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여행(1)
나는 오늘 과거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내가 이곳 개그늘 달목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동기와 사연을 풀어보기로 하자. 먼저 나의 뿌리를 간단히 말씀드리면 시조는 담양 田으로 9세조까지 내려오다 10세조께서 연안 田으로 이본(본관을 바꿈)을 했다. 연안(延安)은 북한의 황해도 땅에 있다. 조상 누대로 구미 선산 무을에서 살았으나 8대조께서 충주로 이거 하셨다. 그곳에서 4대에 걸쳐 살다가 다시, 고조부께서 고종20년 癸未 1883년 어지러운 시국(동학농민혁명, 서원철폐령, 임오군란 등등....)을 피해 그당시 피난지지인 평천으로 가족을 보존하고자 다시 이거 하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곳으로 온 지가 128년째가 되는 해이다. 돌아가신 종형님의 말씀에 따르면 “고조부께서 처음엔 지금은 박명환씨 집인 그곳에 손수 집을 지어서 2.3년 사시다가 달목이로 가셨다고” 얘기해주셨다. 그 후 할아버지께서도 지금 김진확 전회장님 댁에서 5년 정도 사셨답니다. 연세 드신 마을 어른들의 말씀에 따르면 저를 다물집(돌담집)손자로 알고 계시더군요. 누나 전명희는 다물집에서 태어남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우리집안은 개그늘과 달목이를 오가며 살았던 소중한 인연을 갖고 있다.
나의 유년시절은 참으로 어려웠다. 한마디로 불행의 시기였다고 할까요. 그당시 궁벽했던 개그늘 달목이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지만.... “선비집안에 무식자가 난다는” 옛말이 있다. 고조, 증조부님께선 학문을 많이 하셨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때 학문은 끊어지고 그 여파로 먹고 살기도 힘들었지만 배움의 기회는 내게서 더욱 멀어져갔다. 초등학교 1학년 때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권원길이라는 친구 집 높은 봉당위에서 떨어져 입술이 크게 찢어지는 아픈 기억도 있다. 다행히 이는 부러지지 않았지만 얼마나 아팠던지 며칠 집밖에도 못나왔다. 지금 생각하니 영양실조였다. 가끔씩 TV에나오는 북한의 어린이들을 보면 그시절이 생각나곤 한다. 그때 어지러움에 그만 정신을 잃고 떨어지고 만 것이다. 어지러움이 그렇게 위험한지를 나는 일찍 체험했다. 그리고 2학년 때쯤인 갈평 복바위에서 목욕하다가 빠져 죽을 뻔 했던 기억도 있다. 권태국 형님 동생인 권덕순(지금 부산시청 계장)형이 살려 주었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달목이 작은 도랑에서 개구리 헤엄치던 수준으로 복바위의 깊고 넒은 물에 겁 없이 들어갔으니...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아픈 기억 중에 출렁다리가 있다. 학교 갈 때 사람들이 좀 천천히 건너면 좋겠는데....얼마나 심하게 흔들어대는지 출렁다리를 건너가는 게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같이 장단을 맞추지 않으면 떨어져 죽을 판이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한 가지 고마운 기억도 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김없이 들러서 오는 곳 당벌, 안담, 중말의 감나무 밭 혹시 홍시가 떨어져 있나 싶어 많이 찾던 곳이다. 당시 배도 많이 고프고 먹을 게 귀해서 홍시가 주린 배를 채워주던 고마운 과일이었는데.... 지금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수익이 높은 사과밭으로 다 변했다. 초등학교 4학년 가을쯤 아버지께서 오랜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고 한없이 슬펐겠지만 철없던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은 내겐 고난의 시작이었다. 그런 가운데 그럭저럭 초등학교를 졸업을 했다. 친구들은 중학교에 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나는 중학교에 못 간다는 절망감에 가슴이 아팠으나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정말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당시 어머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송아지만 한 마리 있었어도 너를 문경서중학교에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어머니도 눈물로 지내셨다. 철없던 나는 형편을 알면서도 매일 울면서 어머니를 졸랐다. 그러나 결론은 불가였다. 나는 차선을 택했다. 그러면 용연에 있는 신북고등공민학교라도 보내 달라고 그것도 힘들고 어려웠다. 나의 끈질긴 요구에 어쩔 수 없이 그 학교는 보내주셨다. 지금생각하면 고마운 일이다. 당시 형편이 어려워 그학교도 못간 친구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는 복이 많은 편이다. 신북고등공민학교를 그당시 서중학교 학생들은 똥통학교라 놀렸다. 똥이 얼마나 좋은데... 잘 배우고 부유한 사람도 똥을 잘 배출해야 건강한 사람이 되는데 .... 그당시는 똥이 참 더럽고 창피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바로 知天命인데.... 어느 날 문경에 갈 기회가 있었다. 버스 정류장 부근에 멋진 교복에 모자를 눌러쓴 또래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얼른 숨어 버렸다. 자신이 초라해서 얼굴을 맞대고 얘기할 용기가 없었다. 부러움에 한쪽 모퉁이에서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친구들을 보면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피하고 괜히 창피하게 생각했다. 지금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철이 없고 어린마음에 피해의식이 있었다고 할까. 뭐 그런 것 ...
신북중학교 2년 남짓한 생활은 참 재미있었다. 처음 접하는 영어와 한문 궁금한 게 너무 많은 시기였는데... 그런 어느 날 어머니와 누나가 뽕잎을 쓸면서 작두에 어머니의 손가락 3개가 절단되는 크게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 그길로 나는 학업을 접어야하는 운명이 되었다.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어머니 아버지 대신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며 산 뽕잎이며 머루며 다래며 도라지 더덕... 따고 캐려고 달목이 온 산 천지를 헤매고 다녔다. 야문리 재넘어 지금의 평천재 피난골 집피골 작은싸리골 큰싸리골 작은멍애골 큰멍애골 주추바위 장덕바위골 산지당골 아랫너른골 윗너른골 에서 나무도 아주 좋은 싸리나무를 하러 다녔다. 그 때 새로 산 리어카에 싸리나무를 싣고 기분 좋게 내려온 기억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싸리나무 키가 얼마나 큰지 세 번을 묶어야했다. 지금도 그렇게 키가 큰 싸리나무가 있는지... 동네서 가까운 곳 밤나무골 솔갯골 기와지골 가릉. 봉우재골 갈파골 번던 동만으로는 잡목을 하러 다녔다. 그러면서 늘 가슴한구석엔 배움의 한이 쌓여있었다. 농사일을 하면서 중학교 강의록 책을 손에 끼고 다녔다. 그러나 기초가 부족한 영어 수학 때문에 검정고시에 여러 번 떨어졌다. 일단 학업은 여기서 또 접었다. 그 무렵 담배농사를 지어면서 라디오로 중계되는 고등학교 야구가 재미 있어 라디오를 밭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야구중계를 들었다 당시 명문 팀인 경북고 군산상고 경남고 대구상고 동산고 선린상고 등등... 명투수 경남고의 최동원 대구상고의 김시진 경북고의 성락수 선수가 생각난다. 그리고 지금도 생각나는 것 중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는데 하루는 개그늘 마을회관 새마을문고에서 책을 보는데 그중에 설국이라는 책을 보았다. 사실 초등학교 다니면서 만화책 동화책도 제대로 본 게 없는데 설국이라는 책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제목과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만 생각 날 뿐 내용은 전혀 기억이 없다. 나중에 커서 안일이지만 설국은 일본 서정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노벨 문학상 작품이다. 그때 이왕 공부도 못하는데 책이라도 많이 봐 두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지금에 와서 후회 해본다. 스무 살 전까지 농사지으면서 몇 가지 기억나는 것 중에 .... 화전 밭에 감자와 콩도 심고 또 어느 해는 어머니하고 재넘어(평천재) 가기 전에 물떨어지기 폭포가 있는데(지금은 겨울철에 빙벽등반으로 많이 찾는 곳이다.)그 부근 화전 밭에서 콩밭을 매면서 점심때 시원한 계곡물을 그냥 보리밥에 부어 된장에 고추 찍어 먹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주변에 지천으로 널린 산딸기를 따 먹던 일, 안달미 풀이 너무 좋아 소꼴로 했던 일, 안달미는 소에게는 쌀밥처럼 맛있는 풀이다. 또한 시원한 그늘에 쉬면서 앞날을 걱정했던 일들...,지금 생각하니 그때 십여 년의 세월이 나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웠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서울은 한두 번 간 기억이 있고 문경읍내도 자주 나올 기회도 없었고 나올 일도 별로 없었다. 그야말로 산골 촌놈 중에 촌놈이었다. 나의무대는 달목이 첩첩산중 주흘산 어류동 밑으로 앞서 밝힌 산골짜기들이다. 누구하고 경쟁할 일도 없었고 오직 대자연(소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 싸리나무 돌배나무 층층나무 피나무. 박달나무 음나무 산뽕나무 머루나무 다래나무 칡넝쿨 야생오미자 고무딸 산딸기 다람쥐 산토끼 너구리 오소리 비둘기 까치 소쩍새 부엉이 이름모를 야생화들..............)을 벗 삼아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살았던 것이 스무 살 인생이었다.
스무 살 이후는 다음을 기약하며...........
저의 부끄러운 과거를 끄집어 냈습니다.
나름 고향의 향수를 떠 올려 보려했습니다만
부족한 게 너무 많습니다.
울 회원님들과 공감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1, 8, 8 전윤희
첫댓글 우리동네 이야기에 올린 글을 가져왔습니다. 창피한 얘기지만 잘 봐주세요. 그리고 질정을 바랍니다.
어린시절의 배고픔과 삶의 현실앞에서의 어찌할 수 없는 아픔들, 배우고자 하였던 열정을 글을 통해 더욱 실감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더불어 재미나고 아름다웠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순수하고 멋진 선배님이 되지 않으
셨나 생각하지요. 이름도 예쁜 달목이에 가고프네요 ㅎㅎ 선배님의 아름다운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하지요~~
끊어질듯 끊어질듯 실낫같이 아련한 추억들 .총무님 인생란 이런듯 모짐니다 . 정말 지금도 잊지 못하고 가슴 저 깉은곳에 자리한 어린시절의 아픈 가억들 .하지만 이젠 그 추억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나 둘 아름답게 승하 시켜야 겠지요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
귀한소설책...한권 잘읽고 갑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