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7.연중12주 토요일 묵상글>
<마태8,7-10>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890년 3월 13일 서울 남대문 수각교 근처에서 태어난 유영모는 학문에 뛰어났으며,
52세부터(1941년 2월 17일 부터) 40년 동안 하루에 한 끼만 먹었던 금욕주의자로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나면
젖, 밥에 대한 탐욕으로 자라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탐욕 때문에 고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결혼하여 자녀를 둔 그는 금욕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아내와 육체적 관계 없이 오누이처럼 지냈다.(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46-147참조)/
“남녀 관계는 인격을 빠져나가게 하고,
동물적인 욕정으로 떨어지면
사랑은 악의 근원이 된다.
서로 좋으면 좋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가면
존엄성이 깨져 사람은 향락주의의 찌꺼기가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욕망을 억누르는 금욕이 참된 나를 찾아가는 길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옷을 허름하게 입었고,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으며,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입에 대지 않았고, 외식도 하지 않았다. 또 비싼 과일을 먹는 법도 없었다.
그는 아주 먼 거리가 아니면 늘 걸어 다녔지만 시간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서 인천까지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돌아온 다음 날 제자들과 북한산 꼭대기에 올랐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48)/
그의 나이 23세였던,
동경 물리 학교에서 공부할 때, 동경에는 김정식이 한국 기독교 청년회의 총무로 있었다. 김정식은 우치무라 간조를 유영모에게 소개한다. 우치무라 간조는 서구적인 기독교가 아닌, 일본적인 기독교를 찾고자 한 사상가였다. 더구나 교회에 다녀야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 무교회주의자이기도 하였다. 우치무라 간조를 통해 유영모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빨리 무교회 신앙을 접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52)/
유영모는 농사짓는 것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북한산 비봉 아래에서 여러 과실수와 짐승들을 길렀다.
“사람이 땅의 농사를 짓는 것은 결국 마음의 농사를 짓기 위함인데 마음의 농사란 진리를 깨달아 참된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이다.”(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55)/
그는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라야 참이다. 이 허공이 하느님이다.” 이렇게 말했다.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자신을 억지로 드러내지 말고 자신을 감추라며 “세상에 나타나려고 하지 말고 숨으려고 하라. 숨으면 숨을수록 기쁨이 더 충만하게 된다. 그것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르려는 사람은 깊이 숨어야 한다. 숨는다는 것은 더 깊이 준비하고 훈련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감추라는 이야기였다.
착한 일을 하면 칭찬받고 싶고,
봉사 활동을 하면 봉사 점수를 받고 싶은 것이
평범한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고,
돈과 명예를 얻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세상은 혼탁해질 수밖에 없다.
세상이 혼탁해질수록 유영모를 기억하고
그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기대해 보자.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59)/
사람은 동물성 인간성 신성이 있습니다.
동물성에 의해 생존욕구가 있으며, 간뇌가 담당하며 무의식의 영역 입니다.
인간성에 의해 사랑과 소속, 힘 성취, 자유, 즐거움의 욕구가 있으며, 신뇌가 담당하고 의식의 영역 입니다.
신성에 의해 영원성에 대한 욕구가 있으며 계시에 의한 신비체험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기도와 정화로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어 신적인 영역으로 수동적으로 이끌려 집니다.
개신교였던 유영모는 이러한 신적영역의 수련에 대해 영적인 보고를 전수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알다시피 개신교는 영성신학이 없으니까요. 그 뿌리는 루터가 다락방에서 육의 욕망을 끊는데 실패한 그는 신품성사를 받았던 것을 포기하며 가톨릭의 성사를 다 놓고 간데에 그 유래가 있으며, 뿌리깊은 허무주의가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죄란 하느님 은총의 부족을 말하며, 동물성 차원에서 부부끼리의 결합을 성사로 묶어놓고 있습니다. 즉 사랑의 완성이란 동물성의 결합과 인간성의 심리적 존중과 통교 그리고 신성차원의 혼배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축복 이 세가지 차원이 만나야 완전한 사랑으로 봅니다. 하느님 은총의 충만이지요.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부부관계 이외의 성적인 관계는 은총의 부재로 죄성에 떨어진 것으로 봅니다. 또한 자위행위도 대상이 없는 은총의 부재로 자신에게 가한 죄로 봅니다.
가톨릭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금욕주의적 독신생활을 하는 이유는 “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루카20,35)”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이 세상에서 시작된 천국을 미리 사는 의미입니다.
가톨릭에서 내려오는 기도와 정화는 지성 기억 의지의 정화이며 이는 영혼 기능의 정화이며, 완전한 정화는 육과 영의 통합을 이야기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3세께서 말씀하신 몸의 신학의 핵심이며 가톨릭 교리를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육과 영이 통합되는 완덕에 이르려면.
먼저 능동적인 정화(육의 능동적인 밤, 영의 능동적인 밤-의식차원의 정화)
그리고 수동적인 정화(육의 수동적인 밤-무의식 차원의 정화로 십계명에서 해방되며, 칠죄종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짐, 영의 수동적인 밤-영적약혼으로 인한 탈혼, 영적결혼으로 인한 변형일치로 새로남, 마리아와 막달레나가 한 몸에 완성된 단계) 가 있습니다.
균형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루24시간을 동물성 40%(9.6시간), 인간성40%(9.6시간), 신성20%(4.8시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유영모는 밥은 한 끼를 먹었지만 차 없이 걸어 다녔기에 하루 9.6시간 이상을 동물성을 위해 쓴 것으로 여겨집니다. 운동 역시 동물성 차원이지요.(9시간36분-잠자는 시간 6시간과 운동, 농사짓기 등 3시간 36분)
인간성으로는 외적수련인 학문과 세상과의 소통으로 9.6시간(9시간 36분)
신성으로는 내적 외적 수련으로 4.8시간(기도와 정화-4시간 48분
유영모는 23세 때에 일본인우치무라 간조는 서구적인 기독교가 아닌, 일본적인 기독교의 영향으로 종교적 다원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 종교 저 종교 다 공통적인 진리를 찾으려 했고 그가 찾은 답은 ‘허공이라야 참 하느님이다’ 라는 것입니다.
물론 종교적 신념과 전통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모두 존중하다보면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겅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감히 그 전통을 깨버립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7)”라는 것이지요.
유영모는 모든 종교를 존중하며 진리가 있다고 보고, 하나로 통합시키려다 보니까 다 빼내고 ‘허공’만 남게 된 것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적차원이라기 보다는 학문적이요 철학적 차원의 비교종교학에서 다룰 수 있는 인간성 차원이 강하게 베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진리가 성경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즉 불경이나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속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52)”
실제로 옛성현의 말안에는 신적차원의 계시가 아니라, 엄밀히 말해서 진리라기보다는 경험적 지혜들 입니다.
실제로 바빌론에 유배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 신하들이 지혜의 스승들이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저런 지혜가 어디서 왔을까? 결국 그들도 하느님의 창조물이니 그들의 경험과 머리에서 나온 지혜는 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지혜라고 받아들이며, ‘욥기 시편 잠언 코헬렛 아가 지혜 집회서’라는 지혜문학을 쓰게 됩니다. 이것을 진리문학이라하지 않고 땅에서 나온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에 지혜문학이라 합니다.
하느님 계시에 의한 신비적 차원의 삼위일체와 같은 계시적 진리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는 절대적 진리라서 시대를 초월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을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드러내셔서 십자가상에서 쏟아내신 피와 물은 성체성사와 세례성사가 되기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원성사요, 거기에 제자들의 성령강림과 같은 신적인 계시에 의한 체험으로 교회가 생긴 것이지요.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16,18)”. 그리고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57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58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6,54-58)” 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하느님 만이 아니라 교회를 믿습니다. 이것은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를 믿는다는 사도신경 내용이기도 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상을 정으로 쪼아 만들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이라는 주물에 붓기만하면 하느님의 형상이 만들어집니다. 천주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란 그런 것이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만이 아닌 영신수련이 있습니다.
유영모가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이유는 학문적 탁월함으로 인해 그가 쓴 책이 영국의 대학에서 종교학에 인용되고 있다는 것이고, 자신이 간 만큼만 썼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영신서적을 읽을 때 단순기도의 단계인 경우 관상으로 가기 전인데, 책이 이해가 되지 않거든 책을 덮고 기도와 정화에 더욱 매진하여 체험이 오면 다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무의 추구’는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하면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 함께 무아가 되는 자아의 죽음이며 구체적 삶 안에서 평범하게 돌아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의 변화된 삶을 수동적으로, 즉 은총으로 받게되는 변형일치의 삶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지만 점점 더 하느님의 의지가 강해지다가 인간의지가 제로가 되는 탈혼의 상태인 약혼에서 신랑이신 예수님과 영적인 결혼에 이르는 변형일치의 단계에 이르게 되지요. 살아서 지성 기억 의지가 다 제로가 되는 사람은 성인이요, 죽어서 제로가 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겠지요. 다만 죽을 때 하느님께 향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는 준비해야겠지요.
가톨릭에서는 이러한 완덕에 대한 비급이 어린이와 같은 단순 기도로 관상에 들어가며 이러한 단순기도는 단순한 봉헌으로 이루어지며, 기도와 정화의 각 상태들이 성인들의 책으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복음에서 백인대장의 신앙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멀리 있는 환자의 병을 고치실 수 있다거나, 질병에 대하여 특별한 권능을 지니신다고(마태8,2 참조) 믿은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권위” 곧 하느님을 대신하여 말씀하시고 일하신다는 사실을 예감하고 고백한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 군대 백인대장의 말이 궁극적으로는 황제의 말을 대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도 하느님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고백인 것이지요.
<Matthew8,7-10>
7 He said to him, "I will come and cure him."
8 The centurion said in reply, "Lord, I am not worthy to have you enter under my roof; only say the word and my servant will be healed.
9 For I too am a person subject to authority, with soldiers subject to me. And I say to one, 'Go,' and he goes; and to another, 'Come here,' and he comes; and to my slave, 'Do this,' and he does it."
10 When Jesus heard this, he was amazed and said to those following him, "Amen, I say to you, in no one in Israel have I found such faith.
—//—
<책 소개>
8.40년 동안 하루에 한 끼만 먹었던 금욕주의자 유영모
“사람이 세상에 나면
젖, 밥에 대한 탐욕으로 자라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탐욕 때문에 고생을 하게 된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47)/
하루에 두 끼만 먹어도 배가 고픈데
일일일식(一日一食),
하루에 오직 한 끼만을 먹은 사람이 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40년 동안이나 말이다.
1941년 2월 17일부터 하루에 저녁 한 끼만을 먹기 시작한 그는 1981년 2월 3일 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40년 동안 일일일식을 지킨다. 그리고 결혼한 아내와는 육체적 관계 없이 오누이처럼 지냈다.
“남녀 관계는 인격을 빠져나가게 하고,
동물적인 욕정으로 덜어지면
사랑은 악의 근원이 된다.
서로 좋으면 좋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가면
존엄성이 깨져 사람은 향락주의의 찌꺼기가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욕망을 억누르는 금욕이 참된 나를 찾아가는 길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옷을 허름하게 입었고,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으며,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입에 대지 않았고, 외식도 하지 않았다. 또 비싼 과일을 먹는 법도 없었다.
그는 아주 먼 거리가 아니면 늘 걸어 다녔지만 시간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서 인천까지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돌아온 다음 날 제자들과 북한산 꼭대기에 올랐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48)/
지치지도 않고 배고픈 줄도 모르고
목마른 줄도 모르는 스승을 보며
그의 제자 함석헌도 일일일식을 하기로 결심한다.
30년간 세검정에서 종로의 YMCA까지
1시간 10분이나 걸리는 길을 걸어 다닌 사람,
버스나 택시를 타 본 일이 없는 사람,
바로 그가 다석多夕 유영모이다.
그의 호 ‘다석多夕’을 보면 ‘다多’는 ‘저녁 석夕’ 자를 두 개 포개 놓은 것이다. 이를 두고 오직 식사만을 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안 먹으면 죽는다.
안 먹고는 못 사니까 먹는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는다.
적게 먹고 편히 살 수 있는데도
많이 먹고 배탈이 나서 고생을 한다.
사람이 안 먹으면 병이 없다.”
자신의 말처럼 그는 천수를 누리다가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49)/
유영모는 1890년 3월 13일 서울 남대문 수각교 근처에서 아버지 유명근 씨와 어머니 김완전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영모는 다섯 살 때 아버지 유명근으로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웠는데 천자문을 거꾸로 외울 만큼 암기력과 이해력이 뛰어났다.
1900년 수하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서당에서 배우지 못했던 산수에 큰 흥미를 가졌다. 그래서 그는 자주 수數의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말할 정도로 수를 좋아했다. 스물여덟 살이 되던 1918년 1월 13일부터는 자신의 산 날수를 셈하기 시작했다. 그의 일기에는 연,월,일,요일,날씨가 있고 그 옆에 다섯 자리의 숫자가 있다. 이 숫자는 그가 태어나서 그때까지 산 날자 수를 가리킨다.
그는 열두 살 때 소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는 소학교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유영모는 서당에서 유교의 경전 중 하나인 <<맹자>>를 3년 동안 공부했는데, 이렇게 어린 시절 배웠던 맹자를 훗날 YMCA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열다섯 살 때인 1905년에는 김정식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입문한다. 김정식은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 청년회를 창립하고 초대 총무로 일을 했던 인물이다. 유영모는 그 당시 연동 교회, 새문안 교회, 승동 교회의 예배에 모두 참석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1905년 11월 부터 1년 반 동안 일어 학교에서 일어를 공부하였고 그 후 일본어를 통해 신학문이나 서구 사상을 습득하였다. 또 1907년 9월부터 약 1년 반 동안 경신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나, 경신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이승훈에 의해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 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간다.(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50)/
오산 학교 교장이었던 이승훈은 그때까지 기독교 신앙과 접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으나 유영모를 통해 기독교와 만나게 되었고 그로부터 오산 학교도 기독교 이념에 의해 운영되었다.
*오산 학교 졸업식 장면
유영모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여느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타인의 종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다른 종교에 너그러울 수 있었던 것은 동생의 죽음 때문이었다. 1911년 동생 영묵이 죽자 유영모는 죽음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이때를 전후해서 톨스토이의 사상에 심취하고 노자와 불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이승훈
독립 운동가이자 1907년 오산 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이다. 신학문과 애국심을 학생들에게 강조하였으며 1919년 3.1독립 선언에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 물산 장려 운동과 민립 대학 설립을 추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51)/
그는 진리가
성경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즉 불경이나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속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산 학교 교사를 그만둔 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물리 학교에서 1년 반 정도 공부하였다. 유영모는 어릴 때부터 숫자를 좋아했으며 오산 학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또한 유영모는 아들과 함께 망원경을 만들어 천체 관측을 즐겼다고도 한다.
전 도쿄 대학교 교수인 오가와 하루히사 교수는 유영모에 대해 “별에서 영원성을 발견하고 우주의 광대함, 무한함에서 신을 발견하는 그의 신관은 매우 합리적이다. 유영모는 자연에 접하여 자연계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모두 이해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영모는 자연의 위대함은 곧 신의 위대함이라고 생각했다.
동경 물리 학교에서 공부할 때, 동경에는 김정식이 한국 기독교 청년회의 총무로 있었다. 김정식은 우치무라 간조를 유영모에게 소개한다. 우치무라 간조는 서구적인 기독교가 아닌, 일본적인 기독교를 찾고자 한 사상가였다. 더구나 교회에 다녀야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 무교회주의자이기도 하였다. 우치무라 간조를 통해 유영모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빨리 무교회 신앙을 접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52)/
유영모는 일본에서 귀국한 뒤 1915년에 김효정과 결혼을 하고, 1921년 9월에는 조만식의 뒤를 이어 오산 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으나 일제가 1년이 넘도록 교장 자격을 인정하지 않자 자리를 떠났다. 이때 함석헌이 오산 학교 학생으로 재학하고 있어서 유영모와 함석헌은 오랫동안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게 된다.
*왼쪽부터 전병호, 다석 유영모, 함석헌.
유영모가 김교신을 알게 된 것은 함석헌을 통해서였다. 함석헌은 일본 유학 당시 유치무라 간조의 무교회 모임에서 한국인 유학생이었던 김교신을 알게 되었고, 김교신은 1927년 귀국하여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유영모는 <성서조선>에 여러 차례 기고를 하였고, 1942년에는 ‘<성서조선> 사건’으로 인해 두 달 가까이 구금되기도 하였다.(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53)/
이 사건은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쓴 ‘개구리를 조상함’이란 뜻의 ‘조와吊蛙’라는 글 때문에 12명이나 투옥된 일을 말한다.
“오랜만에 친구 와군(蛙君, 개구리)들의
안부를 살피고저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고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건데,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적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低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못 아래에 개구리 두어 마리 기어 다니는 것을 보고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라고 감탄하였는데 이 말 속에 숨은 뜻이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고 일제가 판단한 것이다.
*성서조선
무교회주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1927년 김교신, 함석헌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신앙 동인지이다. 1942년 3월호에 실린 ‘조와吊蛙’의 내용이 조선의 부활을 개구리의 소생에 비유하였다는 이유로 폐간 조치를 당하였다.(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54)/
*동광원 강연 모습
유영모는 1946년에 전라도 광주에 있는 동광원을 알게 된다. 동광원은 ‘맨발의 성자’라고 하는 이현필이 만든 곳이다.
이곳은 고생을 복으로 알고 살며 봉사를 실천하는 노동 수도 단체이다. 동광원의 수녀들은 유영모를 ‘진달래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유영모는 “아름답게 피기보다 지는 데 보람을 두는 꽃 같다.”며 진달래를 좋아했다.
그는 서울 구기동의 집을 판 돈으로 ‘진달래 교회’를 짓는 비용과 1만 평의 터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유영모는 농사짓는 것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북한산 비봉 아래에서 여러 과실수와 짐승들을 길렀다.
“사람이 땅의 농사를 짓는 것은 결국 마음의 농사를 짓기 위함인데 마음의 농사란 진리를 깨달아 참된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이다.”(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55)/
‘겉으로 보기에 각 종교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모든 종교들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는 결국 하나’라는 것이 유영모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그는 여러 종교 가운데 어느 종교가 더 참된 종교인가를 비교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특정 종교에 대해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는 모든 종교는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특정 개인이 특정 종교를 믿는 것은 그 개인의 자유이며, 특정 개인이 어떤 종교를 믿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그 개인에게 달린 문제라고 하였다. 내 종교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 그의 종교관이었다. 그는 나의 종교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알긴 무엇을 아는가.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예수교 믿는 사람은 유교를 이단시하고
불교를 우상 숭배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예수를 비난한다.
유교를 나쁘다고 한다.
유교에서는 불교를 욕지거리하는데
무엇을 안다고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남을 모르면 자기도 모른다.
자기가 그이君子가 되려면 다른 그이君子도 알아야 한다.
지금은 참 멍텅구리 시대다.”(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56)/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57)/
종교를 비교 연구할 때 유영모는 여러 종교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에 힘을 쏟았다. 여러 종교의 공통점에서 여러 종교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하나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는 자유인데 자기가 어떻게 믿든
자기에게 분명한 것을 믿으면 된다.
남의 말 듣고 믿으면 그게 무엇인가.
한 마리의 개가 의심이 나서 짖는데
다른 개들이 따라 짖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라고 하거나,
“어떤 인생관도 제 인생관이지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종교만이 절대적인 진리이며 타인의 종교는 그르다는 식의 태도를 질타했다. 나만이 옳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또 종교가 강조하는 삶이 ‘소박함’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종교가 귀족적이 되면 남을 짓밟게 된다.
예수처럼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남에게 십자가를 지우겠다는 놈만 가득 찼다.”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58)/
그는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라야 참이다. 이 허공이 하느님이다.” 이렇게 말했다.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자신을 억지로 드러내지 말고 자신을 감추라며 “세상에 나타나려고 하지 말고 숨으려고 하라. 숨으면 숨을수록 기쁨이 더 충만하게 된다. 그것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르려는 사람은 깊이 숨어야 한다. 숨는다는 것은 더 깊이 준비하고 훈련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감추라는 이야기였다.
착한 일을 하면 칭찬받고 싶고,
봉사 활동을 하면 봉사 점수를 받고 싶은 것이
평범한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고,
돈과 명예를 얻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세상은 혼탁해질 수밖에 없다.
세상이 혼탁해질수록 유영모를 기억하고
그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기대해 보자.
(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59)/
*오산 학교
1907년 12월 평북 정주군에 남강 이승훈이 민족정신의 고취와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설립한 학교. 현 오산 중.고등학교의 전신으로, 민족 교육사에 크게 공헌하였다. 초대 교장 백이행에 이어, 1910년 교육주지敎育主旨를 기독교 정신으로 고쳐 나부열 목사를 설립자 겸 교장으로 맞았으나, 그 후 사정에 의하여 기독교 측과의 관계를 끊었다. 당시 교육을 맡았던 지도 교사에는 여준.윤기섭.유영모.장지영.이광수.염상섭.김억 등이 있었고, 운영을 맡았던 교장으로는 백이행의 뒤를 이어 이종성.나부열.박기선.조만식.유영모.주기용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있었다. 3.1운동 후 이승훈이 체포 구금되자 일제는 독립 운동의 본거지라 하여 탄압을 강화하였고, 끝내는 교사校舍를 불태웠다. 1923년 출감한 이승훈이 김깋홍.오치은.조시연 등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재건, 종합 교육 기관으로 발돋음하는 계획을 추진하던 중 1930년에 이승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모든 계획이 중단되었다. 그 후 근근이 명맥만을 이어 오다가 광복 후 오산의 전통과 이념을 되살리게 되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학교를 부산으로 옮겨 1953년 4월에 오산 고등학교로 재건하였다. 1956년에 현재 위치인 서울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전하였다.(14살 인생 멘토,김보일,(주)도서출판 북멘토,2010,p.160)/
* 유영모
1890-1981.교육자.종교인.
이칭별칭 호 다석(多夕)
유형 인물
시대 현대
출생 - 사망 1890년 ~ 1981년
성격 교육자, 종교인
출신지 서울특별시
성별 남
관련사건 성서조선사건
저서(작품) 다석일지, 노자
대표관직(경력) 양평학교 교사, 오산학교 교사, 오산학교 교장
•대한제국기 양평학교 교사, 오산학교 교사,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종교인.
•호는 다석(多夕). 서울에서 유명근(柳明根)의 아들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하다가 1900년수하동(水下洞) 소학교에 다니고, 다시 한학에 몰두하였다.
1905년 기독교에 입교하고, 경성일어학당(京城日語學堂)을 거쳐 1907년 경신학교 과정을 마친 뒤 1909년 경기도 양평학교(楊平學校) 교사가 되었다.
이듬해부터 2년간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2년간 재직하는 동안 교주 이승훈(李昇薰)을 기독교에 입교하게 하고, 톨스토이 연구에 정진하여 시종 무교회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1912년 일본에 건너가 동경물리학교에서 수학하며,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강연에 큰 영향을 받고 출세 거부의 결단에 따라 유학 도중 귀국하였으며, 종교철학을 독학으로 탐구하여 나갔다.
1914년최남선(崔南善)과 교류하며『청춘』지에 「농우(農牛)」·「오늘」 등을 1918년까지 기고하였다. 1921년조만식(曺晩植)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에 부임하여, 1년 재직하는 동안 김교신(金敎臣)·함석헌(咸錫憲) 등 제자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1928년 YMCA 성경연구반 지도를 맡아 35년간 계속하는 한편, 김교신의 『성서조선(聖書朝鮮)』지에 신앙의 글들을 발표하여 성서조선사건으로 1942년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어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
1940년 후반 생애를 하루 한 끼의 일중(一中)으로 금욕생활을 실천하는 가운데 선구적인 비교종교학 연구가이자 독보적 종교철인으로 기독교를 비롯한 동서양의 진리를 끊임없이 설파하였다.
또 1955년부터 『다석일지(多夕日誌)』를 쓰기 시작하여 종교적 묵상을 만년까지 기록하고, 『노자』국역(1959)과 한글연구에도 탁견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