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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돈의 성 제롬】
Saint Jerome of Stridon (+ 420)
St. Jerome (Feast Day - June 15) 성 제롬 축일 (축일 - 6월 15일) |
Verses
Jerome the great died,
Not dissimilarly remaining great crowned.
제롬이 죽었고,
대왕관을 쓴 것도 다르지 않다.
Saint Jerome of Stridon was born around 347 into a Christian family in the city of Stridon located on the border between Dalmatia and Pannonia. His full name is Eusebius Hieronymos Sophronios. His parents sent him to Rome, where he studied the secular sciences. At the beginning of his life in the capital, the youth was captivated by worldly vanities and fell into temptations of the flesh. To appease his conscience, he would visit on Sundays the sepulchres of the martyrs and the Apostles in the catacombs. This experience would remind him of the terrors of hell:
"Often I would find myself entering those crypts, deep dug in the earth, with their walls on either side lined with the bodies of the dead, where everything was so dark that almost it seemed as though the Psalmist's words were fulfilled, Let them go down quick into Hell. Here and there the light, not entering in through windows, but filtering down from above through shafts, relieved the horror of the darkness. But again, as soon as you found yourself cautiously moving forward, the black night closed around and there came to my mind the line of Virgil, 'Horror ubique animos, simul ipsa silentia terrent' ('On all sides round horror spread wide; the very silence breathed a terror on my soul')."
Jerome the resolved to change his life and to live in virtue and purity. While in Rome Jerome studied under Aelius Donatus philosophy and rhetoric as well as learning Koine Greek. When the youth was about twenty years old, he accepted holy Baptism. After several years in Rome, he traveled with his friend Bonosus to Gaul and settled in Trier where he seems to have first taken up theological studies, and where he copied, for his friend Tyrannius Rufinus, Hilary of Poitiers' commentary on the Psalms and the treatise De synodis. Next came a stay of at least several months, or possibly years, with Rufinus at Aquileia, where he made many Christian friends.
스트리돈의 성 제롬은 347년경 달마티아와 판노니아의 경계에 위치한 스트리돈 시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모스 소프로니오스다. 그의 부모는 그를 로마로 보냈고, 그곳에서 그는 세속 과학을 공부했다. 수도에서의 생애 초기에 그 젊은이는 세속적인 허영심에 사로잡혀 육체의 유혹에 빠졌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위해 그는 일요일마다 카타콤바에 있는 순교자들과 사도들의 무덤을 방문하곤 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지옥의 공포를 상기시켜 줄 것이다.
"나는 종종 땅 속에 깊이 파놓은 지하실에 들어가곤 했는데, 그 지하실의 양쪽 벽에는 죽은 자들의 시체가 늘어서 있었는데, 그곳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어두워서 마치 시편 기자의 말이 성취된 것처럼 보였다. 여기저기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아니라 통로를 통해 위에서 흘러내려 어둠의 공포를 덜어주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검은 밤이 막을 내렸고, 베르길리우스의 대사 '공포의 유비크 아니모스, 시뮬라 입사 침묵티아 테렌트'('사방에서 공포가 넓게 퍼졌다. 바로 그 침묵이 내 영혼에 공포를 불어넣었다')가 떠올랐다."
제롬은 자신의 삶을 바꾸고 미덕과 순결 속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로마에 있는 동안 제롬은 아일리우스 도나투스 밑에서 철학과 수사학을 공부하고 코이네 그리스어를 배웠다. 그 젊은이가 스무 살쯤 되었을 때, 그는 거룩한 세례를 받아들였다. 로마에서 몇 년을 보낸 후, 그는 친구 보노수스와 함께 갈리아로 여행하여 트리어에 정착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신학 공부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그곳에서 그의 친구 티라니우스 루피누스를 위해 푸아티에의 힐러리의 시편 주석과 논문 De synodis를 복사했다. 그 다음에는 루피누스와 함께 아퀼레이아에서 적어도 몇 달 혹은 몇 년을 머물렀으며, 거기서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 친구들을 사귀었다.
Some of these accompanied him when he set out about 373 on a journey through Thrace and Asia Minor into northern Syria. At Antioch, where he stayed the longest, two of his companions died and he himself was seriously ill more than once. During one of these illnesses (about the winter of 373–374), he had a vision that led him to lay aside his secular studies and devote himself to God. He seems to have abstained for a considerable time from the study of the classics and to have plunged deeply into that of the Bible, under the impulse of Apollinaris of Laodicea, then teaching in Antioch and not yet suspected of heresy.
Seized with a desire for a life of ascetic penance, he went for a time to the desert of Chalcis, to the southeast of Antioch, known as the "Syrian Thebaid", from the number of hermits inhabiting it. During this period, he seems to have found time for studying and writing. He made his first attempt to learn Hebrew under the guidance of a converted Jew; and he seems to have been in correspondence with Jewish Christians in Antioch. Around this time he had copied for him a Hebrew Gospel, of which fragments are preserved in his notes, and is known today as the Gospel of the Hebrews, and which the Nazarenes considered to be the true Gospel of Matthew. Jerome translated parts of this Hebrew Gospel into Greek.
이들 중 일부는 그가 373년경에 트라키아와 소아시아를 거쳐 시리아 북부로 여행을 떠날 때 동행하였다. 그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안디옥에서는 그의 동료 중 두 명이 죽었고 그 자신도 한 번 이상 중병을 앓았다. 373-374년 겨울쯤 이 병을 앓았을 때, 그는 세속적인 공부를 제쳐두고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이끈 환상을 보았다. 그는 당시 안디옥에서 가르치고 있었고 아직 이단의 의심을 받지 않았던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의 충동에 따라 상당한 기간 동안 고전 연구를 삼갔던 것 같다.
금욕적인 고행의 삶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 그는 한동안 안디옥의 남동쪽에 있는 칼시스 사막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그곳에 거주하는 은수자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시리아 테바이드"로 알려져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공부와 글쓰기를 위한 시간을 찾은 것 같다. 그는 개종한 유대인의 지도 밑에서 히브리어를 배우려고 처음으로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던 것 같다. 이 무렵에 그는 히브리 복음서를 베껴 썼는데, 그 단편들이 그의 노트에 보존되어 있고, 오늘날 히브리 복음서로 알려져 있으며, 나사렛 사람들은 그것을 마태복음의 참된 복음으로 여겼다. 제롬은 이 히브리어 복음서의 일부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Returning to Antioch in 378 or 379, he was ordained by Bishop Paulinus, apparently unwillingly and on condition that he continue his ascetic life. Soon afterward, he went to Constantinople to pursue a study of Scripture under Gregory the Theologian. He seems to have spent two years there, then left, and the next three (382–385) he was in Rome again, as secretary to Pope Damasus I and the leading Roman Christians. He was invited originally for the synod of 382, held to end the schism of Antioch as there were rival claimants to be the proper Patriarch in Antioch. Jerome had accompanied one of the claimants, Paulinus, back to Rome in order to get more support for him, and distinguished himself to the Pope, and took a prominent place in his synods.
In Rome he was surrounded by a circle of well-born and well-educated women, including some from the noblest patrician families, such as the widows Lea, Marcella and Paula, with Paula's daughters Blaesilla and Eustochium. The resulting inclination of these women towards the monastic life, away from the indulgent lasciviousness in Rome, and his unsparing criticism of the secular clergy of Rome, brought a growing hostility against him among the Roman clergy and their supporters. Soon after the death of his patron Damasus (10 December 384), Jerome was forced by them to leave his position at Rome after an inquiry was brought up by the Roman clergy into allegations that he had an improper relationship with the widow Paula. Still, his writings were highly regarded by women who were attempting to maintain a vow of becoming a consecrated virgin. His letters were widely read and distributed throughout the Christian empire and it is clear through his writing that he knew these virgin women were not his only audience.
378년 또는 379년에 안디옥으로 돌아온 그는 파울리누스 주교에 의해 서품을 받았는데, 분명히 내키지 않았고 금욕적인 삶을 계속한다는 조건으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신학자 그레고리우스 밑에서 성경을 연구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2년을 보낸 후 떠났고, 그 다음 3년(382-385)에는 교황 다마수스 1세와 로마 기독교인들의 비서로 다시 로마에 머물렀다. 그는 원래 안디옥의 적절한 총대주교가 되기 위해 경쟁하는 주장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안디옥의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열린 382년 총회에 초대되었다. 제롬은 주장자들 중 한 명인 파울리누스를 더 많은 지지를 얻기 위해 로마로 돌아갔고, 교황의 눈에 띄었으며, 교황의 시노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로마에서 그는 미망인 레아, 마르첼라, 파울라와 같은 가장 고귀한 귀족 가문 출신의 여성들과 파울라의 딸 블레실라와 에우스토키움을 포함하여 잘 태어나고 교육을 잘 받은 여성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결과 이 여인들은 로마의 방종한 음탕함에서 벗어나 수도원 생활을 하게 되었고, 로마의 세속 교직자들에 대한 그의 가감없는 비판은 로마 교직자들과 그들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후원자 다마수스가 사망한 직후(384년 12월 10일), 제롬은 미망인 파울라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혐의에 대해 로마 성직자들에 의해 조사를 받은 후 로마에서 그의 지위를 떠나도록 강요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물은 봉헌된 동정녀가 되겠다는 서약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여성들에게 높이 평가되었다. 그의 편지는 기독교 제국 전역에 널리 읽히고 배포되었으며, 그의 글을 통해 그는 이 처녀 여성들이 그의 유일한 청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Additionally, his condemnation of Blaesilla's hedonistic lifestyle in Rome had led her to adopt ascetic practices, but it affected her health and worsened her physical weakness to the point that she died just four months after starting to follow his instructions; much of the Roman populace were outraged at Jerome for causing the premature death of such a lively young woman, and his insistence to Paula that Blaesilla should not be mourned, and complaints that her grief was excessive, were seen as heartless, polarising Roman opinion against him.
In August 385, he left Rome for good and returned to Antioch, accompanied by his brother Paulinian and several friends, and followed a little later by Paula and Eustochium, who had resolved to end their days in the Holy Land. In the winter of 385, Jerome acted as their spiritual adviser. The pilgrims, joined by Bishop Paulinus of Antioch, visited Jerusalem, Bethlehem, and the holy places of Galilee, and then went to Egypt, the home of the great heroes of the ascetic life..
At the Catechetical School of Alexandria, Jerome listened to the catechist Didymus the Blind expounding the prophet Hosea and telling his reminiscences of Anthony the Great, who had died 30 years before; he spent some time in Nitria, admiring the disciplined community life of the numerous inhabitants of that "city of the Lord", but detecting even there "concealed serpents", i.e., the influence of Origen of Alexandria. Late in the summer of 388 he was back in Palestine, and spent the remainder of his life working in a cave near Bethlehem, the very cave Jesus was born, surrounded by a few friends, both men and women (including Paula and Eustochium), to whom he acted as priestly guide and teacher.
또한 로마에서 Blaesilla의 쾌락주의적 생활 방식에 대한 그의 비난은 그녀로 하여금 금욕적 관행을 채택하도록 이끌었지만 그녀의 건강에 영향을 미쳤고 그녀의 신체적 쇠약은 그의 지시를 따르기 시작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사망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로마 민중의 대부분은 제롬이 그토록 활기찬 젊은 여성을 때 이른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해 분노했고, 파울라에게 블레실라를 애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과 그녀의 슬픔이 지나치다는 불평은 비정하고 그에 대한 로마의 여론을 양극화시키는 것으로 여겨졌다.
385년 8월, 그는 로마를 영원히 떠나 안디옥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형제 파울리니아누스와 몇몇 친구들이 있었고, 얼마 후 성지에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한 파울라와 에우스토키움이 그 뒤를 따랐다. 385년 겨울, 제롬은 그들의 정신적 조언자 역할을 했다. 순례자들은 안디옥의 파울리누스 주교와 함께 예루살렘, 베들레헴, 갈릴리의 성지를 방문한 다음 금욕 생활의 위대한 영웅들의 고향인 이집트로 갔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리 교육 학교에서, 제롬은 눈먼 교리 문답 교사인 디디모스가 예언자 호세아를 해설하고 30년 전에 사망한 안토니우스 대제에 대한 회고담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니트리아에서 얼마 동안 지내면서, 그 "주님의 도시"에 사는 수많은 주민들의 절제된 공동체 생활에 감탄했지만, 그곳에서도 "감추어진 뱀들", 즉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의 영향력을 발견했다. 388년 늦은 여름에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베들레헴 근처의 동굴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바로 그 동굴인 예수 동굴에서 남자와 여자(파울라와 에우스토키움을 포함하여) 몇 명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사제 안내자이자 교사로 활동했다.
Amply provided by Paula with the means of livelihood and of increasing his collection of books, he led a life of incessant activity in literary production. To these last 34 years of his career belong the most important of his works; his version of the Old Testament from the original Hebrew text, the best of his scriptural commentaries, his catalogue of Christian authors, and the dialogue against the Pelagians, the literary perfection of which even an opponent recognized. To this period also belong most of his polemics, which distinguished him among the orthodox Fathers, including the treatises against the Origenism later declared anathema, of Bishop John II of Jerusalem and his early friend Rufinus. Later, as a result of his writings against Pelagianism, a body of excited partisans broke into the monastic buildings, set them on fire, attacked the inmates and killed a deacon, forcing Jerome to seek safety in a neighboring fortress (416)
Saint Jerome lived through the fall of his beloved city Rome, which was sacked by the Goths in the year 410. In the year 411 a new ordeal beset the Saint: Bethlehem was invaded by wild Bedouin Arabs. Only through the mercy of God was the community of the aged ascetic saved from complete destruction. He finished his life at the cave in Bethlehem. Saint Jerome is believed to have reposed in 420. His remains, originally buried at Bethlehem, are said to have been later transferred to the Basilica of Santa Maria Maggiore in Rome in 642, though other places in the West claim some relics — the Cathedral at Nepi boasting possession of his head, which, according to another tradition, is in the Escorial. His hand is enshrined in a church near Rome’s Piazza Farnese.
파울라가 생계 수단을 넉넉히 제공하고 책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 그는 문학 작품에서 끊임없는 활동을 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경력의 마지막 34 년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중요한 것에 속한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구약성경을 번역한 것, 최고의 성경 주석, 기독교 저자 목록, 펠라기우스 학파에 대한 대화, 심지어 반대자도 인정한 문학적 완성도. 이 시기에는 또한 정통 교부들 사이에서 그를 구별 짓는 그의 논쟁의 대부분이 속하는데, 여기에는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 2 세와 그의 초기 친구 루피누스의 오리게네스주의에 대한 논문이 포함된다. 나중에, 펠라기우스주의에 반대하는 글을 쓴 결과, 흥분한 무리가 수도원 건물에 침입하여 불을 지르고, 수감자들을 공격하고, 집사를 살해했고, 제롬은 이웃 요새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416)
성 제롬은 410년에 고트족에 의해 약탈당한 사랑하는 도시 로마의 몰락을 겪었다. 기원전 411년, 새로운 시련이 성자를 괴롭혔다: 베들레헴은 거친 베두인 아랍인들의 침략을 받았다. 오직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서만 늙은 금욕주의자의 공동체가 완전한 멸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는 베들레헴의 동굴에서 생을 마쳤다. 성 제롬은 420 년에 안치된 것으로 믿어진다. 원래 베들레헴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나중에 642년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으로 옮겨졌다고 전해지지만, 서방의 다른 곳에서는 일부 유물을 주장한다 — 또 다른 전통에 따르면 에스코리알에 있는 그의 머리를 소유하고 있는 네피 대성당. 그의 손은 로마의 파르네세 광장 근처의 교회에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