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춘천 이야기33
백대자손지지를 선택한 춘천 박 씨 시조 박항의 묘
<샘밭 장본 마을에서 태어난 박항>
겨울이 되었건만 박항의 전설이 서려 있는 봉의산 언저리에는 늦가을처럼 안개가 걸쳐 있다. 날씨 뉴스에서는 밤부터 추워지고 눈이 내린다고 했다. 슈퍼컴퓨터를 운영하니 날씨 예보가 맞을 것이다. 집 밖으로 내려다보니 박항이 태어나 살았다는 신북읍이 흐릿하게 보인다.
박항(朴恒, 1227~1281)은 신북읍 발산리 장본(章本)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너른 샘밭 들을 누비며, 맥국(貊國)의 옛 도읍지 발산리에서 꿈을 키웠다. 장본에 가면 맥국의 옛 자취가 보이는 듯하다. 박항도 그곳에서 맥국의 이야기를 들으며 학문에 매진했을 것이다. 그렇게 학문에 몰두한 탓일까. 그는 18살이 되던 1245년(고종32)에 문과에 급제해서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된다. 그는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찬성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사후에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으로 봉해졌고, 시호는 문의(文懿)였다. 글솜씨와 외교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박항은 효성이 지극했는데, 몽고의 침략으로 춘천이 함락되었을 때 부모가 사망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춘천 봉의산 전투에서 돌아가셨다고 들은 박항은 부모님과 닮은 시신 300구를 묻었으나 끝내 부모님을 찾지 못했다. 누군가 부모님은 포로가 되어 중국에 끌려갔을 것이라 하자, 박항는 사신으로 세 번이나 중국에 가서 부모님을 찾았다. 결국 부모님은 만나지 못했으나 중국 황제에게 전쟁통에 끌려온 고려의 유민(流民)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청하기도 했다.
<사랑마을에서 여생을 보낸, 여우고개의 주인공>
박항은 말년에 고향인 춘천 샘밭으로 돌아왔다. 그가 마지막을 보낸 장소는 율문리 사랑마을이다. 《춘천향토자료집》에는 사랑마을의 유래를 두 가지로 기록했다. 하나는 박항이 주민들을 사랑하는 은혜를 베푼 마을이라 해서이고, 또 하나는 박항이 사랑방에 나와 있으면서 오가는 손님을 맞이했다고 해서란다. 같은 책에 우두산 ‘여우고개’ 이야기도 전한다. 박항이 사랑방에 나와 있으니, 우두산 중턱을 사람들이 넘으면서 박항이 ‘여의한가’를 살피고 넘었다고 해서 ‘엿보는 고개’라 했는데, 나중에 변해서 ‘여우고개’가 되었다고 했다.
박항이 높은 벼슬을 하고 춘천에 적을 두었다고 해서 훗날 박항은 춘천 박 씨의 시조가 되었다. 춘천 관련 지리지에는 어디서나 박항의 이름이 올라있다. 그의 아들 박원굉은 인제군 기린면 현리의 하마비(下馬碑) 주인공으로 평장사의 벼슬을 지냈고, 유명한 외 고손 퇴계 이황(李滉)을 둔 박원비도 판서의 벼슬을 했다.
<사두형 백대자손지지에 묻히다>
박항은 춘천 율문리 사랑마을에서 지내다가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이야 100세 시대라 하지만 고려 시대 55세는 적은 나이가 아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자손들은 묏자리를 구했다. 그때 풍수가 두 가지 제안을 한다. 하나는 삼대정승판서지지(三代政丞判書之地)이고 하나는 백대자손지지(百代子孫之地)였다. 아들 박원굉은 영원히 자손이 이어진다는 백대자손지지를 택했다. 3대에 걸쳐 정승판서가 나고 마는 묏자리는 필요 없었다. 그렇게 정한 묏자리가 신북읍 유포리 무짓골에 있는 박항의 묘이다. 이곳은 산세가 사두안(蛇頭眼)에 해당하는데, 묘 앞에는 머굴봉[蛙峰]이 솟아 있다. 뱀의 먹이가 개구리이니, 자손들이 높은 벼슬은 하지 못해도 의식은 풍족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박항의 묘 뒤로 올라가 보면 산자락이 뱀의 형상처럼 길게 뻗어 있다. 그리고 훗날 머굴봉 앞에는 개구리가 사는 연못인 ‘아침못’이 생겼다. 아침못은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못이 생겼다는 ‘장자못전설’을 지니고 있다. 박항이 명당에 묻히고 자손들의 의식이 풍족한 원인은 살아생전 이웃 사람들을 사랑하며 화기롭게 지낸 덕택이 아니겠는가. 눈보라 치는 이 겨울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이웃은 없는지 살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