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 여행에 대비하기 위해 나무들은 ‘경화’ 과정을 거친다. 먼저 세포벽의 투과성이 극적으로 증가해서 순수한 물은 흘러나오고 세포 안에 남은 당, 단백질, 산이 농축된다. 이 화학물질들은 효과적인 부동액 역할을 해서 온도가 0도보다 훨씬 더 떨어져도 세포 안에 든 액체는 시럽 같은 액체 상태가 유지된다. 세포들 사이의 공간은 세포에서 나온 고도로 정제된 물로 채워지는데, 이 물은 너무도 순수한 상태여서 여기엔 얼음 결정의 핵이 돼서 자라도록 하는, 혼자 떨어져 돌아다니는 원자가 하나도 없다. 얼음은 분자가 3차원적인 결정을 만드는 구조이기 때문에 얼음이 생기려면 핵, 즉 모종의 화학적 돌연변이가 있어야 그것을 기초로 얼음 결정이 쌓아올려지는 것이다. 핵이 될 만한 디딤돌이 전혀 없는 순수한 물은 영하 40도까지 ‘초냉각’을 해도 얼음이 없는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이렇게 일부분은 화학물질로 가득 채우고, 또다른 부분은 완전히 순수한 상태로 유지하는 ‘경화’ 과정을 거쳐 중무장하고 나무는 겨울 여행을 떠나 서리, 진눈깨비, 눈폭풍을 견뎌낸다. 이 나무들은 겨울 동안 자라지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지구라는 행성을 타고 북극이 태양을 향해서 기울고 다시 여름을 맞이할 수 있는 태양의 저편까지 여행을 한다.]
(<랩걸>에서)
위 글을 보면 기온이 0도 이하로 내려가도 얼지 않는 물이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어제 나는 중학생들에게 겨울이 되면 물이 얼기 때문에 나무들은 이파리를 떨어뜨린 다음 최소 에너지로 겨울을 난다고 했다. 참으로 단순한 설명이다. 나무 속은 얼음이 있는 게 아니라 위 글처럼 순수한 물이 있다는 것인데, 이쪽 지식도 약하고 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이를 어찌 풀어나가야 할까? 이후 공부를 하면 되겠지만, 여기서 한계가 드러난다. 수목생리학 같은 책을 필사해보기 했지만, 독학은 실제로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전문가와 함께 현장에 나가 보고 또 보면 좋지만 그렇게까지 발걸음이 재촉되지는 않는다. 적당한 선에서 감정이입을 통한 상상력으로 문장을 만든 다음, 그 모든 것을 ‘삶’이라는 그릇에 넣고 사유를 개진해 나갈 뿐이다. 이 모습이 현재 나의 팩트다. 이를 극복하려면 현장 중심의 사유를 더 강화해야 할 것 같다. 노력은 해볼 것이다.
그런데 <랩걸>을 보고 있으면 그 노력을 저자가 대신하고 있어 굳이 나무를 쪼개고 실험을 하지 않아도 상상이 현실처럼 느껴진다.
다음 문장을 보자.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지구라는 행성을 타고 북극이 태양을 향해서 기울고 다시 여름을 맞이할 수 있는 태양의 저편까지 여행을 한다.”
나무의 겨울나기에 ‘여행’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삶의 틀을 부여해 버린다. 분석을 통한 과학 지식이 슬쩍 망각되어도 우리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하자가 없다. 문과생은 이런 진술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위 글에 이어지는 다음 글을 또 옮겨본다.
“북쪽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들의 대부분은 겨울 여행을 할 준비를 잘 해내므로, 서리 때문에 죽는 경우는 극도로 드물다. 가을 날씨가 따뜻하건, 춥건 상관없이 경화 과정은 시작된다. 기온의 변화가 아니라 24시간의 순환주기 중 빛이 존재하는 시간이 감소하는 것을 감지해서 낮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알고, 월동 준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 해는 온화했다가 한 해는 혹독했다가 하는 식으로 겨울 기온은 변덕을 부리더라도 가을에 낮이 짧아지는 변화는 해마다 똑같다.”
위 글도 과학 설명이다. 이를 어떻게 삶과 연결시켜 풀어낼 수 있을까? 저자의 문장을 보자.
“날씨는 변덕을 부릴 수 있지만, 언제 겨울이 올지 알려주는 태양은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억겁의 세월 동안 나무들은 경화 과정에 의존해 겨울을 날 수 있다. 식물들은 세상이 급속도로 변화할 때 항상 신뢰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식물이 찾아낸 중요 요소는 빛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빛은 곧 우주 만물에 평등하게 존재하는 신일 것이다. 그래서 신은 모든 것에 스며서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빛은 곧 신뢰일 것이다. 믿음일 것이다.
오늘도 인식과 사유를 확장시켜준 호프 자런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