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방<내일을 여는 작가> 2017 신인상 당선작 _ 게스트하우스(외 5편)/ 박금주
강인한작성시간16:14 조회수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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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작가> 2017 신인상 당선작 _ 게스트하우스(외 5편)/ 박금주
심사위원 : 박소란, 오세종, 황규관
게스트하우스 (외 5편)
박금주
목적지에 대한 강박은 없어요. 떠나는 게 먼저니까요. 한 칸의 방이 있다면 어디여도 좋아요. 여행지의 방 한 칸이란 창문에 걸린 낯선 하늘빛과 이름 짓기 힘든 모호한 냄새와 작은 거울 속 낯익은 얼굴 하나로 완성되지요. 하루가 저물면 관절 삐걱대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쳐다봅니다. 무슨 얘기라도 들으려고 귀가 커다래진 방에게 조심스럽게 말하죠. 아기를 낳으러 왔다고요. 방은 놀라지 않아요. 살아 있는 건 뭐든 낳게 마련이니까. 뱃속 아기는 때가 되면 제 길을 밝히잖아요. 그만한 여행이 또 어디 있겠어요. 그래요, 내 속에 너무 오래 있어 팔다리가 길게 자란 아기, 이제는 떠나겠다, 보내 달라 보채는 아기를 낳으러 왔어요. 이 동네에 강이 있다는 얘길 들었어요. 작은 개울이어도 괜찮아요. 흐르는 물속에 들어가 피로 깜깜하게 엉겨 붙은 아랫도리를 벗고 편안히 앉겠어요. 길고 긴 진통이 온몸을 후벼 파겠죠. 그러다 마지막 산통으로 새벽녘이 다시 깜깜해진 순간 뜨거운 피와 함께 아기를 바깥으로 쑥, 밀어내겠죠. 박명에 온몸이 푸르스름하긴 해도 분명 예쁠 거예요. 그건 내가 오래 품어온 슬픔이니까요. 아이는 나를 알아보고 내 손을 잡고 인사를 하죠. 그리고 서둘러 떠나가지요. 안녕, 아가야, 나는 기꺼이 그 애를 놓아주겠어요. 그러면 나는 마음속에 빈자리를 간직한 어미가 될 테지요. 거기에 작은 창과 향기로운 차와 따뜻한 벽난로가 있는 방 하나를 꾸미겠어요. 언제나 슬픈 얼굴의 손님을 먼저 재우겠어요. 그 손님은 아마도, 내가 낳은 당신일 테니까요.
골목
환한 대낮이었으면 그냥 지나칠 뻔했지요
누가, 낡은 양말 목을 뒤집어 들고 다급히 부른 것처럼
걸음 세워 왼쪽으로 고개 돌려 바라본 거기
방금 휘저어진 우물 밑바닥 같은 표정으로 골목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늘 속 더 진한 그늘로 담에 기대 담배를 피우던 사내가
아무렇게나 밟아 끄고 간 담배꽁초 같은 시간들이 먼 데서 달려오고
내가 참석한 연회와 가담하지 못한 모의의 순간들이,
쿵쿵 뛰었을 골목의 심장과 숨죽인 작은 창문들을 흔들어댔습니다
끝 간 데가 막다른 유전자를 나눠 가진 골목과 내가 함께
발목을 담근 적이 있던 이곳,
우리, 만난 적이 있었던가요
만난 적 없으나 잘 알고 있는 숱한 기척들이 술렁이며
좁은 골목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전생을 송두리째 던져 넣어 펼쳐봅니다
매일 하품을 하듯 새벽을 낳아 두런두런 기르고 싶어
어둠이 시간을 가두어버리듯 쿵쿵대는 아이들의 발소리를 채집하고 싶어
함락되지 않는 저 담쟁이들을 삼키고 싶어
백열등 아래 선 것처럼 첫눈에 당신의 속내가 다 들여다보였습니다
울음처럼 내려앉는 어둠을 받아 마시다 사레들린 듯
좁은 목구멍을 뒤틀어 나를 뱉어내며 골목이 말했습니다
얼마나 더 흘러야 물이겠습니까
얼마나 더 가야 당신이겠습니까
침엽, 겨울
얼굴 가릴 필요 없으니 부끄럼이 없지
표정을 잘게 쪼개면 오히려 당당하지
숨바꼭질, 꼭꼭 숨어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지
잎끝이 뾰족한 건 본능으로 치장한 자존심 때문
뿌리가 있어도 움직이지 말라는 법 없지
오히려 멀리 왔지 활엽을 활활 벗어
엄마의 질 속 산도를 지날 때 다 두고 왔지
성큼 고도를 높일 때마다 바뀌는 꿈자리
손 내밀기 어려운 의도 없이도 피를 볼 수 있어
젖 떼자마자 각자의 공간에 갇히는 맹수들
우린, 서로 손잡을 수 없지만 손잡고 싶고
손잡으려 해보는 건 죄가 없는 극한
끝 간 데까지 밀어붙여 뾰족하게 손톱을 벼리지
이 계절은 이빨도 없이 몸이 얼었다 녹는 사이에
자꾸만 생이 누설되어 비밀을 잃어버리지
비밀 없는 얼굴을 본 적 있니
겨울 속에는 있지
본적 없이 떠도는 주소마다
하얀 눈 꼭꼭 찔러 피멍 든 자리
잎 넓은 불안이
창문 없는 다락방 어둠에 눈먼 아이들을 덮칠 때마다
명치끝 통증은 바늘 끝처럼 더욱 예리해지네
편견 없는 눈송이 하얗게 내려와 서러운 누명을 덮어주지
고작 얼굴 좀 가린다고 부끄러울 건 없지
코끝 빨간 겨울 내내 선명하게 당당하게
발아
사실 나는 내 이름을 모르네
설거지하던 대낮이었네
수돗물 틀어놓고 밥풀 묻은 주걱을 씻고
밥그릇을 씻고 국그릇을 씻고 달그락달그락 숟가락 젓가락을 씻고
어어, 놀란 표정으로 줄줄 따라 나오는 내장을 씻고
순식간에 속이 텅 비어버리데
그 텅 빈 적멸로 가만히 흙이 차오르데
배꼽 저 아래부터 차곡차곡 목구멍까지
청결한 흙이 가득 들어찬 순간
신기하게도 나는
이른 봄 들판에 흩뿌려진 씨앗처럼 기대에 차서
자루를 뒤집어 마지막 씨앗 한 알까지 다 털어내고 돌아가는 농부의 뒷모습을
저만큼 멀어지도록 바라보는 것처럼 흐뭇해져서
툭, 등껍질이 터지는 줄도 몰랐네
갈라진 등줄기 틈에서 조그맣고 부드러운 날개 한 쌍이 한낮을 뜨겁게 지피는 사이
하얀 실뿌리들은 흙 속을 파고들어 아래로 아래로 발을 뻗고 있었네
설거지 끝난 한낮이었네
살강 위 뽀얗게 헹구어진 그릇들의 이마가 환하고
꼭 짠 행주를 탈탈 털어 널다가
잠깐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것뿐인데
수건에 문질러 닦아 말린 두 손으로
옆구리인지 등인지를 벅벅 긁어댄 것 같은데
양팔을 쭉 펴서 기지개를 켠 것 같은데
하늘을 향해 아아, 하품을 한 것도 같은데
그만, 내 과거를 까맣게 잊고 말았네
표백
엄마를 중얼중얼 접어 노트에 끼워 넣고 베개로 눌러놓았는데 어느새 그림자가 길게 자라 노트 밖으로 삐져나온다. 어떤 과거는 동물성이어서 자꾸만 기어 나오는 습성이 있다. 그때마다 입을 아, 벌리고 나는 굽이쳐 흘러온 어제의 동선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언젠가 이 부식된 경첩을 고쳐 달아야 한다.
기름 먹인 한지장판이 노오란 햇살에 눌렸다. 한참을 서 있다 뒷걸음으로 나오던 주인집 안방, 묵은 살림 냄새와 조금 열린 문갑 서랍 앞에서 내가 나를 멈추게 한 그 방, 이젠 닫을 수가 없다.
도벽은 어린 가시내를 다락에 가두고 노트 위 눌러둔 베개에 얼룩진 얼굴을 눕혔다. 배고픈 건 질색이야. 아무것도 읽을 수 없잖아. 그동안의 무채색들로도 충분히 어지러워. 표지 아래 목차도 없는 어제가 자꾸만 훌쩍거렸다.
오늘의 엄마가 어제의 내 손을 잡고 오래전 그 방문을 닫을 수 있을까. 그림자에 묻어 삐져나온 엄마를 노트에 도로 집어넣고 중얼중얼 주문을 왼다. 이제 그만 죽은 거라 쳐. 어제의 엄마를 오늘로 데려올 수 없으니까. 삐뚤하게 기울어진 젖가슴을 가진 당신, 참 미웠어. 그래서 참 죽이고 싶은 나였지.
밤의 배스킨라빈스
쇼윈도에 아이들이 매달려 있다
이국적 향과 색과 맛을 가진 아이스크림들은 아주 달고 아주 차다
마주 앉아 각자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젊은 커플들
서로에게 차갑게 소속되어 있다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사던 때가 있었다
양초와 고깔모자와 폭죽과 생일축하 노래 같은 것들
숟가락이 닿으면 아이스크림은 녹기 시작하고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처럼 빨리 녹아 어른이 된다
아껴 먹던 초콜릿과 젤리 장식처럼
시간이 갈수록 더 선명하고 단맛이 더해지는 기억처럼
머리 위로 찬 별들이 눈물을 찔끔거리며 지나간다
자정이 되면 불이 꺼지는 배스킨라빈스
늦게 도착한 손님이 불 꺼진 배스킨라빈스를 들여다본다
신기루는 냉동고 속에 차갑게 얼어 있다
한 생을 거의 다 퍼 먹었다
이국적 향과 색이었고 그리 달지 않았다
차갑고 달콤한 것들이 다 녹기 전에
혀로 핥아 먹을 거다, 마지막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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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금주 / 1959년 부산 출생. 서울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제주대 교육대학원 상담심리학 전공. 현재 제주에 거주하며 심리상담사로 활동 중.
?《내일을 여는 작가》 2017 상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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