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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24장10~23절
제목 : 이것을 고백하리이다
더둘로의 고소가 끝나자, 바울에게 변호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바울은 차분하고도 분명하게 논지를 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1. 고소에 대한 바울의 변론(10~21절)
1)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심으로 기꺼이 변명하십니다(10절).
“[10]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꺼이 변명하나이다”
벧릭스는 재판장으로서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듯 말로 하지 아니하고 고갯짓으로 바울에게 변호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벧릭스가 '재판장'됨을 말하는데,
이는 더둘로가 벧릭스의 '통치자' 됨을 집중적으로 말한 것과(3절) 대조를 이룹니다.
바울 역시 벧릭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함으로써 재판장에 대한 정중한 예의를 표시하고 있으나,
더둘로의 비굴한 아첨에 비해 절제되고 점잖은 인사입니다.
2) 바울의 변론입니다.
첫째, ‘전염병 같은 자’라는데 대하여 (11절).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지 열이틀밖에 안됩니다(11절)
“[11]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안 되었고”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 이 표현은 8절에서 더둘로가 자신에게 했던 말과 동일합니다.
두 사람 모두 벧릭스의 증언이 확인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증언이 서로 다르므로 한 사람은 진실을 말한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거짓을 말한 것이며 이는 구체적인 증거로써 밝혀질 것입니다.
열 이틀밖에 -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머문 기간이 정치적 소요(騷擾)를 일으키기에는 상당히 짧은 기간이었음을 밝힘으로써
더둘로의 고발이 근거 없는 억지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열 이틀 가운데서도 나흘 동안 붙들려 있었다는 점과
칠일간은 성결례(聖潔禮)를 행하였음을 감안하면 그것은 더욱 명백해집니다.
쉴라터(Schlatter)의 견해대로 다음과 같이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습니다.
제1일 : 예루살렘에 도착(21:17),
제2일 : 야고보를 비롯한 장로들과의 회합(21:18),
제3일-제9일 : 7일간의 정결례(21:27) 및 성전에서의 누명(21:28),
제10일 : 공회에서의 증언(22:30),
제11일 : 바울을 살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23:12),
제12일 : 가이사랴로의 이송(23:32).
둘째, ‘소요하게 하는 자’ 에 대하여(12절)
(1)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12절)
바울의 자기변호는 매우 논리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더둘로의 웅변가적이고 선동적인 주장과 뚜렷이 대조됩니다.
앞절에서는 자신의 예루살렘 체류기간이 짧았다는 것을 이야기했는데,
여기서는 더 나아가 대중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전혀 갖지 않았음을 말함으로써, 정치적 반란자로 고발된 것이 터무니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전에서 사람들로 더불어 토론을 벌인 적도 없고
회당과 성 안에서 사람들을 선동한 일도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천부장 루시아가 그의 보고서에 기록하지 않았을리가 없을 것입니다.
한때 소란 사태가 있긴 있었지만 그것은 바울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울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에 의한 선동의 결과였고(21:27, 28),
그나마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었기에 바울에게는 아무런 흠잡을 일이 없었습니다.
셋째,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하는데 대하여(14~16절)=종교적 문제.
(1)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14절)
“[14]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먼저바울은 더둘로가 '이단'이라고 규정한 것을 '도'(호도스)라고 정정하고 있
으며 유대교와 이 '도'(道)가 동일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연속성에 대한 강조는 이 '도'가 유대교와 동일하게 로마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은근히 시사합니다.
그리고 더둘로가 '나사렛 이단'이라고 표현할 때 정치적 집단이라는 뉘앙스로 받아들이도록 사용한 것에 대해(5절 주석 참조),
결코 반로마적인 정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2)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15절)
여기서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과 부활이 동일시되고 있고,
그것은 곧 유대인들의 신앙과 동일시됩니다.
사두개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부활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성경적 근거를 가진 것입니다.(마22:23-33 주제 강해)
(3)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16절)
'이것'이란 앞 절의 부활, 즉 의인과 악인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되는 것을 뜻합니다.
'거리낌이 없기를' '...에 넘어지지 않는'의 의미입니다.
'힘쓰노라'(아스코)는 '부단히 연습하고 노력한다'는 뜻으로 바울은 늘 이렇
게 살려고 애썼습니다(고전 9:27;15:31).
본문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기본적인 의무를 반영하고 있으며 (잠 3:4;눅 18:2, 4),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로 율법을 요약하신 예수의 말씀과 결부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사람 대하여'가 강조되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인들은 사람 앞에서의 의를 위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상실하거나,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위하여 사람 앞에서의 의를 무시해 버리는 형태를 보였었습니다(눅 20:46, 47).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동시적(同時的)으로 의롭게 행하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바울의 겸손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고 말할 뿐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단언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허위적 자신감에 가득 찬 더둘로의 태도와는 전혀 대조적입니다.
넷째,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에대하여(18~19절)
(1) 결례를 행하였습니다(18절)
사실 바울이 성전에서 결례를 행했던 사실은 성전 관계자들로부터 쉽게 확인될 수 있었으며, 이와 같은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자가 성전을 모독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겠습니다.
(2)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고발하였을 것입니다(19절)
“[19]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성전에서 바울을 해치려 했던 유대인들(21:27, 28)이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그들은 지금 이 재판정에 나와 증언을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이 자리에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무런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말해주며 바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시사합니다.
아시아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은 허위의 사실로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여론 재판식으로 바울을 죽이려 하였으나 그것이 실패하자 슬그머지 뒤로 물러났을 것입니다.
3) 바울의 변론 결론입니다 (13, 20~21절).
(1)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13절)
바울의 변론은 논리적이고 치밀하였습니다.
그는 더둘로의 고발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 증명한 후 이제는 결정적으로 더둘로의 고발이 거짓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소요 죄에 대하여 무죄함을 증명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절에 의하면 바울은 구금(拘禁) 상태에서 풀려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① 바울에게 밝혀지지 않은 죄상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거나 혹은 ② 바울이 공적(公的)으로 위험한 일을 벌일 수 있는 인물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시라도 반란의 가능성이 보이면 그를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 로마 행정관의 임무였던 것입니다.
(2)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20절)
“[20]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바울은 더둘로의 고발에 대해 조목조목 반격을 가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마지막 사건에 대해서 자기의 결백을 객관적으로 증거합니다.
공회에 섰을 때(22:30) 바울이 취한 행동 가운데 조금이라도 죄를 정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아나니아 일행이 증언했을 것이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나니아 일행이 바울에 대하여 고발한 모든 것은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으며 바울에 대한 고소는 무효화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3)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21절)
바울은 자신의 공회에서 했던 유일한 발언이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23:6).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바울의 주장은 로마 법정에서도 산헤드린 법정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로마 법정에서는 그것이 종교적인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에 소송의 건(件)이 될 수 없었으며 산헤드린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유대교의 정통적 신앙과 일치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2. 총독의 판결 유보(22~23절)
1)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알고 판결을 연기합니다(22절).
“[22]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벧릭스가 바울의 도에 대해서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가이사랴에 살았던 전도자 빌립의 영향과(8:40;21:8), 그의 유대인 아내
드루실라에 의해 견문을 갖게 되었으니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아니면 유대 지역을 총괄하는 총독으로서 유대의 종교적 상황에 대해서 그런 정도의 정보는 입수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한편 여기서 벧릭스가 '더 자세히' 안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산헤드린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벧릭스가 바울의 도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재판장 벧릭스가 판결을 연기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진행된 더둘로의 고소와 그에 대한 바울의 반대 변호 속에서 사실을 충분히 규명할 수 있음 만큼 증언의 진위(眞僞)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면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판결을 내리겠다는 것도 판결 연기의 정당한 사유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천부장 루시아가 그의 편지를 통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보고했고 거기에서도 바울을 형사 처벌할 아무런 혐의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23:26-30).
벧릭스가 바울을 계속 구금시켰던 이유에 대해서는 13절 주석에 밝힌 바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이러한 이유 외에도 아마 벧릭스는 바울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유대의 최고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의 분노를 고려함과 동시에 바울에게 뇌물을 받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26절).
2) 바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도록합니다(23절).
“[23]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판결을 연기하고 난 후의 바울에 대한 벧릭스의 처우는 그가 바울의 무죄됨을 상당부분 인정하였음을 말해줍니다.
형식적으로 아직 판결이 내려진 상태가 아니므로 바울은 여전히 구금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훨씬 많은 자유와 후한 대우가 주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들어와 면회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수종도 들 수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 있던 전도자 빌립(21:8),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바울과 동행했던 사람들(20:4;21:17),
바울의 조카(23:16)등이 바울을 방문하여 위로도 하고 수종도 들었으리라 추측됩니다.
3. 바울의 참된 믿음과 신앙
바울은 참된 믿음과 신앙을 위하여 악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악인들의 선전은 선을 악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옳게 믿는 성도들은 악인들의 까닭 없는 저주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잠26:2)
*잠26: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루터가 로마 천주교에서 나올 때에 “간음한 자”라는 욕을 들었습니다.
개혁자 파렐은 “루터라의 개”라는 말을 들었고,
중세기의 무수한 순교자들은 “이단자”라는 누명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참된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1) 바울의 변함이 없는 믿음입니다(14절).
“[14]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 믿음은 요동치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14절 상에 “고백”한다고 함은 공동 고백으로 확신 있게 말함입니다)
바울은 그 당시 남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예수의 도를 굳게 믿어 요동함이 없었습니다.
그가 요동치 않게 된 이유는 그의 마음에는 인생문제 해결에 예수님이면 그만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전7:35)”고 하였습니다.
분요함과 믿음은 서로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주님만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면 심리의 산란함이 없어집니다.
심리의 동요(의심)는 믿음에 해롭습니다.
(2) 조상의 하나님을 섬김니다(14절 중)
이스라엘이 조상 때부터 섬겨오던 하나님은 절대로 믿을 만합니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들로 하여금 믿음의 증거를 얻도록 하셨습니다.
히11:2 “선진들이 이로써(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히12:1 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를 받은 허다한 증인들(구약 성도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구약 성도들의 믿음을 본 받아야 합니다.
* 히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3) 율법의 선지자들의 글을 믿음입니다(14절 하).
율법과 선지서에 그리스도가 오시리라는 말씀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많이 예언되었습니다.
바빙크에 의하면 구약에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이 456회나 있다고 하였는데, 그 예언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다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글을 절대로 믿어야 합니다.
2) 부활을 믿었습니다(15절).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사람의 육체가 죽는 것은 분명하고 죽어서 썩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활이 믿어질 수 있을까?
부활 신앙은 사람이 시체를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 신앙은 하나님을 믿음(그의 말씀, 곧 성경을 믿음)으로 얻게 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못하여도 하나님은 성립시킵니다.
(1)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지 못하시랴!
(2)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주검을 살리지 못하시랴!
(3) 우리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신 큰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죽은 몸을 다시 살리지 못하시랴!
3) 양심에 거리낌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16절)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바울은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썼습니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죄악과 거짓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심리입니다.
특별히 성경의 말씀을 받은 양심이 그러합니다.
성경 말씀을 받은 자가 양심대로 회개할 때에 믿음이 굳세어 지고 하나님과 교통이 열립니다.
어거스틴은 임종시에 시51편을 기록하여 벽에 붙여 놓고 열 흘 동안 그 말씀을 읽으면서 회개하다가 별세 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철저히 회개하는 의미에서 말하기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변호사 더둘로로부터 고발을 당합니다.
고발 내용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며, 또 성전을 더럽게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근거를 제시하며 답변합니다.
총독은 그가 죄 없음을 알면서도 재판을 연기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바울의 참된 믿음과 신앙의 교훈을 받습니다.
바울은 변함이 없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요동하지 않았고,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며, 선지자의 글을 믿었습니다.
부활을 믿었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도 바울의 참된 믿음과 신앙을 본 받아 승리하시는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유대인들이 더둘로를 통해 총독에게 낯 뜨거운 찬사를 돌렸던 반면, 뱌울은 담백하게 그의 지위를 인정합니다(10절).
이 재판이 변론술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좌우될 것을 알았기에, 마음을 속이면서까지 총독을 높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여 비굴하게 자신을 낯추거나, 과도하게 상대를 높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존귀한 신분을 잊지 맙시다.
2) 바울은 범법한 일이 없기에 당당하게 자신의 무죄를 변론합니다(11~13절).
그리스도인은 바울처럼 세상에 비난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흠 없고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와 공동체 안에 세상의 비난을 받을 만한 흠이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고쳐나갈지 생각해봅시다.
3) 유대인들은 바울을 이단으로 단죄했지만,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들과 같은 하나님, 간은 성령, 같은 소망을 가졌다고 주장합니다(14~16절).
그리고 이 믿음 소망을 가지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노력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넌지시 자신을 고소한 유대인들이 오히려 그들의 믿음과 소망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나는 믿음과 삶이, 소망과 태도가 일치합니까?
4) 바울은 적극적으로 변론합니다(17~21절).
예루살렘에서 불법을 목격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성전에서 자신이 행한 일이 유대 법을 존중한다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나 공회도 죄목을 찾지 못했다고 변론합니다.
세상의 파상적인 비난과 공격 속에서 교회와 복음을 위해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사실과 변호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5) 벨릭스는 무죄가 분명한데도 판결을 유예합니다(22,23절).
바울을 붙들어 두고 뇌물을 받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한껏 위하는 척, 자유를 주고 친구들의 왕래를 허락했지만, 실은 곤궁한 처지에 있는 약자를 착취하는 악한 권력자의 탐욕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웃의 곤경을 사익(私益)을 취할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