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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9강 5장 3절부터 14절 빛의 자녀답게 행동하라
26.05.23(토)
에베소서 5장 8절에서 13절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오늘은 에베소서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에베소서 5장 3절부터 14절까지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빛의 자녀답게 행동하라 라는 내용입니다.
포인트를 세 가지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성도들이 피해야 할 두 가지 죄는 무엇인가 라는 내용이 본문에 나옵니다.
두 번째는 바울이 한 경고 하나님 나라를 위로 받을 수 없다는 그 경고가 무슨 뜻인가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의 자녀인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본문이 가르치는데 이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3절부터 7절까지는 음욕과 탐심에 대한 경고가 등장을 하고
그 뒷 부분인 8절부터 14절은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음욕과 탐욕을 왜 피해야 되는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는 본문입니다.
지금까지 앞 단락에서는 지난 시간에는 주로 기독교 회심 사건 예수 믿는 사건이 기독교 윤리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 것인가를 살펴봤다면 오늘 본문에서는요 빛과 어두움 안과 밖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설명을 합니다.
또한 수치라는 개념을 통해서 기독교인의 윤리에 대해 설명합니다.
3절에 마땅하다
또 12절에 부끄러운 것들이다. 라는 표현은
수치란 개념을 갖다 사용하면서 기독교인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설명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3절부터 7절까지 음행과 탐심에 대한 경고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성적 타락에 대한 경고와 탐심에 대한 경고로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여기서 지적하는 두 가지 죄 즉 음행과 탐심은 당시 이방인들이 많이 노출돼 있던 그런 죄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경고하면서 그 이유를 듭니다.
왜 음행과 더러운 것 탐욕을 멀리해야 되는가 그 두 가지를 두는데 첫 번째가 3절 4절에 나오죠.
음행과 온 것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3절에서 피해할 죄로 설명하는 음행은 바로 앞에 나왔던 2절의 사랑과 대조가 됩니다.
2절에 너희도 사랑 가운데 행하라 라고 설명했었습니다.
성도들은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을 닮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러나 불신 세상은 이런 지구한 사랑보다는 성적 타락 탐심이라는 행동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3절에 보면 음행 더러운 것 탐심이라는 목록이 나오는데 죄가 나오는데 이것을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눠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음행 이 음행은 결혼 관계 이외의 성 관계를 의미합니다. 성적 타락은 당시 이방인들의 문화였습니다.
이들은 가르치기를 지나치지만 않으면 된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결혼 관계 이외의 성관계도 허용되었고 불륜도 허용되는 것이 이방사회의 문화였습니다.
두 번째로, 더러운 것 이 더러운 것은 문자적으로 지저분한 거라는 뜻인데 이 단어는 앞에 나오는 음행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되고 있을 경우는 성적 타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음행과 더러운 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죄 음행을 가리킨 겁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더러운 것 앞에 온갖 더러운 것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성적인 죄라면 그 어떤 죄라도 피하라고 권면합니다.
제가 영국에서 유학할 때 그곳에 있던 목회자 사모님께서 당시 영국에 유학 와있던 외국 학생들을 성경 공부하면서 혼전 순결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 프랑스 여학생이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한테만 그런 이야기 하시고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그런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라고 이야기했다는 거죠. 혼전순결은 더 이상 윤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10년 전까지 그게 바로 유럽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도 예외가 아니고 있는 걸 보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성적 타락을 더 이상 죄가 아니고 문화로 보는 시대가 돼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뒤에 나오는 혹은 탐심은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아두는 욕심과 관련된 죄입니다.
초대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 것을 나누어주고 조금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구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탐욕은 정확하게 반대의 삶이죠.
구제하고 나눠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해서 재물 쌓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제 3절 그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바울은 여기서 성도들이 왜 성적 타락과 음욕을 피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근데 여기 주목해 볼 단어는 뭐냐하면 성도라는 단어입니다. 성도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이 성도란 말은 거룩한 사람들이란 말이죠.
근데 그 거룩이라는 단어는 본래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구별됐다. 이 구별된다는 것이 거룩의 기본 개념입니다. 따라서 성도들 거룩한 사람들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나온 사람들이죠. 따라서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야 될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성적 타락 탐심은 세상과 같아서는 되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4절에 누추함 어리석은 말 희롱하는 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여기 누추함이나 어리석은 말 희롱하는 말은 다 언어와 말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문맥상 앞 절에 성적 타락을 이야기했었기 때문에 여기 나오는 말도 음행과 관련된 언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성적인 더러운 말을 가리킨 겁니다.
누추함이라는 이 말은 아름다움과 대조되는 추함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어리석은 말이라는 말은요 술취한 상태에서 나오는 성적인 말을 의미합니다.
희롱의 말이라는 것은 이 당시 단어를 사용했던 예를 보면 명석한 머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유창한 말을 가지고서 사용하는 사용할 때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근데 여기서는 아마도 술 잔치에서 또는 파티에서 유창하게 하는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이 위트나 유머를 섞어가지고 하는 성적 농담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행동뿐만 아니라 방금 봤던 4절처럼 아예 언어조차도 성적 타락과는 관련된 단어를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음행과 성적인 언어는 이방인들의 흔한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성도들은 반면에 성적인 것이면 행동이 되었든 언어가 되었든 아예 그런 내용을 담아내지 말라고 말하는 거죠.
4절에 보면 감사하는 말을 해야 됩니다.
이 감사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드리는 감사를 가르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욕망을 자극하는 성적인 욕망 말 대신에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는 말도 성도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거라고 가르칩니다. 세상과 구별된 성도는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성적인 농담 자체도 따라 하지 않는 거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죠.
다른 나라에 이민 간 사람은 그 나라의 말을 배우며 살아갑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 가거나 이민 가면 영어를 배웁니다.
마찬가지로 사탄과 죄가 통치하던 나라에서 하나님이 통치한 나라로 이민 온 사람들 옮겨온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언어를 배우며 살아가야 되는 것이죠.
자 5절은 경고입니다.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로운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유업을 얻지 못하리니 여기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대상이 누구냐면 이미 3절 언급했던 것처럼 음행 더러운 것 그리고 탐심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이 5절에도 음행하는 자 더러운 자 탐하는 자 에서 살려놓았던 똑 같은 죄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탐하는 자를 특별히 우상숭배라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탐하는 자는 재물을 하나님처럼 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안전과 행복을 재물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마치 재물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가르친 겁니다.
그래서 이런 악행 다시 말해서 성적 타락과 탐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엄하게 경고합니다.
성도라고 하는 사람이 성적 타락에 빠져있거나 재물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에 맞지 않는 거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죠.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볼 수가 없는 겁니다. 신약 성경에 보며는 엄하게 다스려야 할 죄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 엄하게 다스린다는 이야기는 다른 말로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해야 할 추방해야 할 사람 추방해야 할 죄라고 그런 의미에서 엄한 엄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가 성적 타락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1절부터 13절에 근친상간한 자를 너희 중에서 내쫓아라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성적 타락을 성적은 엄하게 봅니다.
두 번째로 마태복음 18장이 나오는데 완고하고 고집 센 것을 또한 교회에서 엄하게 다스러워야 합니다.
물론 이거는 기질적인 완고함이나 고집스러운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회개를 거부하는 완고함을 가리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갈라디아서 4장 3절처럼 거짓 가르침을 하는 자들 이단적 가르침을 하는 자들 내쫓으라 라고 가르칩니다.
이 세 가지 죄는 다 공통적으로 파급효과가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사과 박스에 사과 하나가 썩으면 다른 사과를 다 썩게 만드는 것처럼 죄는 이런 죄 이 세 가지 죄는 파급효과가 있기 때문에 신약성경에서 엄하게 다스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바울 특별히 바울은 이 세 가지 중에서 성적 타락 이야기를 많이 강조합니다. 그리고 여러 군데에서 바울 서신 여러 군데에서 성적 타락 이야기를 하는데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5장 19절부터 21절에 육체의 일을 설명하면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1절에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라고 경고합니다.
또 고린도전서 6장 9절에 중간쯤에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그 다음에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를 가리켜서 10절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적 타락을 바울이 엄하게 경고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 이방문화에 살고 있던 이방 기독교인이 비록 예수를 믿고 있지만 아직 성적 타락의 습관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이 이렇게 강하게 경고하는 거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당시 로마 시대의 가치관은 이랬습니다. 처녀들은 쾌락을 위해 존재하고 합법적인 자식을 위해서는 아내가 존재한다.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좀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었죠. 10계명 같은 데 보면 유대인들은 성적인 타락을 엄하게 경고합니다.
이웃집에 아내 탐하지 말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같은 뿌리박고 있던 유대 기독교인들 믿는 유대인들도 성적 타락에 대해서 좀 조심스럽게 살았던 걸 보게 됩니다.
반면에 이방 기독교인들은 이 성적 타락이 일상화였습니다. 따라서 많이 노출돼 있던 걸 볼 수가 있는데,
바울이 여러 군데에서 성적 타락을 경고한 것을 봤을 때 이게 믿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나서도 아직까지 떨치지 못했던 이 죄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적인 타락은 가벼운 죄가 아닙니다.
구약에 보면 죄도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습니다.
물로 씻으면 해결되는 죄가 있고 물이 아니고 동물의 피로 해결해야 될 죄가 있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3가지 죄가 엄한 죄죠 그중에서 성적 타락도 엄한 죄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6절 7절은 거짓 가르침에 대한 경고입니다.
6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함께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 본문은 거짓 가르침 특별히 음행과 탐심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바울이 강하게 경고합니다.
음행 다시 말해서 결혼 관계 이외의 성 관계가 괜찮다고 가르치는 사람 혹은 자기만을 위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그 사람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든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든 이 사람들의 말을 따르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그가 누가 됐든지 음행을 가볍게 여기고 탐심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위해 임한다고 6절에서 설명합니다.
본문을 보면 굉장히 좀 우리가 어려운 본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도들의 최종 구원 성도들의 영광성 기업이 보장돼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성령으로 인칭받았다고 이야기했죠.
에베소서 1장 14절 또는 18절
그런데 오늘 본문에 와서 보면 경고를 합니다. 이러이러한 자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성경은 한편으로는 최종 구원을 최종 구원에 보장돼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하나하나에 들어갈 수 없다고도 강하게 경고합니다.
성경은 당근만 주지 않고 채찍도 있습니다. 당근과 채찍을 통해 성도들을 이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죠. 제 차에는 후진 센서가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차를 조금 더 후진하면 장애물이 보이면 센서를 크게 올려줍니다. 그 경고는 저를 겁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제 차를 보호하기 위해서 경고가 달려있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신약 성경에 나오는 경고들은 우리를 겁주거나 불안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가 최종 구원에 도달하도록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채찍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경고는 성도들을 최종 구원에 도달하게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은 사람인가 경고의 말씀에 회개로 반응하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진자 구원받은 사람은 경고 이 채찍질 앞에 반드시 그 경고를 진지하게 듣고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렇게 얘기하죠.
그들과 함께하는 자가 되지 말라 성도들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죄를 죄로 보지 않고 문화로 보는 세상에서 죄를 죄로 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 8절부터 14절 이제는 음행과 탐욕을 피할 이유가 제시됩니다. 왜 음행과 탐욕을 피해야 되는가 그 이유는 한마디로 우리가 빛이기 때문에 빛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본문은 빛과 어둠을 통해 어둠의 비유를 통해 음행을 피해야 할 이유를 설명합니다. 빛과 어둠은 함께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빛과 어둠은 함께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말 성경에 보면 네 개의 명령문이 나옵니다. 8절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10절에 시험하여 보라
11절에 두 개가 나옵니다.
참여하지 말고 끝에 책망하라
먼저 8절로 가보겠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여기 어둠과 빛이라는 두 개의 개념을 통해 성도들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성도들은 어둠이라는 영역에 있다가 빛이라는 영역으로 옮겨온 사람입니다.
성도들은 지금 이제 빛입니다. 과거에는 어둠이었죠.
그런데 성도는 그 자체가 빛이 아니고요. 주 안에서 빛입니다. 주님과 연합되었기 때문에 빛이 된 겁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처럼 살라는 권면은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빛의 자녀의 신분에 맞게 행동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어떻게 걸어가는지를 통해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행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행하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 행하라는 말은 걸어가라는 이야기인데요.
바울은 그리스도의 삶을 설명하면서 주로 두 가지 비유를 됩니다. 하나가 걸어가는 도보의 비유입니다. 두 번째는 달리기의 비유인데요.
예를 들면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라 두 번째는 성령을 따라 걸어가라 행하라 빛의 자연처럼 행하라 걸어가라 이렇게 말합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성도의 삶을 밝혀서 가만히 있는 삶이 아니고 움직이는 삶이다 라고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자 이제 9절에 가서 보면 성도들의 삶에 맺는 열매를 소개합니다. 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소개합니다.
빛의 자녀가 맺는 세 가지 열매를 설명하는데 이 세 가지 열매라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아까 3절에 언급했던 죄가 세 가지였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
근데 바울은 여기에 맞대어서 주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이 아니고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이런 열매를 맺고 살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10절에 가보면 이제 이렇게 얘기하죠.
어떻게 하면 빛의 자녀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그 답을 10절에 줍니다.
10절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해보라 여기 보면 시험해보는 것이 빛의 자녀가 하는 행동이라고 가리킵니다. 빛의 열매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모든 착함 의로움 그리고 진실함입니다.
그런데 기준이 중요하죠. 어떻게 보면 사람에 따라서 착한 것 의로운 것 진실함이 달라 보일 수가 있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착한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0절에서 기준이 제시됩니다.
주를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
여기 시험하다는 동사는 누가복음 14장 19절에 보면 새로 산 소들에게 멍에를 시험 삼아 메어서 이 소에게 이 멍에가 맞는지 안 맞는지를 테스트해 보는 것을 가리킬 때 이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시험하다는 말은 분별하다 검증하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옷을 살 때 보이는 대로 아무 옷이나 집어서 돈 주고 나가는 게 아니고요. 몇 번 입어보고 거울 보고 앞뒤로 재봅니다.
옷을 테스트해 보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빛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착한 것인지 어떤 것이 의로운 것인지를 테스트해 보고 검증해 봐야 됩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를 쓰고 분별력을 쓰고 이성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기쁘시게 할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이리저리 살펴봐야 된다고 이야기하죠.
신앙은 맹신이 아닙니다. 분별력을 사용해야 되고 질문해야 되고 고민해야 되는 것이죠. 바로 이것이 시험해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명확하게 기록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 애매한 회색지대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주님이라면 이 경우에 어떻게 하는 것이 기뻐하시는 것이 가는 행동일까? 주님이 기뻐하실 행동이 무엇인지를 판단해 보는 행동을 해야 됩니다.
성도의 삶의 가치관은 과거 예수 안 믿던 삶의 가치관과 달라야 됩니다. 제가 영국에서 유학하면서 애를 먹은 적이 있습니다.
영국의 운전대는 우리나라 운전대와 반대 방향에 있습니다. 또한 도로에서 차가 가는 방향도 우리나라와 정 반대입니다.
우리나라는 우측 통행을 하죠. 차가 오른쪽으로 갑니다. 반면에 영국은 왼쪽으로 갑니다. 제가 한 번은 실수한 적이 있는데 이 회전 교차로에서 차를 거꾸로 몰고 역주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습관이 그렇게 나온 것이죠. 그런데 만약 제가 나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영국에 살면서도 한국식으로 운전하겠다라고 하면 굉장히 우수광스러운 일이 벌어질 뿐만 아니라 심각한 일이 벌어집니다. 영국을 가면 영국의 법을 따라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둠의 나라에서 출국해서 빛의 나라에 입국한 사람들입니다. 죄와 사탄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로 들어온 사람들이죠.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들어온 나라 하나님 나라의 법을 따라 살아야 됩니다.
어둠과 빛의 영역에서 몸담고 있던 과거 삶이 아니고 이제 새롭게 소속된 빛의 영역에서 빛의 자녀처럼 그 나라의 법을 따라 살아야 되는 것이죠.
11절 12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1절에 어둠에는 열매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거는 햇빛이 없는 곳에 식물이 자랄 수 없고 식물이 자랄 수 없으면 열매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햇빛이 비추는 곳에 식물이 자라고 열매가 자랍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빛의 잔여들이기 때문에 열매가 열리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제 부정적 권면과 긍정적 권면을 합니다.
부정적 참여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믿는 이방인들은 자기가 소속되어 있던 과거의 이방적 삶 열매 없는 삶에 참여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이제 적극적으로 책망하다고 권면합니다.
이 책망하다는 이야기는 본래 덮어놓았던 덮개를 열어 숨어진 숨겨졌던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물이 안 보이죠. 그런데 빛이 들어오는 순간 어둠의 어둠이 사라지고 그 어둠 가운데 있던 사물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어둠의 일을 적극적으로 죄악이라고 드러내야 됩니다. 여기서 책망하다는 이야기는 언어로 표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은 입으로 언어로 세상의 죄를 죄라고 말하는 일도 해야 된다고 가르친 것이죠. 소극적으로 성도는 죄를 표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죄를 죄로 보지 않는 세상에서 죄를 죄라고 말할 줄 아는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고 가르치는 겁니다.
이제 12절 13절
웨 죄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해야 되는지
그 이유를 12절 13절에서 소개합니다. 참여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이 행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참여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두번째 책망해야 할 이유 두 번째 뭐냐하면 13절이죠.
책망 받는 모든 잘못된 것들은 분명하게 죄로 드러나기 때문에 라고 말합니다.
오늘 배울 말씀을 적용해 보겠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오늘 본문은 성적인 타락은 엄중한 죄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 시대는 성적인 타락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적 타락을 신약 성경이 말하는 엄중하게 다스려야 할 죄 가운데 하나라고 가르쳤습니다.
세상의 분위기는 성적 타락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빛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오늘 본문의 적용은 죄는 문화가 아니라 죄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죄를 문화로 유행으로 인권으로 보는 시각이 점점 커가고 있습니다.
죄를 아예 합법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죄를 문화가 아니라 죄를 죄로 보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소극적으로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는 어둠의 일을 죄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죄를 문화로 보는 이 시대에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에베소서 5장 전반부를 통해 빛의 자녀인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에는 에베소서 5장 후반부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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