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체격이 컸다. 잘 구워진 고구마 빛깔처럼 건강한 피부에 이목구비가 반듯했고, 눈매가 웃고 있는 듯 서글서글해 보였다. 지역아동센터에 그림책 읽어주기 수업 때 슬기를 처음 보았다. 슬기는 첫 수업 때부터 태도가 산만했다. 쉬는 시간에 다른 친구들이 들어올 수 없게 앞 책상과 뒷줄의 책상을 붙여 놓았다. 친구들이 책상을 밀어 자리 정돈하려 하면 힘으로 다시 밀어 버렸다. 저학년 동생들이 놀고 있을 때 뒤에서 밀어 갑자기 넘어진 아이의 우는 소리와 고함으로 소란스러웠다. 슬기는 에너지가 넘치는데 놀아주는 친구들이 없다 보니 내게도 덤비듯이 다가왔다. 수업하기 위해 가져간 준비물을 순간에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왜 남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만들어 버리는 거냐고 따지듯 묻는 내게 “히!” 웃으면 그만이었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내 모습을 보던 민희가 “선생님 잠깐만요 슬기 오빠는 아동센터 선생님만 무서워해요.” 하고 총총걸음으로 다급하게 나갔다. 뒤이어 아동센터 선생님이 들어왔고, 상황을 파악하고 늘 있었던 일처럼 언성을 높이며 슬기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슬기가 밀려 나가자 수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가려는 내게 아동센터 선생님은 슬기에 대해 참고하라며 알려주었다. 슬기는 난독증이 있어 학습이 어렵고 옆에 있는 친구들을 괴롭혀, 누구와 쉽게 못 어울리는 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난독증은 어떤 성향을 말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글씨를 읽는 것 자체가 어려운 증세라는 거였다. 그러니 학습 태도가 산만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신에 슬기는 노래를 잘하며 소리에 민감하다고 했다. 특별하게 좋아하는 것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슬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웬 중학생이 있나 싶을 만큼 우람한 체격이었다. 쉼 없이 두리번거리던 눈동자가 지워지지 않았다. 난독증이 어느 정도의 증세인가를 알고 싶었다. 인터넷을 찾아보고 도서관에 들러 책을 통해 알아갈수록 어린 날 내가 겪었던 내 증세와 비슷했다. 나도 책 읽는 일이 힘들었다. 그때는 정규수업이 끝나면 남아서 수업을 따로 받았다. 행여 복도를 지나가는 다른 반 아이들이 볼까 봐 몸을 움츠렸다. 공처럼 작게 말고 있는 내가 벌레로 변해가는 것처럼 흉물스럽게 느껴졌다. 그 증세는 지금까지도 지속하고 있었다. 나는 새 학년이 되는 일이 두려웠다. 또 다른 아이들에게 내가 글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일이 싫었다. 학교에 가는 일도 싫어졌고 어떻게 하면 학교에를 가지 않을까 하는 궁리만 하게 되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친구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나는 슬기의 처지를 충분히, 아니, 더 이상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슬기는 아동센터에서 문제만 일으키니 그만두게 했다는 것이다.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 슬기 집을 방문했다. 조손가정이었다. 할머니를 만났더니 손이 귀한 집안에 대를 이을 손이라며 슬기를 금쪽같이 여겼다. 슬기는 집까지 찾아온 나를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할머니는 슬기가 하는 짓마다 자랑스럽게 여겼다. 슬기는 글씨만 못 읽을 뿐이지, 가문의 혈통을 이을 손이라며 곁에 있는 슬기를 품에 안았다. 할머니는 슬기를 큰 당산나무를 훑듯이 살피며 글씨는 몰라도 하늘의 뜻만 거스르지 않으면 천지신명이 돌봐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아동센터에 가지 못해 심심하지 않으냐고 슬기에게 물었더니 안 가는 것이 마음이 더 편하다고 했다. 센터 선생님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바보 취급하는 것 같아 항상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새로운 것이 있으면 만져서 느낌을 받아 보려고 하면 무조건 손도 못 대게 하는 것이 무시당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슬기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배워보고 싶다 했다. 슬기는 꿈까지 나와 똑같았다. 슬기는 절대음감이 뛰어나 기타 음계도 잘 익혔다. 아이는 기타 소리의 근원을 알고 싶다며 먹는 일도 잊고 매달렸다. 기타 줄을 누르는 왼손가락 끝마디에 물집 거푸 생겼다. 그 모습이 집착에 가까워 연습 시간 외에는 쉬게 했다. 내가 기타를 메고 슬기 집을 찾아가는 길은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슬기는 기타를 배우다 잠깐 밖으로 나가곤 했다. 수업을 마친 후 내 신발과 커다란 슬기 신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슬기에게 왜 신발을 답답하게 틈도 없이 붙여 놓은 거냐고 했다. 자신의 신발과 내 신발은 두 켤레지만 한 짝씩이라 두 사람이 나란히 있어야만, 온전한 신발이 되어 힘차게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거라며 수줍게 웃었다. 슬기는 소리를 통해 세상을 만나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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