버지는 해주에서 버스업체를 운영한 큰 부자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버스업체와 전답을 모두 팔아 금광사업을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큰 돈을 빌려 사업에 투자했다. 그러나 결국 부도가 났고, 우리 집은 파산했다. 아버지는 곧 몸져 누우셨다.
어머니가 병든 아버지와 어린 나, 남동생, 여동생 등 여섯 식구의 생활을 떠안게 됐다. 나와 스물일곱 살 터울이 지는 큰형님은 학교 선생을 하며 잘 살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 집안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시장에 나가 생선과 잡화를 떼다 광주리에 담아서 집집을 돌면서 팔았다. 60근(3.6㎏)에 달하는 물건을 머리에 이고 하루 80리나 돌아다니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 “잘 있었지? 별 일은 없었고?” 하며 다정한 말을 건네시는 걸 잊지 않으셨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살림에 보태기 위해 매일같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한 짐씩 해 와야 했다. 지금도 내 팔과 다리에 남아 있는 흉터는 그 당시 서툰 낫질로 생긴 것이다. 그때는 특별한 장래의 꿈이랄 게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밥 먹고 살아가는 것이 눈앞의 문제였다.
어머니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내가 아홉 살이던 무렵이다. 여느 때처럼 광주리 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가 갑자기 집안에 있던 신주단지를 모조리 마당에 끌어내 패대기치고 불까지 질러버렸다. 거동을 못하던 아버지는 “저 미친 년! 저 미친 년!” 하고 그저 고함만 질러댔다. 어머니는 전혀 주눅들지 않고 “이딴 것 이제 다 필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외치셨다. 이후 나는 주일마다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감화를 주고, 우리 가정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하신 분은 오택관 목사님이라고, 어머니는 종종 말씀하셨다. 2003년에야 알게 됐지만, 오 목사님은 지금 내가 친형님처럼 가깝게 모시는 우리나라 초대 공보처장관 오재경 박사의 아버님이셨다.
아버지는 1945년 해방을 앞두고 돌아가셨다. 나는 얼마 뒤 은동국민학교를 어렵사리 졸업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는 진학하지 못했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
* [역경의 열매] 조규환 (1) 54년전 동창생이 예견했던 고아 돌봄의 길
* [역경의 열매] 조규환 (2) 주경야독 고달픈 나날… 영어공부는 쉬지않아
* [역경의 열매] 조규환 (3) 윤성렬·아펜젤러 헌신에 감동, 은평천사원 입사
* [역경의 열매] 조규환 (4) 천사원서 결혼하고 아이들도 ‘차별없이’ 키워
* [역경의 열매] 조규환 (5) 아펜젤러 할머님 통해 ‘후원자 개발’ 원리 터득
* [역경의 열매] 조규환 (6) MCOR 지원으로 번듯한 거처 마련… 1964년 원장 취임
* [역경의 열매] 조규환 (7) 거친 아이들 교화 위해 밴드부·4H클럽 등 조직
* [역경의 열매] 조규환 (8) 자체 수익 조달 위해 화훼 재배… 화원도 직영
* [역경의 열매] 조규환 (9) 사회복지 ‘외길’ 노력… 서울 시설연합회장 당선
* [역경의 열매] 조규환 (10) 1970년대 말부터 여자아이들도 본격적 영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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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조규환 (14) 대한사회복지회장 시절 도서문제로 노조와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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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조규환 (16) 나눔센터 설립… 도움 받다 지구촌 이웃 도와 뿌듯
* [역경의 열매] 조규환 (17·끝) 천사원의 소임 다하며 말씀대로 살아갈 것
◇조규환 원장 약력=황해도 옹진 출생. 동양공고, 강남대 사회사업과 졸업. 미 사회복지협의회 회원, 한국사회사업시설연합회 회장, 대한사회복지회장,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 등 역임. 현 한국사회복지협의회 부회장,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실행이사, 한국아동단체협의회 상임부회장, 한국기독교사회복지협의회 공동대표.
***[역경의 열매] 조규환 (2) 주경야독 고달픈 나날… 영어공부는 쉬지않아
우리 식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이 지난 1948년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함께 살자는 큰 형님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교사를 하던 형님은 당시 경찰 간부가 돼 있었다. 그러나 형님네 도움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그 몇 달 뒤 나와 동생들을 데리고 지금의 용인 신갈 근처에 거처를 마련하셨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장사를 하셨고, 나는 나무를 해서 시장에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탰다.
6·25 발발 이듬해 1·4 후퇴가 있자 우리 가족도 피란길에 올라 대구에 자리를 잡았다. 동천 개울둑에 형성된 천막촌이었다. 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날품팔이라도 해야 했다. 매일 아침 일곱시면 어김없이 인력시장으로 갔다. 다섯 명, 열 명씩 뽑아가는 일거리에 투입되면 하루 몇 십 원은 벌 수 있었다. 내 나이 열일곱 살 때였다.
어느 날 미국인과 한국인이 함께 와 인력을 차출했는데, 운 좋게 나도 거기 낄 수 있었다. 그들을 따라간 곳은 지금의 대구 동천비행장이었다. 822공병대가 주둔하며 비행장 건설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며칠간 기름통을 굴려 옮기는 작업을 거들었다. 그런데 한 미군 장교가 나를 부르더니 사무실 청소를 맡으라고 했다. 나는 요령을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그 일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으로 월급을 받으며 일하게 됐다. 내 생애 첫 직장인 셈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미군과 마주할 기회가 많았다. 나는 영어에 관심과 흥미가 생겼고, 어설프게나마 영어를 깨우치기 시작했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우리 가족도 피란생활을 마감하고 서울로 돌아가게 됐다. 그러나 직장을 떠나기 서운했던 나는 6개월간 더 대구에 머문 뒤 상경했다.
형님이 새로 마련해준 서울 대방동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정식으로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장차 내 앞가림을 하는 데 남들이 갖지 못한 기술 하나 정도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어머니도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나를 늘 안타깝게 여기시며 “공부해라,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영등포에 있던 일진학원에 등록했다. 아침 7시에 영어 수업을 들은 뒤 낮에는 공사판에서 막일을 하는 식이었다.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노량진에 있는 동양공업고등학교 토목과에 진학했다. 뒤늦게 학업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검정고시를 보지 않아도 학비만 내면 진학이 가능하다는 말에 결단을 내렸다. 야간 학교를 다니면서도 나는 영어 배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서울공업고등학교 안에 있던 미군 야전병원에서 급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내가 눈치껏 영어를 구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군은 군수품 창고 담당 직원으로 나를 고용했다. 나는 승진을 거듭해 고등학교 3학년 때인 54년, 병원 군수품 창고의 책임자가 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대방장로교회에 출석했는데, 나는 ‘내가 평생 함께할 곳은 교회’라는 생각에 주일학교 교사와 찬양대 활동에 열심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장인이신 윤삼열 장로님의 권유로 고아원에서 전쟁고아들을 위한 봉사를 시작했다. 그때는 거리마다 고아들이 넘쳐났다. 이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걸하고 다리 밑이나 남의 집 담장 옆에 거적을 치고 밤을 지냈다.
***[역경의 열매] 조규환 (3) 윤성렬·아펜젤러 헌신에 감동, 은평천사원 입사
윤성렬 목사님. 내 삶의 스승이자, 지난 50여 년간 내가 그토록 닮기 위해 애썼던 분이다.
1885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신 윤 목사님은 1914년 목사 안수를 받고 황해도 해주 지방에서 목회를 시작하신 뒤 54년 은평감리교회를 설립하는 등 은퇴하실 때까지 20여 교회를 세우셨다. 또 평생 진실, 근면, 절약과 구제의 정신을 몸으로 보여주셨다.
“비싼 것을 먹든, 싼 것을 먹든 간에 시간이 지나면 같아지는 것이고, 우리가 입고, 보고 듣는 것, 소유하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또한 참된 삶은 진실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르게 살려고 할 때 그 사회 전체가 아름다워진다.”
지금도 기억하는 그분의 가르침이다.
윤 목사님은 전쟁고아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셨다. 당시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자기 한 몸 지킬 능력조차 없이 거리에 방치됐다. 윤 목사님은 한 성도의 방을 빌려 고아원을 시작했다. 어느 날 윤 목사님의 아들이자 훗날 장인이 되신 윤삼열 장로님이 “우리 아버지가 불광동 근처에서 고아원을 시작했는데 참 어렵다. 와서 도울 수 있나”고 내게 물으셨다. 나는 순순히 주말과,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고아원에 나가 봉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윤 목사님을 처음 만났다. 목사님이 서울역에서 고아들을 데려오면 나는 아이들을 씻기고, 머리를 깎아주고, 옷을 갈아입혔다. 글을 가르치고, 교과서를 얻어다가 다른 공부도 도와줬다. 초등학교 3학년 이하, 4학년 이상, 중학교 이상, 이렇게 세 그룹으로 나눠 아이들을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 이북의 내 고향 후배들도 셋이나 만났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더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른다.
59년 3월, 윤 목사님은 아펜젤러 할머님, 잭 타이스 선교사 등과 함께 은평천사원을 세우셨다. 미군에게 지원받은 24인용 천막 두 개가 당시 시설의 전부였다. 천막 하나는 낮에는 교실, 밤에는 숙사로 쓰였고, 다른 천막은 식당과 창고로 사용됐다. 거기에 40명 정도의 고아들이 살았다. 나는 부모도 없고 집도 없는 이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 좋았다. 그들은 종종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윤 목사님이 은평천사원의 아버지라면, 아펜젤러 할머님은 어머니였다. 아펜젤러 할머님은 1890년대 북한 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미국인 선교사 아서 노블의 큰딸이자,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의 큰 며느리다. 본명은 루스 노블 아펜젤러지만 나는 그냥 아펜젤러 할머님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그분 나이 63세 때였고, 내게는 지금도 친근한 할머니로 기억되고 있다.
그해 4월 은평천사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날, 나는 정동에 있던 아펜젤러 할머님의 자택에 초대받았다. 할머님은 첫 말씀에 “사랑을 많이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고아들과 같이 일하려면 첫째도 사랑, 둘째도 사랑, 셋째도 사랑이야. 사랑이 많고, 그 사랑을 나눠 줄 수 있는 사람만이 고아들과 일할 수 있어. 먹고 입고 자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거든.”
할머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봉사는 내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나는 당시 직장이던 주한 미대사관 관리부에 사표를 던지고 은평천사원에 입사했다. 스물일곱 살 때였다.
***[역경의 열매] 조규환 (4) 천사원서 결혼하고 아이들도 ‘차별없이’ 키워
지금 은평천사원 주변엔 옛 모습이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50여년 전 설립할 때만 해도 이곳은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국말이라는 전형적 시골마을이었다. 녹번동 버스 정거장에서 내려 30분 정도 걸으면 군용 천막 2개가 보였는데, 그곳이 바로 천사원이었다. 산기슭에 있었기 때문에 천막 앞에 서면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나는 평생 너희들하고 같이 살 거다. 결혼도 하지 않겠다.”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천사원에 갔을 때 나는 원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치기어린 생각이었지만, 내 진심을 담아 한 약속이기도 했다. 나는 제대로 못 배웠지만, 이 아이들의 미래만큼은 더 나을 것이라 기대했다. 사실 이러한 희망이 없었다면 결혼하지 않고 고아들과 살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천사원에 들어온 후로는 나도 천막 숙사에서 아이들과 함께 먹고 자고 했다. 나만 편하고 좋은 방에서 생활할 수는 없었다. 고생을 같이해야 빨리 정이 든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쑤시고, 몸 구석구석에서 이가 들끓었지만 행복했다.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나는 서서히 그들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어느새 아이들은 나를 ‘형’이나 ‘삼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결혼하지 않겠다’던 원생들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내가 아내, 윤경숙 장로를 처음 만난 것은 1954년 대방장로교회에 나갈 때였다. 우리는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활동을 같이했었다. 나보다 네 살 아래인 아내는 이화여자대학교 약대에 진학했을 정도로 수재였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1학년만 마치고 그만둔 상태였다.
59년 천사원에 입사한 이후 그녀를 우연찮게 다시 만나게 됐다. 그녀는 천사원 설립자인 윤성렬 목사님의 외손녀였던 것이다. 나는 그 무렵 천사원 총무로 일하던 동료가 먼저 결혼하는 것을 보고서야, ‘혼자 생활하는 것이 참 어렵고 궁색한 일이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그렇지만 감히 내가 윤 목사님의 손녀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번듯한 집안을 가진 데 반해 나는 배움도 짧고 집안 역시 보잘것없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전부터 내 인생의 배우자를 준비해 두셨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와 아내가 평생을 천사원에서 일하도록 만드셨는지도 모를 일이다(아내는 평생의 동역자로서 현재 남성 정신지체 장애인 생활시설인 은평재활원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간의 교제 끝에 63년 김성렬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현재 2남 2녀를 두고 있다.
우리 식구들은 천사원 안에서 생활했다. 현재까지도 나와 아내는 천사원 숙소에서 산다. 나는 천사원 아이들과 내 자식들 간에 어떤 차별도 두지 않도록 힘닿는 데까지 노력했다. 내 아이를 따로 학원에 보낸 적도 없고, 용돈이나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더 사준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입학식, 졸업식에도 시간을 내 참석한 적이 없다.
이런 아버지를 둔 자식들은 때로 서운했을 것이다. 여느 가족처럼 같이 나들이 한번 간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나와 같은 길을 가는 우리 자식들도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역경의 열매] 조규환 (5) 아펜젤러 할머님 통해 ‘후원자 개발’ 원리 터득
아펜젤러 할머님 집 테이블 위에는 편지지와 편지봉투가 항상 가득 쌓여 있었다.
“아니, 무슨 편지를 이렇게 많이 쓰시는 거예요? 다 어디로 보내시는 거죠?”
어느 날 내가 묻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나는 요즘 먹고 자고 기도하는 시간 외에는 이렇게 편지 쓰는 일에 모든 시간을 쓰고 있다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할머님은 다시 설명하셨다.
“이게 다 은평천사원을 위한 일이야. 내가 아는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서 한국 고아들의 실상을 알리고 이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거지. 그래야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거든. 이게 내가 천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네.”
아펜젤러 할머님은 이렇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 후원금을 모으셨다.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할머님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도움을 주고 싶어도 사람들이 실상을 알지 못한다면 관심을 갖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님은 내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야. 왜 그런지 아나? 지금은 그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지? 하지만 아이들만 잘 자라준다면 장차 그것보다 더 확실한 투자는 없다네. 그러니까 지금 뭐든지 아낌없이 지원하고 베풀어야 하는 거야.”
당시 나는 그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자랑스러운 천사원 출신들을 볼 때마다 그 말의 뜻을 분명히 알게 됐다. 이들은 해마다 많은 기부금을 내놓으며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과거 자신들과 같은 처지의 후배들을 도우려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다.
나는 아펜젤러 할머님을 통해 천사원의 후원자 개발을 위한 중요한 원리를 터득했다. ‘편지 쓰는 것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내가 아는 모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받는 것이 끝이 아니라 받은 것으로 정확하게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의 중요함을 말이다. 후원금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물질적 정신적인 혜택을 보았는지를 소상히 알린다. 그리고 후원자들의 마음에도 그만한 기쁨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아펜젤러 할머님은 은퇴 후 1966년 미국으로 떠나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이후로도 매월 후원금을 보내는 등 천사원을 후원하는 일만큼은 언제나 현역이었다.
79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할머님을 다시 만났다. 85세로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던 할머님은 연신 “잘 왔다! 잘 왔다!”며 양 볼에 키스해 주셨다. 우리는 식사를 함께하며 천사원 얘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 아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 된 아이 등 성공한 원생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언급하는 할머님 표정은 기쁨으로 넘쳤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죽으면 유산을 천사원에 기증하겠다고 말했다.
할머님은 86년 12월, 93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현재 그분의 유해는 서울 마포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묘지에 안장돼 있다. 할머님의 유산은 천사원에 기증돼 장애인들을 위한 재활체육센터와 참빛교회를 건립하는 데 귀중하게 사용됐다. 나는 참빛교회에 할머님 흉상을 세웠다. 그분의 사랑 가득한 정신이 영원토록 천사원에 남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역경의 열매] 조규환 (6) MCOR 지원으로 번듯한 거처 마련… 1964년 원장 취임
천막 2개로 시작한 은평천사원은 얼마 뒤 미 군사고문단으로부터 50평 크기의 퀀셋 막사(야전용 반원형 막사) 두 동을 지원받아 기숙사를 세웠다. 집다운 집에서 지낼 수 있게 된 것은 1960년이었다. 한 미국 후원자에게 5000달러를 후원받아 방 8개가 딸린 ‘평화의 집’을 건축했다. 그리고 그해 미국 감리교 해외구제회(MCOR)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MCOR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의 사회사업시설 복원과 농촌지역 구제 등을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이곳은 고아원, 사회시설, 농촌양곡은행 등을 도왔고, 사회복지시설 35곳도 지원했다. 이 MCOR 2대 지부장으로 취임한 로버트 홀컴씨는 나와 특히 인연이 깊었다. 그는 나를 친아들처럼 아껴줬다. 데이비드라는 내 영어 이름도 그가 지어 준 것이다. 홀컴씨는 보이스카우트, 밴드부, 4H 클럽과 화훼사업에 이르기까지 초창기 천사원 운영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 천사원의 운영 기록을 보면, 정부보조금은 10%에 머물렀고, 60% 이상은 MCOR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는 73년 MCOR이 국내에서 활동을 완전히 접을 때까지 계속됐다.
나는 64년 은평천사원 원장이 됐다. 당시 원장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젊다는 이유로 국내 이사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아펜젤러 할머님과 홀컴씨의 지지로 원장에 취임할 수 있었다.
60년대 초반 천사원 아이들은 은평구 일대를 주름잡았다. 몰려다니며 사고치는 일도 많았다. 아이들은 예사로 돈 안 내고 버스 타기, 동네 주민이 키우던 개나 닭 잡아먹기, 이웃집 과일 서리 등을 했다. 심지어 남의 집 장독 뚜껑을 열고 고추장을 퍼먹기도 했다.
한번은 주민들이 경찰서에 진정을 낸 것이 발단이 돼 서부경찰서 경찰이 트럭을 몰고 와서는 중3 이상 되는 아이들을 모조리 잡아갔다. 다음날 아침 나는 부랴부랴 경찰서로 찾아갔다. 서부경찰서 서장은 알고 지내던 장로님인데, 일부러 ‘서장님’이라 하지 않고 ‘장로님’이라 부르며 선처를 호소했다.
“장로님, 이 애들은 모두 부모 없는 아이들입니다. 장로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서장이 형사과장을 불러 조사기록을 가져오게 했다. 밤새 지하실에서 조사 받으며 예전에 저지른 자잘한 잘못들까지 모두 기록돼 죄목이 꾀나 많은 상황이었다. 거듭 선처를 호소하자 서장은 아이들을 모두 데려오게 했다.
“너희들 모두 형무소 가야 하는데, 조 원장님의 특별한 부탁 때문에 봐준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이었다. 한번은 좋은 일로 여러 일간지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힘들게 살아가는 결핵촌 주민들을 돕겠다며 몇몇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황규호를 비롯해 대여섯 명의 아이들은 새벽에 서울역에 나가 신문을 팔았고, 6개월간 고생해 모은 돈으로 천사원 옆 결핵촌에 월동용 연탄 1000여장을 기증했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들보다 더 춥고 외롭게 겨울을 나는 이웃들의 모습이 아이들 눈에 띄었을 거라 생각됐다. 용돈도 없이 생활하는 원생들이 남을 돕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너무나 고마웠다.
***[역경의 열매] 조규환 (7) 거친 아이들 교화 위해 밴드부·4H클럽 등 조직
전후 거리의 고아들은 남자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자 아이들은 남의 집 더부살이로 들어가 식모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스레 눈에 많이 띄는 남자 아이들을 먼저 수용하게 됐다. 1961년 5월 10일 은평천사원은 남자시설로 정부 인가를 받았다.
힘들었던 것은, 아이들이 이미 거리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들 성정이 대부분 거칠었다. 아무 때나 저 좋은 시간에 잠들고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한 이들에게, 정해진 규칙이 있는 단체 생활은 쉽게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통제받기를 싫어해서 차라리 밖에서 매를 맞더라도 동냥이나 소매치기의 삶을 택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 천사원에 들어왔으면 정해진 규칙을 지켜야 했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에게 나는 이따금씩 야구 방망이를 들었다. 나에게 야단을 들은 아이들 열댓 명이 집단가출을 감행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또 이들을 찾으러 거리로 나갔다. 지난한 일의 연속이었다.
하루는 서대문경찰서의 도움을 받아 경찰 몇 명과 함께 서울역 앞으로 나갔다. 지금 대우빌딩이 있는 자리가 당시는 ‘거지 소굴’이었다. 큰 정자가 하나 서 있었는데 그 아래 위로 거지와 넝마주이들이 비바람을 피해 생활하고 있었다. 그 중 나이 지긋한 한 사람이 왕초 노릇을 했다. 그가 웃옷을 벗고 드러누우면 꾀죄죄한 아이들이 앞 다투어 안마를 하거나 시중을 들었다. 우리가 아이들을 시설로 데려가겠다고 해봤자 왕초가 애들을 내놓을 리 만무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아이 몇몇을 천사원으로 데려와도 어느 틈엔가 이들은 시설을 빠져나갔다. 왕초 일행이 와서 몰래 아이들을 빼가는 일도 많았다. 어떤 아이는 그렇게 열여섯 번을 데려오기도 했다.
어느 날 담당 간호사가 급히 나를 찾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 애가 저한테 모르핀을 놔 달라고 졸라요. 어떡해요?”
열다섯 살 정도 됐음직한 소년이었다. 옷을 벗겨봤더니 팔과 다리, 손과 발에까지 주삿바늘 자국이 가득했다. 아편 주사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역 앞 왕초가 자꾸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시키자 반항심에 도망쳐 온 아이였다. 그는 아편 후유증으로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나는 먼저 아이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자신이 빠진 수렁에서 빨리 헤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서울시의 도움을 받아 시립정신병원에 아이를 입원시켰고, 그 아이는 1년 뒤 완치돼 퇴원을 했다. 그리고는 이발 기술을 배워 취업하는 등 사회에 적응해 나갔다.
시설의 아동들은 대부분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하루 아침에 부모와 떨어져 고아가 된 아이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되찾아주기 위해서는 어디 한 군데 열중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 개발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가출을 쉽게 생각하고 시설 드나들기를 반복하는 생활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했다. 이를 위해 아이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취미를 갖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천사원 내 소년밴드부를 조직하고, 4-H클럽과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시작했다. 내가 먼저 보이스카우트 소년단 지도자 훈련을 받아 대장이 됐고, 곧 4-H클럽 지도자 자격도 획득했다.
***[역경의 열매] 조규환 (8) 자체 수익 조달 위해 화훼 재배… 화원도 직영
1960년대 초 보이스카우트 소년단은 웬만한 중산층 이상이 아니고선 자녀들을 참여시키기 어려웠다. 서울사대부고 배재고 서울고 경복고 경기고 등 서울지역 일부 명문학교에만 있는 것으로 인식되던 때였다. 고아원 안에 보이스카우트 유년대, 소년대, 연장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일반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자 했던 이 시도는 성공적 결과로 이어졌다. 은평천사원 59연장대는 잼보리 등 보이스카우트 행사 때마다 우수 소년단으로 표창을 받는 등 그 활약이 정말 대단했다. 나는 지금도 늘 자랑삼아 얘기하곤 하는데, 천사원 보이스카우트는 한국에서 제일가는 소년단이라 할 수 있었다. ‘범단원’은 보이스카우트 최고의 영예였다. 모두 21개의 기능을 인정받아야 범단원이 될 수 있었는데, 당시 범담원은 국내에 15명뿐이었다. 천사원 보이스카우트는 제16호에서 23호까지 모두 8명의 범단원을 줄줄이 배출했다. 이는 원아들의 자존감과 자긍심을 끌어올렸다. 소년단원으로 활동했던 아이들 가운데는 현재 세계적 명성을 얻은 박사와 교수, 목사와 기업가 등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밴드부는 서울지역에서 천사원이 처음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34인조로 구성된 밴드부는 그 실력을 인정받아 KBS TV에 출연했고, 보이스카우트 총재였던 김종필 공화당 의장의 환영식 음악 연주를 맡기도 했다.
15세 이상 아이들을 중심으로 꾸린 4-H클럽은 양, 돼지, 오리, 토끼 등을 직접 길렀으며 채소나 꽃을 재배하는 일도 도맡았다. 애초 시작할 때는 자본금이 없어 여기저기 돈을 빌려다 온실도 짓고 축사도 만들었다. 가축과 채소는 천사원에서 식용으로 쓰거나 시중에 판매했다.
천사원 최초의 자체 수익사업인 화훼 재배는 미국 감리교 해외구제회(MCOR)의 지원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이를 발전시키는 데는 한 미국인 후원자의 힘이 컸다. 1966년 어느 날 주한 미대사관을 통해 미네소타 출신의 월터 먼데일 상원의원이 2000달러를 보내왔다. 그는 나중에 부통령까지 지낸 인물인데, 모친 장례식을 치르고 모인 조의금을 우리에게 후원한 것이었다. 2000달러면 당시 꽤 큰 돈이었다. 나는 그 돈으로 온실을 확장키로 했다. 그리고 비교적 쉽게 기를 수 있는 장미를 비롯해 고무나무와 연산홍 등으로 재배 품종을 늘렸다. 71년에는 국내 최초로 관음죽, 소철을 일본에서 수입해 재배하기도 했다.
상품이 점차 다양해지면서 직접 판로를 개척해야겠다는 계획이 섰다. 그래서 인사동에 처음으로 꽃 가게를 열었다. 이후 서대문 대신학교 앞에 두 번째 가게를 열었고, 감리교 총리원의 배려로 태평로 감리회관 앞 공터에 가건물을 지어 ‘천사화원’도 개원했다. 축하화분, 화환, 조화 등을 판매하면서 얻은 수익은 점차 천사원 운영비 3분의 1을 충당할 정도가 됐다.
중·고생만 150명이 넘을 정도로 원아들의 수는 계속 늘었다. 그러나 정부보조금은 턱없이 적었다. 아이들의 학비는 천사원에서 모두 책임지고 있었는데, 의욕과 열정이 있는 아이들이 대학 진학이나 유학을 원하는 경우에는 어렵지만 끝까지 지원해 줬다. 부모 없는 아이들도 꿈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
***[역경의 열매] 조규환 (9) 사회복지 ‘외길’ 노력… 서울 시설연합회장 당선
은평천사원 원장으로 취임하고 7년쯤 지났을 때, 나는 미국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의 친구인 르밴(Levan) 박사를 만나 교제했다. 대구 계명대 영문학 교환교수로 온 그는 주말이면 가끔 서울에 와서 천사원을 찾았다. 르밴 교수는 유대계 미국인이었는데, 나는 당시 유대인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대화를 나누려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제 나라 없이도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오늘날 노벨상 수상자 3명 중 1명을 배출하는 민족, 세계를 움직이는 이 민족의 저력은 나에게 있어 늘 호기심과 경이로움의 대상이었다.
르밴 교수에게 세계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유대인들의 저력과 비결을 물었다.
“한국에 있는 하나뿐인 친구인데 방법 좀 알려주시오.”
그랬더니 그는 “조 원장은 어떤 것에서 일등이 되고 싶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사회복지사업에서 단연 최고가 됐으면 하지요.”
“음, 그럼 내가 하라는 대로 하겠소?”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재차 약속한 뒤에야 그는 말문을 열었다.
“그럼 지금 바로 실행하시오. 이제부터 조 원장은 사회복지만 생각해야 하오. 책도 사회복지에 관한 것만 읽고, 다른 데 시간 낭비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시오. 계속 그렇게만 한다면 꿈을 꿔도 사회복지에 관한 것만 꾸게 될 것이고, 항상 좋은 아이디어가 생길 것이오.”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가 오늘날의 천사원으로 이어진 게 아닌가 생각한다.
1975년 나는 서울시 사회사업시설연합회 회장에 출마했다. 당시 43세로 비교적 젊은 축에 들었다. 그때까지 원로들이 회장을 맡는 것이 대세였기에, 내가 회장 선거에 나선 것만으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많은 표차로 당선됐다. 그러나 곧 원로와 중진 원장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나는 영향력을 지닌 원장 9명의 자택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간곡히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이들 전원이 협조하겠다며 호의적 자세로 돌아섰고, 나는 회장으로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일 중 하나는 김기창 화백, 이방자 여사 등 유명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한 점씩 얻어 전시회를 여는 것이었다. 그림을 판매한 수익금으로 시설 아동들의 장학금을 마련했다.
그 무렵 나는 당시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과 그 부인인 이형자 권사를 알고 지내게 됐다. 이 권사는 신앙생활에 열심일 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그는 어느 날 대한생명, 신동아건설 등 회사 임원 부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나를 초청해 시설 운영에 관한 어려움을 직접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리고 고아원 원장들이 월급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내 설명을 듣고 바로 후원 제안을 하셨다.
“제가 원장님들을 후원할게요. 용기내세요. 한 달에 5만원씩이면 어떨까요?”
5만원은 당시 꽤 큰돈이었다. 내가 알기로 민간에서 시설 원장들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원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지역 시설 원장들과 만나 논의를 한 끝에 매달 개별적으로 지원을 받기보다 복지 기금을 마련하는 데 쓰기로 결정했다. 원장은 총 50명이었지만, 후원금은 넉넉하게 매달 300만원씩 지원됐다. 이 돈은 원장들의 긴급 치료비나 장례비 등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됐다.
***[역경의 열매] 조규환 (10) 1970년대 말부터 여자아이들도 본격적 영입
초창기 은평천사원은 남자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원아 중 한 아이의 사정이 참 딱했다. 이 아이는 자신의 누이동생이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고생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당시 더부살이하는 아이를 친딸처럼 학교에 보내고 공부시켜 줄 가정은 흔치 않았다. 나는 결국 그 누이동생을 천사원에 데려오기로 했다. 그 아이는 성장해 경기도 여주에 있는 직업훈련소로 보내졌고, 직장을 구해 어엿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됐다. 이후 그녀는 천사원에서 만난 남편과 결혼을 했는데, 나는 그 결혼식 주례를 맡았다. 그때의 뿌듯했던 기억은 해묵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
천사원에서 본격적으로 여자 아이들을 맞게 된 것은 1970년대 말부터였다. 61년 서대문시립병원이 들어서면서 결핵환자들이 천사원 인근에 집단으로 모여들었다. 못살던 시절, 결핵은 흔한 병이었다. 병실이 한정된 탓에 환자들은 6개월을 채우면 모두 퇴원하도록 돼 있었다. 오갈 데 없는 가난한 결핵환자들은 병원 근처인 구산동 산61번지에 천막을 치고 하나 둘 살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그곳은 점차 일군의 산동네로 변했다. 이른바 결핵환자촌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느 해 여름, 그곳의 몇 집이 수해로 쓸려 내려가는 참사가 발생했다.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있던 대낮에 갑작스럽게 쏟아진 폭우가 원인이었다. 한 가정은 낡은 집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 있던 남편과 아내 모두가 목숨을 잃었다. 그 집 딸이 둘이었는데, 두 자매는 당시 우리 원아들과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급우였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이 자매를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오갔을 테고, 얼마 뒤 동장이 날 찾아왔다. 자매를 받아달라는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천사원은 남자 아이들만 있는 곳이라서….”
“원장님, 딱한 아이들 좀 돌봐 주세요. 다른 시설로 보내기도 마땅치가 않습니다.”
고민 끝에 이 아이들을 데려오기로 했다. 어린 애들이라도 남녀는 유별한지라 머물 곳을 따로 마련해 줘야 했다. 처음에는 혹시나 사내 녀석들이 일반 가정집에서 자란 여자 아이들을 괴롭히거나 짓궂게 굴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급작스레 천애고아가 된 이 자매가 측은했던지, 남자 아이들이 은근히 챙겨주고 배려하는 것이었다. 남자들만 우글대던 천사원 분위기는 단지 여자 아이 두 명이 들어왔을 뿐인데도 사뭇 달라진 듯했다. 전에 비해 화사해지고 부드러워졌으며 알게 모르게 질서가 잡혀가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나중에는 본격적으로 여자 아이들이 머무를 집을 하나 더 지었다. 그리고 아동보호소에서 여자 아이 몇을 더 데리고 왔다. 그 가운데 차분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한 아이는 커서 의사가 되기도 했다.
여성 시설인 은평기쁨의집이 정식 개원한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07년의 일이다. 일반 아동 시설에 비해 많이 늦었다. 기쁨의집은 아기 때 버려지거나 서울시립아동병원에 수용 중인 부모 없는 여성 장애인들을 데려다 보호하는 것부터 시작됐다. 현재는 만 4세부터 41세의 무연고자 또는 1∼3급 여성 지적장애인들이 함께 생활하는 집이 됐다.
***[역경의 열매] 조규환 (11) 故 김동휘 장관 주선으로 승합차·장학금 마련
김동휘 외무부 차관의 방문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1979년 당시 외무부와 천사원은 자매결연을 했는데, 그해 말 김 차관이 성금을 들고 찾아왔다. 나는 시설 현황을 설명한 뒤 장애고아 시설을 시작하려 하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
장애아동들 중에는 환자가 자주 발생한다. 낮에는 택시를 타고라도 병원에 갈 수 있지만, 밤에는 환자를 업고 뛰느라 이만저만한 고생이 아니었다. 현대 아산재단에 승합차 한 대를 기증해 달라고 신청했다가 한 차례 거절당한 뒤였다. 나는 김 차관에게 “현대에 말씀하셔서 차 한대만 얻어 주실 수 있느냐”고 어렵사리 부탁을 했다.
“외무부 차관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제 힘으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 차관은 거듭 “죄송하다”며 미안해했다. 그리고 석 달쯤 지났을 때였다. 상공부 장관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알고 보니 김 차관이 상공부 장관으로 승진한 것이었다.
“원장님, 저 김동휘입니다. 그때 말씀 하신 거, 조만간 좋은 소식이 갈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몇 시간 뒤 아산재단에서 전화가 왔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사무실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담당 부장을 만났는데 나에게 대뜸 “상공부 장관과 잘 아는 사이냐”고 물었다. 나는 회장실로 안내됐고, 그 방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문인구 상무가 앉아 있었다. 이들은 나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상공부 장관과 집안 되십니까?”
“그렇지는 않지만, 잘 알지요.”
“원장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애로사항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애초 봉고차 한 대를 목표로 했지만, 이왕 정 회장을 만난 김에 큰 부탁 한 가지를 해 보자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저희 천사원에서 지난해부터 장애 고아들을 보호하게 됐습니다. 이들을 양육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습니다. 봉고차도 저희에게 꼭 필요하지만, 한 가지 부탁을 더 드리고자 합니다.”
“예, 말씀하시지요.”
“전국 고아원 아이들은 만 18세면 법적으로 독립을 해야 합니다. 시설을 나가면 국가도 돌봐주지 않고, 시설 원장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 역시 새벽부터 우유 배달, 신문 배달, 구두닦이 등 갖은 고생을 해야 겨우 학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고아들도 도와주면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조건 없이 대학 장학금을 주십시오!”
내 말이 끝난 뒤 정 회장은 그 자리에서 문 상무와 담당 부장에게 지시했다.
“즉시 파악해서 장학금 전액과 생활비 일체를 주도록 하지.”
내 삶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짜릿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 회장 지시와는 달리 이후 실제 장학금을 지급할 때는 등록금만 나왔다. 생활비의 경우 정확한 통계나 계산을 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실무진에서 달리 결정한 것이었다.
천사원 출신 중에는 80년부터 현대 아산재단에서 받은 장학금으로 공부한 학생들이 여러 명 있다. 아산재단은 81년 천사원 내 대영학교에 필요한 책걸상 등 비품을 제공했고, 은평재활원과 서부장애인종합복지관 등의 시설 개선 작업에도 기금을 지원해 줬다.
나는 그 이후 김 장관이 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순직했다는 비보에 몹시 가슴 아팠다. 생존해 계셨더라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분이었고, 천사원과도 더 많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컸다.
***[역경의 열매] 조규환 (12) 의사 친구 수술 도움으로 ‘제2의 생명’ 얻어
의사 고창준 박사는 내가 처음 장애인 시설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열렬히 반대했던 친구 중 하나였다. 그의 의견들은 오늘날 천사원의 모습을 있게 한 밑거름이 됐다. 그가 그토록 반대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일을 자칫 쉽게 생각하고 덤볐다가 큰코다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 박사 역시 학창시절 집안이 어려웠다. 그는 어렵게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그리고 군의관으로 있을 때도 꾸준히 천사원에 자원봉사를 왔다. 그는 평생의 친구이자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기도 하다.
1994년 말이었다. 기침이 계속 났는데 ‘이러다 말겠지’하는 생각으로 방치한 것이 화근이었다. 어느 날 뒷산에 올라갔다가 숨이 차서 기침을 했는데 손수건에 피가 묻어 나왔다. 세브란스 병원에 열흘을 입원했다. 각종 검사를 다 했는데도 병명을 알 수 없었다. 다만 폐에 작은 혹 같은 것이 보인다는 진단이었다.
담당의사는 결핵이나 암, 둘 중 하나라는 소견을 냈다. 내 생각에도 결핵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암이라는 말인데…. 그 무렵 가까운 목사님이 암 수술을 했다가 도리어 수명을 재촉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서둘러 퇴원을 했다. 아내의 동의도 구했다. 만약 암이라면 수술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대로만 살겠다고.
때는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성탄 분위기에 들뜬 천사원 아이들을 보는 심경이 남달랐다. 얼마나 더 살게 될까? 이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데 고 박사의 급한 전화를 받았다.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당장 수술을 해야겠다며, 내 의견도 듣지 않고 그 자리에서 수술 예약을 했다. 일단 수술을 해 봐야 병명을 알고 정확한 치료도 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결국 며칠 뒤 나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이보다 20년 전 맹장 수술을 받을 때에는 ‘아, 이제 죽는구나.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에 스트레스를 무척 많이 받았었다. 나중에 고 박사가 “맹장 수술로 죽는 사람이 어딨나”라며 웃어 넘겼지만, 난생 처음 받는 수술이라 그랬는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병명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큰 수술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도리어 편안했다. 죽어도 하나님의 뜻, 살아도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기로 했다. 수술은 8시간 동안이나 계속됐다. 폐의 일부분을 도려내는 수술이었다.
알고 보니 내 병은 국균종 감염이었다. 폐에 있던 그것이 암 세포가 아니라 곰팡이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수술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균이 기도까지 감염돼 치료할 도리가 없을 터였다. 내가 입원했을 당시에도 같은 병을 앓던 사람이 결국 사망했다고 들었다.
수술 후 입원해 있으면서 나는 ‘내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천사원 출신 아이들이 앞 다퉈 병실을 찾아왔다.
“원장님, 적은 액수나마 치료비에 보태세요.”
“꼭 건강해지셔야 합니다. 저희들한텐 원장님밖에 없어요.”
나중에 다 모이고 보니 1500만원 정도 됐다. 세브란스 병원 측에서는 입원비도 면제해 줬다. 아이들이 가져온 돈은 고스란히 천사원에 기부했다.
건강을 되찾은 나는 내게 생기는 돈은 모두 남을 위해 쓴다는 원칙을 지키며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 삶을 허락해 주셨으니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조규환 (13) 처 고모 도움으로 1995년 재활센터 흰돌회 설립
교도소에 장기 복역한 후 출소한 이들이 사회에 적응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출소한 이후 돌아갈 가정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경우다. 많은 이가 결손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커서는 범죄자 낙인이 찍힌다. 그러다 보니 전과자인 이들은 대체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범죄를 다시 저지를 확률이 높다.
흰돌회는 재소자와 출소자의 사회재활을 돕기 위해 이화여대 영문과 윤정은 교수가 1995년 창립한 민간단체다. 윤 교수는 내 아내의 고모가 되는데, 어느 날 퇴직금으로 받은 돈의 일부로 전셋집을 얻어 출소자들을 돕겠다는 뜻을 전달해 왔다. 갓 출소한 사람에게 숙식을 무료로 제공해 생활기반을 마련해 주고, 이들이 기술을 배우거나 일자리를 얻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취지였다. 그래서 윤 교수가 회장, 내가 부회장을 맡아 흰돌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윤 교수는 동료 교수와 제자들, 지인을 통해 후원금을 모으는 한편 출소한 사람에게 일거리를 찾아주기 위해 애썼다. 그 중 하나가 이화여대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일이었는데, 최근까지도 흰돌회에 소속된 출소자 다섯 명이 그 일을 담당해 왔다.
안타깝게도 윤 교수는 200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흰돌회는 은평천사원에서 맡아 운영하게 됐다. 윤 교수가 암으로 투병하던 당시, 천사원에서는 부지 일부를 매각한 돈으로 응암동에 출소자를 위한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윤 교수는 몹시 기뻐하면서 개관식 날 흰돌회 현판을 직접 달았다.
흰돌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개 3∼4년 부지런히 일을 해 돈을 모아 독립해 나간다. 17년을 교도소에서 지내다 나온 한 출소자는 내가 주례를 서서 결혼도 했다. 부인도 함께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더니 흰돌회에서 처음으로 집을 사서 나갔다. 철물 줍는 일을 했던 그를 돕기 위해 천사원에서 공사하고 버리는 건축 폐자재를 넘겨주기도 했는데, 과연 보람이 있었던 셈이다. 최근 후원금 100만원을 들고 찾아온 그를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흰돌회를 거쳐 간 사람은 120여명에 이른다. 흰돌회는 국고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해 기부금만으로 빠듯하게 운영되고 있다. 그래서 흰돌회 직원에게는 월급을 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모자쉼터’를 운영할 경우 서울시에서 직원 월급을 지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것을 계기로 모자쉼터의 문도 열게 됐다. 다세대주택 7세대짜리 두 곳을 전세로 얻고, 인근에 단독주택 한 채도 장만해서 새롭게 시작했다. 그렇게 흰돌회는 출소자 쉼터와 모자가정 쉼터를 따로 운영하는 형태로 발전해 오고 있다.
모자쉼터는 사업 실패나 배우자의 사망, 가정 폭력 등으로 노숙 직전에 놓였거나, 이미 노숙 생활을 하고 있는 모자 가족을 지원하는 단기보호 생활시설이다. 입소한 아이들에게는 방과 후 공부방과 청소년수련관을 이용토록 지원한다.
나는 흰돌회를 계속 키워 나갈 계획이다. 현재 출소자, 모자가족이라는 두 흰돌회의 사무실은 물론, 거주지 자체를 완전히 분리해 운영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이다. 두 번째 장기적인 계획은 흰돌회의 이름으로 서울역 주변 노숙인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출소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집 한 채를 사서 쉼터를 만들고, 서울역 앞에 상담소를 개설해 자립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다 살게 하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조규환 (14) 대한사회복지회장 시절 도서문제로 노조와 갈등
대한사회복지회는 1954년 1월 보건사회부 아동과가 설립한 한국아동양호회(Child Placement Service)가 모태다. 정부 차원에서 고아와 혼혈아동의 입양을 목적으로 세워진 기관인 것이다. 홍옥순 여사가 보건사회부 장관의 위촉을 받아 초대 회장에 취임했고 전국 고아원 700여개 시설, 수십만명의 전쟁고아들을 해외로 입양시키기 시작했다.
내가 관선이사로 일했던 1980년대 초반 당시 대한사회복지회 직원들은 서울 본부, 한서병원, 의정부 임시보호소, 부산복지관 및 일시보호소, 광주영아원, 나주영아원 등을 포함해 모두 300여명에 달했다. 나는 은평천사원에서 반나절, 대한사회복지회에서 반나절을 근무하면서 틈틈이 전국 시설을 돌며 직원들을 격려하고 다독였다. 또 외국 기관장을 초청, 예산 등을 설명하고 입양비 증액을 부탁하기도 했다. 대부분 흔쾌히 승낙해 준 덕분에 대한사회복지회는 4대 입양기관 중 처음으로 1인당 1000달러의 예산 인상을 끌어낼 수 있었다.
이후 나는 회장으로 또 다시 근무하게 됐고 89∼91년 부산사회복지관 위탁, 강남구립도서관 위탁, 광주탁아소 신축, 임시재활원 건축비 확보 등의 성과도 냈다. 내가 관선이사로 가기 전에 있던 노조와의 문제도 원만히 해결돼 임기 후반에는 대체적으로 일이 순조로웠다.
그 무렵 작가 정도상씨가 ‘샘이 깊은 물’에 발표했던 단편소설 ‘아메리칸 드림’을 각색해 김수영 감독이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이 작품 내용이 지나치게 자극적인 바람에 논란이 빚어졌다. 미국 가정에 입양된 한국 아동의 이야기였는데, 이 아이의 심장이 평소 심장이 약했던 주인집 아이에게 제공됐고 아이의 시체는 쓰레기통에 버려진다는 내용이었다.
입양 기관들은 일제히 주한 미국 대사관과 정부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영화 제작을 막아야 한다”는 탄원서를 냈다. 이런 내용이 영화화된다면 그때까지 아이를 해외로 입양한 친부모들의 심경이 어떻겠느냐는 우려도 나왔다. 또한 이후의 해외 입양이 지극히 비도덕적 행위인 것처럼 오인될 위험도 컸다. 결국 미 대사관 영사가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영화 제작은 중단됐다.
그런데 대한사회복지회 노조가 그 책을 구입해 읽으라는 내용의 공고를 냈다. 나는 노조 위원장을 불러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회장님, 미국 놈들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일 뿐인 것을 실상과 혼동해서야 되겠는가. 더구나 입양 기관에 몸담고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온당치 못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나는 노조 위원장의 대답을 듣고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이보게, 왜 우리가 미국으로 아이들을 입양 보내는 일을 하고 있을까. 자네 말대로라면 지금 당장 이 일도 중단해야 되지 않겠나. 안 그런가?”
노조 위원장이 내 야단을 들은 뒤 나와 노조 사이에는 갈등이 생겨났다. 점차 의견 대립이 심해졌다. 노조가 본격적으로 나를 반대하기 시작하자 나는 회장 자리를 내주고 퇴임했다. 이후 퇴직금 문제로 마찰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받은 퇴직금 전부를 서울 상도동에 있는 한 고아원에 기부해 장마로 무너진 담장을 보수토록 했다.
***[역경의 열매] 조규환 (15) ‘따뜻한 겨울보내기…’는 모금의 참 의미 알리는 계기
나와 가족, 그리고 이웃을 뜻하는 세 개의 빨간 열매. 바로 사람들의 상의 가슴팍에 달려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 ‘사랑의 열매’다. 이 사랑의 열매는 저소득층을 지원하고 사회복지기금을 조성하는 일을 담당하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상징이다.
나는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 3, 4대 회장으로 일했다. 2002년 말부터 2006년까지 4년 동안의 일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에는 모금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전문가도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모금에 관해서 만큼은 스스로 전문가라고 자부한다. 1959년부터 아펜젤러 할머님의 편지를 통한 모금 활동을 옆에서 지켜봤고, 이후 수십년 동안 현장에서 모금 활동을 벌였다. 모금에 대한 강의도 제법 해 왔다.
모금하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받을 줄만 알지 이후 처리를 잘하지 못하는 것이다. 후원금이든 물품이든 간에 받고 나면 영수증과 함께 감사 편지를 보내야 한다. 이것은 기본 중 기본이다. 베푼 사람들에게도 만족과 보람을 느끼도록 해서 그 선의의 후원이 계속 이어지게끔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테면 후원자가 보내준 10만원으로 무엇을 했는지, 몇 명의 아이들이 어떤 혜택을 받았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아이들이 쓸 학용품을 샀다든지, 몸이 불편한 원아에게 필요한 의료 기구를 샀다든지 하는 아주 세세한 쓰임새를 말하는 것이다. 후원자들 역시 그런 베풂과 나눔의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런 노하우를 바로 아펜젤러 할머님께 배웠다.
무엇이 필요한지, 무슨 일을 하는 데 얼마가 필요한지, 왜 그만한 돈을 들여 그 일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것 역시 중요하다. 아주 기초적인 것이지만 모금하면서 당장의 목표 액수를 채우는 데만 급급하다 보면 소홀하기 쉬운 점들이다.
내가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으로 취임해 한 일 가운데 특히 성과가 컸던 것은 ‘따뜻한 겨울 보내기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진행되며, 지금도 계속되는 것으로 안다.
큰 성과를 못 내던 이 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나는 서울시내 25개 구청끼리 경합을 벌이도록 만들었다. 모금 액수에 관한 선의의 경쟁이었다.
나는 모든 구청을 일일이 방문해 모금에 관해 설명하고, 100만명 후원자 운동에 구청장이 앞장서 주기를 요청했다. 처음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구청장들도 각 구청에서 모으는 성금 전액을 구청장 이름으로 구민을 위해 쓰도록 하겠다는 파격적 제안을 하자 큰 호응을 보였다.
서초구청의 경우 2000만원을 밑돌던 모금액이 2002년 겨울 직접 구청장을 방문한 이후 3억원을 넘어섰다. 성과가 가장 높았던 용산구청은 10억원 이상을 모았다. 이렇게 서울 25개 구청마다 불우이웃돕기 성금 모금액이 몇 배씩 증가했다.
나는 직접 찾아가는 방식과 함께 이러한 모금액의 추이를 자료로 만들어 언론사에 뿌렸다. 이것이 지역 신문을 비롯해 여러 언론매체에 기사로 나가면 구청장들은 예민해지게 마련이다. 경쟁 아닌 경쟁이 돼 간혹 볼멘소리들을 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모인 돈이 전부 각 지역의 소외된 이웃들에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결코 원망할 일만은 아니었다.
***[역경의 열매] 조규환 (16) 나눔센터 설립… 도움 받다 지구촌 이웃 도와 뿌듯
은평천사원의 지난 51년을 보면 정부보다는 개인이나 민간기업 차원의 후원이 더 컸다. 그리고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외국인들의 후원이 많았다.
우리 천사원도 이제는 지난 세월의 지원에 대한 은혜 갚음에 나서고 있다. 그 중 하나는 1990년대 초 중국이 개방될 무렵 중국 옌지에 복지관을 짓고, 직원을 교육시켜 파송한 일이다. 2000년부터는 우즈베키스탄 캄보디아 필리핀 등의 소외지역을 방문해 재활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모금활동도 꾸준히 진행하는 중이다. 우리는 10여년 전부터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한 성금을 보내고 있다. 1년 동안 천사원 내 교회에서 모금한 금액을 우간다와 캄보디아의 고아원으로 보낸다. 1950년대 한국의 많은 전쟁고아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다.
기억에 남는 모금활동 중 하나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수해를 입은 미국 뉴올리언스 주민들을 위해 처음으로 1만 달러 이상의 헌금을 보낸 일이다. 미국에 도움을 주는 입장이 됐던 그때의 뿌듯함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북한의 빈곤 지역에 1만 달러의 기금과 의약품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보다 조직적으로 해외원조 사업을 전개해야겠다는 판단에 따라 2007년 8월 ‘나눔센터’를 개관했다.
천사원 나눔센터는 빈곤과 질병, 재난으로 인해 고통 받는 북한과 지구촌 어린이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구호활동과 지속적 개발사업을 실행하는 기관을 지향한다. 또 나눔센터를 통해 우간다 고아원으로의 식품과 의료 지원사업도 매달 정기적으로 해 나갈 수 있도록 했고, 일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캄보디아 네팔 등 현지 봉사활동도 지원하게 됐다.
2008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천사원을 방문했을 때 그는 무슨 이야기 끝에 “우리나라가 창피하다”고까지 말했다. 경제 수준에 비해 한국의 해외 지원 수준은 너무나 열악하다는 의미였다. 반 총장은 한국의 이미지가 자칫 ‘받기만 익숙하다보니 남에게 베풀 줄은 모르는 나라’로 굳어질까 우려했던 것이다.
한국의 해외 파송 선교사 숫자는 해마다 느는 추세다. 자원봉사자들도 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해외 원조를 위해 큰 돈을 쾌척하는 개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왕이면 한 핏줄인 국내 어린이들이나 가난한 청소년들을 돕고 싶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해외에 긍정적인 한국의 이미지를 심는 일 또한 국익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에이즈 환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는 캄보디아 같은 나라들의 경우, 의약품과 올바른 교육활동을 지원해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일을 막는 것이 절실하다. 또 식수가 부족한 아프리카 국가들에는 우물을 파 줘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생존과 관련된 아주 구체적인 문제점을 지닌 해외 국가들을 그저 ‘먼 나라 이야기’라고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앞서 다른 선진국들이 우리가 당면해 있던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도 있는 것이다.
나눔센터는 이제 막 출범한 단계다. 그러나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본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때를 생각하면 천사원은 정말 짧은 시간 안에 눈부시게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조를 받는 입장이었던 것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닌 만큼 아직도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노하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조규환 (17·끝) 천사원의 소임 다하며 말씀대로 살아갈 것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몹시 심했다. 장애인들은 불구자, 폐질자 혹은 병신 등으로 비하됐고, 사회의 제반 제도에서 소외돼 있었다. 특히 지적장애인의 경우에는 그들을 위한 보호·양육시설이나 특수학교는 찾아볼 수 없었고, 골방에 가두거나 버려졌다가 시립병원 등에 수용되는 것이 허다했다.
78년 어느 날 나는 서울시립아동병원 김기수 원장의 안내로 병원을 둘러봤다. 그곳은 병원이 아니라 장애아들의 고아원과 다름없었다. 병원에 수용된 300여명 모두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었고, 그들 때문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다른 아동들의 입원 치료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김 원장이 하소연했다.
“조 원장, 도와주십시오. 장애아동은 계속 늘어나는데, 아무도 장애고아원을 운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직업보호시설을 운영할 계획을 바꿔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하겠다고 김 원장에게 약속했다.
장애고아원 설립을 위해 모금도 하고, 조언도 받고자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모두가 반대했다. 특히 의사나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국가도 못하는 장애인 시설을 어떻게 개인이 운영하느냐”며 “장애인에게는 교육, 치료, 재활 등의 통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데, 일개 사설 고아원 차원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립병원에 있던 장애아들이 눈에 밟혀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리라 믿고 기도하면서 무작정 장애아동들을 위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는 재원과 후원금을 모두 합쳐도 자금이 모자라 가까운 친구에게 2000만원을 빌리기도 했다. 그렇게 80년에 건물을 준공하고 시립아동병원에서 40명의 장애아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학년당 2학급(학급당 20명)씩 개설 허가를 받아 특수학교를 시작했다.
학교만으로는 장애인들에게 충분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애인을 위한 전문적인 종합복지관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선교부는 당시 현금 20만 달러와 종로 지역의 땅 617평을 기증해 줬다. 이를 통해 점차 복지관, 재활병원, 재활체육센터 등 여러 시설과 기관을 갖출 수 있었다. 현재는 하루 평균 1000명이 넘는 장애인이 천사원 내에서 교육, 치료, 재활, 직업 훈련 등의 서비스를 받고 있다.
나는 천사원을 설립하신 고 윤성렬 목사님께 많은 영향을 받았다. 목사님은 “남을 도울 때는 작은 기부를 해도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드려라. 돕는 일도 정성을 다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신다” “정직해라, 근면해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등의 말씀을 항상 하셨다. 그분은 90세가 넘어서도 신촌에서 천사원까지 늘 걸어오시면서 노끈을 주워 판 돈으로 천사원 운영자금을 보태 주셨다. 또 돌아가시기 전 자기 소유의 물건을 모두 팔아서 뉴기니 선교에 바치셨다.
나는 그를 닮으려고 파주 오산리기도원, 철원 대한수도원 등을 다니며 기도했고 요즘도 새벽기도회 때마다 천사원 기관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기도한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처럼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대로 살아가며 천사원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길 소망한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