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동 진씨(廣東陳氏) 시 조 휘(諱): 진 린(陳 璘), 광동백(廣東伯) 자(字): 조작(朝爵), 호(號): 용애(龍崖)
광동은 중국 남단에 위치하여 남지나해에 면한 광동성의 성도인 광주(廣州)의 통칭으로, 일찍이 해륙교통의 요충을 차지하여 화남에 있어서의 정치·경제·문화의 대중심지이다. 우리나라 진씨의 시조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 조선이 위태롭게 되자 명나라 어위도총관·전군도독부도독(前軍都督府都督)으로서 수병 5천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강진 고금도에서 이순신과 더불어 전공을 세워 광동백에 봉해진 진 린(陳 璘)이다. 그는 본래 중국 광동 지방에서 대대로 현유와 현관을 배출한 명문의 후손이다. 그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뒤에 태자 소보에 추증되었고 그의 손자 영소(泳 )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를 지내다가 명나라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남경으로부터 배를 타고 동도하여 남해의 장승포에 표착하였다. 그러다가 조부인 린(璘)이 공을 세웠던 강진 고금도(康津古今島)로 옮겨 살다가 다시 해남현 내해리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는데 여기서부터 광동 진씨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감국수위사 영소(泳 )의 아들 석문(碩文)이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손자 천룡(天龍)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추증되어,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을 지낸 기환(幾 )과 함께 이름났고, 계규와 계조는 효행으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동 진씨는 남한에 총 271가구, 1,1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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