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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삭발한 개들이 저지른 야수적 살인이 남긴 것
415년 3월 어느 날 기독교 광신도들이 이집트 거리에서 한 여성을 옷을 벗긴 뒤 난도질했다.
배후로 지목된 이는 총대주교 키릴로스, 그는 교회를 세속 권력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간 교회에는 수많은 키릴로스가 있었다.
‘히파티아 살인사건’이 오늘의 한국에 뜻하는 바는…
흰 망토를 두른 히파티아.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서.
415년 3월 어느 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거리에서 한 여성이 습격당했다.
기독교 광신도들이 근처 교회까지 그녀를 질질 끌고 간 후 그곳에서 옷을 벗기고 조개껍데기로 난도질했다.
그리고 토막 난 시체를 광장으로 가져가 불태웠다.
당시 지중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이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철학자 히파티아, 고대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최고의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철학과 더불어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친 최초의 여자 교수였다.
여교수 살인 사건
히파티아는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 테온의 딸로 태어났다.
테온은 오늘날의 대학과 견줄 수 있는 무세이온에서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가르쳤다.
히파티아는 일찍이 아버지를 통해 수학에 입문했다. 그녀는 원추형에 대한 논문을 썼고 고대 수학자들의 저서를 편집
하고 주석을 달았으며, 천문관측의와 물비중계 제작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은 고도의 추상적 사고뿐 아니라 실험과 관찰을 중시한 알렉산드리아의 학풍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히파티아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신플라톤주의 학파를 이끈 철학자였다.
그녀는 철학자의 망토를 두르고 도심을 누비고 다녔으며, 원하는 사람이면-종교와 종파를 불문하고-누구에게나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 철학자들의 책을 해석해주었다.
히파티아 살해의 배후로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키릴로스가 지목받았다.
동시대 교회사가 소크라테스는 키릴로스가 살인 사건에 직접 연루됐다는 말은 피했지만, 히파티아가 ‘정치적 시기심’
탓에 희생됐으며, 히파티아 사건이 키릴로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적지 않은 불명예를 안겨줬다고 보고한다
(‘교회사’).
6세기 철학자 다마스키오스는, ‘반대파’의 키릴로스가 도시 전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히파티아에 대한 시기와 증오에
휩싸여 살해를 직접 모의했다고 주장한다(‘철학사’).
한편 7세기 니키우의 주교 요한은 히파티아의 살인을 ‘마녀’의 제거 또는 살아 있는 우상의 파괴로 정당화하며
키릴로스를 영웅으로 치켜세운다(‘연대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라파엘로는 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테네 학당’의 철학자들 사이에 히파티아를 되살려
놓았다. 이후 히파티아는 종교개혁자들과 계몽주의자들에게 주목받았다.
예를 들어, 18세기 개신교 신학자 존 톨란드는 ‘히파티아 또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결하고 가장 학식이 높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성, 그러나 통상적으로 하지만 부당하게도 성인이라고 불리는 대주교 성 키릴로스의 자만심과 경쟁
심, 잔인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성직자들에 의해서 조각조각 찢겨진 여성의 역사’(1720)라는 긴 제목
의 역사 수필을 썼고,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볼링브로그 경의 중요한 조사 또는 광신주의의 무덤’(1736)에서 히파티아
의 살해를 종교적 광신주의가 천재를 박해한 사건으로 규정한 뒤 “키릴로스의 삭발한 개들이 저지른 야수적 살인”이
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르콩트 드 리즐은 히파티아를 “플라톤의 정신과 아프로디테의 육신”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하며,
그녀의 죽음과 함께 그녀가 대표하는 고대문명의 상실을 안타까워했다.
히파티아를 주인공으로 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최신 팩션 영화 ‘아고라’(2009)는 다시금 기독교 교회의
불편한 기억을 되살렸다. 사실, 히파티아의 삶은 영화보다 훨씬 덜 낭만적이고 그녀의 죽음은 훨씬 더 잔혹했다.
히파티아의 죽음은 ‘새로운’ 기독교 문명의 눈부신 도약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든 고대 그리스-로마문명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한다. ‘불안의 시대’로 불리는 고대 후기, 신구(新舊)-문명의 대결이 다른 어느 곳보다 치열했던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진 히파티아의 암살극은 고대문명의 최후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히파티아가 살았던 바로 그 시대에 오랫동안 고대 그리스-로마문명의 ‘등대’ 역할을 해온 알렉산드리아가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전투적 지도자들이 이끈 ‘새로운’ 종교는 이교신전 사라페이온을 파괴했고, 도시가 생긴 이래 700년간 존속한 유대인
공동체를 파멸시켰다. 히파티아의 암살 이후 오래지 않아 도시의 통치권은 교회의 수중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이 글에서 우리는 히파티아의 극적인 삶과 죽음을 신구 문명의 교차지 알렉산드리아의 역사 속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알렉산드리아가 잃어버린 옛 문명은 어떤 모습이었나? 그리고 새로운 문명은 어떤 얼굴로 나타났는가?
어떻게 옛 문명은 새로운 문명에서 기억됐는가?
문명의 대전환을 몸소 겪었던 히파티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잃어버린 고대문명
파로스 등대.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건립됐고, 대왕의 사후 이집트에 수립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가 되었
으며, 기원후 641년 아랍군에 의해 함락되기까지 천년의 고도(古都)
로서 위엄을 자랑했다.
건립된 지 오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의 도시는 고대문명의 새로운
중심지로 급성장했다. 그런데 이 신흥 도시가 품어 안은 문명의
이상은 더 이상 협소한 도시국가(polis)의 테두리 안에서 전개된
고전기 그리스 문명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인종적, 민족적, 지역적
경계를 넘어 하나의 세계 문명을 지향하는 ‘헬레니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치사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원정에 나선 기원전 334년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클레오
파트라 7세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한 기원전 30년까지의 약 300년간을 ‘헬레니즘 시대’라고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동정(東征)으로 출현한 헬레니즘 문명은 고전 그리스문명과 고대 동방문명이 융합돼 창출된 것으로,
문명사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결혼’으로 일컬어진다.
헬레니즘은 에게 해 중심의 그리스 세계를 ‘서(西)’로 하고, 이집트를 포함한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동(東)’으로 하는
동서 문명 통합의 산물이었다. 헬레니즘은 철학에서는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로, 종교에서는 제설통합주의
(syncretism)로 대변된다.
실제로 헬레니즘 시기 이름난 철학자의 대다수는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시리아, 이집트 및 아랍 출신이었으며, 신들의
이름이 상호 교환되기도 했고, 이집트-그리스 신(神) 사라피스와 같이 하이브리드 신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지중해의 진주’로 불린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의 최대 무역항이었다. 지중해 연안 도처로부터 배가 들어왔다.
어떤 배들은 몬순 바람을 이용해 인도의 서해안에서 홍해를 거쳐 비단과 향료를 들여오기도 했다. 기원전 3세기 기록
에 따르면, 배 한 척이 한 번에 향료 60상자, 코끼리 상아 100t, 흑단 135t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인도와 중국을 ‘동’
으로 하고 헬레니즘 세계를 ‘서’로 하는 확장된 의미의 ‘동서무역’은 고대인들의 세계 지평을 현저히 확대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인이 이집트에 세운 ‘그리스’ 도시였지만, 그리스인 외에도 이집트인, 페니키아인, 아랍인,
누비아인 등 다양한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어깨를 비비고 사는 곳이었다.
이처럼 ‘고대의 뉴욕’이라 할 만한 알렉산드리아는 고대사에서 최대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한 곳이기도 했다.
기원전 3세기 초엽,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그리스말을 사용하는 유대인을 위해 학자 70여 명에게 히브리어 구약 성서
를 그리스어로 옮기도록 요청했으며, 그 결과 유명한 ‘70인역 성서’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패전과 자살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막을 내리고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속국이 된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의 유산을 바탕으로 고대 후기 문명을 주도하게 된다.
또한 이 도시는 한때 로마 다음으로 가장 큰 도시였다.
기원후 1세기 중엽에는 인구가 100만명에 달했다. 이 시기에 성(聖) 마르코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 교회를 세운다.
이로써 기독교가 이교(異敎)와 유대교와 함께 치열한 문명의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찬란한 고대문명을 대표하는 것으로 단연 등대와 도서관을 꼽을 수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파로스(Pharos) 등대는 고도의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40층짜리 고층 빌딩이었다.
이 고대판 마천루는 기원전 283년에 세워져 기원후 1300년대 중반 지진에 의해 쓰러질 때까지 약 1600년간 항구를
드나드는 배들을 안전하게 인도했다. 우뚝 선 파로스의 맞은편 항구 주변에 왕궁이 있었고, 바로 근처에 무세이온
(뮤즈의 신전)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안에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놓여 있었다.
지중해 세계 지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기원전 3세기에 건립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전폭적 지원 아래 번영을 구가했고, 알렉산
드리아를 문화적 황무지에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바꾸어놓았다.
더불어 알렉산드리아는 나일강 일대에 자생하는 파피루스를 가공하는 종이산업의 본고장이자 지중해 지역 서적 무역
의 중심지로 도약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당시 존재한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책을 사들였다.
특히 호메로스의 작품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돼 다양한 종류의 필사본이 수집됐다. 기원전 3세기 초에 활약한 칼리마
코스는 도서관 장서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정리한 ‘목록’(원제는 ‘전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과 그들의 작품을
기록한 목록’이다)을 편찬했다.
기원전 2세기에는 ‘사라페이온’에 두 개의 소형 도서관이 건축됐다. 무세이온의 주도서관에는 50만~70만권의 두루
마리 책이, 사라페이온의 부도서관들엔 5만권의 책이 소장돼 있었다고 전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왕립 대학 무세이온 (‘museum’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의 산하기관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로열 아카데미’는 고대의 학문을 집대성하겠다는 문화적 야심의 산물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개창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뮤즈의 신전’을 짓고, 세계의 유수한 작가·시인·과학자·철학자를
불러 모아 높은 봉급과 함께 숙식을 제공하면서 연구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기하학자 유클리드와
지구의 원주를 근소한 오차로 계산해낸 지리학자 에라토스테네스 그리고 해부학의 창시자 헬로필로스가 초빙됐다.
무세이온은 특히 수학과 의학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무세이온의 회원으로 알려진 최후의 인물이 바로 테온, 그러니까 히파티아의 아버지다.
고대문명의 보고(寶庫)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소문만큼 이론(異論)도 많다.
7세기 아랍의 정복자들에 의해 파괴됐다는 전설이 있지만, 이슬람을 중상하기 위해 꾸며낸 허구일 소지가 크다.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전술상의 이유로 알렉산드리아 항에 정박 중이던 자신의 함대에 불을 질렀을 때
불길이 번져 위대한 도서관을 태웠다고도 하지만, 도서관 전체가 아니라 일부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로도 도서관은 수차 화마를 겪은 것으로 전해지며, 270년경, 팔미라 왕국의 폭동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인해 왕궁과 함께 주도서관이 파괴된 것으로 간주된다.
늦어도 391년 사라페이온이 완전히 파괴됐을 때 부도서관들도 (그때까지 건재했다면) 자취를 감추게 됐다.
히파티아가 죽기 25년 전의 일이다.
영화 ‘아고라’에서는 도서관이 이교도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으로 나온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라페이온의 파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391년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이교의 제사의식을 금지하고 사원을 철폐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옛 종교는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영구히 추방된다. 3
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한 지 80년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교 사원 철폐령에 따라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테오필로스는 기독
교인들을 이끌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호신 사라피스의 신전으로
가서 헬레니즘의 거대한 ‘우상’을 파괴했다.
그가 젊어서 모시던 성 아타나시우스의 오랜 염원이 드디어 이뤄진 순간
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를 역임한 아타나시우스(293~373)는 교회 내
이단논쟁에서 성자의 신성(神性)을 부정한 아리우스파를 몰아내고 성부와 성자가 본질상 동일하다는 내용의 ‘정통
교리’를 확립한 주인공이다. 교회의 일대 ‘내전’을 종식시킨 아타나시우스는 말년에 눈길을 교회 밖으로 돌렸으며,
특히 이교의 상징인 사라페이온을 부수길 희구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이교’(異敎)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제외한 ‘다른’ 전통 종교를 가리킨다.
다분히 기독교와 유대교를 기준으로 하는 편향된 말이다. 하지만 ‘이교’로 번역되는 원어 ‘paganism’은 이보다 더
심한 말이다. 이 말이 유래한 라틴어 ‘paganus’는 원래 ‘시골뜨기’ 내지 ‘무식한’을 뜻하며, 미신에 빠진 사람이나
범죄자 또는 환자라는 뉘앙스를 풍기는데, 이후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됐다.
정작 ‘이교도’로 불린 사람들은 기독교의 압제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하나의 집단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정치적 권한이 확대되면서, ‘교회의 파라오’라 불리던 테오필로스 총대주교의 세력도 강화됐다.
흥미롭게도 테오필로스 시대에 성 안토니우스(250~350)가 시작한 이집트 수도원 운동이 절정에 달한다.
히파티아를 흠모한 시인 팔라디스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2000여 명의 수도승이 알렉산드리아 주변에 살았고, 은수
자 5000명가량이 니트리아 사막에 은거했다고 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총대주교의 요청에 따라 한꺼번에 엄청난 수의 수도승이 알렉산드리아로 달려왔다는 사실이다.
테오필로스는 수도승들을 자신의 ‘사병(私兵)’으로 활용한 것이다. 수도승들은 사라페이온의 파괴에도 한몫을 했다.
세상의 유혹을 끊고 오직 신을 찬미하기 위해 불모의 사막으로 떠났던 성 안토니우스의 후예들이 주교의 군대가 되
어 도시로 되돌아온 것이다. 검은 망토를 두른 수도승들은 테오필로스의 사촌이자 그를 이어 총대주교의 자리에
오른 성 키릴로스에게도 충성을 바쳤다. 이들이 바로 흰 망토를 두른 철학자 히파티아의 살해 용의자다.
키릴로스의 야심
교회사가 소크라테스는 히파티아 사건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을 기록하며, 그녀의 죽음이 단순히 개인적 감정에 기인
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사전에 준비된 ‘정치적 암살’임을 암시한다.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키릴로스(376~444)는
현재 기독교 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교회 박사로 기억되는 인물이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논란의 대상이
었다.
412년 키릴로스는 폭도들을 동원해 교회 내부의 반발 세력을 제압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선출됐다.
교회 조직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지 못한 신임 총대주교는 과도한 ‘행동주의’로 자신의 불안감을 상쇄하려 했다.
교회 안으로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세웠다.
이 과정에서 엄격한 금욕주의를 표방한 노바티아누스주의자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축출됐다.
교회 밖으로는 자신의 권한을 세속 정치의 영역에까지 확대하려고 했다.
이러한 ‘월권’으로 인해 키릴로스는 이집트의 총독 오레스테스와 심각한 갈등에 빠진다.
이 갈등은 유대인 문제를 계기로 폭발한다.
이단 축출 이후 키릴로스는 교회의 내부 세력을 규합하고자 유대인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더욱이 그는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시나고게의 타락에 대하여’를 집필해 반(反)유대인 정서를
조장했다. 마침내 415년 어느 날 오레스테스 총독이 자리한 극장에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이 싸움은 결국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의 파멸로 귀결됐다.
소크라테스는 이 엄청난 사건이 아주 사소한 이유 때문에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유대인들의 ‘극장 열풍’이 그 사소한 화근이었다. 그가 전하는 사건의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종종 율법을 듣는 대신 극장에 갔다. 특히 무용수들이 관중을 끌어 모았다고 한다.
춤 공연에 열광한 유대인들이 장외 질서까지 문란하게 하자, 기독교인들의 항의가 잇달았고, 관(官)에서도 제재 조치에
나섰다. 오레스테스 총독이 규제령을 공포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극장에 소집했을 때, 기독교인들도 들으러 갔다.
그런데 키릴로스의 열렬 추종자 한 사람이 규제령에 환호의 박수를 보내자 주위에 있던 유대인들이 그를 선동가로 몰아
세웠다. 그러자 총독은 ‘선동가’를 체포하게 하고,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고문에 처했다.
이것은 관권을 침해하는 총대주교에 대한 경고장이기도 했다.
증오에 휩싸인 유대인들은 어느 날 밤중에 교회에 불이 났다는 거짓말로 기독교인들을 집 밖으로 유인해낸 다음 무차
별로 공격해서 죽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손가락에 나무 반지를 꼈다고 한다.
다음 날 새벽, 기독교인들의 복수전이 시작됐고, 키릴로스가 몸소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7세기 이집트 니키우의 주교 요한은 승자의 입장에서 전쟁의 경과를 기술한다.
“기독교인들은 분노에 차서 시나고게로 향했고, 그것을 차지했고, 교회로 만들기 위해 정화했다.”(‘연대기’).
이 사건은 유대인 공동체의 파멸로 끝나지 않았다. 니트리아 사막으로부터 약 500명의 수도승이 도시로 몰려와서
총독을 ‘이교도 우상숭배자’라고 모욕하며 난동을 피웠다. 총독은 자신이 세례를 받은 기독교이라고 항변했지만, 한
수도승이 그를 돌로 쳤다. 이를 본 시민들이 달려와서 그의 목숨을 구했고, 그를 친 수도승을 잡았다.
총독은 수도승을 공개적으로 고문했는데, 고문이 극심해서 수도승이 죽고 말았다.
키릴로스는 수도승의 시체를 어느 한 교회에 안치하고, 거기에서 그를 순교자로 추대하는 성대한 미사를 거행했다.
소크라테스는, 지각 있는 사람들은 -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 - 키릴로스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키릴로스는 교회를 세속 권력의 중심으로, 자신을 도시의 통치자로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그의 시대에 기독교는 더 이상 세상의 ‘약자’가 아니라 ‘강자’가 되었고, 박해받는 자가 아니라 박해자가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대박해가 있은 지 약 100년이 지났을 시점이다. 총독과 총대주교 사이의 권력 다툼은
또 다른 사건에 의해 새로이 불붙는다.
총독과 친분관계에 있던 알렉산드리아 최고의 유명인사, 즉 히파티아가 살해당한 것이다.
아프로디테의 육신
철학자 히파티아는 신플라톤주의 학파의 수장(首長)이었다. 신플라톤주의는 3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항구에서 짐꾼
으로 생계를 잇던 암모니오스 사카스(‘짐꾼’)에서 시작해 로마로 간 그의 제자 플로티누스(205~270)를 통해 고대 후기
로마제국의 지배적 철학사조로 발전한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특히 우주의 원리를 논하는 형이상학적 사변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들의 형이상학적 원리론
은 기독교 신학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플라톤의 정신에 충실하게 수학 교육을 중시했고, 그들의 형이
상학은 피타고라스주의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 히파티아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철학자였다.
하지만 히파티아의 사상이 정확히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특히, 그녀가 종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플로티누스처럼 종교적 제의를 멀리하고 철학이야말로
신을 모시는 진정한 길이라 여겼을까? 아니면 이얌블리코스와 같은 후대의 신플라톤주의자처럼 더욱 적극적으로 종래
의 제의를 포용하려고 했을까? 아니면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처럼 신플라톤주의를 기반으로 이교의 전통을 쇄신하려
했을까? 분명한 것은 히파티아가 기독교인을 적대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듣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철학을 가르쳤다. 그녀의 문하에는 이교도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도
있었다. 사실상 그녀의 가장 유명한 제자는 기독교인으로 주교좌에 오른 키레네의 시네시우스다.
390년대 알렉산드리아로 유학 가서 히파티아를 사사한 시네시우스는 스승을 몹시 존경했다.
그가 남긴 수많은 편지 가운데 히파티아에게 보낸 편지가 7통 전한다. 한 편지에서 그는 히파티아에게 “하데스에서는
망자들에 대한 망각이 있다지만, 거기에서도 나는 당신을 기억할 것이오.”(‘편지’)라고 썼고, 그가 병상에서 보낸 마지
막 편지에서는 그녀를 “어머니, 누이, 선생님, 게다가 은인”(‘편지’)이라고 부른다.
그는 스승에게 자신의 저서를 함께 보내면서 의견을 구하기도 하고, 그를 비방하는 검은 망토를 입은 자들과 흰 망토
를 입은 자들 양쪽에 대항해 자신의 철학을 옹호하기도 하며, 물비중계를 보내달라는 부탁도 한다.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토로하기도 하고 또 히파티아가 답장을 하지 않는다고 불평도 한다. 시네시우스가 히파
티아의 죽음을 언급하는 편지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먼저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시네시우스와 히파티아의 사제 관계가 예시하는 것처럼, 고대에는 한 철학 학파에 입문하는 것이 ‘평생 친구들’의 서클
에 가입하는 것과 같아서, 철학자 친구들은 죽을 때까지 서로 간에 친밀한 유대를 유지했다.
시네시우스 주교는 참다운 철학의 길을 모색하며 교회의 ‘정통 교리’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특히 육체의 부활, 세상의 종말, 영혼의 창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교리에 반대했으며, 교회 내에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히파티아가 길러낸 철학자 주교가 걸은 길이다.
이 길은 ‘다른’ 생각을 용납지 않은 키릴로스가 걸은 길과는 다르다. 키릴로스는 수많은 이단 논쟁에서 승리했고,
수많은 이를 파문했다. 그리고 교회에는 수많은 키릴로스가 있었다.
이처럼 숱한 파문의 역사를 통해 확립된 것이 소위 ‘정통’이다.
다시 히파티아로 돌아가자. 히파티아는 높은 학식과 함께 미모로 유명하다. 한 일화에 따르면, 한 학생이 너무나 아름
다운 처녀 교수를 사랑하게 됐다. 그것을 알게 된 선생은 제자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음악을 사용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충격요법을 썼다.
그녀는 자신의 피 묻은 생리대를 가져와 보이며 “청년, 이것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것이다.
어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라고 말해서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고 한다(‘철학사’).
그녀의 아름다움이 총대주교의 여성혐오증을 야기했거나 부채질했다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415년 살해 당시,
그녀는 적어도 40대 중반, 많게는 60대 중반이었으므로, ‘아프로디테의 육신’과는 거리가 있지 않았나 싶다.
소크라테스는 히파티아를 차분하지만 자유로운 성품의 소유자로 묘사한다.
그녀는 관료들이 자리한 공식석상에 자주 나타났고, 남자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자들도 범상한 위엄과 덕을 지닌 그녀를 존경했다고 덧붙인다.
다마스키오스 역시 그녀의 덕을 칭송한다. 특히 그녀를 절제와 정의의 귀감으로 기린다. 이밖에 그녀의 명료하고도
능숙한 언변과 정치적 감각도 언급한다. 이러한 자질들로 인해, 히파티아가 시민들의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됐던 것
같다. 새로 부임한 총독 오레스테스에게 히파티아는 알렉산드리아를 대표하는 시민이었다.
총독은 이 여성 철학자를 정치적 조언자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마녀사냥
히파티아가 얼마나 ‘정치적’이었는지는 가늠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보고에 따르면 히파티아가 오레스테스와 자주
회동을 갖자, 기독교도들 사이에 총독과 총대주교의 화해를 가로막는 것이 그녀라는 악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마침내 성서 낭독자로 일하던 베드로라는 자가 광분해 폭도들을 이끌고 가서 히파티아를 공격했다고 한다.
7세기 니키우의 주교 요한도 그러한 소문을 믿었고, 오레스테스의 반항을 그녀 탓으로 돌렸다.
이 맥락에서 그는 놀랍게도 히파티아를 ‘마녀’로 묘사한다. 그에 따르면 히파티아는 마법에 종사했고 많은 이를 악마
의 술책으로 홀렸으며, 도시의 통치자 즉 오레스테스 또한 마법으로 현혹해서 총독과 불목하게 하고 교회에 냉담하게
만들었다. 그의 묘사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천문관측의와 악기들이 마법과 한통속으로 다뤄진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천문학이나 화성학과 같은 수학적 학문들을 마법이라고 스스로 오해했거나 또는 남들을 오도하려고 한 것
같다. 이러한 태도는 학문을 죄악시하는 종교의 광신적 전통과 맞물려 있다(‘연대기’).
요한은 키릴로스가 히파티아 살해에 직접 연루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살해 장면을 묘사한 후 다음과 같이 쓴다.
“그리고 모든 이가 총대주교를 둘러싸고 그를 ‘새로운 테오필로스’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가 도시에 남아 있는 우상의 마지막 잔재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연대기’). 여기에서 키릴로스의 히파티아
제거는 테오필로스의 사라페이온 파괴에 비교된다. 요컨대, 히파티아의 살해는 우상파괴 내지 ‘마녀사냥’이다.
6세기 신플라톤주의자 다마스키오스는 다른 시각에서 사건을 해석한다. 그는 히파티아의 살해를 너무나 단순하게도
인간심리를 통해 설명한다.
그가 본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키릴로스가 어느 집 앞을 지나가다가 많은 사람이 그 집으로 나고 드는
광경을 보게 됐다. 그가 수행원에게 무슨 군중에, 웬 소동인지를 묻자, 수행원은 철학자 히파티아가 지금 문안 인사를
받고 있는 중이고, 그 집이 그녀의 집이라고 대답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영혼이 미움에 휩싸였다. 그러자 곧 그는 그녀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철학사’).
다마스키오스의 진단에 따르면 키릴로스는 미움 내지 시기 질투라는 마음의 병에 제압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히파티아의 죽음에 걸려 있는 수많은 디테일을 생략한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미움이 히파티아
사건의 핵심인 것은 사실이다. 종교가 다르거나, 종파가 다르거나, 생각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사라페이온도, 유대인 공동체도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고 철학자도 살해되
지 않았을 것이다.
적시에 바쳐진 뇌물 덕에, 히파티아 사건의 원인과 주모자에 대한 관(官)의 조사는 없었다. 키릴로스의 교회는 황실
까지 매수했다. 오레스테스 총독은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됐다. 418년, 마침내 도시의 행정권이 총대주교의 손으로
공식적으로 넘어가게 된다.
등대여, 다시 빛나라!
사라페이온의 파괴와 히파티아의 암살이 곧바로 고대문명의 종말을 가져오진 않았다. 440년대 키릴로스가, 죽은 지
80년도 넘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를 논박하는 ‘율리아누스에 반대하여’를 집필할 필요를 느낀 것을 보면 그렇다.
히파티아가 죽은 후에도 알렉산드리아의 신플라톤주의학파는 100년 넘게 지탱했다.
5세기 중반 히에로클레스가 아테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편을 잡았다. 비록 오래지 않아 고향에서 추방당하
고 말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마지막 이교도 철학교수인 올림피오도로스(475~570)는 이교도 철학자로서 기독교 도시에 산다는
것이 야수들에 둘러싸여 그들을 쓰다듬으려고 하는 미치광이 짓과 같다고 썼다(‘고르기아스 주석’).
다마스키오스(460~540)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우고 가르치다가 아테네로 건너가서 아카데미의 학장이 된다.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아카데미를 철폐하자 아카데미의 마지막 학장은 동료들과 함께 페르시아로 망명길에
오른다. 이로써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이 공식적으로 최후를 맞는다.
훗날 기독교 교회는 히파티아를 마녀로만 기억하지 않았다. 8세기 무렵 생성된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의 전설
에 히파티아의 아름다움과 처녀성, 그리고 철학·수학·천문학 분야의 학식이 투영된다. 사실, 전설의 성녀 카타리나와
역사적 히파티아의 연결고리를 시사하는 유적이 있다. 아직도 소아시아의 한 고대도시에는 ‘성 히파티아 카타리나’에
게 바쳐진 교회의 폐허가 존재한다.
왜 기독교 교회는 히파티아를 마녀에서 성녀로 만들었을까?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회가 ‘배운 여자’를 포용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14세기에는 ‘히파티아’가 여성 학자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처럼 사용되기에 이른다.
2011년 이집트는 현대사를 다시 쓰고 있다. 민주화운동으로 ‘현대의 파라오’라 불리던 무바라크가 30년의 독재 끝에
하야했다. 하지만 1월1일 알렉산드리아 콥트 교회에서 일어난 차량폭탄 테러 사태를 생각하면 이집트가 갈 길은 아직
멀다. 역사는 돌고 돌아 성 마르코의 교회가 무슬림이 대다수인 나라에서 약자 신세가 됐다.
이렇듯 오늘의 강자가 내일의 약자일 수 있음을 역사는 가르친다.
강자든 약자든 종교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내가 어느 종교를 가지고 어떤 종파에 속하
든지 남과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독단과 독선을 버리고 대화의 장, 아고라로 나와야 한다. 대화하는 정신,
이것이 히파티아를 인도한 고대문명의 등대였다. 등대여, 다시 빛나라.
참고문헌
● Maria Dzielska, Hypatia of Alexandria,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
● Manfred Clauss, Alexandria. Eine antike Weltstadt, Stuttgart: Klett-Cotta (2003)
5. 이슬람-십자군-기독교 전쟁할 것인가, 교류할 것인가
3월19일 연합군의 공습 직후 리비아 국영TV는 “십자군 적(crusader enemy) 전투기들이 트리폴리의 민간 시설을 폭
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십자군이라는 낱말을 끄집어내 서방 기독교 국가에 대한 반감을 자극한 것이다. 도대체 십
자군이 뭐기에 이슬람-기독교 세계에서 지금껏 회자되는 것일까. 11세기 말부터 200년간 문명의 교차로에서 지속된
십자군이 인류에게 남긴 것.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최고지도자 지지자가 장난감 소총을 든 아이를 목말 태운 채 리비아 국기를 흔들고 있다.
카다피 지지세력은 서방의 공습을 십자군의 폭격이라고 표현했다.
최근 친구와 말다툼을 하거나 부부싸움을 한 적이 있는가? 살다보면 타인과의 소통에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로 인한 갈등도 피할 수 없다.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여서 전쟁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린다.
인류 역사상 전쟁이 멈추었던 적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도 지구상 어느 곳에선가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은 언뜻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인 것처럼 보인다.
개전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조지 W 부시는 십자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슬람권의 오사마 빈 라덴도 이 낱말을
입에 올렸다. 요즈음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리비아에서도 무아마르 카다피가 서방 세계의 간섭을 십자군에
비유하며 이슬람 정서를 자극했다.
기독교 세계의 팽창
이러한 예에서 보듯 십자군이란 말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십자군에 대한 좁은 시각이 한몫을 했다.
십자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초점이 전쟁으로서의 십자군에 맞추어져서, 개별 전투의 전개 양상 및 전략과 전술,
그리고 광신에 따른 잔혹 행위에 관심이 집중되곤 한다. 또한 십자군의 본류에서 벗어나 성당기사단이나 성배(聖杯)
이야기 등에 관심이 쏠리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십자군은 여러 가지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십자군은 11세기 말부터 시작돼 200년 동안 지속된 기독교의 성지 회복을 위한 전쟁을 지칭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팽창 정책 전체를 일컫는다.
10세기부터 에스파냐에서 기독교 세력이 벌인 재정복운동(reconquista)이나 프로이센에서 독일인이 벌인 식민 활동
을 십자군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8세기 초 이슬람은 오늘날 스페인에 있던 서고트 왕국을 정복했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는 한동안 이슬람의 지배
아래에 놓였고, 이 지역을 기독교화하려는 샤를마뉴 대제의 시도조차 이슬람에 의해 좌절됐다.
그러나 10세기부터 이 지역의 기독교도들이 반격에 나서 조금씩 영역을 넓혀나갔고, 마침내 1492년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재정복운동 역시 기독교와 이슬람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십자군으로 간주된다.
심지어 12~13세기 남부 프랑스에 널리 퍼져 있던 기독교의 이단 카타르(Cathares)파에 대해 교황과 프랑스 국왕이
탄압한 것 역시 십자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카타르파는 육신을 더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정신만이 깨끗하다고 여겼으며, 육신을 깨끗하게 정화(cathare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이분법적인 생각은 정통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논란이 됐다.
이들은 기존의 정통 교회를 악의 교회로 규정했다. 교황의 탄압 대상으로 지목될 조건을 카타르파가 두루 갖췄던 셈
이다. 당시 프랑스 국왕이던 필리프 2세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남부 프랑스로 확대하기를 원했다.
남부 프랑스는 귀족마저 카타르파를 믿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같은 기독교도인 카타르파에 대한 십자군은 교황과
프랑스 국왕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에 일어난 것이었다. 더욱이 이 십자군의 진압 방식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이라크 전쟁을 두고도 십자군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렇듯 십자군은 10세기부터 13세기에 걸친 유럽의 팽창운동을
통틀어 일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십자군은 종교적인 성격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사회적 힘이 외부로 팽창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 성지에 대한 십자군은 그러한 팽창을 상징
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십자군의 원인은 1차적으로 이슬람 세력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콤네노스(Alexios Comnenos)가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한 데에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에 패배해 아시아에 있던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다. 곤경에 처한 비잔티움 황제는 1094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에게 투르크 족을
공격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다.
십자군의 원인
사실 이러한 요청은 이례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면 오래전부터 로마 교황과 비잔티움 황제가 소원했기 때문이다.
과거 로마의 황제는 제사장이기도 했으므로 황제는 행정조직의 우두머
리임과 동시에 종교조직의 우두머리였다.
종교조직만을 놓고 본다면 황제 바로 아래 5명의 총대주교(總大主敎·
Patriarch)가 있었으며, 후일 교황이라고 불리는 로마 총대주교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이러한 체계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다음에도 한동안 지속됐는데,
로마 총대주교는 다른 총대주교들과 마찬가지로 비잔티움 황제의 보호
를 받았다.
따라서 서로마 교회(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로마 교회(비잔티움 교회)
는 원래 단일한 교회 조직에 속했으며, 모두 비잔티움 황제의 지휘
아래 있었다.
그런데 726년 성상(聖像)파괴령을 기점으로 두 교회가 분열하기 시작
했다.
비잔티움 황제 레온 3세(Leon III)는 모든 성상을 우상(偶像)으로 간주
해 금지했으나, 게르만족에게 지속적으로 포교해야 하는 로마 교황은 성상 유지를 주장했다.
결국 로마 가톨릭 교회와 비잔티움 교회는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고, 1054년 로마 교황의 특사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파문함으로써 두 교회는 완전히 결별했다.
오늘날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과 동유럽의 정교회는 이때부터 같은 기독교이면서도 별개의 조직을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분열돼 있었으나 로마 교황도 비잔티움 황제도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화해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 가운데
비잔티움 황제가 원조를 요청한 것인데, 황제가 예상했던 원조는 대규모 십자군 파병이 아니라 제국 군대를 보조할
소규모의 용병 기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황의 생각은 달랐다.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원조보다는 성지 회복에 방점을 찍었다.
성지 순례는 참회의 수단이었다. 중세에는 예전에 성인들이 머문 곳을 방문하면 그 영향력의 일부가 순례자의 것이
된다거나, 성유골(聖遺骨)을 찾아가면 질병 치유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또한 중죄를 저지른 자에게 교회가 순례를 명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순례가 널리 퍼져 있던 중세 시대의 3대 순례지는 에스파냐 북부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 로마 그리고 예루살렘이었다.
순례지 중 하나인 예루살렘의 회복이야말로 기독교인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의무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교황이 원한다고 해서 기사들이 순순히 십자군에 나설 리는 만무하다.
기사들은 기사들 나름대로 참전 이유가 있었다. 서유럽은 게르만족의 침입, 서로마 제국의 멸망, 그리고 바이킹의 침입
등으로 혼란에 빠져 있다가 10세기경부터 안정되기 시작했다.
봉건제가 성립돼 기사들 사이에서는 위계질서가 생겼으나 이들의 폭력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교회로서는 이들이 호전
성을 분출할 출구를 마련해줄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이슬람을 정복함으로써 자신들의 토지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이
기사들에게 매력으로 작용했다.
더욱이 성지 회복과 성지 순례라는 명분까지 더해졌으므로 십자군이야말로 기사들에게 매력적인 기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앞서 언급했듯 십자군은 서유럽 사회의 팽창이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유럽이 안정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새로운 토지 개간이 이뤄졌지만, 토지는 여전히 부족했고, 장자상속제가 시행돼
둘째 아들부터는 영지를 상속받을 기회가 없었다. 즉 인구 압력이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서유럽 밖으로의 인구 배출을 유도했다. 따라서 십자군의 발생 원인을 성지 탈환이나 호전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유럽의 팽창이라는 시각으로 십자군을 들여다봐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군의 경과
십자군은 11세기 말부터 거의 200년 동안 지속됐는데, 대규모 군사원정이 여덟 차례 시도됐고 소규모 원정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14세기에도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열망은 이어졌다.
제1차 십자군은 1096년 시작됐는데,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으며, 팔레스타인 지역에 4개의 십자군 영
지(領地)를 건설했다.
기사들은 성당기사단, 병원기사단 같은 조직을 구축해 예루살렘을 지키고 순례자를 보호했다.
이들 기사단은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함락된 뒤 유럽으로 돌아와서도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이들이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다고 하는 성배를 가져왔다거나, 예수의 장례를 지낼 때 몸을 감쌌다고 전
해지는 성의(聖衣)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는 유럽인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후 4개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이던 에데사 백작령이 이슬람 수중에 들어가자 제2차 십자군이 결성됐다.
그리고 1187년 이슬람의 지배자 살라딘(Saladin)이 하틴(Hattin)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과 그 일대를 정복
하자 제3차 십자군이 구축됐다.
그러나 두 차례 모두 성지 회복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특히 제3차 십자군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영국 국왕
리처드 1세가 힘을 모았으나, 두 군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항구도시 아크레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이즈음 십자군은 점차 변질돼가고 있었다.
제4차 십자군은 가장 추악한 십자군으로 기록돼 있다.
일찍이 베네치아 상인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무역과 관련해 특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특권을 경쟁 도시인 제노아와 피사에도 부여하자 베네치아 상인들은 십자군에게 성지로 가는 선박을 제공해
줄 테니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달라고 요구했다.
1204년 십자군은 기독교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약탈한 뒤, 그 일대에 라틴 제국을 세웠다.
성지에는 가지도 않았으며 이슬람과의 전투도 물론 없었다. 이후에도 네 차례 더 십자군이 결성됐으나 모두 실패했다.
십자군의 결과
십자군은 원래 목표한 바를 성취하는 데 실패했다. 애초 교황은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서유럽을 단일한
기독교 세계로 만들고자 십자군을 제창했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교황의 권위가 실추한 반면, 국왕들의 권위는 신장됐다. 국왕들은 십자군에 참가해서 전사한 봉건귀족의 영지를 몰수
했고, 자신이 직접 참가한 십자군의 기사 군대를 지휘했다.
물론 십자군이 왕권 강화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십자군이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권력관계의 변화는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의 대립에서 교회권력이 점차 쇠퇴하고, 단일한 기독교 세계라는 개
념이 퇴조하는 대신 근대국가가 등장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국왕이 권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민족적 적대감이 격화되기도 했다.
제2차 십자군 때는 독일인과 프랑스인 사이에 증오감이 커졌으며, 제3차 십자군 때에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영국 국왕 리처드 1세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결국 단일한 기독교 세계를 건설하겠다는 바람은 분열된 민족국가의 길로 들어서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이렇듯 겉으로 드러난 직접적 결과만이 십자군이 남긴 영향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도에게 십자군은 승리의 표시로 인식됐다. 돌이켜보면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됐을
때부터 십자가 표시는 승리의 상징이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막센티우스와 서로마의 패권을 놓고 다퉜는데, 하늘의 계시를 받아 방패에
기독교의 십자가 표시를 하고 전투에 임해 승리를 거뒀다. 이 승리에 대한 보답으로 콘스탄티누스가 이듬해 기독교
를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결국 십자군은 콘스탄티누스의 방패에 새겨진 승리의 표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했던 셈이다. 오늘날 권력가들도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걸핏하면 십자군 운운하지 않는가.
주목해야 할 점은 십자군이 기독교인에게 승리의 표시로 기억되는 만큼이나, 이슬람 지역에서 십자군은 신성모독이
나 유럽인 침략행위의 표시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침략을 단호하게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십자군에게까지 관용을 베푼 살라딘을 이슬람 세계가 영웅으로
받들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인해 이집트가 영국, 프랑스와 벌인 전쟁은 1191년 영국 국왕과 프랑스 국왕이 모두
참여한 제3차 십자군에 비유됐고,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제3차 십자군을 물리친 살라딘에 비유됐다.
그리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역시 서방 세계에 대항해 싸우는 자신을 살라딘에 빗댔다.
지중해 세계의 부활
십자군은 일견 충돌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충돌이란 교류의 한 측면이다. 충돌과 교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십자군은 원래 목표에는 없던 다양한 결과를 가져왔고, 그 열매들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중해 세계는 십자군을 거치면서 문명 교류의 장으로 부활했다.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할 때, 모든 교류는 지중해를
통해 이뤄졌다. 물자와 인력, 그리고 문화가 지중해를 통해 로마로 흘러들어왔고, 로마에서 혼합됐으며, 로마로부터
흘러나갔다.
사실 지중해 세계는 로마 제국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기원전 1000년경 페니키아인이 지중해에 도시를 건설
했으며, 이후 그리스인이 지중해에 진출해 여러 식민도시를 세웠다. 우리가 잘 아는 나폴리, 마르세유 등이 바로
그리스인이 세운 식민도시다. 그리스인의 뒤를 이어 로마가 지중해를 내해(內海, mare internum)로 만들었다.
르드 살라딘(1138~1193)은 이슬람의 영웅이다.
로마 중심의 지중해 세계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쇠퇴했다.
4세기부터 서로마가 있던 지역으로 이주한 게르만족은 혼란을 야기했고,
7세기부터 북아프리카에는 이슬람 세력이 등장했다.
반면 동로마 제국은 축소되기는 했으나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그 명맥을
유지했다. 이윽고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서로마 황제에 오른 800년에
는 명백히 지중해는 세 문명으로 분열돼 있었다.
과거 서로마 제국에 속하던 영토에는 게르만족이 이주해 살기 시작했고,
이들 중 일부는 기독교로 개종했다.
8세기 말 게르만족 중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이던 샤를마뉴는 게르만족의
왕국들을 대부분 정복했고, 로마 총대주교이던 교황은 샤를마뉴에게 서
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이로써 오늘날 서유럽 지역에는 ‘게르만족-로마 가톨릭’ 문명이 형성됐고,
이 문명에서는 종교 지도자인 교황이 정치 지도자인 황제보다 우위에 있
었다.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와 소아시아로 축소된 채 유지되고 있었으나, 7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의
치세를 분기점으로 옛 로마 제국의 성격을 점차 잃고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명으로 거듭났다.
이 제국을 수도의 이름 비잔티온을 따서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한다.
그런데 과거 로마의 황제가 제사장이기도 했으므로 비잔티움 황제 역시 정치 지도자이면서 종교 지도자였다.
따라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총대주교가 황제 아래에 있었다.
동로마 제국이 ‘그리스 문화-정교회(Orthod-oxy)’를 특징으로 하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변모한 것이다.
북부 아프리카와 오리엔트 지역 역시 과거에는 로마 제국에 속했으나, 이슬람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
이슬람 세력은 8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해 지중해 남쪽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을 ‘이슬람 문명’으로 뒤덮었다.
이로써 지중해 문명은 오늘날의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샤를마뉴 제국,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비잔티움 제국,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문명으로 분열했다.
이러한 구분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지중해를 서유럽, 동유럽, 이슬람이 나누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늦춰 잡아도 800년부터 십자군이 발생한 시기까지 지중해는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한 셈이었다.
제1차, 제2차 십자군은 육지로 이동했는데, 이 같은 사실은 해로가 봉쇄돼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십자군은 서유럽에서 출발해 동유럽을 지나 그리스를 통과해 터키에 이르렀다.
터키에서부터는 육지와 해로를 모두 이용했다.
제3차 십자군에 이르러서는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의 십자군은 배를 타고 이동했으며, 독일을 비롯한 중동부 유럽의
십자군만이 육지로 이동했다. 악명 높은 제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제공한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중해를 통한 해상운송이 회복된 것이다.
해상운송을 항구적인 것으로 만든 데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생긴 기독교 영지들도 한몫을 했다.
앞서 서술했듯 제1차 십자군으로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4개의 영지가 생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데사 백작령이
이슬람 수중으로 넘어갔고, 뒤이은 십자군에서도 이 백작령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선 당연히 여러 가지 물건이 필요했고 이러한 필요를 충족하고자 유럽으로부터 물자가 수송됐다.
물자 유통은 기독교도의 영지들이 이슬람 수중에 넘어간 이후에도 계속됐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이 같은 유통의
중심 역할을 떠맡았다. 이탈리아를 출발한 선박은 그리스를 거쳐 소아시아 반도와 키프러스 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각지로 물건이 실려나갔다.
그러나 유럽에서 전해지는 물건보다 유럽으로 보내는 물건이 값어치가 더 나갔다. 유럽은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와
면직물, 귀금속을 수입했다. 중동에서 출발한 배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 도착했고, 일부 선박은 남부 프랑스와
스페인 동부로 항해했다.
중동의 산물은 강을 타고 서유럽 구석구석으로 전해졌다. 상업의 온기가 유럽의 말초신경까지 전해진 것이다.
한마디로 로마 제국 몰락 이후 단절됐다고 할 만큼 쇠퇴했던 지중해 무역은 십자군을 통해서 부활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업의 부활은 거의 농업만으로 자급자족하던 유럽의 여러 마을에 외부의 산물을 가져다주었고,
도시가 발달하는 디딤돌로 작용했다.
지중해 상업의 부활은 서유럽이 중국-인도-중동-아프리카로 이어지는 세계 경제에 연결됐음을 의미한다.
중국과 인도에서 생산한 물건이 유입되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 인도의 문화도 들어왔다.
예컨대 11세기 말 중국에서 사용하던 나침반이 12세기에는 유럽으로 유입됐다.
오늘날 베네치아에서 볼 수 있는 유리공예는 시리아에서 전래된 것이며, 사탕수수나 비단 같은 새로운 물품도 유럽
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치품이 유럽으로 운송됐다.
유럽은 귀금속, 목재, 모피 등을 제외하면 반대급부로 제공할 것이 없었다.
동방으로 수출할 물품이 필요했던 유럽은 모직물 생산을 늘리기 시작했다.
지중해 무역의 중심은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이탈리아 도시다. 이들은 십자군과 예루살렘 왕국에 물자를 제공했
을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과도 물자를 거래했다.
이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종교가 아니라 이탈리아와 중동 사이에 있는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베네치아 같은 도시에서 중동에 이르는 바닷길은 비잔티움 제국의 통제를 받고 있어서, 통행허가를 받고, 관세를 납부
해야 했다. 이러한 비잔티움의 통제에 불만을 품은 베네치아는 십자군을 사주해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을 공격하도록 했다. 베네치아 상인들에게는 종교보다 상업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들은 이후 지중해 상업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탈리아 상인들의 패권 장악은 십자군의 변질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중해 상업의 부활이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발생한 ‘교류’라면,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유럽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친 교류도 있었다.
그것은 이슬람 학문의 수입이었다. 물론 십자군 이전부터 이슬람의 학문은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 칼리프국(Cali
phate of Cordoba)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750년에서 900년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이 아랍어로 번역됐고, 신플라톤학파의 저술 역시 비슷한 시기
에 번역됐다. 그리고 12세기까지 이슬람의 여러 학자가 이 저작들을 해석하고 주석을 달았다.
이러한 이슬람의 학문적 업적이 십자군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유럽으로 건너갔다.
학문적 교류는 대부분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이웃해 함께 살던 지역에서 이뤄졌다. 12세기에는 에스파냐의 톨레도
를 중심지로 삼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거의 모두 라틴어로 번역됐다.
이러한 번역을 통해 거의 모든 지식 분야에서 학문적 진전이 이뤄졌다. 특히 아베로에스(Averroes)의 아리스토텔레스
에 대한 아랍어 주석이 라틴어로 번역돼 중세 스콜라 철학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철학뿐 아니라 수학 분야에서도 기독교 세계로 학문이 전파됐다.
인도에서 유래한 아라비아 숫자와 영(零)이 유럽에 도입됐고, 오늘날 컴퓨터 용어로 자주 사용되는 알고리즘(algorit
hm)이라는 단어의 어원인 수학자 알콰리즈미(al-Khwarizmi)의 대수학도 기독교 세계로 수입됐다.
과학 분야의 학문 수입도 적지 않았는데 연금술, 점성술이 대표적이다.
연금술이나 점성술은 그 자체로서는 일종의 거짓 과학이지만, 연금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화학 기구가 발전했으며,
점성술 역시 천문 관측기구의 제작과 천문도 작성의 디딤돌 구실을 했다.
요컨대 유럽인은 십자군을 통해서 이슬람의 학문세계를 접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 철학의 유산을 온전히 되살
릴 수 있었으며,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천문학 등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십자군이 당초 의도한 목적을 이뤘다고는 할 수 없다. 성지 회복이라는 순수한 종교적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십자군
이라고 하더라도 종종 광신이나 정치적 의도에 의해 변질되곤 했다.
애초에 십자군을 제창했던 교황은 단일한 기독교 세계를 구축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제4차 십자군이 보여주듯이 십자군에 참여한 기사들은 토지와 재물에 관심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종종 벌어졌던 광신에 가까운 행동은 내부 결속을 다지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했다.
가령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나서 벌인 살육은 너무나도 심각해 솔로몬 신전 옆에 피의 도랑이 생겨
발목까지 잠겼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화는 이슬람이 단결하는 계기가 됐다.
이와 반대로 하틴(Hattin)의 전투에서 살라딘이 성당기사단을 학살한 사건은 십자군 쪽의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이 같은 증오심은 전쟁을 지속해야 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경향은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서, 오늘날에도 십자군이라는 단어는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수단
으로 이용되곤 한다.
얻은 것과 잃은 것
십자군의 중대한 결과물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교류일 것이다. 물론 두 문명의 교류가 십자군을 계기로 시작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교류는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군을 통해 문명의 교류가 대규모로 이뤄지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탈리아 도시들은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해 르네상스 시대까지 영광을 누렸다.
지중해 상업의 부활도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십자군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격렬한 ‘충돌’ 속
에서도 의도하지 않은 ‘교류’가 발생하고, 이것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유럽이 이슬람 학문을 수입한 것 역시 충돌의 과정에서 이뤄진 교류의 결과다. 지중해 상업의 부활이 눈앞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면, 학문의 수입은 유럽이 다른 세계를 이해하고 그 장점을 취해 자신들의 장기적 발전을 도모하도록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모두가 종교와 전쟁에 매몰돼 있을 때도 학문의 교류를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으며, 이들이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충돌이 발생하고 있지만, 나머지 지역은 평화롭게 교류하고 있으며, 심지어 충돌이 벌
어지는 곳에서조차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십자군에서 보았듯이, 교류와 충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며, 교류와
충돌 모두 적개심을 품게 할 수도, 이해를 증진시킬 수도 있다.
6. 너희들은 물고기냐, 인간이냐?
이주 노동자를 보고 신경이 쓰일 때, 이국적인 식당을 찾아다닐 때, 엽서 속 이국의 풍경에 설렐 때 우리는 내 붓으로
타자(他者)를 그린다. 우리는 다름을 어떻게 느끼고, 왜 그렇게 느끼는 걸까?
16~17세기 유럽인이 그린 타자의 모습. 좌측 그림은 아메리카를
상징하는 여성으로, 전신에 나뭇잎모양 문신이 있다.
우측은 반인반어 괴물의 상상도다.
몇년 전 필자는 인터넷에서 여러 사람의 사진을 보고 국적을 맞혀
보는 게임을 한 적이 있다. 외국 생활을 좀 했던지라 자신만만하
게 게임을 시작했으나 점수는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거리 한복판에서 어떤 여성을 보고 ‘중국 사람이네’
라고 생각할 때 그 기준은 절대적이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일단 그 여성이 한국인이 아니라고 분류할 때부터 한국 여성의
외양, 제스처 등에 대한 본인의 경험과 생각이 개입된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인 중에서 중국인이라고 추측할 때에도 그에
관계된 생각이나 편견이 다시 발동하게 된다.
낯선 이와 마주쳤을 때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처럼 낯선 얼굴을 ‘낯설다’라고 인식하는 과정과 그 낯섦을 그리는 방식이다.
규모는 다양하지만 전쟁과 여행, 교역을 통해 인간은 다른 세계의 사람을 계속 만나왔고, 이들을 인종적·민족적 ‘타자’
로 인식하고 재현해온 역사도 짧지 않다.
일반적으로 타자를 자신과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이들을 형상화하는 과정에는 두 가지가 수반된다.
즉 타자를 그렇게 인식하는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생각과 실제로 타자를 그려놓았을 때 그 모습이 자신에게
타자처럼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라는 고민이다.
17세기 영국 작가들도 이러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글로벌 르네상스’라고도 할 수 있을 16~17세기에 이르러 유럽
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큰 범위로 자기 밖의 세계와 만났다.
항해술을 비롯한 기술의 발전으로 유럽인은 아메리카 대륙에 닿을 수 있었고, 이 지역을 대거 식민화하며 다량의 자원
을 수입했다. 물론 오스만튀르크 같은 지중해 권역의 나라나 인도와의 교류도 확대됐다.
신세계의 발견과 식민화, 팽창하는 교역과 함께 다량의 새로운 문물과 지식도 유입됐다. 서구는 이런 ‘수입품’을 자신
의 사회와 지식체계 속에 껄끄럽지 않은 형태로 안착시키고자 이런 것들과 지적·문화적 차원에서 협상하려 애썼다.
다른 세계와의 만남이 확대된 만큼 신세계나 인종적 타자에 대해 보고하는 문헌이나 문화 상품도 대폭 늘었다.
또 몽테뉴의 ‘식인에 대해서’(1580)처럼 신세계 사람들을 어떤 존재로 봐야 할지를 논의한 글도 있었다.
그런데 문화 상품의 경우, 여행기이든 연극이든 그 작품을 만든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아니, 사실 ‘객관적’인 보고와 재현은 거의 불가능했다. 문화 상품은 그것을 수용할 사람들의 기대 수준과 이해, 감성의
틀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자에 대한 문화적 재현은 타자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와 같은 정도로 이들
을 재현하는 작가 자신과 재현된 타자를 해석하는 사회를 보여준다.
아래에서 논의할 두 작품, 셰익스피어의 ‘태풍’과 아프라 벤(1640~89)의 ‘오루노코’는 신세계, 신세계인과의 만남이라
는 재료로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17세기 영국에선 지중해 연안의 나라를 포함해 외국을 배경으로 하거나 외지인이 주요 인물로 나오는 문학작품이 적지
않았으나, 이 두 작품은 타자의 모습을 더욱 섬세하게 그렸다고 평가돼왔다.
그러면 타자의 모습과 이들과 유럽인 사이의 만남이 어떻게 재현되었는지 주목하면서‘태풍’과 ‘오루노코’를 살펴보자.
“이 섬은 내 것이오” : 타자의 주장
1611년에 상연된 셰익스피어의 희곡 ‘태풍’은 밀라노의 공작 프로스페로
의 고초와 복수를 그린다.
간략한 줄거리는 이렇다. 학문만 좋아하며 마법도 공부하던 프로스페로는
야심적인 동생으로 말미암아 쫓겨나서 딸과 함께 이름 없는 작은 섬에 은
거한다. 그는 원래 그 섬에 살던 마녀의 아들 칼리반과 정령인 아리엘을
부리며 살았는데, 칼리반과 프로스페로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프로스페로는 천운의 힘과 자신의 마법을 이용해 근처 바다를 항해하던
자신의 동생 일행을 난파시켜 그 섬으로 데려오고, 이들을 혼내준 다음
함께 귀향하기로 한다.
‘태풍’은 프로스페로의 동생 일행이 튀니지로 시집가게 된 나폴리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것으로 설명하는 등 한층 교류가 활발해진 세계를 배
경으로 하고 있다(버뮤다 제도에 난파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의 경험담이 ‘태풍’의 소재라는 추측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멀리 떨어진 섬에 가서 그 섬의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칼리반과 아리엘의 노고에 의지해 사는 프로스페로 부녀의
모습은 일견 신세계에 건너간 이 시대의 유럽인처럼 보일 여지가 크다.
그런데 프로스페로를 식민주의자, 칼리반을 착취당하는 원주민으로만 보면 지나치게 단순한 독해라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으로 지명을 언급한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태풍’은 배경의 이름이 없다. 그저 신비로운 느낌이 강한 섬을 배경
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아리엘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정령이고 칼리반은 알제리 마녀가 악마와 사통(私通)해 낳
은 아들로 설명되고 있어서, 칼리반을 신세계 원주민들과 완전히 동일시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선후와 비중을 정확
하게 따지자면 셰익스피어는 프로스페로가 이국적이고도 신비로운 공간에서 겪는 사건을 원한 것이고, 그 공간에 살
던 존재인 칼리반을 설명할 때 신세계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일부분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칼리반의 모습들. 왼쪽과 가운데 그림은 18세기 삽화이고, 오른쪽 그림은 20세기 공연에서 칼리반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다.
그렇다 해도 셰익스피어가 프로스페로나 ‘태풍’을 관람한 영국인 같은 유럽인과는 사뭇 다른 칼리반을 어떻게 그렸는
지는 주목해볼 여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타자’로 분류될 수 있는 다른 존재를 어떻게 대하는지, 타자에 대한
대응이 그렇게 대응하는 자들의 어떤 점을 보여주는지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프로스페로뿐 아니라 이 섬에 도착하는 유럽인이 칼리반을 대하는 공통적인 태도는 칼리반의 ‘인간’됨을 부정하는 것
이다. 마녀와 악마의 아들이라면 절반 정도는 인간이라고 볼 수도 있고, 어쩌면 인간과 대단히 다르게 보이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칼리반을 보는 첫 순간부터 “물고기냐 인간이냐”고 외치며 그를 인간의 대열에서
제외시킨다(칼리반의 외양이 인간과 혹은 유럽인과 어떻게 다른지는 불분명하나, 대사로 미루어보건대 다른 인물과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확실하다).
프로스페로는 외양 때문에 칼리반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악한 성품과 행동에 치를 떨면서 “이 암흑의 것”
“타고난 악마”라고 한다.
또한 ‘태풍’에서 재미있는 점은 칼리반을 만나는 유럽인 모두는 그가 자신과 같은 인간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실제로 작품에서는 칼리반이 ‘인간’과 완전히 다르지 않은 면모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극중 인물로서 칼리반은 보통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과 지성의 폭을 지녔고, 자신의 개인사, 경험, 주장을
프로스페로와 청중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고 혹자는 공감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전달한다.
이는 프로스페로의 딸을 강간하려다 실패하고 그 후로도 끊임없이 프로스페로를 살해하려 시도하는 칼리반이 악한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프로스페로의 딸을 취할 수 있었다면 “이 섬을 칼리반들로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칼리반은 만만치 않은 철면피이며, 지극히 단순하고 자기중심적인 본능에 빠져 있는 자다.
프로스페로를 살해하는 장면을 상상할 때 칼리반은 무서울 정도로 가학적이고 폭력적이다.
칼리반이 외양도 이질적인데다 악한임은 분명하나, 무시할 수 없는 점은 그는 이 희곡에 나오는 다른 악한보다 사연
이 있고, 흥미로운 악한이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칼리반으로 하여금 제법 많은 말을 하게 해주었고, 그의 대사
는 청중으로 하여금 경멸과 지탄을 한 몸에 받는 그를 주목하게 만든다. 프로스페로에게 말을 배워 욕하는 데에 잘
쓰고 있다고 빈정대는 칼리반은 보기보다 언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인물이고, 그만큼 말하는 동물인 인간에 가깝
게 느껴진다. 칼리반의 대사는 대개 외국인의 말처럼 어딘지 단순하고 모자란 듯 들리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 한에서
말의 힘을 십분 이용하고 있다. 칼리반이 프로스페로에게 따지는 장면 중 하나를 보자.
이 섬은 내 어머니 시코락스에 의해 내 것이오.
당신이 내게서 섬을 뺏었지만. 당신이 처음 왔을 땐
나를 쓰다듬고 소중히 여겼었소. 내게 들딸기 섞인 물을 주었고,
밤과 낮에 빛나는 저 더 큰 빛과 작은 빛의 이름도 알려주었소.
그래서 난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 당신에게
이 섬의 특성을 전부 가르쳐주었지 (중략)
그랬던 것이 저주스럽구나! 시코락스의 모든 저주가
당신에게 떨어지기를!
여기서 칼리반은 (서구의 부계적 상속권과 대비되는) 모계적 상속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더해 그는 자기 기억을
바탕으로 자신이 영토를 선점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프로스페로가 섬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자신의 덕을 봤다는
것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프로스페로의 힘 중에서 주요한 요소인 마법을 의식한 듯이 자신의 어머니인 마녀 사이코
락스의 마법을 들먹이는 것도 칼리반이 상황을 그런 대로 잘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논리적인 언변 외에도 청중이 칼리반을 ‘인간적인’ 존재로 느낄 수 있는 요소로 그가 섬의 자연 환경에 대해 그 나름대
로 감성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섬의 낯선 소리에 놀라는 유럽인들에게 칼리반은 자신의 섬이 본디
매우 신비로운 소리로 가득 차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소리의 아름다움에 젖어 있노라면 행복하고, 소리가 멈추었을 때 행복한 꿈에서 깬 사람 모양 울고 싶어진
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렇듯 아름다운 것에 둔감하지도 않고, 자신의 감성을 알맞은 비유로 표현할 줄 아는 칼리반의
모습은 그를 인간에 못 미치는 기형의 생물로만 보기 힘들게 한다.
‘태풍’에서 셰익스피어는 칼리반의 여러 모습과 목소리를 섬에 도착한 유럽인들의 반응과 함께 들려준 셈이다.
그런 면에서 셰익스피어가 적어도 이 희곡에 등장했던 여러 유럽인보다는 타자라는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고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었고, 이들을 재현하는 일에서 유연성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돈으로 살 수 있겠지” : 타자라는 거울
‘태풍’에서 셰익스피어는 칼리반뿐 아니라 그와 새로운 세계를 만난 유럽인들의 모습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존 사회의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 낯선 섬에 와서 여러 유럽인은 자신의 성품이나 신념을 마음껏 표현한다.
일례로 난파한 유럽인 중 하나인 노(老)대신 곤잘로는 이 섬에 교역도, 정치가도, 돈도, 문자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
는 꿈같은 계획을 펼친다. 이런 발언은 당연히 이들 유럽인이 새로 도착한 섬이나 17세기의 신세계를 정확히 파악해
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런 낯선 세계를 ‘백지’로 보고 이 ‘백지’를 자신들의 세계인 유럽의 문제가 부재하는
뒤집힌 이미지의 공간으로 해석하고 싶었을 뿐이다.
칼리반과의 만남을 통해 드러나는 유럽인들의 모습을 좀 더 살펴보자. 앞서 말했듯이 프로스페로를 비롯해 유럽인
모두가 칼리반을 ‘인간’으로 동등하게 대접하지 않으나, 이들의 반응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프로스페로로 말하자면, 적어도 칼리반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이전에는, 그나마 타자인 칼리반에게 좋은 영향을 끼
치려 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태풍’에 나온 다른 인물보다 세련되고 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스페로가 언어를 비롯한 각종 지식을 가르쳐준 반면 칼리반도 섬에 대한 정보와 노동력을 제공해주었으니, 칼리
반이 이 관계에서 일방적인 수혜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학문을 좋아하고 마법까지 공부
하다가 권좌를 잃은 프로스페로에게 지식은 최고의 가치이자 재산이었음이 분명하다. 프로스페로도 한때는 자신이
처음에는 자신의 딸에게 그랬듯이 칼리반을 인간적으로 배려하며 가르치려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프로스페로는 칼리반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가장 좋은 방식으로 주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한계가 있다 해도 칼리반을 교육하겠다는 프로스페로의 시도는 신세계인의 야만성과 무지함을 떠들어댔던 당
대 사람들의 태도에 비하면 훨씬 선의를 지닌 것이다.
반면에 칼리반에 대해서 다른 유럽인이 보이는 반응은 실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이다.
칼리반은 극 중반에 술 취한 집사인 스테파노와 광대 트링큘로와 만나 제법 긴 시간을 이들과 같이 보내고, 프로스페
로의 동생과 나폴리 왕의 동생도 칼리반을 목격하게 된다.
이들 네 명의 유럽인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칼리반에 대해 매우 거친 반응을 보인다.
이들은 칼리반을 보자마자 물고기에 비교하며 면전에서 그의 이상한 외양과 악취를 비웃을 뿐 아니라, 단박에 칼리반
을 돈으로 산 뒤 유럽으로 데려가 구경거리로 만들면 짭짤한 벌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 시대에는 신세계에서 원주민을 데려와 장터 같은 곳에서 전시하기도 했고, 트링큘로가 말하듯 보통 사람은
굶고 있는 거지한테는 돈을 아껴도 인디언 시체는 신기하게 여기며 돈을 내고 구경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칼리반에 대한 이들의 첫 반응이 하나같이 그들 자신의 일천한 지식과 편견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나, 이들
유럽인이 칼리반을 대하는 방식이 처음이나 끝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점이다.
스테파노와 트링큘로는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신분이 낮은 축에 드는 사람으로 희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데,
칼리반에 대한 이들의 대응은 유럽인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신세계 원주민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을 희화화하
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칼리반에게 성경에 입을 맞추게 하는 한편 술병에 대고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유럽의 사회적 위계가 이 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용해 왕 혹은 귀족 노릇을 하려든다(물론 이때 칼리반은
스테파노가 왕 노릇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신민이다). 또한 스테파노와 트링큘로에게 풍요로운 섬과 프로스페로의 아름
다운 딸은 자신들의 정복욕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태풍’의 끝부분에서 프로스페로와 다른 유럽인은 자신들의 문제가 일단락되자 섬을 떠난다. 이들이 칼리반을 데려간
다는 언급은 없다. 프로스페로만이 칼리반 교육이라는 프로젝트가 끝내 실패했다는 것에 씁쓸함을 느낄 뿐, 나머지
사람은 잠시 만났던 칼리반에 대해 무심하다.
칼리반 자신도 프로스페로를 제외한 유럽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다지 변하지 않았고, 어쩌면 그는 유럽인들이 모두
떠난 섬에서 예전에 살던 그대로 살았을 것도 같다. 이 희곡에서 칼리반과 유럽인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서로에게 생긴
변화는 그다지 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을 본 청중은 적어도 자신들이 타자와 만났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그러한 자신에 대해 스스로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되짚어볼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이것은 ‘태풍’에서 셰익스피어가 거둔 수확이다.
“피부색만 아니라면” : 타자의 재현
17세기 삼각무역 경로와 교역품. 별표가 가리키는 곳이 수리남이다.
이제 두 번째 작품인 ‘오루노코’를 보자. 여성 작가인 아프라 벤은
‘태풍’이 상연된 후 약 70년이 지난 1688년 이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동안 영국은 대외관계에서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16세기에는 스페인이 남미를 지배했지만,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영국이 점차 해상 영향력을 키우게 됐다.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에도 진출해 식민지를 세우기 시작했다.
특히 1640년대에 들어서는 중남미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는데,
이를 위해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자,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
아메리카 대륙으로 데려가 일을 시켰다. ‘오루노코’의 배경이 된
남미 북부의 수리남에도 다수의 영국인과 그보다 훨씬 많은 수
의 아프리카인 노예가 있었으며, 아프라 벤 자신도 수리남을 실제로 방문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7세기 영국인들은 이전보다 신세계를 훨씬 더 가깝게 여겼을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보고서뿐 아니라 남미
원주민에 대한 악행을 비판하는 문헌도 있었다.
또한 ‘오루노코’ 초반부에 언급된 ‘인디안 여왕’처럼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 등장하는 연극도 상연됐다.
신세계의 두 모습. 좌측은 신세계인이 식인을 하는 광
경을 상상한 그림, 우측은 신세계의 동식물을 기록한
것이다.
아프라 벤은 아프리카의 코라만틴 왕국의 왕자인 오루
노코의 비극을 여성 화자의 회고담이라는 방식으로
들려주고 있다.
오루노코는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질투에 찬 할아
버지에 의해 아름다운 연인과 헤어지고, 그 후 영국인
선장의 속임수에 빠져 노예가 된 뒤 수리남으로 이송된다.
그곳에서 헤어졌던 연인을 천운으로 만나고 몇몇 영국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연인이 임신한 후 오루노코는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더욱 간절히 원하게 되어 다른 노예들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절망에 빠진 오루노코는 목숨을 걸고 자신을 괴롭힌 백인에게 복수하려 하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끔찍하게 처형당
한다.
‘오루노코’는 신세계와 영국이 이전보다 더 큰 범위로 교류하게 된 시기에 발표됐고 아프리카인 노예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텍스트다. 아래에서 이 작품에 대해 논하려 하는 점 중 하나는 이 이야기가 결코
아프라 벤이나 다른 동시대인들이 만났다는 아프리카인 혹은 남미 원주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작가가 문학적으로 인물을 창조할 때 역사적 현실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다만, 현실감 있는 인물과 배경
설정은 작품을 더욱 설득력 있고, 흥미롭게 만들기 때문에 작가들은 자신이 아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하게 마련이다.
‘오루노코’도 예외는 아니다. 이 작품에는 아프라 벤 자신이 수리남에서 경험한 바나 수리남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반영돼 있다. 동시에 아프라 벤은 작가로서 자신이 원하는 작품의 분위기에 맞게끔 기구한 운명을 지닌 영웅 오루
노코와 그가 활동했던 공간인 이국적인 아프리카와 수리남을 재창조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이야기의 앞부분에 나오는 오루노코의 고향 코라만틴 왕국의 묘사는 17세기 현실의 아프리카가 아니라
하렘이나 폭군 같은 모티프가 등장하는 근동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오루노코에 대한 묘사도 무예,
교양, 외모 등 상상할 수 있는 좋은 자질을 모두 갖춘 훌륭한 왕자로 설정되다 보니 과장된 찬사가 연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프라 벤이 위대한 영웅과 왕자라는 이상을 지극히 유럽 중심적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즉 최고의
왕자가 갖출 교양은 유럽의 교양과 학식이고, 위대한 영웅은 서구 영웅의 예를 통해서만 재구성된다.
그래서 오루노코는 얼굴만 검을 뿐 서구의 영웅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오루노코의 뛰어남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는 탁월한 무용(武勇)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유럽의 교양을 쌓았으며,
영국·스페인 상인과 즐겨 이야기하다 그 나라의 언어에도 능통하게 됐다. 서구 역사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오루노코
는 로마 영웅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을 뿐 아니라 17세기 영국 내전의 이야기에도 흥미를 보인다.
이러한 오루노코를 두고 화자는 “성품에 야만스러운 구석이 없었고 모든 점에서 유럽 궁정에서 교육받은 듯 행동했다”
라고 평가하며 오루노코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서구적 가치 기준과 노골적으로 연결한다.
이런 모습의 오루노코는 현대적 기준에서 좋게 봐주자면 코스모폴리탄, 혹은 국제인이라고 불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루노코의 외양 묘사를 보면 그를 유럽 중심적 기준을 충족시키는 영웅으로 만들려 했던 시도가 가끔은 억지
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낳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얼굴은 그 나라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불그스레한 갈색 기운이 도는 검은색이 아니라 완전히 흑단 내지는 잘 다듬
어진 칠흑 같았지요. (중략) 눈자위는 눈같이 흰색이요, 치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코는 아프리카인들 모양 평평한 것이 아니라, 로마인처럼 솟아 있었습니다. 입 모양도 우리가 볼 수 있는 중 최고로
멋지게 생겼었는데, 흑인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위쪽으로 뒤집힌 큰 입술이 아니었답니다. 얼굴 전체의 비율이며
분위기가 어찌나 고귀하고도 정확한지, 피부색만 아니라면 자연에서 그보다 더 아름답고 근사하며 잘생긴 사람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프라 벤의 딜레마는 오루노코의 인종적 정체성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이니만큼 그가 아프리카 흑인이라는 사실
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다른 한편 그를 평범한 흑인과는 뭐가 달라도 다른 비범하고도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루노코는 피부색은 극단적으로 까맣고 치아는 유달리 하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독특한
외모로 묘사된다. 화자는 아프리카 흑인의 인종적 특성인 코나 입술의 형태마저 유럽인들의 미감에 맞는 형태로 수정
해서 제시하며, ‘피부색만 아니라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안타까움 섞인 칭찬을 늘어놓고 있다.
이는 오루노코의 이질성을 무마해보려는 몸부림에 가깝게 보인다.
이야기의 끝부분까지 오루노코는 상당 정도 혼종적인 인물로 남는다.
수리남에서 노예가 됐을 때 그는 로마 영웅의 이름인 ‘시저’로 새로 불리게 된다(노예에게 고전 작품의 인물 이름을 붙
이는 것은 종종 발견되는 관행이긴 했다). 이후로 수리남에서 오루노코는 그의 무용과 영웅적 면모에 걸맞긴 하지만
어쨌든 서구인이 붙여준 것임에 틀림없는 이 이름으로 계속 불린다. 또한 그는 작중 화자를 포함한 몇몇 영국인과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이들의 탐험에 동반하거나 기독교를 비롯한 서구 문화에 대해 듣고 관심을 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합성사진 같은 오루노코가 ‘아프리카인’답게 그려진 부분을 찾으려 한다면, 이 경우 고려해야 할 것은
‘아프리카인다움’이 어떤 기준을 근거로 한 것이냐는 문제다. 예를 들어 이야기 종반부에 나오는 사건 하나를 보자.
오루노코는 극도의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자신을 괴롭힌 자들에게 복수한 후 자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궁리하던 중 그는 자신이 먼저 죽으면 임신한 연인이 능욕당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쳐, 복수하기 전에 연인을 미리
죽이는 것이 낫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그는 연인과 숲으로 가서 그녀에게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 후 연인이 동의하
자 그녀를 죽인다. 그러고는 썩어가는 그녀의 시체 옆에서 며칠을 누워 있게 된다. 실종된 오루노코와 그의 연인을
찾던 유럽인들은 악취 가득한 숲에서 오루노코를 발견하고는 연인을 죽였다고 그를 비난한다.
이런 오루노코는 아프리카인다운가, 아닌가? 이야기 초반에 화자는 남미 원주민 여성이 남편에게 지극히 순종적이
라고 설명했고, 영국인들이 만난 부족 중에는 자해(自害)행위로 용맹을 가리는 승부를 벌이는 부족도 있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오루노코가 임신한 연인을 살해한 사건은 오루노코와 그의 연인을 유럽인과 확연히 다른
존재로 느끼게 해줬다고 할 수 있다. 이 장면을 보고 당대 영국 청중이나 현대 독자가 오루노코를 ‘아프리카인답다’
라고 느꼈다고 치자.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아프리카인답다’라는 인상을 준 오루노코의 모습이 그의 진정한 아프
리카적 정체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과격한 행동과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애초에 아프라 벤을 포함
한 영국인들이 아프리카인을 복수와 명예, 폭력에 대해 서구인과 전혀 다른 감수성과 기준을 지닌 타자로 보았기
때문에 삽입됐을 수 있다. 아프라 벤은 적당한 선에서 ‘진짜’ 아프리카인을 보고 싶어하는 독자의 취향을 고려해 위
에서 말한 사건을 그렸을 뿐이고, 영국인들은 이 ‘아프리카인다운’ 오루노코에게서 자신들이 애초에 생각했던 ‘아프
리카인다움’만을 확인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이다.
영웅적인 인물을 그리기 위해 ‘우월한’ 서구적 특성을 억지로 접목해 인종적 특성을 가려버리든, 아니면 역으로 다른
인종, 문화권의 이질성을 듬뿍 강조한 에피소드를 늘어놓든 공통점이 하나 있다. 독자들이 만나는 타자는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는 문화적 기준에 맞춰 재구성된 타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들도 말할 줄 아는가” : 타자와의 만남과 공존
사실 ‘오루노코’는 유럽인의 눈을 통해서 아프리카와 수리남을 보여주고, 이 두 곳에서 유럽인이 아프리카인이나 남
미 원주민과 교류 및 충돌하는 모습을 그리는 등 다양한 공간과 만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텍스트다.
이 작품에서 이뤄지는 여러 인종 간의 만남을 대략 꼽아보자면, 여러 나라의 유럽인들이 오루노코의 고향인 코라만
틴을 방문하고 있다는 것과 수리남에서 서구인을 만나게 된 아프리카 출신 노예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수리남에서
서구인은 남미 원주민과 공존했으며, 아프리카 노예 중 오루노코 같은 사람은 남미 원주민을 만날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살던 때의 오루노코를 보자. 아프리카에서 그는 프랑스인에게 유럽 문물을 배우기도 하고 영국·스페인
과 교역하기도 하지만, 결국 영국인 선장의 속임수에 넘어가 노예가 되고 만다. ‘오루노코’의 화자는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이는 선장을 칭찬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언급을 피하겠다’고 한다.
이 말 자체는 은근한 비판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이야기 앞부분에서 화자는 수리남에 도착한 노예가 팔리는 과정을
아무런 감정도 판단도 없이 그리고 있다. 이를 보면 아프라 벤은 영국의 경제적 이익에 노예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데는 근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듯하다. 화자는 그저 오루노코처럼 신분이 높은 아프리카인이 노예가 됐을
때 생기는 현실적 문제를 걱정하는 동시에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인 노예가 다수고, 영국인이 소수인 수리남의 상황에서 아프라 벤이 노예 집단과 영국인의 관계에 대해 보
이는 태도는 어정쩡하기 짝이 없다. 영국인들보다 거칠다는 네덜란드인이나 출신이 나쁜 잔인한 영국인 몇 명을 비
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예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에 반대하는 화자의 마음을 엿볼 수는 있다.
그러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영국인들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대사는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실제로 화자를
포함한 여성들은 오루노코가 다른 노예들과 반란을 시도했을 때 멀리 피난 가버리고 그 결과 화자는 오루노코가 곤
궁에 처했을 때 도와줄 기회를 놓친다. 뛰어난 아프리카인 개인, 왕족 노예인 오루노코에 대한 동정과 노예에 의존
해 경제생활을 영위하며 이들을 통제해야 하는 현실은 별개인 것이다.
남미 원주민과 서구인의 공존과 만남에서도 영국인들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화자가 남미 원주민을 그리는 태도 역시
상당히 혼란스럽다.
이야기의 초반부에서 남미 원주민은 마치 태초의 낙원에 살던 사람들처럼 순수하고 고귀한 것으로 그려지거나 신세
계만큼이나 신비하고 낯선 존재로 제시된다. 이들과 유럽인들의 관계도 평화롭고 우호적인 것처럼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바로 뒷부분에 나오는 우호적으로 지내야만 안전이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의 말을 읽으면 작가가 묘사
한 평화 공존 상태를 말 그대로 믿기 어렵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짤막하게나마 선하기만 하다던 남미 원주민들이
그들에게 나쁘게 대한 네덜란드인을 도륙했다는 이야기도 언급된다. 이처럼 ‘오루노코’는 그 시기 아메리카 대륙에서
신세계인과 유럽인의 공존이 아슬아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수리남 등의 중남미에서 노예제는 19세기까지 계속됐다. 수리남의 노예제를 비판한 18세기 후반의 삽화.
그런데 ‘오루노코’는 유럽인과 신세계인의 긴장 관계에 더해 흥미진진하고
호기심에 가득한 양자 사이의 만남도 그리고 있다.
이야기 중반 정도에 오루노코와 영국인들은 농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탐험을 나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원주민 부족을 보게 된다.
이 탐험 장면은 신기한 동식물, 색다른 냄새의 공기로 특징지워지는 낯설
고도 매혹적인 신세계, 그리고 신세계인과의 만남을 그리는 막간극처럼
도 읽힌다.
재미있는 점은 원주민들이 자신과 다른 유럽인을 보면서 신기해하는 것으
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남미 원주민들은 한눈에 인종적 타자임이
분명한 이들 유럽인이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하며 “친구여”라고 부르며
접근한다. 이들은 통역해주는 사람에게 유럽인이 말을 할 수 있는지, 지력
은 갖추었는지, 전쟁이라는 것을 아는지 등을 연달아 묻고는 자신의 음식
을 대접 한다.
반대로 유럽인들도 원주민들 보란 듯이 화려한 옷을 입거나 원주민들 앞에서 피리를 불고, 확대경을 이용한 놀이를
한다. 이는 마치 원주민들이 기대했을 법한 신비로운 재주를 가진 ‘타자’의 모습을 충실히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럽인의 낯선 모습을 보고 신기해하는 남미 원주민의 모습은 여행기 같은 글에서 흔히 나오던 타자에 대한 유럽인
의 경탄이나 다른 세계 사람들을 전시품처럼 그리는 행위를 뒤집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 탐험 장면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타자성’이나 ‘이질성’은 상대적이고 쌍방향적임을 보여주고, 다른 글에서 발견
되는 유럽인의 자기중심적 시선을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만든다.
이 탐험을 제외하면 ‘오루노코’에서 유럽인과 이들 타자 사이의 만남은 거의 다 비극으로 종결된다.
오루노코가 다른 노예들을 선동해 탈출을 시도함으로써 영국인들의 이익을 침해했을 때 그는 ‘보통 노예처럼’ 채찍질
당한 후 능지처참되고, 토막 난 그의 시체는 본보기로 각 농장에 보내진다. 오루노코에게 호의적이던 일부 영국인들
은 이런 상황에 무력하기만 하다.
결국 유럽인과 신세계인의 만남과 공존의 결과물은 풍요로웠으나 불안정했던 옛 식민지에 대한 기억과 안타깝게 죽
은 오루노코에 대한 추모의 정이다. 참담한 비극으로 끝난 오루노코의 삶과는 달리 그의 이야기는 출판 후 곧 연극으
로 만들어져 크게 인기를 얻었으니 수리남과 오루노코를 기리려 했던 아프라 벤의 시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오루노코’를 통해 많은 수의 독자와 관객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이 직접 보지 못한 신세계나 타자와 마주했을 것이고,
새로운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첨예한 갈등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갈등에서
희생된 오루노코에게 공감하며 갈등의 원인과 그 갈등을 해결할 방안을 고민하게 됐다면, 불완전하게나마 타자와의
만남을 그린 이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낯선 세상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
18~20세기 초에 걸쳐 서구세계는 제국주의적 팽창을 적극적으로 추구했고, 영국의 경우 1834년 노예를 해방했지만
인도 등의 나라를 놀라운 속도로 식민화했다. 그 결과 정치적·경제적 갈등이 급증했고, 사회적 차원에서나 문화적
차원에서나 인종적 타자에 대한 인식과 재현은 더욱 첨예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와 함께 식민주의 담론이 더욱 정교해지면서 유럽인들이 식민지 시대의 주체로서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도
계속 변화했다. 이렇듯 역사적·문화적 환경이 변함에 따라 ‘태풍’과‘오루노코’는 끊임없이 재해석됐다.
18세기 삽화에서 프로스페로는 계몽적인 현자, 칼리반은 흉측한 괴물로 묘사됐으나 탈식민주의 담론이 대두된 20세
기에 들어서는 프로스페로는 오만하고 교활한 식민주의자, 칼리반은 어떻게든 제 목소리를 내보려는 피식민 주체로
이해되기도 했다. ‘오루노코’는 18~19세기 노예 해방주의자들이 열심히 읽은 텍스트였고, 프랑스나 독일에서 번역되
어 읽히거나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특히 이 작품은 20세기 후반 탈식민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의 각광을 받게 됐고, 17세기 서구의 신세계 진출이나
노예제의 실상에 대한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더 널리 읽히고 있다.
셰익스피어와 아프라 벤은 우리에게 자신과 다른 자, 낯선 이를 만나서 그 다름을 자신의 틀로 인식하고,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재현하는 과정에 대해 다면적으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인종적 다양성이 강화되는 추세인 21세기의 다문화 사회에서는 타자와의 관계 맺음에 대해 더 정교하게 생각할 필요
가 예전보다 커질 듯하다. 지하철에서 외국인들이 낯선 방식으로 인사하는 것을 보고 신경이 쓰일 때, 맛있다는 인도
음식점을 찾아다닐 때,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한 관광 광고에 설렐 때에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
다. 나는 이 다름을 어떻게 느끼고, 왜 그렇게 느끼고, 그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는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