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안도현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 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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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인의 시집<북항>에 실려있는 시입니다.
자연과 함께 순리대로 유유자적 살아가는 일상이 참 평화롭습니다.
국화꽃도,사슴벌레도,감나무도,기러기도 사람과 구별없이 귀히 여기고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마음을 따스하게 하네요.
시를 소리내어 읽다보면 복잡한 일들이 전혀 복잡하지 않게 느껴지지요.
애쓰지 않아도 오전 지나 오후가 될 것이고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마다 밥을 먹지요.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하고 시인은 묻네요.
숨이 막힐 것 같은 더위도 곧 지나갈 것이고 서늘한 바람이 당도하겠지요.
이렇게 자연에 잠시 머물러 보는 것도 다시 나아가기 위한 발돋움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감상/어향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