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명-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저자-한나 아렌트(유대인이면서 독일에서 성장한 정치 철학자)
작가 글을 쓴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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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지난 뒤 유대인 학살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졌을 때,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이히만(AdolfEichmann)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붙잡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예정되었던 대학 강의를 취소하고, 미국의 교양잡지 뉴요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특파원 자격으로 재판을 참관하며 이 책을 썼다. 한나 아렌트는 20세기에 활동했던 정치 철학자이며,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독일의 베를린에서 성장기를 보낸다.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하이데거의 조교로 철학을 공부하며, 나치 히틀러에 협조하던 하이데거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하이데거를 떠나 자신의 논문에 몰두하였다.
출판사-한길사 /독정-2020.1.27. 화
· 이 책의 주제는 한 마디로 사유의 불능성’(inabilitytothink)으로 인해 생긴 악의 평범성을 해부하는 책이다. 어떠한 이론이나 사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주 사실적인 어떤 것, 엄청난 규모로 자행된 악행의 현상 자체를 나타내고자 만든 용어다.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이데올로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천박함’이 괴물이나 악마를 넘어 일종의 ‘불능성’으로 어리석음이나 멍청함과는 차원이 다른 ‘사유의 불능성’(inabilitytothink)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히만이 어떻게 악마의 모습이 되었나를 보면 처음에 그는 평범한 노동자였다. 외판원이었지만 먹고 살려고 생계 때문에 나치당에 가입한다. 히틀러 당시 유대인을 단계적으로 괴롭히는 법은 유태인을 2급 시민으로 치부, 대학에도 갈 수 없고 뉘른베르크 법(독일인과 유대인과 결혼 금지-지구 오염을 막기 위한 법이라는 법)을 만들어둔다. 1938년 유럽 유대인의 상점 유리가 다 깨져버린다. 유대인은 약탈과 방화를 일으키고 이 사건으로 독일내 거주 유대인은 모두 추방당한다. 그 즈음 아이히만이 맡은 역할이 같은 유대인 동족의 도움을 받으며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내는 일이었다. 아이히만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39년에 히틀러의 수용 계획이 바뀌어 절멸, 유태인을 태워 없애기로 할 때 집단 수용소를 지은 후 유대인의 완전 제거 공문을 받고 충격 받는다. 1941년에 유태인들이 구덩이 속에 던져지고 치과의사가 망치로 금이빨을 빼다가 잘못해서 금이빨을 안 뺐다는 실책을 받자 스스로 구덩이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지만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미워하거나 나쁜 일을 한 적도 없고 사무적으로 시키는 일만 했다는 자부심으로 살다가 이 현장을 보고 정신이 붕괴된다. 그는 서기로 15년간 도망다니다 끝에는 붙잡힌다. 아이히만은 평범한 체구에 나치 협력, 살인자. 등 15개의 죄를 지었다. 그러나 그는 “신 앞에서는 내가 죄가 있을지 모르가 법 앞에서는 죄가 없다. 나는 유대인 수송을 맡았을 뿐, 내가 그 일을 게을리 했다면 그건 죄가 되지만 나라가 시킨대로 했을 뿐이니 내가 죄가 없다.”고 한다. 이에 6명의 정신 감정가가 아이히만의 정신을 분석한 결과 “이 사람의 정신은 내 정신보다 훨씬 정상이다.”이 사람은 가족을 위해 일한 참 좋은 아버지다.“등의 판결을 받는다. 교수형에 처해지자 포도주를 달라해서 먹고 헐겁게 묶어달라고 요구한다, 이유는 교수형틀이 있는 곳까지 꼿꼿이 걸어가서 형틀에 매달리고 싶다는 것이다. 두건을 씌어줄까고 물었을 때 ”내게는 그런 것 필요 없소.“
거절하고 꼿꼿이 걸어가 교수형에 처해진다.
여기서, 인간의 사악함속에서 이루어지는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메시지를 읽게 된다. 나 역시 공무원으로 살 때, 다소 부당한 일이라도 이 사회에 선한 역할인가 악한 역할인가에 대한 생각에 앞서 거대한 제품의 부품처럼 자신의 무사안일만 생각하며 시키는 대로 할 일을 하려고 한 적이 없었는가? 이 책의 주인공 아이히만은 거대한 제품의 부품처럼 살면서 악의 평범성에 경종을 울리며 사라져갔다. 지극히 평범한 아버지이자 가정적이고 화목에 힘쓰는 남편이였던 아이히만이 시대, 환경, 상황에 따라 악(惡)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과정을 충실히 그린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