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緣起 속의 인과因果>
세계는 물질계와 정신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질계는 정신계의 영향을 받고, 정신계는 물질계의
영향을 받습니다. 물질계가 정신계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내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내가 주재主宰할 수
있는 물질이 있다는 것으로 증명이 됩니다.
머리 아플 때 게보린을 먹느냐, 타이레놀을 먹느냐가 그렇고, 승용차를 고르는 일, 옷과 음식을 선택하는
일도 내가 물질계에 영향을 주는 일입니다. 숨 쉬고 방귀 뀌는 일도 당연지사 물질계에 주는 영향력입니다.
반대로 물질이 내 마음을 빼앗아 가니, 물질계가 정신계에 영향을 받는다고 단정해도 됩니다.
우유주사라 불리는 마취제의 일종인 프로포폴propofol에 중독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것 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물질이 정신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부정 할 수 없게 만드는 일입니다.
(저는 몇 차례 내시경 검사시에 이 약을 투여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수면마취 검사를 했으니
유사한 약효가 있는 약이 투여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경우 인과因果가 별 오차 없이 유추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요. 그런데, 내게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더군요. 간호사 말이 “1차 투약에 효과가 없어
통상량의 2 배를 주사했는데 안 졸립냐?” 하더군요. 결국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위·대장 내시 경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대장 내시경은 장 속을 비우는 관장을 밤새 한 것이 아까워서 했는데 아파 죽는 줄
알았습니다.)
1차 정리를 한다면 물질〔事〕과 정신 혹은 마음〔理〕은 상호 연기緣起관계에 있다는 말입니다.
인·연·과는 간단없는 이와 사의 한 단면 을 ‘사건적’으로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붓다는 연기를 체득한 최초의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붓다는 세계에 현현되는 인과 연과 그 과보를 다 아셨을까요?
역사적 붓다는 세계의 존재 원리인 연기를 체득했지만, 이와 사 가 어우러져 세상에 나오는 인·연·과를 다
알 수 없었습니다. 공장에서 출시된 그 많은 스마트폰이 어떤 인연으로 누가 왜 구입하는 것까지 알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화엄경』에서는 보살 정도만 되어도 무량 법계의 낱낱 중생의 그 업과 과보를 모두 안다고 말합니다.
그건 법계=연기=비로자나 법신불로 발전한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완벽한 일체의 개념, 허물 없는
완벽한 붓다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상적 발전이 신앙과 결합해 추론 된 것입니다.
고타마 붓다는 연기라는 체體를 확인한 ‘깨달음’을 얻은 후 말씀하십니다.
“연기는 내(여래)가 태어나기 이전이나, 내(여래)가 멸한 후라도 나 와는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연기에 확철한 경계라는 것은, 인간의 욕심과 작위로 인因과 연緣을 엮어가서 만들어
내는 과果라는 것을, 아주 미미하고 소소한 일로 여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마음의 무한 팽창을 이룩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인간이 어떤 문제에 자신의 마음의 10%쯤 빼앗기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이것을
반인 5%로 줄여 집착과 번뇌 역시 반으로 줄이는 일도 가능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10배로 확장
시킨다면 이 역시 빼앗기는 마음을 10%에서 1%로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뜻입니다.
고타마 붓다는 마음을 극대화시켜 인간이 갖는 모든 욕망을 아주 미미한 수준으로 낮추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감각기관을 다스리는 초기 수행의 방법론이며, 번뇌의 불을 다른 곳으로 번지지
못하게 단속한 붓다의 열반의 경지였던 것입니다.
고타마 붓다도 곳곳에서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드러냅니다. 제자들을 야단치고, 우열도 가리고, 갈증이
일 때는 목말라 하며, 늙고 병드는 육체적 고통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연기의
관점에서는 마치 태양에 물 한방울 더한 것과 같은 의미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연·과를 도식화하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통해 인·연·과를 깔끔하고
명백하게 밝혀낸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이것은’ 분명한 인·연·과의 과정이라고 증명해 낼 수 있는 것이 몇 가지나 되겠습니까?
‘술을 마시면 취한다’는 것은 사실 이지만 어떻게? 왜? 취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경전과 논서들에서 인과는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불이 있으면 뜨거우니,
인과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생에 가난한 인因은 과거생에 인색하게 살았기 때문이다”라는
모범적인 경전적 해석과 의존은, 붓다의 연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원죄론적 인과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는 것입니다. 연기 자체에는 선악이 없습니다. 인과에도 선악이 없습니다.
따라서 인과응보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는 인과에
징벌적 도덕률을 극대화시킨 것입니다. 연기의 부분집합으로 벌어지는 인과에는, 선이나
악이라는 인간의 자기 편의적 분별이 섞일 수가 없습니다. 인과는 연기의 한 단면이고 연기는
우주와 법계의 존재 그 자체와 질서로, 인간의 분별심이 오염 시킬 수 없는 자리입니다.
붓다께서는 이 원리를 깨달으셨기에 시비와 분별, 선과 악, 태어남과 죽음, 이런 온갖 양변을
여의고 중도의 자리에 안착하셨던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