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
🌻25년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 조직 : 사회주의 학생 단체로 1926년 6·10만세 운동주도. 🌻29년 작곡가 현제명, 첫 독창회 🌻37년 순천의 매산 학교·매산 여학교와 담양의 황덕 학교가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폐교됨. 🌻49년 김태준 등 남로당 거물간첩 9명에 사형선고 |
🌻58년 서울운동장 야구장 개장
✱1962년 9월2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 개장 - 1925년 10월 15일 건립된 이래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最古/가장 오래된)의 경기장이자, 국내 스포츠의 메카로 남게 된다.
1925년 일본의 동궁(히로히토 덴노) 결혼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경성 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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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운동장은 천황의 결혼식이라는 일본의 최대 경사를 경축하는 뜻을 담는 동시에 "특히 운동을 사랑하시는 동궁전하의 기념사업으로 운동장 설치계획을 세움은 적당한 처치"라는 것이 그 건립의 이유였다. |
🌻63년 중앙정보부, 황태성 사건 전모 발표. 공화당 창당 관여설 부인 🌻70년 강원도 대관령에서 버스추락. 75명사망 🌻76년 현대여자농구팀 창단, 삼성여자배구팀 창단 🌻78년 제42회세계사격대회 개막(서울) 🌻79년 서울시경, 골동품상 금당살인사건 범인박철웅 형제 검거 🌻80년 기업체질강화대책발표, 20대재벌계열 기업정리및 대기업의 모든 부동산 신고 의무화 하기로 |
🌻81년 프랑스 고속열차 TGV 첫 운행
✱1981년 9월27일 프랑스 고속열차 TGV 첫 운행, 프랑스 고속열차 TGV가 1981년 9월 27일 첫 운행을 시작했다.
| 오전 7시15분, 파리를 서서히 빠져나간 오렌지색의 유선형 1번 열차가 리용까지의 425km 거리를 2시간 40분 만에 주파하자 프랑스 언론들은 다가올 TGV 시대의 도래를 축하했다.
출발 후 1시간17분이 지나 “지금 시속이 260Km입니다”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자 운행을 축하하기 위해 탑승한 미테랑 대통령과 승객들은 박수치며 환호했다.
1964년 일본의 동해도 신간선이 세운 종래의 210Km 기록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TGV는 최고시속이 380Km이지만 소음 등을 고려해 초기에는 시속을 260Km로 제한해 운행했다 |
🌻82년 외무부, 주한 일본공사를 통해 39개 항의 일본 역사 교과서 시정 자료를 전달 🌻84년 제3차 아시아올림픽 평의회(OCA) 총회 개최, 12명의 중공 대표도 내한(서울) 🌻85년 한국이 참여한 첫 해외 개발 유전인 인도네시아의 마두라 유전서 생산 개시 🌻85년 정부, 총13조 8153억규모의 86년도 예산안 확정 🌻87년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 발족, 초대 회장에 윤영규 |
🌻88년 IOC 집행위, 약물복용한 벤존슨의 금메달 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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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올림픽 100m 금메달리스트 벤 존슨의 약물복용 조선일보 특종 |
🌻88년 김창선·엄흥길조 서울올림픽 기념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 🌻89년 남ㆍ북적십자사, 판문점에서 남북적십자회담 실무접촉, 구체적 진전없이 끝남 🌻90년 세종대 총학생회, 수업거부 철회 찬반투표를 실시, 167일 만에 정상화. 🌻90년 우리나라의 對 선진국 주종 수출상품이 기술 과 원가고로 인한 경쟁력 약화로 수출이 크게 위축 🌻90년 국토개발연구원의 낙후지역 의식조사,군 지역 주민 64%, 언젠가 도시로 떠날 생각을 갖고 있다고. 🌻90년 수원-천안 간을 8차선, 천안-남이 간을 6차선 으로 확장키로. 🌻90년 최호중 외무장관, 뉴욕에서 전기침 중국외교 부장과 첫 한·중 외상회담 🌻91년 18개방위산업체, 지체배상금총액 804억원중 93%인 749억원을 면제조치받았다고 권노갑의원 밝혀. |
🌻92년 노태우 대통령 첫 중국방문
-천안문 광장에 사상 첫 태극기 게양-3박4일 일정 노태우 대통령의 중국 방문
1992년 9월 27일, 31년 전 오늘 노태우 대통령이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 같은 해 8월 24일 한중수교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국빈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에서 남북한 관계 개선과 사회주의권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바 있으며, 한중수교와 중국방문은 '북방외교'의 한 연장선입니다.
당시 국제적 상황은 1989년 12월 미소 몰타정상회의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했고, 1989년 5월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으로 중소관계가 정상화되었으며, 1990년 9월 한소수교가 수립된 것 등이 한중수교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노태우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평양으로 가기 위해서 유엔과 모스크바를 거쳐서 그 마지막 관문인 북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서 북한이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는 두 나라 모두와 우리는 새로운 친구가 된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남북한의 자유왕래를 막고 있는 저 휴전선뿐입니다. 저는 북한의 오랜 친구이자 우리의 새로운 친구인 중국의 지도자들에게 통일을 향한 우리 측의 입장을 분명히 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노태우 정권의 북방외교가 모든 이들로부터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참석한 육사 졸업식에서 육사 교장은 졸업 축사에서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조차 흐려지고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육사 교장은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르겠지만 사임했습니다. |
🌻93년 중국 부총리 방한 🌻93년 화물선-유류 바지선 충돌-한려수도에 기름띠 죽음의 바다로 🌻93년 정부,농어촌 구조개선 사업을 3년 앞당겨 98년까지 마무리 하기로 하고 4조 648억원을 책정 🌻93년 건설부,그린벨트 완화-27년만에 첫손질 원주민 은 60평까지, 5년 이상 거주자는 40평까지 증개축 허용 🌻93년 전남 동광양시 금호동 지신도 앞바다, 파나마 선적 BG 아산호와 부산선적 유조바지선 제5금동호 충돌, 🌻96년 이종현(29.노동장.황해북도 곡산군) 인천항으로 밀항귀순. |
2000년대 |
🌻2010년 북한 ‘3대 세습’ 공식화
✱2010년 9월27일 북한 ‘3대 세습’ 공식화 | 북한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알려진 3남 김정은에게 2010년 9월 27일 명령 제0051호를 통해 인민군 대장 칭호가 내려지면서 북한의 3대 세습을 공식화 하였다. 28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공식발표하였다.
대외적인 공식발표에 김정은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남 김정은과 여동생 김경희 등 6명에게 군사 칭호를 부여하며 군과 친족을 통한 3대 세습을 공식화 하였다.
또한 이날 44년 만에 당 대표자회를 열어 김정일을 당 총비서로 재추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