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사회의 암적 존재, 확증편향과 진영논리
◆ 한국사회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다양한 사회적 현상과 문제들이 있다. 이 문제들을 일일이 나열하자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저출산 문제, 사교육 문제, 가계부채 문제, 자영업파산 문제, 미분양 주택문제, 청년실업 문제, 중독문제, 다양한 양극화 문제 등 수없이 많을 것이다. 이 중에서도 어쩌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도 한 것은 ‘진실’이 사라져가는 문제가 아닐까 한다. “탈-진실의 시대”라고 할 만큼 사실이 아닌, 진실이 아닌 것들이 너무나 사실과 진실로 포장되어 유통되고 있는 현실이다. 소위 말하는 가짜뉴스와 거짓 선동이 인터넷과 다양한 매체에서 여과 없이 통용되면서 더 이상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하기 힘든 시대가 된 것이다. 이렇게 사실과 진실이 무시되는 정신적 환경이 조성된 데는 심리학 용어로 “확증편향”이란 것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 군중심리가 확증 편향을 낳고, 확증편향이 '진영논리'를 낳는다!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란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 혹은 자신의 기호나 선호에 따라 이에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이외 다른 정보는 무시하는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자신의 생각과 견해에 일치하는 것만을 수용하고자 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정보처리 과정에서 인지편향이 있기에 발생하는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확증편향은 ‘군중심리’라는 것과 잘 부합하는 것이다. 구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의 『군중 심리』에 따르면 군중이란 개성을 상실하고, 이성적 분별력을 잃은 모든 이들이 이 범주에 속할 수 있다고 한다. 군중은 무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정치적인 이유로 ‘무리’를 짓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리에 합류하는 모든 이가 군중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 판사, 국회위원, 종교인들도 군중의 범주에 속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네트워크 미디어 시대에 더욱 두드러지는 특징이 군중심리이다. 그래서 군중이 정치적인 일에 개입하게 되면 필시 확증편향이 발생한다. 오늘날 이는 ‘진영논리’라는 것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내 편이 옳고, 네 편이 틀리며, 내 편이 의롭고, 네 편이 불의하다는 원칙을 가진 사고방식이 ‘진영논리’가 의미하는 것이다. 군중은 무리를 짓게 되면 자아나 개성이 상실하게 되고 거대한 집단지성을 형성하여 맹목적으로 어떤 이념이나 슬로건을 무조건 추종하면서 도덕적 감각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특징이 있다.
◆오늘날 군중의 특성은 모든 계층에서 나타난다
군중의 이러한 특성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엘리트 계급의 사람들에게도 군중의 모습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오직 자기 집단의 특권을 유지하고 공고히 하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상대를 가지리지 않고 서로 이합집산하면서 무리 짓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적이라고 생각되는 이들에게는 ‘거짓 소문’ ‘가짜뉴스’를 서슴없이 퍼뜨리고 공격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한다면 누구와도 손을 잡는다. 의회나 국회에서는 서로 싸우는 것 같지만, 사석에서는 서로 포옹하고 식사도 함께하며, 친분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선적 잣대는 학벌이라는 것으로 더욱 공고히 된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철저한 대학 서열이 존재하고 명문대학이 존재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이미 200년 전에 행정적으로는 모든 대학이 평준화가 되었다.
◆ 우리도 위선의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는가?
유럽에서 엘리트 교육의 기원은 멀리 ‘명예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로크 시대로 불리던 근대 이성주의의 한 중심에 있었다. 명예혁명이한 말로 근사하게 포장하였지만, 이는 왕을 무력으로 몰아낸 젠트리 그룹이 국민들의 악화된 여론을 의식하여 네들란드에서 새로운 꼭두각시 왕을 데려온 사건이 명예혁명이었다. 이후 젠트리 그룹은 왕은 있으되 자신들이 좌지우지 하는 법을 활용하여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입헌군주제"라는 제법 고상한 말을 사용하였지만, 그것은 왕이 가졌던 절대 권력을 자신들의 손안으로 데려온 장치에 불과하였다. 실례로 로크는 철학자였지만 <무역 식민위원회>의 서기장까지 하였고, 식민통치의 모든 제정을 독점했던 <왕립 아프리카 주식회사>의 주주이기도 하였다. 노예무역을 주관했던 한 주주가 자유주의를 외친 철학자 로크였다는 사실은 그 자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시대의 중심에는 로크가 다녔던 ‘웨스트민스트’학교가 있었다. 영국에서는 이들을 ‘젠트리 계급(신사 계급)’이라고 불렀지만, 사실상 부와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신흥 주류 세력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젠트리 계층의 학생들은 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엘리트 그룹의 교육은 모범적인 삶을 가르친다. 도덕적 순결성과 최고의 예절을 배우고 온갖 필요한 교양들을 배운다. 승마도 배우고 펜싱과 수영도 배운다. 아마도 오늘날의 전인교육이라는 것의 모범을 제시하라면 이 웨스트민스트의 학생들을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젠트리 그룹의 학생들은 현실적인 삶의 실제적인 모습과는 단절된 채, 그들만의 성채 안에서 그들만의 삶과 문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현실정치에 몸을 담게 되면 필연적으로 모순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도덕적 순수성을 외치면서도 인맥이 모든 것을 좌우하고, 평등을 외치면서도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노예제도를 긍정하고 식민 지배를 당연시한 것이다. 이러한 위선적인 모습들이 ‘노예무역’을 정당화하였고,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들에서 ‘착취지배’를 정당화하였으며, 심지어 인간을 상품으로 만들기도 한 것이다. 로크는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였지만 이 관용은 오직 영국의 '청교도'에게만 해당되었고 무신론자나 로마 가톨릭에는 해당되지 않았고, 자유주의를 주장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국내에서 통용되는 것이었고, 자신들은 노예들을 활용하여 막대한 부를 축척하였다. 최소한 르네상스 시기까지만 해도 인간 존재에서 ‘신성과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지만, 이성의 시대에서 젠트리 그룹은 인간 존재에서 신성의 개념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나무를 나무로 보지 않고 ‘목재’로 보는 사람들의 유형이 생겨나듯이, 인간에게서 신성의 의미를 완전해 제거해 버리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않고 다만 ‘노동력’으로 보는 사람들의 유형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들의 후손들은 마치 노예무역과 식민통치를 가능하게 한 것이 고대와 중세의 종교인들이라고 헛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이고, 어떤 이들은 이러한 거짓을 사실이라고 굳데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확증편향'이다. 중세의 성직자들의 분명한 오류이자 죄가 있다면, 그들도 돈을 너무 밝혔다는 사실이며, 철저하게 권위주의자 였다는 것이며, 심지어 죄사함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세뇌시킨 <면죄부> 사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사람을 물건처럼, 사람을 상품처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빛은 어디서 오는가?
이제 현실로 되돌아와 보자.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도 영국의 ‘젠트리 계급’과 유사한 자칭 엘리트라고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이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근대 영국의 젠트리 계급과 오늘날 한국 사회의 엘리트 그룹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영국의 젠트리들은 군중의 힘을 가장 두려워하였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의 젠트리들은 군중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군중은 감정의 증폭에 따라 움직이기에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정당성이나 타당성도 따지지 않는다. 여기서 기준은 오직 나의 편인가 너의 편인가 하는 ‘진영논리’만 존재하는 것이다. 개성도 주체성도 상실한 채 오직 진영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군중은 한국 젠트리 그룹의 가장 큰 힘이고 지주가 된다. 여기엔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고질적인 한국적 정서가 상식과 이성 그리고 법 위에 군림하게 된는 부조리가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부조리가 “예(禮)”라는 다소 품위 있고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어 거침없이 통용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모든 곳에서 ‘확증편향’이 작동하고, 모든 것이 ‘진영논리’로 마무리된다. 상식, 합리성, 정직함, 양심, 도덕성, 정의, 진실, 진리와 같은 용어들은 다만 자신들의 위선을 가려주는 화장품 정도로만 생각하게 된다. 권력과 정치적 탈선을 경계하고 감시해야 할 군중이 오히려 권력과 정치의 도구 역할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참으로 답이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이러한 위선의 시대에 빛은 어디서 오는가? 구스타브 르 봉의 말을 다시 인용해 보자. 그것은 “인간 속에 있는 신성한 감정을 되살리고, 위선적인 ‘신사’가 아닌 진정한 ‘신사’들이 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 한 명의 위대한 영웅적인 존재가 아닌, 도처에서 인격과 공의(公義)를 갖춘 인물들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나의 소중한 인생이 맹목적인 군중심리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 볼 줄 아는 주체성과 공의로운 정신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