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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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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6. 01:14조회 855
최치원
신라의 학자 중에서 최치원을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을 수가 있습니다.
최치원은 857년, 금성 사량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무렵은 통일 신라가 기울어져 가는 때였습니다. 귀족들과 대신들이 정권 다툼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습니다.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으며, 민심이 흉흉했습니다.
아버지 최선비는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최치원은 4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습니다.
''잘 가르치면, 훌륭한 인물이 되겠구나. ''
아버지는 최치원의 재주에 속으로 감탄했습니다.
12살이 된 최치원은 당나라 유학의 길을 떠났습니다. 배를 탄 최치원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맴돌아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당나라에 가서 10년 안에 과거를 보아 급제하지 못하면, 아예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마라. "
당나라로 건너 간 나이 어린 최치원은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했습니다. 당나라 소년들이 뛰어 놀아도, 최치원은 공부만 하였습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최치원은 뛰어난 수재로다. "
그래도 최치원은 조금도 우쭐하지 않았습니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온지도 몇 년이 지났습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이제 과거를 보아도 되겠다. "
마침내 17살이 된 최치원은 당나라 과거에 당당히 급제하였습니다.
(고운선생은 배찬이 주관한 빈공과에 장원급제하였습니다. 이는 신라, 발해 등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과거시험이었답니다. 장원급제한 다음 20세 되는 해에 지금의 강소성(남경) 율수현(溧水縣)의 현위로 보직을 받습니다. 그런데 표수현위로 잘못 기록된 곳이 많던데 율(溧)자와 표(漂)자가 비슷하다보니 잘못기록된 것 같고, 현위(縣尉)란 현령 밑의 보직임으로 부군수격이 됩니다.)
당나라 학생 들은 최치원을 몹시 부러워하였습니다.
"우리 고을을 다스리는 분은 새파란 신라의 청년이래."
"신라 사람이라면서 ? "
을수현 백성들은 최치원을 우러렀습니다.
최치원은 그 고을을 다스리며 틈틈이 글을 지었습니다. 이 무렵, 최치원은 <중산복궤집> 5권을 펴냈습니다.
그런데 최치원은 당나라 사람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서 벼슬을 그만두고, 학문에만 매달렸습니다.
이 무렵에 당나라에는 황하 유역에 큰 홍수가 났습니다. 때문에 민심이 나빠지고 도적 떼가 들끓었습니다.
황소라는 자는 산뚱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광조우를 휩쓸고 장안(당나라의 서울)을 향해 쳐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당나라 황제인 희종은 고변을 시켜서 반란군을 토벌케 하였습니다.
고변은 최치원을 불러 종사관으로 삼았습니다. 고변은 원래 고구려 출신의 장군으로 당나라에 귀화한 고순문의 손자였습니다.
토벌군은 반란군에게 계속해서 패했고 마침내 희종은 남쪽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이때 고변이 최치원에게 말했습니다.
"당나라가 황소의 도적 떼에게 망하게 생겼소.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 "
최치원은 포고문과 선전문을 썼습니다. 또한 ''토황소 격문''도 썼습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은 황소의 무리를 다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 또한, 땅 속의 귀신들 역시 그대들을 이미 죽이기로 결정했으니 ‥‥‥.>
황소는 최치원이 지어 붙인 방을 보고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물러가지 않으면 큰 변을 당하겠다 ! "
황소는 군사를 거두어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변은 미처 도망치지 못한 황소의 무리들을 무찔렀습니다.
희종은 ''토황소 격문''으로 황소를 무찌른 최치원을 칭탄했습니다.
"최치원의 붓 끝이 그처럼 힘이 있는 줄 미처 몰랐도다. "
지금도 최치원의 ''토황소 격문''은 중국 문장의 고전으로 남아 있습니다.
최치원은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지은 글을 모아 <계원필경> 20권을 엮어 내었습니다.
희종은 최치원에게 벼슬을 내리고, 자금 어대를 내렸습니다. 어대는 물고기 모양의 장식이 붙은 주머니인데, 당나라 때 관리의 신
분을 표시 하던 것이었습니다.
최치원이 황제의 신임을 받자, 당나라 학자들이 대신을 움직여서 또다시 모함을 하였습니다. 때문에 최치원은 외딴 섬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최치원은 29살 때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부모곁을 떠난 지 17년 만에 돌아온 것입니다.
헌강왕은 최치원에게 시독 겸 한림학사 등의 여러 벼슬을 한꺼번에 내렸습니다.
이듬해에 헌강왕이 죽고, 정강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정강왕도 곧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라 조정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행실이 좋지 못한 진성여왕이 왕위에 올라서, 간신들이 들끓었습니다.
최치원은 스스로 지방의 관직을 택하여, 887년부터는 대산군, 천령군, 부성군의 태수를 차례로 지내며 학문 연구를 하였습니다.
893년, 최치원은 당나라 사신으로 임명되었으나 나라가 어지러워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이듬해인 진성여왕 8년, 최치원은 ''시무 10여책''을 지어 새로운정치를 펴도록 여왕에게 건의했습니다.
"공이 직접 그 정책을 펴 나가시오."
진성여왕은 최치원에게 아찬 벼슬을 내렸습니다.
최치원은 좋은 정치를 베풀려고 하였으나, 그것은 관청에 전달조차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신라 조정은 썩었습니다.
백성들도 신라 왕실에서 이미 마음이 떠나 있었습니다. 백성들중에 는 아예 궁예 나 견훤을 찾아 도망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진성 여왕도 더 이상 나라를 다스릴 힘 이 없어서, 왕위 를 헌강왕의서자인 요에게 물려 주었습니다.
''아, 신라의 운명도 이젠 다 하였구나 ! ''
최치원은 벼슬을 내놓고 방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금오산, 월영대, 쌍계사, 청량사, 해운대 등지를 방랑하던 최치원은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도를 닦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대학자요, 문장가인 최치원은 한창 뜻을 펼 40대에 방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그의 문집인 <계원필경>만이 전해져서 최치원의 명문장을 대할 수가 있을 뿐입니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으로 돌아와 은둔하며 살았는데 이 곳을 그의 벼슬명(한림학사)을 따라 학사대라 이름지었습니다.
그의 만년에 지팡이를 땅에 꽂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내가 살아 있으면 이 지팡이도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에 매진하기를 바란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홀연히 계곡으로 사라졌는데 전설에서는 그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도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학사대에 살아있는 전나무가 그 때 최치원의 지팡이가 변한 것이라 합니다.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최치원
狂奔疊石吼重巒 광분첩석후중만
人語難分咫尺間 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 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 고교유수진농산
층층 돌사이 쏟아지는 물이 온 산을 부르짖어
지척의 이야기도 가리기 어려워라
시비가리는 소리 귓가에 다다를까 두려워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산을 감싸네
------------------------------(一) 출생과 世系------------------------------
고운선생은 신라 헌안왕 1년인 서기 857년 경주 沙梁部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는 "역사의 전함이 없어져 윗 代를 알 수 없다.[史傳泯滅 不知其世系]"고 하지만, 사량부가 신라의 개국 원훈 蘇伐都利 공이 崔씨를 得姓한 곳(삼국사기 儒理尼師今條)인 점으로 보아 그의 후예이고, 아버지는 親撰한 글(大崇福寺 碑銘)에 肩逸이라 기록되어 있다. 견일은 왕실 사찰인 大崇福寺를 지을 때 큰 기여를 한 점, 또 이를 훗날 임금이 그 아들인 고운선생에게 직접 술회하기까지 한 점, 그리고 선생의 가문이 당시 骨品制 사회에서 임금이 될 수 있는 眞骨 다음의 六頭品이었던 사실 등을 감안하면 상당한 정도의 지위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나 구체적인 사항은 전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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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선생을 소벌도리공의 24세손이라고 보는 설('대한민국성씨변천사' 1980. 역사편찬회, '뿌리와 얼' 1989. 도서출판 보)이 있으나 신빙할 사료가 없으므로 본 경주최씨 중앙종친회는 이 世數를 채택하지 않는다.
--출생지에 관해서는 일부 자료(徐有가 편찬한 '校印 계원필경집 序', 沃溝군지, 群山市사적)에 '호남 沃溝사람' '古群山列島 출생'설이 제기되어 있으나 고운 선생이 당 나라를 떠나올 때 같이 귀국하는 신라인들과 어울려 지은 다음과 같은 시를 볼 때 경주임이 분명하다.
與君相見且歌吟 그대여, 우리 오늘 만났으니 시나 읊고
莫恨流年挫壯心 더 큰 꿈 이루지 못한 건 한탄하지 말자.
幸得東風已迎路 다행히 봄바람이 우리를 길 맞이하리니
好花時節到鷄林 꽃피는 좋은 철에 계림에 도착하는 걸.(계원필경 '12월화우이제야견시')
이 시에서 '계림'은 경주의 별칭이다. '계림'을 신라의 별칭으로 볼 수 있다는 반론이 있을지 모르나, 계원필경에서 "나는 신라사람으로서[某新羅人也]... 열두 살에 계림을 떠나[自十二則別鷄林]"(초투헌태위계)란 표현을 한 것을 보면 계림은 경주가 틀림없다.
--史傳泯滅 不知其世系= 삼국사기에 나오는 구절. 임금 아닌 이로서 가장 많은 문헌을 민족사에 남긴 이가 고운 선생인데, 그리고 그 많은 문헌을 상고하면 世系의 일부라도 틀림없이 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고운선생 아버지와 관련, 선생은 자신이 쓴 글에서 "임금(헌강왕)이 나 치원에게 이르시되 <선왕께서 이 절을 지으실 당초에 큰 誓願을 밝히셨는데 김순행과 그대의 아비[若父] 肩逸이 일찍이 이 일에 종사했다. 그러니 그대는 마땅히 銘을 짓도록 하라>고 했다"면서 부친의 이름을 분명히 밝혔다(대숭복사 碑銘). 그런데도 삼국사기는 대학자를 소개하는 長文의 列傳을 쓰면서 주인공의 부친에 대해 한 마디 언급도 없이 사전민멸이라고만 했다. 이것은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김부식을 비롯한 편찬요원들이 이 비명을 전연 읽지 않았다는 것을 傍證해준다.
* 학계에서는 선생 親撰의 글에서 부친이 견일이란 사실을 밝혔으므로 이를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며(1925. 최곤술편 '고운집' 사적란, 김인종 등 1989.'고운 최치원' 15면, 최영성 1998.'역주 최치원 전집' 1권 11면, 최완수 신동아 2001. 9월호, 최근덕 2001. 10.16.'중-한 최치원학술세미나' 개막연설) 경주최씨 족보에서도 1921년 辛酉譜가 이를 기록한 이후 각 派譜에서 이를 기록하는 추세이다.
* 견일의 신분에 관해서는 역사학자 金庠基 박사가 "沃溝지방의 知縣事로 있었던 듯하다."고 주장한 바 있고 (1967. 옥구 자천대 중건기념비문), 옥구군지는 "야사에 따르면 최치원의 아버지는 신라의 무관으로 내초도 기지에 수군장으로 주둔한 바 있다."고 쓰고 있으나 달리 증빙할 자료가 없다.
--------------------------(二) 12세에 당나라에 유학--------------------------
선생은 어릴 때부터 명민하고 학구열이 깊어 12세 때 (868년)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갔다. 유학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國費유학이 아니고 私費유학으로서였다. 고국을 떠나기 앞서 아버지는 "네가 10년 공부하여 진사에 급제 못하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말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 하지 않겠다."(계원필경 서문)라고 엄히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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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비유학인가 사비유학인가.= 국비유학이란 설도 있으나(이지관 '校監 역주 역대고승비문-신라편' 171-172면) 사비유학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국비유학생은 계원필경의 몇 대목에서 보듯이 관리가 주관하는 배를 타고 그의 인솔 아래 당나라에 건너간다. 고운 선생에게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 삼국사기에는 그저 "隨海"해서 당나라에 갔다고만 되어 있다. 사가들은 "商船을 따라"라고 풀이한다. (박지원 '연암집', 이병도 삼국사기 역주, 이가원 '고운 사적고序)
* 아버지가 임금의 역점 사업인 대숭복사 건립에 큰 기여를 했던 점에 비추어, 선생이 適齡期에 유학을 하고자 했다면 국비유학생이 되는데 하등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11세의 어린 나이로서 인원이 한정될 수밖에 없는 국비유학 경쟁에 뛰어 들다 보니 사정이 여의치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는 어떤 연령 조건이 있어 그 연령에 훨씬 미달하니까, 아예 처음부터 국비유학을 시도하지 않고 막 바로 사비유학을 추진했을 수도 있다. 국비유학을 위해서 최소한 6-7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아들의 재질과 학구열을 잘 아는 아버지로서는 너무도 아깝고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三) 18세에 科擧 及第-----------------------------
선생은 당나라에서 "漢 나라 孫敬이 새끼줄로 상투를 대들보에 걸어 매고 공부했던 일과, 전국시대의 蘇秦이 송곳으로 무릎을 찔러 가며 졸음을 쫓아 공부했던 일을 본받아 열심히 노력하여"(계원필경 서문) 6년 만인 874년 진사 과거에 응시, 첫 번 도전에 당당히 합격했다. 당나라는 이 때 외국인에게도 '賓貢'이라 간주하여 응시문호를 개방했다. 당시 나이 18세(만으로 17세), 낯설고 땅선 이국인으로서는 대단한 성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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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賓貢科에 급제했다"는 번역= 삼국사기 번역서를 비롯, 각종 史書와 현대 학자의 論著 및 우리 宗門의 각 派譜에 이런 식으로 기재돼 있으나 적절치 못한 표현이다.
* 고운선생이 급제한 것은 당 나라의 중앙정부가 전국의 인재를 대상으로 실시한 科擧, 즉 進士시험이다. 賓貢선발시험이 결코 아니다. 계원필경 서문에서 아버지의 당부를 <十年不第進士則勿謂吾兒>라 명기한 뒤 "저는 이 훈계를 명심하여 6년만에 급제하였습니다."고 쓰고 있다. 즉 선생은 진사에 급제하라는 아버지의 명을 그대로 수행했노라고 명언한 것이다.
* 그러면 빈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賓은 글자 뜻 그대로 손님, 즉 외국이고 貢은 추천, 천거를 뜻한다. 따라서 빈공은 외국에서 추천된 사람을 말한다. 중국은 인구가 많기 때문에 전국의 응시 희망자를 한 장소에 다 모아 과거시험을 치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종의 예비시험 제도를 도입했으니 그것이 바로 貢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 제도로 치면 사법-행정고시의 1차 시험과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예비시험은 吏部(우리의 행정자치부)와 禮部(우리의 교육부), 그리고 각 지방별로 치러졌다. 이 가운데 지방에서 뽑힌 사람을 鄕貢이라 했다. 즉 '지방에서 추천된 사람'이란 뜻이다(鄕貢에는 鄕貢進士와 鄕貢明經이 있는데 설명은 생략). 그런데 당나라는 나중에 신라-발해와 외교관계가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국의 이 진사시험에 외국인도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외국인으로서 당나라에 유학 오는 이들은 대부분 왕족이나 귀족, 고관들의 자녀였기 때문에 이들을 '외국에서 추천한 사람'으로 간주, 賓貢이란 이름으로 응시자격을 준 것이다.
* 고운선생은 자신의 급제와 관련, '빈공'이란 용어를 한번도 쓴 일이 없고 다른 사람의 일을 거론하면서 이를 '賓薦'이라 한 일은 있다. (예부상서 배찬에게 보낸 편지)
* 이러한 사정은 이 분야를 전공으로 연구한 글(妹尾達彦 '唐의 科擧제도와 長安의 합격의례' 東京 汲古書院 1986.)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다.
"매년 10월이 되면 향공과 빈공이 서울 장안으로 몰려든다. 吏部-禮部 예비시험 응시자를 합하면 5천 내지 6천 명이 된다. 이들은 수험생 담당관, 즉 知貢擧의 지도를 받고 孔子廟를 배알하며 특별히 마련된 강의도 듣고 질문응답도 하는 등으로 준비기간을 보내다가 이듬해 1월 본시험을 본다. 본시험은 禮部 南院에서 치러지고 합격 발표는 2월초에 있다."
* 빈공도 시험 절차나 과정을 다른 응시자들과 똑 같이 받아야 하고 당연히 진사로서의 특전과 권리도 본국인과 동급이었다. 그래서 고운선생은 현위,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등의 직첩도 누리고 또 고관 명사들과의 두터운 交遊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정작 중국인들은 사정을 잘 알아서 선생을 그냥 진사라고 부른다. 2001년 10월 16일 중국에서 열린 '중-한 최치원 학술세미나'에서 주최측인 양주대학 방홍금교수의 개회연설, 季建業 양주시장의 축하연설은 다같이 선생을 가리켜 "18세에 진사에 합격한 선생"이라고 했다. 그리고 선생이 都統巡官으로 집무한 유적지에 세워진 '회남절도사 衙署遺址'碑(양주시에서 2001년 5월 건립)도 비문에서 이 곳에 근무했던 李德裕 杜牧 杜佑 등 몇 명의 명사를 예로 들면서 고운선생도 거명, "진사에 급제한[得中進士] 신라 최치원"이라 명기했다.
* 그런 점에서 역사의 기록 중 가장 정확한 것은 李仁老(1152-1220년)의 '파한집' 권23에 표현된 <以賓貢入中朝擢第>이다. 풀이하면 빈공으로 중국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빈공이란 표현을 굳이 쓰는 것은 사실은 蛇足이다. 외국인이면 모두 빈공이니 그냥 과거 급제, 또는 진사급제로 표현하는 것이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는 바른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일거급제= 삼국사기의 이 구절을 이병도 박사는 "단번에 급제"라고 번역했다. 잘못돤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다만 "단번에"라는 말은 요새 사람들은 단순한 강조나 부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그냥 "급제"라고 해도 될 것을 왜 "一擧"라는 2자를 추가했을까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여러 번 시험을 친 끝에 급제한 것이 아니라, 첫 번 도전에 급제한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인종 교수도 이에 동조 "한 번 응시하여 급제"라 번역했다. ('고운최치원' 1989. 민음사 21면)
* 첫 번 도전에 급제하는 것을 '單擧'라 하여 기렸는데 삼국사기는 이 말을 좀더 쉽게 설명하려는 취지에서 '一擧'라는 표현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 그것은 선생이 당나라를 떠나올 때 친구 顧雲이 쓴 송별시의 구절에서도 느낄 수 있다. 顧雲은 그 끝머리에 이렇게 읊었다.
"一箭射破金門策(화살 하나로 과거 과녁을 적중시켰네)"
이 구절은 화살 여러 개를 쏘아 과녁을 맞춘 것이 아니라 첫 발에 맞추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顧雲 자신이 孤雲선생과 급제 동기생이긴 하지만 '單擧'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에겐 선생의 '單擧'가 더욱 부러웠을 것이며 그러한 심정이 이 시에서 "一箭射破"라는 표현으로 나타났을 것이라 여겨진다. 선생과 지우를 가졌던 문인 羅隱만 해도 10회 이상 응시했는데 낙방했다고 한다.
--급제 연령= 진사 시험장에는 16세로 솜털이 다 없어지지 않은 童子로부터 백발이 성성한 72세의 노인도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인으로 만 17세 어린 나이 합격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고 한다 (양기선 '고운 최치원 연구' 62-70면) .
* 당나라 때의 속담에 "三十老經 五十少進士"란 말이 있다. 明經(鄕貢명경을 말함. 즉 과거예비시험 합격자)은 30에 따면 늙은 편이고 진사(과거 본시험 합격자)는 50에 따도 젊은 편이란 뜻이다. 이 말만 봐도 진사 과거 급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어려운 일을 만 17세에 성취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선생의 아버지는 아들이 영특한 줄 알았음에도 10년이란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즉 22세까지는 급제하라고 당부를 했다. 그런데 선생은 계원필경 서문에서 표현한 것처럼 <다른 사람이 백의 노력을 할 때 저는 천의 노력을 하여[人百之己千之]> 그 시기를 4년이나 앞당겼던 것이다.
--------------------(四) 급제 후 몇 년 간 고독 속의 문필생활-------------------
당나라 서울 長安에서 반년 여에 걸친 진사 급제 축하기간을 보낸 선생은 외국인인 처지라 고독과 착잡함 속에서 앞으로의 향로를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 한동안 고뇌한다. 그러다가 당나라 東都라 불리던 洛陽으로 옮겨 얼마동안 문필생활을 한다. 이때 지은 詩賦 30수로 책 3편을 만들어 뒷날 신라왕에게 봉정했는데(계원필경집序) 지금은 전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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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기간= 진사 급제자들을 위한 축하의식은 화려하다.
* 먼저 시험 주재자인 지공거 댁에 가서 인사를 하고 다음에는 宰相 집무실을 예방, 인사를 한다. 그리고 장안 시가의 곳곳에서 열리는 축하연에 참석한다. 다음에는 축하의식의 하이라이트인 황제 주최 大宴에 참석한다. 이 연회는 4월에 曲江池라는 왕실 연못에서 열리기 때문에 '곡강지대연'이라 불렸는데 이 연회에는 황제로부터 장안의 일반 남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대거 참석하여 음식과 술, 음악과 춤, 꽃구경과 각종 운동경기를 즐긴다. 여기엔 모든 명사들이 일제히 참석하기 때문에 주변 길에는 마차가 밀리고 시내는 텅 빌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 이후에도 공식 小宴과 사적으로 초대받는 축하연이 서너 달 더 이어진다고 한다.(妹尾達彦교수 前揭書)
* 선생도 이런 모든 행사에 물론 참석했을 것이다. 법장화상전에서 "내가 갑오년(874년) 봄에 西京(장안)에 있을 때 의종 황제가 나라의 의식에 참여하여 사람을 시켜 眞身(사리)을 모시는 것을 목도했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급제 후의 고독과 어려움= 다음 세 편의 글이 이를 말해준다.
上國羈棲久 대국에서 타향살이 하도 오래 하니
多慙萬里人 만리 저편 가족들에게 무척 부끄럽구나
他鄕少知己 타향이라 지기(知己)가 별로 없으니
莫厭訪君頻 그대 자주 찾는 것 귀찮다 마시라. ('장안의 旅舍에서 이웃에 사는 于愼微장관에게')
"장안이 좋다는 말을 듣고 만리 길을 날아 왔으나 이 서울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이 막연하다. 비록 계수나무 한 가지를 꺾었으나(과거급제) 급제 榜文에 군살만 덧붙인 격이 아닐까. 괜히 멀리 왔나보다." (사탐청료전장)
"지난번에 제 간절한 정성을 갖추어 사양하는 말씀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다시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50일이 지나도록 늘 세끼 밥을 꼬박꼬박 받으니 실로 살얼음을 밟는 듯 합니다. 원컨대 밥을 지어 상까지 차려주는 것은 그만 두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바라는 바는 絶糧이나 면하고 잠시 동안 부평초 같은 신세를 의지하는 것뿐입니다."('양양 이상공께 館給을 사양하는 글'-이상공은 양양자사 산남동도절도사를 지낸 李蔚. 879년10월卒)
-------------------------(五) 縣尉로 관직 시작---------------------------
선생이 처음 맡은 관직은 지방관으로서 20세 때인 876년 水현위에 임관되었다.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 "현위는 그 직급은 낮으나 그 임무는 매우 중해서 [其官雖卑 其務甚重] 죄수들을 살펴야 하고 피로한 백성을 위무하니[推詳滯獄 尉撫疲 ] 동료 공직자는 그 직언을 겁내고 지방수령들도 두려운 마음을 가진다[佐僚能憚 其直聲 宰尹亦懷 其畏色]. 사리를 말하자면 실로 훌륭한 인재에게 맡겨야 한다"(계원필경-'이함에게 천장현위를 보직시킴')고 했다. 이러한 중요한 자리에 요새로 치면 미성년인 만19세의 외국인을 임명한 것은 중국으로서는 이례적인 우대(최준옥. '事蹟考' 1982.寶蓮閣 265면)였다.
고운 선생 본인도 "본디 바닷가 출신으로 가문을 빛내게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거늘, 더욱이 먼 곳 사람으로 한 고을 중책까지 맡았다." (사탐청요전장)고 회상했다. 이때 "급료가 많고(현위의 연봉은 200-300석이었다고 함-최완수 '신동아' 2001. 9월호) 일은 한가로와 더욱 배움에 촌음을 헛되이 않아 지은 글 모두 5권"(계원필경서문에서 중산복궤집 내력 설명)이었다. 선생은 귀국 후 이를 역시 신라왕에게 봉정했으나 지금은 전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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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수현은 당시 江南西道 宣州 관할에 있던 지명. 지금은 강소성에 속한다. 삼국사기 이병도박사 역주(1983년판과 2000년판 모두)는 "율수현은 지금 강소성 陽縣"이라고 설명했으나 착오이다. 율수현은 지금도 율수현 그대로 엄존하고 있다. 남경 남쪽 50킬로 지점에 있으며, 그 남쪽 50킬로 지점에 율양(지금은 市로 되었음)이 있다.
* 현재 각종 저서와 諸宗 족보의 70% 이상이 水를 漂水(표수)로 잘못 적어놓고 있다. 심지어 국학에 관한 최고의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발행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시급한 시정을 요한다.
* 2000년 10월 16일 이 현의 박물관 경내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2001년 10월 경주최씨 후예들이 이 동상을 참배했다.
--현은 당나라 때 지방행정단위. 전국을 10여 개의 道로 나누고 한 도에 10여 개의 州가 있으며 그 주에 10여 개의 현이 있었다. 당시 전국의 현은 1551개. 前漢地理志 권1에 의하면 당나라 때 율수현 인구는 1만 호였다고 한다. 당시가 대가족제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현은 지금 우리 나라의 중소규모 郡에 해당한다.
--현위에 대해서 율수현에 건립돼 있는 선생의 동상비문엔 "민정을 體察하고 각지를 순방한다" 했고, 율수현 박물관 高武松관장은 "군사업무를 전담했다"고 했으며(2001년 10월 14일 면담), 이병도박사의 삼국사기 역주는 "典獄 및 捕盜官"이라 했다(1983년판 361면). 뉴앙스가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종합해서 볼 때 司正기관의 지역 책임자로 생각하면 무난할 듯하다.
--삼국사기는 "현위가 되고 치적고사로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 되었으며 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고 했으나, 앞서 지적한대로 이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은 매우 영광스러운 직첩으로서, 현위 치적고사 우수자가 받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뒤에 승진 경위를 자세히 설명)
-----------------------(六) 학문정진 위해 縣尉 사직--------------------------
그러나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 꿈이던 선생은 877년 겨울 현위의 직을 사임하고 산수간에 들었다. 그리하여 "학문이 넓은 바다에 이르기를 기약하고[學期至海] 절차탁마"했다. (계원필경 제2장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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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인 사임이유는 "博學宏詞科(관리 선발을 위해 문장 3편을 고사하던 시험 과목)에 응시"(제2장계)한다는 것이었으나 진심은 다음과 같다.
"나는 덩굴풀[絲]처럼 누구에게 붙어 사느니, 거미가 줄을 치듯 제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자 한다. 수 없이 생각해 봐도 학문하는 것만 못하다[不如學]. 평생에 애써 노력한 것이 오히려 헛될까 두려워서[百年勤苦 唯恐失之] 벼슬길의 진흙탕에 다투어 뛰어들지 않고 다만 유교의 도를 좇았다[未競宦塗 但遵儒道]. 그러므로 처음 벼슬해서도 진토를 싫어하고[筮仕而懶趨塵土] 거처할 데를 고르는데 산천을 그리워하니[卜居而貪憶林泉] 속세의 요로와 교통하는 데는 눈길을 준 일이 없고[人間之要路通津 眼無開處] 물외의 청산과 녹수에 돌아갈 때만 꿈꾸었다[物外之靑山綠水 夢有歸時]"(계원필경 재헌계)
---------------------(七) 가난과 난리로 절박한 상황에----------------------
하지만 혈혈단신의 외국청년으로서 공부에 장기간 전념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두 세 해가 지나자 "녹봉은 남은 것이 없고 글 읽을 양식이 모자랐으며"(제2장계) 설상가상으로 난리의 피 바람이 신변을 위협했다. 즉 885년에 반란을 일으킨 黃巢의 군대가 몸 가까이에 까지 밀어닥쳐 879년 6월 12일에는 율수의 州都인 宣州가 함락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생계가 아닌, 생사 자체가 걸린 절체 절명의 급박한 상황이었다. "하늘이 높으니 물을 곳이 없고 날이 저무니 어디로 가야할까[天高莫問 日暮何歸]"(여객장서) "어디로 향해야 생을 안돈할 수 있을까[指何門而欲安生計]."(재헌계)란 말은 바로 이런 급박함을 웅변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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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심정은 다음 글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집은 멀고 길은 험하다. 한없는 근심이 밤새도록 속을 태우고[窮愁則終夜煎熬] 먼 고향소식은 해를 지나도록 막혀 있다[遠信則經年阻絶]." (여객장서)
"벽을 기대 명상에 잠기고자 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본다. 자리는 차갑고 창 바람은 눈을 헤치며[席冷而窓風擺雪] 붓은 말랐는데 벼루 물은 얼음이 되어 있다[筆乾而硯水成氷]. 언 베개에 마음이 상하는데 내 짝은 등불에 비치는 외로운 그림자뿐이다[凍枕傷神 孤燈伴影]. 멀리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는 나그네의 마음 두근거리게 하여 편안한 잠 이룰 길 없으니, 천만 갈래의 울적함이 쌓인다. 더구나 집은 멀리 해 솟는 곳에 있고 길은 큰 하늘 못을 격해 있는 몸[家遙日域 路隔天池]. 客舍에 들기가 원수보다 싫구나[投客舍而方甚死 ]" (재헌계)
--전란 와중인 879년 이 해는 '一將功成萬骨枯'란 고사성어가 생긴 해이기도 하다. 이 말은 曺松의 <己亥歲>시에 나오는데 이 해가 바로 기해년이다.
--황소의 난= 875년에 발발. 879년 선주를 함락시킨 황소는 880년 황제를 僭稱하고 881에는 수도인 장안까지 점거했으나 883년 장안을 뺏기고 884년에 피살되었다.
--선생에게는 설상가상으로 또 하나의 이변이 생겼으니 즉 선생이 응시하고자 한 박학굉사과 시험이 이해부터 무기 연기되어 버린 것이다(松本明 1975.'鈴木선생고희기념 동양사논총' 409면). 아마 전란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험은 18년 뒤에야 부활되었다.
----------------------(八) 高騈의 幕僚로 관직 다시 시작-----------------------
이때 마침(879년 10월) 문인 출신인 高騈이 鎭海 節度使에서 淮南 절도사로 전임해 왔다. 그리고 이어 12월 高騈은 東面 諸道行營兵馬都統(동부지방 군총사령관)을 겸했다.(자치통감 권253 唐紀69 1750-1752면)
高騈은 권력이 막강해지고 일이 많아지자 유능한 인재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선생의 급제 동기생인 顧雲이 그 막하에 있었는데 선생의 처지를 동정한 그의 추천으로 선생은 館驛(兵站遞信支廳) 巡官(절도사 직속. 判官 推官의 다음 서열)에 기용되었다. 즉 高騈의 幕僚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임지는 당시 절도사 관할지 수도인 揚州의 외곽도시 高郵盂城이었다 (이 관역은 현재도 "중국의 現存最完整의 郵驛유적지"(중국동방항공 발행 '銀燕' 2001년 9월호)로 관광지가 되어 있다).
위기에 처했던 선생으로서는 그야말로 "거적을 덮는 설움을 면하고[免泣牛衣]"(사차택장) "물고기와 거북이 물을 만나 갑자기 살아난[龜魚投水驟喜命蘇]"(재헌계) 격이었다. 현위를 지냈다는 경력 때문에 반란군에 잡힐 경우 처형당할지도 몰랐던 선생은 이 관역순관 취임으로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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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雲= "淮南爲從事, 畢師鐸의 난 때 퇴임, 건녕초(894년) 졸"이라고 신당서에 기록돼 있다.
--벼슬을 다시 시작하기 전 선생은 顧雲의 권유로 高騈에게 몇 편의 글과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는 당시 60세인 국가 중진에게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정중과 예의를 다한 것이었으나 내용에는 선생의 자부와 긍지가 스며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은 그 일부.
"공자 님의 문하에도 타향의 제자들이 있었고, 맹상군의 문하엔들 어찌 먼 지방의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저는 신라사람으로서 재주는 크지 못하고 배움은 넉넉지 못합니다. 다만 形骸는 비록 보잘것없으나 年齒는 아직 쇠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잠깐 현위의 직을 내놓고 홀로 산수에 의지하여 옛 글을 보면서 몇 해 동안 賦를 지었으매, 졸작인 雜篇章 5축과 陳情 7언장구 시 100수를 올립니다." (초투헌태위계)
--관직 재출발 시기에 관해 최준옥 씨와 최영성 교수는 878년 설을 주장하고 있고, 종전의 일부 족보와 최병헌 교수 논문은 879년 설을 주장하고 있다. 高騈의 회남 부임이 879년 10월인 점을 감안하면 관역순관 취임은 879년 말 또는 880년 초로 보면 될 것 같다.
--이 순관 취임을 삼국사기나 중국 책에서는 '酸致遠爲從事'라 했는데 酸은 절도사 권한으로 하는 특채起用이란 뜻이다. 爲從事는 "군무에 종사케 했다"거나 "종군하게 했다"는 뜻인데 이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從事官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모든 한글 책자가 다 그렇다. 그러나 계원필경에 보면 '奏請從事官狀'이란 글이 있다. 누구를 "종사관으로 (임금에게) 주청한다"는 뜻이다. 이를 보면 종사관이란 직함이 별도로 있었고 또 별도의 임명절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때의 百官志에도 나오지 않아 그 직급은 상고할 길 없으나, 도통이 임금께 주청하는 절차가 필요했던 점으로 보아 당시로서는 상당히 요긴한 직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 자신은 "금월 25일에 삼가 공문을 받은 바 특별히 직위를 내려 館驛 巡官에 보임시킨 내용이었습니다."(謝職狀) 하며 자신의 직위를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종사관'을 지냈다는 표현은 계원필경은 물론이고 귀국 후 여러 글을 쓰면서 한 번도 언급함이 없었다. 순관과 종사관 중 어느 것이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떠나, 본인도 주장하지 않는 직위를 구태여 우리가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한다. 高騈이 군을 지휘하는데 '종사'했다는 뜻에서 이 용어를 쓴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그렇다면 혼선이 올 수 있는 이 용어를 쓰지 말고 <高騈의 막료가 되었다.>고 기술하는 것이 오해도 피하고 사실에도 합치한다 하겠다. 사실 그가 곧 취임하는 도통순관은 요즘으로 치면 '정훈참모' '공보관' '대변인'의 역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 고운선생 자신의 글에는 '從事'는 없고 '從軍'은 여러 군데 나온다. (예-사령종군장, 謝李琯書의 "伏緣旣 從軍", 사원랑중서의 "雖樂從軍")
-----------(九) 안도와 여유------------------------
절박함에서 벗어난 선생은 찌들린 여관생활을 청산하고 官舍생활을 하면서 다시 여유 있는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고 더 이상 출세할 생각도 없었다.
"지난 날 과거 합격했을 때는 별로 뜻에 맞은 줄 몰랐더니, 이제 직책이 이 곳에 있게 되매 비로소 영광스러움을 깨닫게 되었다. 부평초 같던 신세가 안정되어 날마다 학문의 배양이 불어간다." (出師후고사장)고 하는 것이 그의 소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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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심경은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官車를 빌려주어 여관을 떠나게 되니 우산과 책상자[ ]를 스스로 지고 가는 수고를 면하게 되었다"(사 송순시어서)
"사령부의 조치 내용을 받아보니 官舍를 얻어주어 편히 있게 한다는 내용이다. 맡은 직책도 적지 않고 공부할 양식도 자못 넉넉하다. 논어에 이르기를 <배워서 넉넉하면 벼슬하고 벼슬해서 넉넉하면 배워야 한다> 했으므로 오직 공부만 하기로 했다. 다만 바른 길을 걸어서 스스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다행히 좋은 곳에 거처(관사를 말함)가 있어 삿갓 쓰고 짚신 신고 멀리 가는 수고가 없으며 한 바구니 밥, 한 바가지 물로 길이 가난에 안심[安貧]할 수 있다."(謝차택장)
-----------(十) 본격적인 從軍 시작--------------
그러나 선생의 여유로움은 불과 몇 달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끝났다. 高騈은 얼마 안 있어 정승급인 태위로 승격되었는데 이 때문에 황제에게 보내는 表 등 문서 일이 많아진 高騈은 880년 여름 선생을 본부로 불러 올린다. 본부에서는 선생에게 배편을 마련하는 등 부산을 떨었고, 선생은 배를 타고 高郵에서 양주 교외 부둣가인 東塘(지금의 茱萸灣공원 부근)까지 40여 Km를 달려 그곳 군막에서 출정 나온 高騈을 대면한다. 여러 막료들의 추천도 있어 高騈은 선생에게 본부근무를 보직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이 태위가 된 데 대해 황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謝加太尉表' 등의 문서작성을 의뢰한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從軍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高騈은 고운 선생이 작성해 올린 글을 보고 그 식견과 문장에 매료되어, 선생에게 모든 문서에 관해 중간 과정 경유를 생략하고 直報하도록 특별히 배려했다. 보람과 영광을 향한 제1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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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근무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880년 여름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계원필경에서 "회남에 從職하여 高侍中(高騈을 말함)의 문서임무[筆硯]를 도맡게 되자 그 몰려드는 軍書 등을 힘껏 담당하여, 4년간 마음 써 이룬 것이..."라 했는데 선생이 이 일을 마치고 귀국 길에 오른 것이 884년 8월이므로 그 4년 전은 곧 880년 여름이다.
--이러한 과정과 관련, 계원필경을 통해서 단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령부에서 전달하는 명령을 보니 배를 빌려 타고 대열을 따르라는 내용이다. 도적의 괴수를 오랏줄로 잡고 싶은 마음 나 역시 있었지만 힘이 부족함이 한되더니, 뜻밖에 특수한 조치를 내려 배까지 마련해 주다니... 濟川(국가대사)에 참여할 기회를 얻어 감격스럽다. (謝令從軍狀) * 제천= ''若濟巨川 用汝作舟楫'' (서경 상서 열명 上)
(2) "상공(高騈)이 出師할 때 홀연히 불러 東塘에서 나를 접견하고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때 참모들이 힘을 합쳐서 나를 추천하니, 상공이 대답하기를 메아리처럼 하여 드디어 두터운 知遇를 받고 갑자기 특별한 영광을 입었다" (제2장계)
(3) "티끌 속에 묻힌 관리의 행색이 부끄럽더니, 배를 타고 보니 갑자기 물위의 신선이 된 것 같아 놀랍다. 풍파에도 처소를 잃어버릴 염려가 없구나" (사차舫子장)
(4) "어제 전달하는 조치를 보니, 위문을 내리고 겸해 奏薦을 허락하여 손수 狀本을 만들어 올리라는 내용이었다. 가벼운 몸이 날 것만 같고 한편 떨리는 마음 걷잡기 어렵다. 훌륭한 인재가 구름 같은데 내가 무슨 공로가 있어 이런 영광을 입었는지."(사허奏薦장)
---------(十一) 단계를 뛰어 넘은 초고속 승진----------
영광은 갑자기[遽 제2장계의 표현], 그리고 한꺼번에 찾아왔다. 다섯 개의 직첩이 일시에 선생에게 주어진 것이다. 절도사 겸 도통인 高騈은 선생을 절도사 직속의 순관에서 도통순관으로 막바로 승진시키는 한편, 황제에게 특별히 추천하여 承務郞 (6부 소속의 郎官) 殿中侍御史(御史臺에 소속되었던 벼슬) 內供奉 (大殿의 道場에 물품을 조달하는 벼슬)이란 세 가지 직첩과 이에 더하여 緋魚袋까지 하사 받게 했다.
이에 대해서는 우선 고운선생 자신이 놀랐다. 선생은 이를 "超昇(단계를 뛰어넘는 초고속 승진)"이라 표현하면서 "지방의 한 현위로부터 곧바로 內殿의 직함을 받고 또 章 (인끈)마저 겸했다 (내공봉-전중시어사와 魚袋 받음을 말함). 이 나라에 벼슬하는 빛나는 젊은 사람들을 볼 때 등용 20-30년에도 남루한 도포를 입는 이가 많거늘, 항차 나와 같은 외국인에게 이런 일이 있다니... 옛날에 하루에 벼슬이 아홉 번이나 올라감(漢나라 田千秋의 고사)도 이렇게 영광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고 토로했다. (계원필경 제2장계)
특히 어대는 궁궐출입에 증명으로 사용되는 것이기도 해서 외국 청년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 (이은상. 1971. 해운대 고운선생동상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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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선생은 도통순관이란 본직을 포함하여 주요 4부의 직함을 일시에 겸하게 되었다. 오늘에 비유하면 내각-감사원-청와대-군의 직함을 함께 갖게 된 셈이다. 선생의 도통순관 직에 대해 양주시 문물고고연구소 顧大風소장은 "계원필경에 나오는 내용과 관련 사료를 종합해 볼 때 '비서실 책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2001년 10월15일 면담)
--魚袋= 금 또는 은으로 장식한 물고기 모양의 물건. 관복에 패용하고 궁궐출입증으로도 사용되었다. 주머니[袋]에 넣고 다녔으므로 어대라 함. 당나라의 四色 公服제도는 1-3품은 紫色, 4-5품은 緋色, 6-7품은 녹색, 8-9품은 청색인데 자색 복엔 금어대, 비색 복엔 은어대를 차게 했다.
* 선생이 이때 하사 받은 것은 비어대이다. 귀국 때 쓴 '제참산신문'에 "賜비어대 최치원"이라고 몸소 명기해 놓고 있다. 삼국사기가 자금어대를 받은 것으로 기록한 이후 거의 모든 연구서책과 족보가 이 잘못을 따르고 있으나(徐有 의 '校印계원필경집序'만이 제대로 비어대라 썼다) 그것은 계원필경을 숙독하지 않은 탓이다. 자금어대는 신라 조정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당나라가 망한 지 17년 뒤인 924년에 건립된 智證대사 碑銘에는 당나라 때의 관직을 모두 빼고 신라에서 받은 관직만 새겼는데, 거기에 "賜 자금어대 臣 최치원"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관직 첨가 및 승진을 한 시기에 대해서는 설이 엇갈린다.
양기선 교수는 878년 10월, 최병헌 교수는 879년, 최영성교수는 880년, 김인종-김영두 교수는 880년 5월, 이규경의 '五洲衍文長箋散稿'는 881년이라 주장했다. 이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관역 순관과 도통 순관을 분간하지 못한데다가 한국 나이-만 나이의 1년 차이에 따라 일어난 혼선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관역순관 취임 시기를 전술한 것처럼 880년초 전후로 보고 또 본부종군을 880년 여름으로 본다면 878년 879년 설이나 880년 5월 설은 성립되기가 어렵다. 계원필경에서 "(高騈이) 작년 仲夏에 出師할 때 홀연히 불러 주어 전열에 동참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런데 갑자기[遽] 특별히 奏薦을 해주어 이를 황제가 재가하매 超昇하게 되었다."(제2장계)고 했는데 여기의 "작년 중하"를 "880년 여름"으로 보면 승진 시기는 881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 이은상의 해운대 비문은 어대만을 따로 떼어서 언급, 이를 882년에 받았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어대는 다른 세 직함과 함께 동시에 받은 것이다. '제2장계'의 "內殿의 직함을 받고 또 章 마저 겸했다"는 서술이 그것을 말해준다.
--관역순관에서 본부근무를 거쳐 도통순관으로 승진한 것을 거의 모든 史書나 연구논문은 놓치고 있다. 다만 민족문화 대백과사전(1991년 정신문화연구원 발행)만이 이를 분간해서 썼다. 계원필경에 "특히 公牒을 내려 관역순관의 직을 고치고 사령부를 따라 서쪽으로 隨行하라는 영을 받았다."(謝改職狀)고 명기되어 있고 또 "나 같은 사람에게 어찌 도통순관을..."(제2장계)이란 구절도 분명히 있는데 모두들 이를 살피지 않았다.
--高騈이 이처럼 선생을 높이 배려한 것은 선생의 능력과 공적을 감안한 것이나, 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인 관계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연령은 61세와 25세로 큰 차가 나지만, 高騈은 문인으로도 식견과 재능이 있어서 시집 1권이 당서 예문지에 등재되어 있는데, 그의 '雪詩'와 고운선생의 '雪詠'이 화답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상하관계를 넘어 글벗으로서의 관계로까지 발전되었음을 보게 된다. (성낙희. 1986. '최치원의 시정신연구' 관동출판사)
* 高騈의 조부 崇文이 고구려 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十二) 승진을 사양한 또하나의 명문-------
할 일은 하되 출세하는 것은 선생의 志向이 아니었다. 그래서 관역순관이 되었을 때도 "권세에 아부하는 영광[附勢之榮]을 버리고, 도를 지키고 가난함을 편안히 여겨[守道安貧] 한가로움을 사랑하는 즐거움[愛閑之樂]을 넉넉히 얻겠다."(사송순시어서)고 다짐했었다. 이러한 선생이기에 스스로도 놀란 파격적인 승진에 대해 극구 고사했다. 이것은 선생의 진심이었다. 여러 차례 사양의 편지를 올리고 발령장을 반납하기까지 하는 등 노력을 했으나 '勅命'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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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는 선생의 명문으로 '檄黃巢書'를 들지만 실은 승진을 사양하는 '제2장계'야말로 사람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글이다. 다음은 그 주요 부분.
"짧은 두레박줄은 깊은 우물물을 길을 수 없고[短 不可以汲深], 무딘 창은 굳은 것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頑鋒不可以 滯].
공자 님으로부터 벼슬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은 漆雕開가 <벼슬에 나아가는 길은 능히 그 깊은 뜻을 잘 익히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을 저는 일찍이 논어에서 읽었습니다. 공자 님은 칠조개의 뜻을 기뻐하셨는데 저는 비록 불민한 것이 부끄러우나 몰래 이것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어제 발령을 받으매 곧 章啓를 갖춰 사양말씀을 드리고 公牒을 반납했더니, 회답에 <이것은 황제의 勅命이니 오직 받아 들이라> 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至誠을 허락 받지 못하고 嚴旨를 따르지만 근심이 일어 등에 땀방울이 솟습니다.
생각하건대 모든 선비와 장병이 상공 한 사람에게 귀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도통순관에는 직책에 합당하다는 칭송을 들을만한 인재를 뽑아야 사방의 기대와 위엄에 합당할 것인데, 저 같은 것으로 헛되게 자리에 앉게 하면 적의 비웃음을 사고 역사의 기록에 비판을 받을까 두렵습니다.
제가 尊旨를 따르지 않으려 하는 것은 실로 상공의 명망을 아끼고 우리 淮南 총사령부의 권위를 살려서 事理를 이그러뜨리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엄한 질책을 각오하고 진심을 말씀드린다면, 저의 직책을 풀어주심이 옳습니다. 제 소망은 저를 용원(冗員 하급 관직)에 보임해 주시고 낮은 봉급을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나무 가지 한 줄기, 곡식 몇 알이면 (새의) 날개와 깃털을 기를 수 있고[一枝數粒 可養羽毛] 한 말의 물, 한 치의 파도에도 (물고기의) 비늘과 지느러미를 편히 할 수 있습니다[斗水尺波 得安 ]. 청렴함을 과시하고 사양함을 꾸며서 이를 요구함이 아니고, 정말 분수를 헤아려서 은덕에 누를 끼치지 않았으면 하는 소원에서입니다."
----------(十三) 4년간에 쓴 글 1만 首---------------
이리하여 선생은 문서 일을 도맡게 되었는데[專委筆硯] 이후 "4년간에 쓴 글이 1만 首" (계원필경 서문)나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檄黃巢書(역적 황소에게 보내는 포고문)다. 이 글에 대해 고려 때 학자 이규보(1168-1241)는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온 천하 사람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아마 지하의 귀신들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抑亦地中之鬼 己議陰誅]>이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부지불식중에 상 아래고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만일 귀신을 울리고 놀라게 하는 솜씨가 아니라면 어찌 능히 그러한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겠는가."(詩話叢林)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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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81년 황소가 장안을 점령한 뒤인 7월 8일에 쓴 것이다. 이 글에 "너는 궁궐을 침략하여 公侯들은 험한 길로 달아나게 되고 御駕는 먼 지방으로 행차하게 되었다. 궁궐이 네가 어찌 머무를 곳이랴."란 대목이 있어 황소의 기세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황소 토벌이 끝난 수 중국인들 사이에는 ''이번에 황소를 토벌한 것은 칼의 힘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의 힘이로다''란 말이 나돌았다고 한다. (김모세 한국위인전)
* 중국 인명대사전 高騈란에 "高騈이 천하에 황소토벌격문을 뿌려 위세가 일시에 떨쳤다. 그래서 황제가 심히 그를 중히 여겼다."(1974. 경인문화사편 상권 893면)고 한 것을 보면 이 격문이 당시 온 중국의 화제가 된 것이 분명하다.
-------------(十四) 글 속에 보이는 당 멸망의 前兆-----
선생이 高騈을 대신하여 쓴 이 글들은 이처럼 적군을 질타하고 장병을 호령하는 것들이 많았으나, 동시에 집권세력 내부 문제로 고심하고 해명하는 글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는 당나라 말기였다. 나라의 쇠망을 예고하는 갖가지 병리현상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절도사들의 부정부패, 군부 내부 상호간의 참소-무고 사태가 번지더니, 드디어는 우군간에 관할지를 놓고 전투를 벌이는 난맥상까지 빚어졌다. 이런 와중에서 임금도 누가 충신이고 누가 불충인지 갈피를 잡지 못해, 지역 총사령관인 都統과 국방비 담당 총수인 鹽鐵轉運使를 수시로 바꾸는 혼미한 리더십을 보였다. 도통과 염철전운사를 겸했던 高騈도 그 권리를 박탈당했다가 다시 회복하는 어려운 고비를 여러 차례 겪었다. 이러한 사정에 따라 선생의 공칭 관직도 '도통순관'에서 '절도사순관'으로, 또 거기서 '도통순관'으로 여러 차례 왔다갔다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맡은 일이 高騈의 막료 일이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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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원필경에 보이는 당나라 집권세력 내부의 부패와 상쟁
"某州 절도사에게 알리노라. 싸우는 군사는 주린 빛이 있고 승전 소식은 없으니, 지방장관이란 이름만 지닌다면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여러 절도사들은 비록 제집 보배라도 군용에 충당해야 할 텐데, 州縣에서 들어오는 국세로 사복을 챙겨서야 되겠느냐. " (고보제도징촉강운서)
"조서를 보니 저의 직책(도통)을 임시로 그만 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신은 먼 진영에서 싸우매 억센 이웃과 감정을 맺게 되었으니, 오직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사조시권령鄭相充都統狀)
"갑자기 보낸 편지를 보니 놀랍고도 분하오. 군령을 배반하고 도망한 자의 말을 믿고 내가 딴 생각을 품었다고 하다니. 어찌 참소하는 자의 말을 임금께 아룁니까." (답절서주사공서)
"서주에 있는 時溥가 병권을 잡아서 나의 관할구역을 여러 번 침범, 城邑을 불지르고 재물을 노략질하길래 내가 부하들을 시켜 흉포한 기운을 대략 꺾었사오나 時溥의 간사한 꾀는 聖聰을 흐리게 합니다. " (사조시徐州事宜狀)
"요즈음은 이웃끼리 오래 동안 원수를 맺고 있다. 조정에서 그대에게 국방비 조달의 권리를 주었으니 자기의 兵車만 거두어 들여도 충분하겠거늘, 이제 와서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徐州-泗州의 영토를 거두노라>하여 군사를 동원시키니 그 뜻을 알 수 없다.... 다시 생각을 신중히 하여 속히 군사를 돌이켜라. 만일 계속 나의 출정하는 길을 막는다면 네 목베기를 사양치 않으리라." (답서주시부서)
"도대체 알 수 없습니다. 이웃 鎭의 참소와 무고를 입어 황제폐하께 염려를 끼쳤으니...... 장군은 <泗州가 본래 徐州에 예속되었는데 내(高騈)가 망녕되이 점령했다> 하지만, 이것은 필연코 간사한 꾀를 살피지 않고 뜬소문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882년 7월4일 양양극장군에게 답하는 글)
"저는 주위가 모두 각 마음이니 어찌 힘을 같이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방금 知己께서 군사를 통솔하시게 되어, 간교한 무리는 다시는 고자질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도 부푼 마음을 한 번 쏟아 볼 기회가 있게 되겠습니다." (882년 1월 후임 도통 왕탁에게 한 축하편지)
"臣은 2년 동안 도통이란 직책을 갖고서도 포학한 자를 목베지 못했으며, 4년 동안 염철전운사를 맡았지만 능히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용을 넉넉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병권이 여러 번 변경되고 염철관계 권한도 또한 오래 동안 분할되었으니, 무릇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한 것은 모두 신의 탓입니다. 신은 공밥 먹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특히 노쇠한 몸이오니 신으로 하여금 직을 면하게 해 주시기 원합니다." (881년말 讓관청치사표-이 사의는 반려됨)
"나는 염철전운사를 맡아 6년을 지냈으나... 더구나 統師의 직책을 여러 번 변경하는 중에... 軍需를 저축하고 나라를 부강케 하기란 아주 그 계획마저 끊어졌고, 소금 굽고 철 주조하기란 거의 그 기초조차 없게 되어 버렸다" (883년 제도염철사를 회수하고 侍中겸 식읍올려줌을 감사하는 장문-어느 상공에게)
--선생은 당나라 조정의 내분과 난맥상을 적라라하게 보여주는 이런 글들을 귀국 직후 신라 임금에게 加減 없이 바쳤다. 당나라를 대국으로 받들던 신라의 외교적 입장을 보거나 또 당나라의 사신 자격으로 귀국해 있는 자신의 개인적 처지 를 보거나, 이를 문서집으로 만들어 조정이 공람하도록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결단한 선생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선생이 귀국해서 본 신라의 내부적 상황도 당나라와 다를 것이 없었고, 따라서 임금이 당나라의 예를 교훈으로 삼아 이러한 상황을 잘 대처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衷情과 소망이 그 심중에 깔려 있었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난이 장황스러울 정도로 긴 문장을 여기 인용한 것도, 바로 선생이 신라조정에 하고싶은 말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자는 뜻에서이다.
--高騈은 선생의 도움으로 여러 차례의 참소를 헤쳐 갔지만, 선생이 신라로 귀국한 뒤로부터는 속수무책이었던지 끝내 좌절하고 만다. "道敎신자인 부하의 말을 믿고 칭병해 출정하라는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고발을 받아 또다시 병권을 박탈당하고 울분 속에 仙道에 전념하다가 畢師鐸에게 피살되었으니 선생과 헤어진 지 불과 3년밖에 안 되는 887년의 일이었다 (舊唐書 권 182, 新唐書 권 224하.) (최준옥 '고운선생문집' 하권 595면).
* 高騈에 대해서 구당서는 호의적이고 신당서는 비판적이다. 신당서는 유교원리에 엄격했던 歐陽脩(1007-1072)의 작품이다. 정치가로서 유교원리를 통해 당시의 정계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그인지라 도교에 심취했던 高騈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을 것임은 능히 짐작이 된다.
------------(十五) 山水와 부모생각 더욱 간절--------
이러한 상황 속에서 榮華에 골몰하기보다는 山水를 더 그리워했던 선생의 初心은 한층 간절해졌다. "나는 산에 가서 살지 못하고 오히려 속세의 잡일에 종사하여[未遂山棲 尙從塵役] 관사는 깊이 군영에 있으니 실로 陋巷과 한 가지이다. 털을 아끼는 표범은 비오는 날에는 산에서 나오지 않아야 하는데 나는 이 기약을 수년간 어겼다[數年乖豹隱之期]." (謝강고장) 라는 술회는 이것을 잘 말해준다. 이와 함께 부모를 그리워하고 또 봉양하고 싶은 심정은 여전히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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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水를 그리워하는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미 사랑스러운 난초와 국화가 향기를 풍기는 것은 끊어졌고[旣乏君章之蘭菊 可襲聲香] 쓸 데 없이 우북한 쑥대만 있어서 도리어 적막함만 줄뿐이다[空餘仲蔚之蓬蒿 偏資寂寞].
봄 날씨면 나비가 낮 꿈을 이끌어주고[春日則蝶牽晝夢] 가을 바람이 불면 귀뚜라미가 밤의 읊음을 도와주니[秋風則 助夜吟] 이것으로 오락을 삼을 뿐 다른 기대할 것은 없다[以此爲娛 無他所 ]." (謝강고장)
--부모님을 생각하는 글
"전달하는 조치를 받으매 매달 料錢(급료) 20꿰미씩을 더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라건대 제 끼니 때울 것만 남기고 먼 고향에 계시는 어버이[遠鄕之親]에게 나누어주었으면 합니다. " (謝가료전장)
"아득한 바다가 막혀 負米(부모 봉양)의 뜻을 이루기 어렵고 하물며 오래도록 고향 사신이 없어 편지도 부치기 어렵던 차, 마침 본국의 사신 배가 바다를 지나간다 하니 이 편에 차와 약(아버지 아프다는 소식 있었던 듯)을 사 집에 부쳤으면 합니다. 제가 어버이 품을 떠난 지 오래라는 것과 이왕 품팔이 신세를 면한 이상 反哺(부모 봉양)의 심정이 간절하다는 것을 감안하셔서, 석 달치의 급료를 받아쓰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바라는 바는 저의 祿이 마침내 어버이에게 미쳐 멀리 이역에 영광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謝探請料錢狀)
----------(十六) 16년만에 귀국 길에------------------
서기 884년 28세 때 드디어 선생은 귀국을 결심한다. 당시의 전란 때문에 "외국 젊은이들이 놀라 제국을 떠나는[鸞鳳驚飛出帝鄕]."(봉화좌주...절구-뒤의 '논점 三'서 설명) 상황이기도 했지만, 앞서 예거한 '謝探請料錢狀'에 "약을 사 집에 부쳤으면 한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귀국의 직접적인 동기는 아버지의 병환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그래서 선생 본인은 <歸覲>이라 표현했다(謝許歸覲啓). 어버이를 뵈러 집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선생의 사촌 아우 棲遠이 '신라국에서 회남에 들어가는 사신 [新羅國入淮使錄事]'의 관직명을 가지고 선생을 영접하러 온 것(謝賜弟棲遠錢狀)을 보면 신라왕의 부름과 가족들의 상봉 소원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884년 7월 마침 역적 황소가 토벌되어 '황소 죽인 것을 하례 드리는 表'를 마지막 글로 지은 후 이해 8월 귀국 길에 오른다. 당나라 毅宗황제는 신라에 詔書를 가지고 가는 使臣의 신분을 선생에게 주었으며, 高騈은 비용을 넉넉하게 지급하고 배편을 마련해 주는 등의 배려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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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선생에 대한 高騈의 배려
"어제 사령부 경리 직원이 8월 분 봉급을 보내 왔습니다. 저는 이미 귀국허가에 따라 특별히 路資를 받았었는데 어찌 다시 봉급을 받음이 합당하겠습니까. 그래서 반납했더니 도리어 재송부 명령을 내렸습니다. 집을 윤택하게 하는데 쓰라는 말씀에 놀라 삼가 감사히 받습니다."(사 재송 월료전 장)
"저의 사촌아우인 서원이 新羅國 사신단원의 자격으로 집안 편지를 가지고 저를 영접하러 왔습니다. 장차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이러한 제 동생에게 어제 특별히 돈 30관을 내려주시는 큰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謝賜弟棲遠錢狀)
--선생이 귀국한 연유에 대해 서유구(1764-1845)는 "高騈이 큰 일을 하는데 부족하고 方士 呂用之 諸葛殷 등이 誕妄하여 반드시 패할 것임을 최치원은 알고 초연히 떠났는데, 떠난 지 3년만에 淮南에서 난리가 났으니(高騈의 피살을 말함), 幾微를 아는 명철한 군자다움이 있다."(계원필경집序)고 했다. 선생의 심중을 천년 뒤에 추리하는 것이어서 진실 여부는 영원히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선생의 글에는 一字一句의 단서도 없기에 이 난에 논평 없이 기록만을 해둔다.
------------(十七) 풍랑에 막혀 바닷가 생활 반년-------
8월 淮南 군막을 떠나 10월 大珠山 밑에서 배를 띄었다. 배에 올라 대주산 산신에게 풍랑을 멎게 해 달라는 告祀를 지냈는데, 그때 명의가 "淮南入新羅兼送國信等使 前東面都統巡官 承務郞 殿中侍御使 內供奉 賜 緋魚袋 崔致遠"(계원필경 권20 '제참산신문')이었으니 이것이 선생의 당나라 생활 16년을 총결산하는 직명이었다.
이처럼 고사까지 지냈으나 풍랑은 그치지 않아 중도에 曲浦라는 곳에서 겨울을 나게 됐다. 그 동안에 여러 지우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고 시를 화답하면서 고국으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달랬다. 이듬해 바다가 잔잔해져 드디어 3월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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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淮南入新羅兼送國信等使= 회남에서 신라로 들어가면서 國信(사신의 징표나 조서 등의 문서) 등을 갖고 가는[送] 사신.
--바닷가 생활 반년을 말해주는 몇 편의 글을 계원필경에서 뽑아 본다.
(1) 산신에게 고사를 지낸 제문의 한 구절
"오늘 부모님 뵈려 고향에 가려 합니다. 삼가 薄酒로써 감히 도움을 바라오니, 산신께서는 가만히 명하셔서 파도 귀신으로 하여금 팔짱을 끼게 해 주십시오. 편안히 물에 떠서 순식간에 '군자의 나라'[君子之國]에 돌아가는 것은 오직 산신께서 바람을 어떻게 불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2) 高騈과 몇 차례 편지. 다음은 주요 내용.
"고향을 이별한 지 오래되고 바다에 뜰 길이 먼지라, 머물려니 부모를 봉양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저리고[住傷烏鳥之情] 떠나려니 모셨던 일이 그립습니다[去懷犬馬之戀]."
"<약 주머니를 뱃머리에 달면 풍랑이 두렵지 않을 것>이라는 가르침의 말씀 잘 받았습니다. 푸른 주머니를 달아 놓으니 과연 푸른 바다보다도 더 푸르러, 바다 귀신으로 하여금 파도를 그치게 해 줄 것 같습니다."
"海內誰憐海外人 뉘라서 외국 사람 가엾게 여겨 보살펴 주리.
問津何處是通津 묻노라, 어디메가 내가 갈 나루로 통하는지.
本求食祿非求利 애초에 食祿만 구했고 利를 구하지 않았으며
只爲榮親不爲身 어버이의 영광을 위했고 내 몸 위하지 않았네.
客路離愁江上雨 떠도는 나그네의 시름, 강 위의 비처럼 내리고
故苑歸夢日邊春 고향 가고 싶은 꿈은 봄 햇살처럼 떠오른다.
濟川幸遇恩波廣 은덕 입어 다행히 국난극복에도 참여했으니
願濯凡纓十載塵 이제 갓 끈의 십 년 먼지 씻으려오." (진정상태위시)
"저희 일행이 탄 배가 乳山에 이르러 10여일 간 바람이 잔잔해 지기를 기다리던 중 겨울이 닥쳤습니다. 뱃사공이 출항하기 어려우니 좀 더 머물러야 한다고 요청했습니다. 무서운 풍파를 만나니 어쩔 수 없군요. 지금 곡포라는 곳에 돛을 내려서는 띠를 엮어 몸을 가리고 미역을 끓여 배를 채우고 있습니다. 겨울이 지난 뒤에 출발 일자를 정하겠습니다. 따뜻한 봄이 되면 바람도 잘 테니 그 때 고향으로 떠나겠습니다."
(3) 진사 동기생인 顧雲과 吳巒 楊贍 등 여러 명사들과 이별을 아쉬워하는 모임을 갖고 시를 화답했는데 다음은 화답시의 한 구절
특히 과거에 같은 해 합격한 顧雲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며 슬퍼했다.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문장은 중국인을 감동케 했네”
이 구절은 선생이 당시 외국인이었지만 당나라 명사들과 학문과 시로 어깨를 겨뤄도 조금도 꿀리지 않았던 그의 활약상을 입증해준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선생은 신라시대에 벌써 ‘韓流열풍’을 일으킨 셈('뉴스메이커' 2001. 9. 13. 노만수)이다. 선생은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悲莫悲兮兒女事 슬퍼도 아녀자들 같이 슬퍼하지 말자.
不須 別離中 이별은 그렇게 마음 상할 일 아니니. (진사 양섬의 송별시에 답함)
(4) 빨리 고국에 돌아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시
臨行與爲眞心說 이 자리서 내 진심 털어 말을 하자면
海水何時得盡枯 저 바다는 어느 때나 다 마를까요. (유별여도사)
-----------(十八)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귀국해 보니 그렇게도 보고싶어했고 또 봉양하기를 다짐했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아니 계셨다.
선생이 귀국 길에 올라 바닷가에서 반년을 보낼 때 아버지가 별세한 듯하다. 당시는 배편 외에는 아무 통신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선생은 물론 알지 못했다. 대숭복사 비명을 보면 "나는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했지만 虞丘子의 긴 통곡만 해야 했다. 이제 부모 가신 뒤의 부질없는 영광만 누릴 뿐이다."란 대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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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虞丘子는 '한시외전'에 나오는 皐魚를 말한다.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공자가 길을 가다가 슬픈 통곡소리를 듣고 가보니 고어였다. 공자가 우는 이유를 물으니 고어가 답했다.
"나무는 고요히 있으려고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樹欲靜而風不止]
아들은 부모를 봉양하고 싶으나 부모께서 기다려 주지 않으십니다[子欲養而親不待]. 한 번 가면 다시 뵐 수 없는 것이 부모입니다."
따라서 고운선생이 "우구자의 긴 통곡만 해야 했다"고 한 것은 아버지를 봉양하고 싶어 귀국했으나 아버지가 기다려주지 않고 돌아가셨다는 뜻이다. 귀국 직후 엮은 계원필경 서문에도 "돌아가신 아버지[亡父]께서 훈계하시기를..."이란 구절이 있다.
* 학계에서도 고운선생이 귀국하기 전에 부친이 타계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고운 최치원' 15면)
-----(十九) 헌강왕의 환대와 벼슬---------------------
임금인 헌강왕은 고운 선생을 반겨 侍讀 겸 한림학사 守兵部侍郞 知瑞書監의 벼슬을 주고 자금어대를 하사했다. 헌강왕으로선 최선의 배려를 한 셈이다. 그러나, 經世의 포부를 책임지고 펼 수 있는 직위는 아니었다. 당시 중앙부처나 군부대의 長 등 요직은 귀족인 眞骨만이 차지할 수 있었는데 선생은 귀족이 아닌 6두품 출신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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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독'은 經書 강의를 하는 직책, '한림학사'는 국서를 작성하는 임무를 맡은 직책으로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는 사람에게 의례적으로 주어지던 직위, '지서서감'은 문필기관 副책임자이다. 그리고 '수병부시랑'의 병부시랑은 국방차관이고 '수'는 품계보다 상위직을 맡을 때 붙이는 것이니 요즘으로 보면 서리 또는 대리란 뜻이다. 그러나 당시는 병부시랑이나 수병부시랑이 수 명 있었기 때문에 병권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라고는 할 수 없다. 당나라 군의 일선 총사령부에서 중요한 일을 한 데 대한 예우나 경험 활용 차원이라고 보는 것이 무난한 해석일 것이다.
-- 자금어대도 같은 차원으로 보면 된다. 당 나라에서 이미 비어대를 받았으므로, 어대를 하사하자면 그 보다 한 등급 높은 자금어대를 하사해야만 동격의 대우를 한 셈이 된다. 신라왕(경문왕, 진성여왕)이 당으로부터 정승, 즉 '檢校太尉'의 직첩을 하사 받은 것(선생의 글 '사은표'에 나옴)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二十) 단순한 질투와 猜忌가 아니라...----------
당시 신라의 기득권 층인 진골 귀족의 입장에서 볼 때 선생의 귀국과 官界등장은 매우 거북스럽고 긴장스러운 돌발사였다.
당시 신라에는 과거제도가 없었고 진골이라는 혈통만으로 출세가 보장되는 시대였다. 진골로서는 매우 만족스럽고 편안한 체제였다. 이에 힘입어 그들은 나라 발전의 결실을 독차지하고 사치를 즐겼다. 이런 계제에 진골 아닌 6두품의 고운선생이 골품제가 없는, 그래서 신라보다는 훨씬 개방적인 당나라의 空氣를 호흡하고 거기다가 신라에는 없던 과거라는 인재등용 시험에 합격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관작까지 지내고, 그것도 前途有望한 30 미만의 창창한 나이로 돌아왔다. 이러한 선생이 언제 어떤 파괴력을 가지고 그들의 독점적 지배체제에 도전할지, 그들이 불안감과 의구심을 가지고 선생의 동태를 예의 주시했을 것임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렇지 않아도 선생처럼 당나라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들은 사회적 모순을 가장 민감하게 인식하고 그 극복방안을 모색하고 있었으며(최병헌 '신라사에서 본 최치원' 1983. 동방사상논고) 진골 중심의 폐쇄적인 신분체제에 불만을 품고 이에 저항하기 시작한 상황이었다(김경태등 '한국문화사' 1986.77면, 이화여대출판부. 하현강 '한국의 역사' 1979. 신구문화사. 95면). 선생이 이들의 선봉이나 領袖가 되어 예컨대 과거제도 실시와 같은 체제개혁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모든 기득권 세력에게는 혁명에 비견되는 타격이 된다고 할 것이다. 선생이 의심과 시기[疑忌 삼국사기의 표현]를 받았던 진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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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귀족들의 사치 풍조에 대해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서울 경주에는 35개의 金入宅(부자집)이 있었다. 그들은 봄에는 東野宅, 여름에는 谷良宅, 가을에는 仇知宅, 겨울에는 加伊宅에서 놀았다 (전부 별장을 지칭한 듯). 49대 헌강왕 때는 성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노래 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 중국의 新唐書에도 "宰相家에는 祿이 끊이지 않고 노예가 3천명이며 무기와 말 소 돼지가 이 숫자와 비슷했다"고 쓰고 있다.
--당시 과거 비슷한 것으로 讀書三品科란 것이 있기는 했다. 788년에 실시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國學의 학생들만을 상대로 하는 졸업시험과 같은 것(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병헌)이기 때문에 대상이 극히 제한적이었고, 또 무엇보다도 어떤 직급 이상은 올라갈 수 없다는 골품제 원칙이 있는 한 그 시험대상이 아무리 넓어도 진정한 과거제의 실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고운선생은 '진감화상 비명'에서 "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누구에게나 도가 있으며 따라서 異邦人이 따로 없는 것[夫道不遠人 人無異國]"이라고 도의 평등원리를 주장했다. 이러한 언급은 당나라 사람과 신라 사람의 평등을 강조하여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사상이었지만, 여기에 내재된 평등의식을 확대하면 골품제에 대한 그의 반발의식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즉 누구에게나 도가 있다는 견해는 특권층 옹호에 반발하는 이론으로도 해석된다.(유승국 '최치원의 東人의식 연구' 1983. 동방사상 논고)
--삼국사기는 "치원이 귀국해서 자기의 뜻을 실현하려고 했으나 의심과 시기를 많이 받아 용납되지 못했다... 행동하기가 자못 곤란하고 걸핏하면 비난을 받으니..."라고 썼다. 의심과 시기를 받았다는 설명만 하고 이때 선생이 실현하려고 했던 '자기의 뜻[將行己志]'이 무엇인지, 그리고 '비난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김부식은 관료였다. 체제적 모순을 지적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건 간에 관료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 일부에서는 "재능을 시기하고 능력을 꺼렸다[猜才忌能]" (최영설 가야산학사당비陰記)고 기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태를 너무 좁혀서 본 것이다. 재능이 많아서 시기와 질투를 받는 것은 인간세상에서 더러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라면 선생의 전면적인 은퇴라는 결과까지는 생길 리 없다. 선생은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단순한 시기와 질투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언젠가는 해칠 수 있는 <어린 호랑이>로 간주되어 밀려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기-질투라는 용어 자체가 애초부터 부적합했다고 생각한다. 이익집단 간의 이견과 갈등, 또는 體制觀의 대립을 오늘의 우리들은 결코 상호간의 시기-질투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진골세력에 있어 고운은 시기-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견제-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골품제가 국민통합에 얼마나 치명적이었던가는 삼국사기의 다음 일화에서 例證 된다.
"신라 진평왕 때 사람 薛 頭는 어느 날 친구들과 술 마시며 <신라에서는 사람을 쓰는데 그 골품을 따지므로 비록 큰 재주와 공이 있더라도 한계를 넘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멀리 중국에 가서 비상한 공을 세워 고관 복을 입고 황제 곁에 출입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후 그는 당나라에 들어가 고구려 원정에 자진 참가, 1등의 공을 세웠으나 전사했다. 황제가 그 사유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御衣를 덮어주고 장군 벼슬을 제수했다."(권47)
------(二十一) 桂苑筆耕을 왕에게 바치다--------------
특히 당시 임금인 헌강왕은 글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김인종 '고운 최치원' 24면) "선비들을 돌보고 예로써 대우"했다(낭혜화상 비명). 그리고 선생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선생을 영접하기 위해 선생의 사촌 동생에게 사신의 자격까지 주어 당나라에 보내었다(十六항서 설명). 그래서 왕은 선생을 각별히 존경하고 중하게 여겨 장차의 국정에 선생의 기여함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時王甚敬重之 若將與有爲於治. 최곤술 1925. '고운집' 편집서문]. 실제로 왕은 선생이 귀국하자 말자 선생을 불러 왕실 사찰인 대숭복사 비명과 國師인 지증대사 비명을 지으라고 친히 부탁했으며, 또 선생은 당나라 있을 때 쓴 글 수 만 수를 10개월 작업 끝에 "추리고 추려서[淘之汰之]"(계원필경 序) 886년 1월 이를 28권으로 엮어 헌강왕에게 바치는 열의를 보였다. 이때 바친 글에 계원필경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정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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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은 성품이 총명 민첩하고 책 보기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번 보기만 하면 모두 입으로 외울 정도였다 한다. 당연히 그 자신이 문필에 능하였고 문사를 지극히 사랑하였다.(최완수 '신동아' 2001. 10월호)
--이때 헌강왕에게 바친 글 28권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과거급제 후 東都(洛陽)에 있을 때 지은 詩賦인 私試今體 5首 1卷, 五言七言今體詩 100首 1卷, 新詩賦 30首 1卷 도합 3卷
-縣尉로 있는 동안에 지은 詩文인 ≪中山覆 集≫ 5卷
-계원필경집 20卷
--계원필경은 한국 最古의 문집인데 桂苑은 계수나무 동산, 즉 향기가 진동한다 하여 학자나 문인이 모인 것을 지칭한다. 筆耕에 관해서는 선생 자신이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제가 마침 난리를 만나 軍幕에서 寄食하게 되었은 즉 이른 바 거기서 먹고 살아왔다[ 於是 粥於是]는 뜻으로 '필경'이라 제목했습니다."
* 목차는 다음과 같다. {서문}, {권1} 賀改年表 등 10首(表), {권2} 謝加太尉表 등 10首(表), {권3} 謝詔狀 등 10首(狀), {권4} 奏請從事官狀 등 10首(奏狀), {권5} 奏誘降黃巢狀 등 10首(奏狀), {권6} 賀入蠻使廻狀 등 10首(堂狀), {권7} 滑州都統王令公 3首 등 20首(別紙), {권8} 泗州于濤常侍 등 20首(別紙), {권9} 都統王令公 3首 등 20首(別紙), {권10} 魏博韓簡侍中 등 20首(別紙), {권11} 檄黃巢書 등 10首(檄書 4首, 書 6首), {권12} 州許勍 등 20首(委曲), {권13} 行墨勅授散騎常侍 등 15首(擧牒), {권14} 淮口鎭將李質充沿淮應接使 등 25首, {권15} 應天節 齋詞 3首 등 15首(齋詞), {권16} 祭五方文 등 10首(祭文·書·記·疏), {권17} 初投獻太尉啓 등 10首(啓狀), {권18} 賀破淮口賊狀 등 25首(書狀啓), {권19} 上座主尙書別紙 등 20首(狀啓·別紙·雜書), {권20} 謝許歸覲啓 등 40首(啓狀·別紙·祭文·詩)
* {卷16}까지는 高騈을 위해 대필한 것들이다. 유명한 「檄黃巢書」도 그 안에 들어 있다.
--계원필경에 관해서는 현대 중국인들도 그 가치를 높게 평하고 있다. 특히 강택민 국가주석은 95년 한국방문 때 국회연설에서 이 계원필경을 예로 들어가며 양국의 우호관계를 강조해 우리를 놀라게 한 바 있다.
* 중국의 당은평 교수는 "계원필경은 우선 중국 正史인 신,구당서와 자치통감에서 빠진 부분까지도 기록했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중국정사에서 틀린 부분이 있으면 계원필경을 근거로 수정하고 있다. 계원필경은 매우 정확한 역사서이다."라고까지 말한다.(2000.11.25. KBS 역사스페셜 인터뷰)
---------(二十二) 두 왕의 잇따른 죽음-----------
그러나 불행히도 이 계원필경을 올린 뒤 반년밖에 안 되는 이해 7월 헌강왕이 죽었다. 아들 嶢가 채 돌도 안되었기[生未周 ] 때문에 왕의 동생 정강왕이 임시로 나라를 다스렸는데[權統](삼국사기 진성왕조 '최치원 納旌節表') 그 정강왕도 또 1년 만인 887년 7월에 죽었다. 두 왕의 가까운 혈육으로는 누이동생 坦과 嶢밖에 없었다. 坦이 할 수 없이 "임시로 왕의 직무를 맡으니[權知當國王事]"(謝嗣位表) 이가 곧 진성여왕이다.
이것은 고운선생의 입지를 매우 어렵게 하는 사태변화였다. 신라가 후기에 들어서면서 잦은 왕위쟁탈전으로 정권의 권위가 흔들렸으나 헌강왕은 증조가 45대 신무왕, 조부가 46대 문성왕, 아버지가 48대 경문왕이어서 정통성 차원에서 한 치의 이의도 없었고 따라서 왕권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또 정강왕마저 일찍 죽어 여성이, 그것도 "임시"라는 이름으로 왕의 일을 맡으니 왕권이 제대로 안정될 리 없었다. 왕권이 약화되면 역으로 臣權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당시 신권은 진골귀족에게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진골들로부터 경계를 받고 있던 고운선생은 이리하여 중앙정계에서 철저한 疎外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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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로 왕의 직무를 맡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이때 왕위의 父子상속이 鐵則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헌강왕이 죽었을 때 돌도 안 되는 嶢를 장차의 왕으로 확정해 놓고 (사실 嶢는 12세에 52대 효공왕으로 즉위한다.) 다만 너무 어리니까 그가 장성할 때까지 近親이 왕의 직무를 임시로 대행한다는 개념으로 이러한 용어가 등장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당시로서는 있을 수 있는 발상이었다고 여겨지는 면이 있다. 28대 진덕여왕으로 왕이 될 수 있는 聖骨의 代가 끊겨 진골이 왕이 되자 잦은 왕위 싸움이 일어나 진골이 진골을 죽이는 골육상쟁이 거듭되었다. 그래서 이래서는 自害의 無限連續일 수밖에 없다는 반성이 진골세력 내부에서 自生되었고 따라서 왕위의 부자상속을 어떠한 경우라도 예외 없이 지켜서 骨肉相爭을 원천적으로 막자는 합의가 진골세력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權知當國王事'라는 말은 제후가 황제에게 사용하는 의례적인 말만이 아니라 실제의 상황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 같다.
-------(二十三) 진골의 핍박속에 지방 太守로-----------
이때부터 선생의 지방 太守(지금의 군수) 시절이 시작된다. 태수를 지낸 지역으로는 고운선생 親撰시문(贈희랑화상)에 天嶺(경남 함양)이 있고, 삼국사기에 大山(충남 부여군 홍산 일대-이병도 박사 추정. 그러나 太山, 즉 전북태인의 誤記일듯), 富城(충남 서산)이 있으며, 이밖에 擇里志에는 沃溝(전북)가 기록돼 있다.
중국에 있을 때 "어진 지방관이란 옛날에도 드물었다[良二千石 古難其人]"(허칙수廬州자사)고 한탄한 바 있던 선생인지라 선정을 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하나의 예로 咸陽上林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함양군 함양읍의 외곽지대를 둘러싸고 있는 숲인데, 선생이 태수로 있을 때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우리 나라 최초의, 그리고 최대규모의 防風 防災林으로서 지금도 2만여 그루의 정정한 나무들이 우람한 숲을 이루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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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수로 나간 것에 대해서는 자청했다는 설(김인종 앞책 25면, 최완수 '신동아' 2001. 10월호)과 쫓겨나갔다는 설(중앙일보-신영복)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별 의미가 없는 논쟁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지방근무를 자청했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쫓겨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태수를 시작한 시기에 대해서는 "헌강왕이 죽자 조정에서 시기하는 자가 많아 지방으로 나가서 태산 태수가 되었다"는 886년 설(최곤술 1925.'고운선생 사적')에 김인종 김영두 교수가 동조하고 있으며 887년 설(양기선 '고운 최치원 연구') 890년 설(최준옥 문집 표, 최영성 '연보')도 있다.
--태수를 마친 시기에 대해서는 일정한 기록이 없다. 咸陽歷史年表에 "891-892년 함양태수를 지냈다"는 기록, 그리고 삼국사기에 "893년 부성태수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二十四) 곳곳에서 반란이-----------------
선생이 지방 태수로 전전하는 사이 신라는 급격히 쇠망의 길로 빠져 들어갔다. 폐쇄적 지배체제라는 구조적 원인에다가 왕권의 약화라는 시기적 상황까지 겹쳐 지방 豪族세력이 급격히 그 세를 팽창해 갔다. 더욱이 진성여왕이 美少年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그들에게 요직을 맡기는 등의 亂政을 해 민심이 離反하던 끝에, 888년에는 여왕을 비난하는 대자보가 조정 앞 대로상에 나붙는[欺謗時政 辭 榜於朝路] 사태까지 벌어졌다 (삼국사기).
889년 들어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 지방에서 조세를 안 바쳐 국고가 비게 되었고 왕이 使者를 보내 이를 독촉했으나 도리어 이로 인해 도처에서 반란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元宗 哀奴 등이 沙伐州(尙州)에서 반기를 들었으며 891년에는 北原(原州)의 梁吉이 부하 弓裔를 시켜 溟州 관내 10여 군현을 빼앗았고 892년에는 裨將 甄萱이 完山(全州)에서 後百濟를 일으켰다.
이 무렵 선생은 천령 태수로 있었다. 물론 조정의 명도 있고 하여 선생은 반란군을 방어하는 일에 힘썼다. 이때 선생과 지우관계에 있던 希朗스님이 해인사에서 화엄경을 講論했는데 선생은 "나는 반란군을 막는 일에 얽매어[ 虜所拘] 청강 못 하고 시로써 그 일을 기린다."면서 시(증희랑화상)를 보냈다. 이 시를 보낸 명의는 "防虜大監 天嶺郡太守 粲 崔致遠"으로 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31. 함양名宦錄에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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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로대감= '방로'는 '오랑캐를 막는다'는 뜻. '대감'은 신라 때 兵部 등에 있었던 차관급 문관직.
-- 粲(알찬)= 阿 . 역시 차관급.
* 885년 귀국 때 '수병부시랑'으로 차관서리 급이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차관급으로 승진된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경력으로 보아 승진은 시켜야 하겠는데, 그러나 중앙부처의 차관은 주고싶지 않은 진골세력의 고민이 <차관급 태수>라는 이런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 이 기록을 볼 때 894년 時務十餘條로 인하여 아찬으로 승진되었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무엇인가 혼선이 있었던 때문이 아닐까 한다.(二十七항에 설명)
--여기서 말하는 반란군은 선생의 임지가 경남 함양인 것을 감안하면 견훤의 후백제 군이 틀림없다.
-----------(二十五) 다시 가 본 唐나라---------------
미증유의 국난을 지방직에 있으면서 맞는 선생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태수로 반란군을 막는다는 것은 무너지는 하늘을 지팡이로 막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없는 안타까움을 품고 선생은 893년께 충청도 부성태수로 옮겨간다. 충청지방 한 野史는 임지 瑞山에 부임한 선생이 "산성 아래 초막을 짓고 비운의 당나라와 신라를 비관했다."(保寧郡誌)고 전하고 있다. 이것은 야사라고 해서 도외시할 말이 아니다. 그때 선생은 조정의 명을 받아 중국에 賀正使로 다녀왔기 때문이다.
선생이 다시 본 당나라는 10년 전 귀국 때 보았던 상황보다 더욱 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 지배세력 내부의 상쟁과 난맥은 더욱 깊어져 선생이 애써 보필했던 高騈은 고발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던 끝에 벌써 6년 전에 피살되고, 절친했던 知己 顧雲도 벼슬을 떠났다. 그가 본 것은 절망뿐이었다.(사실 이로부터 10여 년 뒤인 907년 절도사 朱全忠은 많은 선비들을 죽이고 당나라를 멸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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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당나라 재방문과 관련,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893년 치원은 부성태수로 있다가 왕의 부름을 받아 당나라에 가는 하정사가 되었는데 흉년이 들고 도적이 횡행하여 길이 막혀 가지 못했다. 그 후에 치원이 또 사절이 되어 당에 갔었는데 그 시기는 알지 못한다"
* 924년의 지증대사 비명에 "入朝賀正"이라고 명기하고 있으므로 하정사로 다녀온 것은 틀림없다. 賀正은 신년을 하례하는 인사로서 몇 년을 연기해서 할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기는 893년 말과 894년 초 언저리로 추정된다. 전남 신안군 비금도 선착장이 있는 수대마을 뒷동산엔 선생이 당나라에 使臣가다가 파놓았다는 전설이 있는‘孤雲井’이란 샘물이 지금도 맑은 물을 솟구치고 있다.(한겨레21 1999-7-22보도)
--朱全忠의 선비 살해= 당나라의 말세를 상징하는 사건. 주전충은 당을 멸망시키기에 앞서 당에 충성할 것으로 보이는 선비 38명을 白馬驛에서 살해하여 그 시체를 황하에 던졌다. 이 사건은 주전충의 보좌관 李振의 건의에 따른 것인데 이진이 "이놈들은 淸流인체 하니 마땅히 황하에 던져 영원히 濁流가 되게 합시다."라고 하자 주전충이 웃으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한다. (唐書)
* 선생이 애초에 귀국하지 않고 당에 계속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1745년 黃景源이 쓴 栢淵書院(경남함양 소재)記는 "선생께서 종신토록 당에서 벼슬했다면 어떻게 白馬驛에서 淸流로 몰려 죽는 화를 면했겠는가"라고 썼다.
----------(二十六) 救國의 直言--時務十餘條 ----
당나라의 파국상을 직접 목도하고 귀국한 선생은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 이대로 가다가는 신라도 망할 것이 명약관화하다고 판단한 선생은 진성여왕 8년 894년 2월 일신의 안위를 제쳐놓고 왕에게 구국의 직언을 하니, 그것이 時務十餘條(급선무로 시행해야할 시국대책 10여조항)이다. 내용은 전하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신라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골품제를 완화하고 과거제에 의한 인재등용을 하라는 건의 등이 피력되었을 것"(하현강 '한국의 역사' 95면)이다. 그리고 10여 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선생의 평소 소신인 다음 내용도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임금의 덕화는 치우침도 편벽함도 없어야 한다. (귀순군 손단)
* 정치는 인을 가지고 근본을 삼고 ........백성을 건져주는 것으로서 인을 이룬다.[政以仁爲本.......仁爲推濟衆之誠] (대숭복사 비명)
* 신하를 알아보기는 어진 임금밖에 없다 (절서주보사공)
* 비상한 인재가 있어야 비상한 일이 있고 비상한 일이 있어야 비상한 공이 있다. (서주나성도기)
* 천하를 다스리려면 먼저 부정 출세를 막아야 하고 어진 선비의 진출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양관청치사표)
* 장차 곤궁에 빠진 백성을 살리려면 진실로 유능한 관리들에게 의지해야 할 것이다. (수고패권지강주군주사)
* 아래사람이 이탈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대개 윗사람이 온전한 덕이 없기 때문이다. (소의성린)
* 예나 지금이나 사치란 다 몸을 망치는 법이다. (변하회고)
* 풍속을 순화시키는 데 제일 먼저 할 일은 권농이다[撫俗所先 勸農爲最]. (허권섭관찰아추충홍택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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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십여조의 내용에 대해서는 학계의 추정도 대부분 같다.
"추측컨대 진골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 6두품을 포함하는 폭 넓은 정치를 지향했을 것으로 보인다. 신분보다 학문을 바탕한 인재 등용을 주장했으리라. 이러한 정치 이념은 나중에 고려 왕건의 골품 초월정책, 광종의 科擧 실시, 성종의 유학 장려책에 반영된다."(유성태 '고운 최치원' 225면)
"집권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 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해 보고자 한 노력이었던 것 같다. 이 정신은 고려왕조가 성립되고 사회가 안정을 찾아갈 무렵인 982년 성종에게 올린 최승로의 상소문 중 <時務 28조>로 계승되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중환)
--사치에 대해서는 선생이 중국에서 수양제가 만든 제방을 보고 읊은 시가 있다.
莫言煬帝曾亡國 수양제가 나라 망쳤다고 말하지 말라
今古華奢盡敗身 예나 지금이나 사치란 다 몸을 망치는 법. (변하회고)
---------(二十七) 建議는 묵살되고-------------------
선생의 시무십여조 건의 내용이 귀족들의 엄청난 반발과 비난을 받았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왕이 이를 嘉納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아마도 잘못된 기록일 것이다. 건의 내용이 하나도 실천되지 않았으므로 이를 가납이라 할 수 없다. 이에 관해서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십여조를 여왕에게 간했으나 여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연암집-함양 학사루기)고 기술했는데 이 기술이 정확한 것일 듯하다. 그리고 아찬으로 승진시켰다고 하는 기록도 불분명한 점이 있다.
선생은 이처럼 자신의 건의가 묵살되게 되자 그야말로 "앞으로 나아감에 받아들여질 데가 없고 뒤로 물러나도 베풀 데가 없는 지경[進不能容 退無可施之地]"(최곤술 '고운집' 편집서문)이 되었다.
나라의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대해 선생은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전쟁과 흉년 두 재앙이 중국에서 신라로 건너 왔다. 최악의 상태가 벌어지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惡中惡者 無處無也] 굶어 죽거나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餓 戰骸 原野星排]."(선생이 895년 7월 16일 지은 해인사 묘길상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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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찬 승진은 위 二十四항의 親撰글을 볼 때 천령 태수 때거나 그 이전에 된 것이 분명하다. 함양역사연표(二十三항에 설명)에 따르면 891-892년에 천령태수를 지냈는데 시무십여조는 894년에 올린 것이다. 그러므로 아찬 승진은 시무십여조와 관계없이 그 한 두 해 전에 이미 되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위 二十四항의 親撰글이 희랑화상에게 보내는 것으로서 불교관계의 글이었기 때문에 이를 참고대상에서 제외한 김부식이, 시무십여조 후에 고운선생의 직함이 아찬으로 기록된 것이 나오자 시무십여조 봉정 때 승진이 된 것으로 오판해서 "가납-승진"운운한 것이 아니었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 최영성 교수는 삼국사기의 기술을 존중해서, 선생이 894년 시무십여조로 인해 아찬으로 승진되고 그 3년 뒤인 897년에 천령(함양) 태수로 부임한 듯하다는 조심스러운 假說을 제시했다('연보' 553면). 그 가설대로라면 첫째, 함양역사연표의 기록을 부인해야 된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둘째, 선생이 그 이듬해인 898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은퇴하는데, 그 한해 동안에 대규모의 함양上林조성사업을 완수하고(二十三항) 學士樓를 짓고(연암 박지원의 '학사루기'에 "이 누각은 고운이 태수가 되어 지은지 천년"이라 했음), 거기다가 진성여왕과 효공왕에게 불려가 '讓位表'와 '謝嗣位表'의 내용을 숙의하기까지 하는 등의 많은 일을 과연 다 해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해인사 묘길상탑기= 굶주린 장병들을 위해 당시 해인사의 스님이 농촌으로 다니면서 벼를 희사시켜 군량에 충당하고 그 나머지로 이 3층 석탑을 세웠으니 이는 오로지 전란에 죄 없이 목숨을 잃은 고혼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다. 이 기문은 1965년 石塔舍利장치 전문도굴단이 검거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말하자면 선생의 글로서는 가장 최근에 발견된 글이다.
--당시의 난리 상황= 894년 10월 궁예가 하슬라(강릉) 진입, 장군이라 자칭. 895년 8월 궁예, 지금의 화천 인제 2군 점령. 금화 철원도 공격. 896년 賊이 國都 서남 방면에서 일어나 그들이 바지를 붉게 하여 스스로 달리하매 사람들이 이를 赤袴賊이라 불렀다. 그들은 고을을 무찌르고 서울 서부 모량리에 이르러 민가를 약탈하여 갔다.(삼국사기)
--선생이 비장한 결심으로 국정개혁을 건의했지만 이것이 조정에 의해 묵살된 사실은 최근 사극에서도 나온다. 사극이 흥미 위주로 흘러 사실을 왜곡한다는 비난을 종종 받고 있지만 지금 방영되는 사극 '태조왕건'의 선생관련 부분은 당시의 진실을 가능한 한 잘 묘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진성여왕이 시무십여조를 가납했다는 삼국사기의 근거 없는 해석에 현혹되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잘 연구해서 다듬은 다음 대목은, 다년간 역사를 전공한 다른 모든 학자들이 귀감으로 삼을 만한 것이다.
신라 병부시랑(지금의 국방차관) 최치원이 진성여왕 앞에 엎드려 말한다.
"폐하. 반역의 불길이 도처에서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사옵니다."
여왕 (얼굴을 찌푸린다)
최치원 "삼가 살펴 주시오소서. 이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이옵니다. 성심을 다잡으시어 민심을 일으켜 잡으시고 국기를 바로 하시오소서."
여왕 "지난 역사의 기록을 보면 크고 작은 반역이란 늘 있어 온 거예요. 모두 저절로 사라질 거예요."
최치원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폐하. 覇道정치를 버리시고 皇道정치를 구현하시오소서."
위홍 (角干. 여왕의 정인(情人)) "무슨 무엄한 망발을 하고 있는 게요? 패도정치라니?"
최치원 "연이은 가뭄과 조세의 가혹한 징수로 유리걸식하던 백성들이 이 나라를 원망하며 반란의 괴수들에게 동화되고 있사옵니다. 기아로 죽어 가는 백성들이 곳곳에 즐비한데 사흘 小宴, 닷새 大宴이 무슨 일이시옵니까? 거두시오소서 폐하,"
위홍 "그만 하지 못할까? 당장 물러가라. 기껏 군주의 작은 연회자리나 탓하고 모든 잘못을 조정에 돌리다니..... 이런 무례가 있는가?"
여왕 "그만 하세요. 가십시다. 연회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어요."
위홍 "예, 폐하....(따라나서며) 병부시랑은 참으로 무례하오. 돌아가 근신토록 해야겠소."
최치원 "폐하, 성심을 되찾으시오서. 폐하"
여왕과 위홍이 그곳을 빠져나갔다.
최치원 (눈물을 흘리며 계속 울부짖는다.) "어이할꼬, 이 나라를 어이할꼬....."
----------(二十八) 悲壯한 역사적 고발----------------
내란상태가 것잡을 수 없게 되자 897년 7월 진성여왕은 引責을 하고 孝恭王에게 양위한다. 신-구의 두 왕은 중국에 이를 고하는 글을 보낼 때 선생의 문장력과 중국에서의 연고를 고려하여 表文 짓기를 부탁한다. 국사가 걸린 중대한 문건이라 글을 쓰긴 했지만, 선생은 이 글에서 나라가 당면한 위급한 상황을 조금의 주저도 없이 사실 그대로 생생하게 그렸다.
임금의 이름으로 보내는 외교문서에 어찌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처절한 표현을 했다. 선생에게는 임금의 체면을 생각하여 사실을 糊塗하는 표현을 하기에는 사태가 너무나 절박했던 것이다.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왔다는 것을 새 임금도 알고 외국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런 대담하고 과감한 글을 썼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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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역사적인 고발이라 할 그 주요 대목은 다음과 같다.
"환난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북 쪽 무리가 경계를 침범하여 독을 내 뿜었고(886년의 일-삼국사기) 다음에는 綠林들이 무리를 이루고 다투어 광기를 부채질하여 곳곳의 고을이 다 도적의 난리를 만나 劫灰 (세계파멸 때 일어나는 큰불의 재)를 보는 것 같다. 게다가 사람 죽이기를 마치 칼로 삼대를 베는 듯 하고[殺人如麻] 땅 위에 드러난 백골은 잡초처럼 버려졌으며[曝骨如莽] 백성의 유리 표박은 날로 심하고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다 태우는 玉石俱焚의 맹렬한 불꽃은 바람 같이 거세니, 어진 나라가 변해서 병 든 나라가 되었다[致使仁鄕 變爲疵國]... 개미 떼가 제방을 무너뜨리고 메뚜기가 국경을 뒤덮고 있으니[蟻至壞堤 蝗猶蔽境] 백성들이 신열이 나도 물로 씻어줄 수 없고 물에 빠졌어도 건져줄 수 없다[熱無以濯 溺未能援]. 모든 국고와 창고는 한결같이 비어 있고 나루로 통하는 길은 사방으로 막혀 있다[帑 一空 津途四塞]." (진성여왕이 중국에 보내는 讓位表)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하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하는 것은 곧 군자의 마음 씀이요, 멸사봉공은 실로 옛사람들이 힘쓴 바인데, 이를 입으로 자랑하는 이는 많아도 몸소 실행하는 이는 드물다... 큰 흉년이 자주 들어 도둑들이 사방에서 일어났는데 그들은 형세를 타고 벌떼가 날 듯 하매, 갑자기 城을 파괴하고 고을을 노 략질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연기와 티끌이 국경을 빙 두르고 제 때에 농사를 지을 수 없게 했다. 뭇 도적이 번성한 데다 먹을 식량마저 마련키가 어렵게 되었다. 지금 군읍이 두루 도적의 소굴이요[郡邑遍爲賊窟] 산천이 모두 전쟁터다[山川皆是戰場]." (효공왕이 중국에 보내는 謝嗣位表)
----------(二十九) 벼슬 내놓고 가야산으로------------
선생의 생애와 관련하여 위 글에는 매우 주목되는 대목이 있다. 즉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하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하는 것은 곧 군자의 마음 씀이요, 멸사봉공은 실로 옛사람들이 힘쓴 바인데, 이를 입으로 자랑하는 이는 많아도 몸소 실행하는 이는 드물다."는 부분이다. 이것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명백하다. 나라 상층부를 독차지한 진골세력이 위난에 빠진 나라를 구할 생각은 않고, 無爲無能으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데 대한 지적이 틀림없다. 시무십여조 파동에 이어 또다시 위기감을 느끼게 된 진골세력들이 이제는 더 이상 두고볼 수는 없다 생각하고 선생을 축출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글을 쓴 1년 뒤인 898년 선생은 별 실권도 없던 아찬 벼슬을 떠나게 된다 (동국문묘 18현 연보-景仁문화사 영인본 1980). 삼국사기는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고 다시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었다[自傷不遇 無復仕進意]."고 썼지만 선생이 한탄한 것은 자신의 불우가 아니라 조국의 불행이었다. 그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간다. 산에서 사는 것[山棲]은 당나라 때부터의 꿈이었으니(十五항 '사강고장') 이때 선생의 나이 4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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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찬 벼슬을 버린 데 대해 안정복(1712-1791)의 東史綱目은 "죄를 얻어 면직됐다"고 썼다.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진골의 공작이 무엇인들 못했을까. 二十七항 말미 사극 장면에서 선생이 "이 나라를 어이할꼬"라며 울부짖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런 말이나 혹은 "이러다간 나라가 망한다"는 등의 발언이 있어 그런 것을 꼬투리로 잡았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鷄林黃葉>발언을 해서 임금의 노여움을 샀을 것이라는 추리(최영성 앞책 17면)도 있다(별항으로 후술). 이러나 저러나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나라가 망하는 것이 뻔한데 할 말을 않고 헛 벼슬만 할 선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할 말 하는 것이 죄가 된다고 해서 가만있을 선생 또한 아니었으니 죄를 얻고의 여부는 선생의 관심사가 아예 아니었을 것이다. 선생은 암담한 현실을 회피한 소극적인 지식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던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2000-11-26 KBS 역사스페셜)
--조정과의 관계단절에 대해서는 이런 일화가 있다. 선생이 은퇴 후 전국을 순례하던 중 국왕이 사람을 보내 국정을 논의하자고 불렀는데 선생이 이 말을 듣고 귀를 씻었다. 그곳이 바로 지리산의 洗耳岩이다. (하동군 왕성초등학교 앞 게시판)
--양위표 사사위표 외에 '사은표' '사불허북국거상표' '주청숙위학생환번장' 등이 있지만 모두 비슷한 시기에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산을 첫 거처로 택한 것은 그의 지기인 희랑스님과 형인 賢俊스님이 가야산 해인사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사실과 관련, "선생이 승려들과 섞여 있었던 것은 멀리 은둔하려는 방책"이라는 풀이가 있다.(노상직, 1926. '고운집'重刊序)
* 삼국사기에 현준스님을 母兄이라 했다. 이 母兄을 일부(양기선, 김인종)에서는 母의 兄, 즉 외삼촌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同腹형으로 보는 것이 옳다. 선생이 쓴 法藏화상傳(일명 賢首傳-다음 항에 설명)을 보면 "師兄인 현준이 大乘遠으로 별호를 삼았는데 나 치원이 중국 생활을 했다는 등의 구실을 들어 드디어 쓰라고 명해 사양하기가 어려웠다."고 적혀 있다. 선생의 항열이 '遠'인데 그 형이 스님이 되었으니 친지들이 애칭 겸 경칭으로 그 항열자에 대승불교의 '대승' 두 자를 붙여 '대승원'이라 부른 것 같다.
----------(三十) 亂世成何事라며 著述에 心血-----
선생은 가야산에 살면서 '해인사缺界場記'(898년), '해인사 선안주원벽기'(900년), '법장화상전'(904년) 등의 글을 썼는데 특히 법장화상전에서는 "利를 추구하지 않았던[非求利 진정상태위시]" 그의 청렴하고 가난했던 삶, 그리고 난세를 구할 수 없음에 대한 그의 안타까움이 눈물겹도록 잘 나타나 있다.
"904년 봄 나는 迦耶(선생은 伽倻를 이렇게 썼다.)山 해인사 화엄원에서 난리도 피하고 병도 요양하는 두 가지 일을 도모하고 있다[避寇養 兩偸其便]. 모든 봉우리와 인사를 나누고 세상일은 멀리 던져버렸다. 입은 옷은 안개나 이슬 속에 노니는 듯 축축하고 앉은자리는 방축 못에 가까이 있는 듯[座若近陂] 하다. 게다가 병든 몸은 눈 뜸질을 일 삼는데 창구로는 쑥 연기가 뭉게뭉게 몰려든다. 삶이 귀찮아 더러 몸을 태워버렸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문병하는 이가 많지만 모두들 코를 가린다. (옛 사람의 글을 몇 부분 인용한 후) 난 황홀한 가운데 그 끝을 잇는다.
난세에 무슨 일을 이룰 것인가 亂世成何事
감당할 수 없다는 '7불감'만 더할 뿐인데.... 唯添七不堪
이 법장화상전은 동양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대저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생은 이 밖에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많은 불교관계 저술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선생이 은퇴 후의 시간을 史家들이 표현한 것 같은 吟風詠月이 아니라 연구활동에 바친 것을 實證的으로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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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불감= 죽림7현의 한 사람인 康이 한 말. 그는 자기가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것이 일곱 가지 있다고 말하였다. 그 중 몇 개를 들면 다음과 같다.(문선 권43 '與山巨源絶交書')
* 거문고를 둘러메고 벌판을 헤매는 것이 무상의 즐거움인데 벼슬을 하게 되면 從者들이 귀찮게 붙어 다닐 테니, 나만의 시간을 즐기지 못한다.
* 벼슬하면 正裝하여 상관에게 인사를 해야하니 이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 입신출세주의자들과 같이 일을 해야 할 텐데, 그들의 능숙한 솜씨를 안 볼 수 없으니 이 또한 참기 어렵다.
* 관청의 일은 어느 것이나 번거롭기 짝이 없으니 이를 해낼 수가 없다.
--법장화상전= 법장화상은 712년 죽은 당나라 화엄종의 第3祖인 달마다라를 말한다. 선생이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심혈을 쏟아 이 글을 쓴 목적은 화엄의 圓融사상으로 신라 후기의 혼란상과 분열 상을 극복하여 백성을 구제하고 와해될 위기에 처해 있는 국가를 유지 수호하기 위한 데 있었을 것이다. 이 전기는 그 상세함과 신빙성, 그리고 법장의 인간상을 여실히 그려낸 것이라든지 법장의 神異性과 靈驗性을 통해 새로운 法藏觀을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실로 전무후무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이 해인사 은거 이후에 단순하게 孤雲野鶴으로 소일한 것이 아니라 학술-종교활동에 힘썼음을 보여준다. (최영성 '고운문집' 35-36면)
-----------(三十一) 入山의 참뜻---------------------
선생은 가야산에서 얼마 동안을 보냈지만 거기서도 보기 싫은 일을 보게 된다. 당시 해인사에는 두 사람의 華嚴宗匠이 있었는데 그중 希朗은 친고려를 표방하고 觀惠는 친후백제를 표방해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병헌).
선생은 입산하기 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은 바 있다.('贈山僧' 또는 '入山詩'라고도 함)
僧乎莫道 靑山好 스님들이여, 청산이 좋다고 말씀들 하지 마시오.
山好何事 更出山 산이 좋다면 왜 자주 산 밖으로 나오시는가.
試看後日 吾踪跡 두고 보시라. 나의 뒷날 자취를
一入靑山 更不還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을 테니.
여기에서 '산'은 단순한 거주지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생활과 생각 그 모든 것이 속세를 떠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몸이 비록 산에 있더라도 속세의 정치나 정권과 연결돼 있다면 그것은 입산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 스스로 산에 들어온 선생이었으니 그 심정은 오죽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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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승려는 끝내 신라를 등지고 말았다. 희랑은 태백산 부석사를 거점으로 하여 왕건의 福田이 되었고 관혜는 지리산 화엄사를 거점으로 하여 견훤의 복전이 되었다.(한국불교전서 4책 512면)
--가야산에 들어와서 쓴 '해인사 선안주원벽기'(三十항에 소개한 바 있음)에서 선생은 스님의 像에 관해 이런 표현을 한 바 있다.
"周易에서 이른 바 <王侯를 섬기지 않고 자기의 일을 고상히 여긴다>하고 또 <고요한 데 거처하는 사람[幽人]은 바르게 살아서 길하다.>한 것은 도를 실천하는 방법이리라. 그런데 幽人은 누구인가. 스님이 아주 가까울 것이다."
------------(三十二) 後學교육과 國土巡禮의 苦行------------
선생은 무겁고 착잡한 마음으로 전국 순례에 나선다. 선생은 중국에 있을 때부터 산수를 사랑했고 또 자신의 은퇴는 정치로부터 떠난 은퇴이지 산천사랑과 民族愛로부터 떠나자는 은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은 이러한 국토순례 과정을 통해 후학 교육에도 많은 시간을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門人들로서 고려초기에 開城으로 가 벼슬한 이가 자못 많았다(삼국사기, 이병도 '고려시대연구' 아세아문화사 1989. 37면). 在朝時에는 후학교육의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을 것임을 고려하면, 이러한 門人指導는 은퇴 후에 주로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후학 지도에 관해서는 다음의 시를 참고할 수 있다.
願言 利門 자네들 부디 이욕엔 문을 닫고
不使損遺體 부모께 받은 귀한 몸, 상치 말아라.
爭奈探珠者 어찌타 眞珠를 캐는 저 사람
輕生入海底 목숨 가벼이 여기고 바다 밑을 들어 가는고.
身榮塵易染 몸이 영화로우면 티끌에 더럽혀지기 쉽고
心垢水難洗 마음에 낀 때는 물로도 씻기 어렵다.
澹泊與誰論 담박한 맛, 누구와 의논하랴
世路嗜甘醴 세상사람들은 단술(또는 단것과 술)만 좋아하는 걸. (寓興)
국토순례와 관련, 삼국사기는 "산림과 강과 바다로 소요 방랑하며 정자를 짓고 송죽을 심으면서 서책으로 베개를 삼고 풍월을 읊었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울분에 찬 그의 은퇴과정과 그가 최후로 쓴 정부공식 문서의 비장한 구절(二十八항에 소개)을 감안할 때, 그 순례는 그런 牧歌的이고도 浪漫的인 것이 될 리 없다. 또 경제적인 능력에서 볼 때도 정자를 짓거나 할 여유가 없었을 것임은 다음 시 '길을 가다가[途中作]'에 잘 나타나 있다.
東飄西轉路岐塵 동서로 떠도는 길, 헷갈리고 먼지투성인데
獨策 幾苦辛 여읜 말 홀로 채찍하며 얼마나 고생했던가.
不是不知歸去好 귀향함이 좋은 줄 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只緣歸去又家貧 돌아간다 한들 또 집이 가난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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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은둔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전설상의 隱者 巢父나 許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현명한 신하는 그 임금이 堯舜처럼 되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 세상에서는 어진 인재를 필요로 하므로 俊士는 巢父나 許由가 되기를 부끄러워한다."('여김부랑중별지 제2')
선생은 또 신라로 돌아오는 귀국도상에 진사시험 주재관이었던 裵瓚예부상서에게도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고국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가진 재목이 쓰여지기만을 기다립니다. 거친 용도나마 취해짐이 있다면 알고 있는 바에 욕됨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참여주의자였고 실천가였다. 시대가 그를 은둔으로 몰아 간 것이지 스스로 은둔이 좋아서 은둔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은둔한 것>이 아니라 <은둔된 것>이다. 그가 은둔기 이후 후학 교육과 저술에 몰두한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리고 그의 산천순례도 유람이 아니었다. 전란으로 피폐되어 가는 산천을 염려와 안타까움의 눈길로 돌아보고, 이름 없는 아까운 풍광에는 이름을 붙여주는, 국토사랑 산천사랑이라는 또 다른 祖國愛의 실천이었다.
--선생의 紀行地에 대해 삼국사기는 경주의 남산, 剛州(지금의 의성)의 氷山, 합천의 청량사, 지리산의 쌍계사, 合浦(지금의 마산-창원)의 別墅 등 다섯 곳을 예거했다. 이 밖의 기록이나 사적으로 전해지는 순례지는 다음과 같다.
* 경북지방= 안동 청량산의 치원봉, 치원대, 치원암과 聰明水, 봉화 청량산, 문경 희양산 자락의 봉암사, 의성 騰雲山 고운사, 문경시 가은읍 夜遊岩과 백운대, 성주 초전, 고령 벽송정, 김천 梁金洞 학사대
* 부산-경남지역= 부산의 해운대, 수영구 백산사의 玉蓮禪院, 남구의 신선대, 양산 孤雲臺 (일명 임경대), 거창 가조 고견사, 삼천포 남일대 해수욕장, 남해 錦山洞天(택리지에 기록 있으나 발견 안됨), 진해 靑龍臺刻石, (함양에도 사적이 많으나 은둔기 이전의 것임)
* 충청지역= 연기군 조치원읍, 보령군 성주사와 보리섬, 공주 공산성, 보은 속리산, 홍성 장곡면 쌍계 계곡
* 호남지역= 김제시 금산면 歸信寺, 해남군 화원면 瑞洞寺, (태인, 옥구 등에도 사적이 많으나 은둔 이전의 사적이 대부분)
--지금까지 밝혀진 선생의 紀行地는 영남 호남 충청 등으로 전부 三南지역이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금강산 개방으로 그곳에도 선생이 紀行했다는 자취가 새로 확인되었다. 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전설이나 설화 등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금강산이 최초의 문학작품으로 직접 형상화된 것은 고운의 시에서다.
. 千丈白練 천길 흰 비단이 드리운 듯하고
萬 眞珠 만 섬 진주 알이 쏟아지는 듯.
한국문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당시 최고의 知性이 구룡폭포를 생동감 있게 묘사한 이 작품은, 그 폭포 앞 너럭바위에 새겨져 폭포의 웅장함과 지금도 함께 하고 있다." (중앙일보 1998-06-26)
방문객의 글에도 다음과 같이 나온다.
"고운 이래 내노라 하는 시인 명현 명사 치고, 금강산 다녀가지 않은 이가 없고 금강을 노래하지 않은 이가 없다"(유흥준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 2001. 중앙M&B발행. 하-22면)
---------(三十三) 반란자들이 왕이 되고---------------
선생의 울분과 비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신라의 천년 사직은 점차 기울어 간다.
반란군의 세력은 날로 기세를 올려 900년에는 그때까지만 해도 '신라西南都統'으로 자신을 부르던 견훤이 드디어 왕을 칭하고, 이어 梁吉과의 싸움에서 이긴 궁예도 901년 이를 따라 왕을 칭하니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속수무책이었다. 신라왕은 영토가 날로 줄어드는 것을 듣고 매우 걱정했으나 이를 방어할 힘이 없으므로, 각 성주에 명하여 "출전하지 말고 성벽을 굳게 지키기만 하라"고 지시할 뿐(삼국사기 효공왕조)이었다.
907년에는 드디어 당나라가 망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조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반란자들이 왕이 되었다. 忠孝를 주창했던 儒者로서 선생의 胸襟은 어떠했을까. 선생은 술잔을 들고 시 한 수를 읊는다.
亂世風光無主者 난세이니 이런 풍광에 주인도 없고
浮生名利轉悠哉 뜬 인생의 명리, 더욱 아득하기만 한데
思量可恨劉伶婦 생각하니 劉伶(중국의 유명한 애주가)의 아내가 한스럽다.
强勸夫郞疎酒杯 왜 남편에게 술잔 멀리하라 강권했는지. (春曉偶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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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伶= 죽림7현의 한 사람. 그가 술을 달라하자 아내가 술독을 모두 두드려 깨며 눈물로 호소했다. 유영이 말했다.
"당신 말이 맞소. 신령님께 고하고 금주를 서약하리다. 그러니 빨리 주효를 준비해주시오."
아내가 부탁한대로 하자 그는 무릎을 꿇고 신령에 아뢨다.
"하늘이 이 유영을 낳을 땐 술로 이름을 날리라고 낳으셨을 줄 압니다. 그러니 한꺼번에 한 섬을 마시고 닷 말로 해장을 하게 하소서. 아녀자의 말은 삼가 듣지 마소서."
이윽고 그는 술을 마시고 대취했다. (세설신어 임탄 상편)
-------(三十四)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글
정치라는 것은 이렇게 어이없는 것인가. 그에 대해 다시 무슨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때문에 희생되는 백성들의 버림받은 삶이 선생의 눈을 아프게 한다. 그들은 역사의 길가에 버려진 접시꽃(蜀葵花)인가. 또 한 수를 읊는다.
寂寞荒田側 거친 밭 언덕 적막한 곳에
繁花壓柔枝 두툼한 꽃송이가 약한 가지 누르고 있다...
車馬誰見賞 수레 탄 사람 누가 보아줄까.
蜂蝶徒相窺 그저 벌 나비만 와서 엿볼 뿐.
自慙生地賤 천하게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堪恨人棄遺 세상에서 버림받아도 참고 견딘다. (蜀葵花)
선생은 897년 '양위표' '사사위표'를 조정에 마지막으로 써 준 이후 달리 어떤 관서나 사찰이나 요인의 글 부탁에 응한 기록이 없다. 다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으니 重閼粲(아찬의 하나) 異才 부부의 청으로 908년에 쓴 '신라 수창군(대구 수성구) 護國城 八角燈樓記'이다. 그것은 異才 부부가 "법등을 높이 달아 빨리 전쟁을 없애야 되겠다[顯擧法燈 銷兵火]."(기문에 나옴)는 목적으로 등루를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글을 청해왔기 때문이다. 비록 은둔하고 있는 선생이었지만 전쟁을 없애야겠다는 그 취지는 전쟁의 최대 희생자인 生民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던 선생의 마음을 움직였던 듯하다. 이 글에서 그는 통한의 어조로 말했다.
"하늘이 아직 재앙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고 있는데, 땅에서는 여전히 간악함이 판을 치는구나. 시국이 위태로우면 생명체 모두가 위태로우며[時危而生命皆危], 세상이 어지러우면 인심 또한 어지러워지는 법이다.[世亂而物情亦亂]"
이 글은 선생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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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등루는 異才부부가 나라의 경사를 기원하고 兵 (전쟁으로 인해 생긴 죄과)을 제거하기 위해 세운 것. 선생은 이 글에서 "속담에 사람에게 선한 소원이 있으면 하늘이 반드시 이에 따른다[人有善願 天必從之] 했으니 그 소원이 이루어 질 것"이라 격려했다.
* 선생은 또 이 글에서 "나는 멀리 떠나 있었는데[愚也尋蒙遙] 청을 받아 졸문을 쓰게 되었다."고 경위를 밝혔다. 멀리 떠나 있던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마지막 글= 연대가 밝혀진 글로서 이 때 이후의 작품은 일체 없다. 924년에 세워진 지증대사 비명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찬술한 시기는 893년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다음 항에 설명한다.
--------(三十五) 68세 생존의 증거 智證大師碑---------
선생은 최소 68세까지는 생존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 증거는 지증대사비로서 이 비는 924년에 세워졌다 (槿域書畵徵에 ''경명왕 7년 甲申建''. 경명 8년이 갑신이니 924년으로 볼 수밖에 없음). 이 때는 선생이 은둔을 시작한 지 26년이 되는 해인 68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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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의 명의는 "入朝賀正 겸 迎奉皇花等使 전 수병부시랑 충서서원학사 賜자금어대 臣 최치원 奉敎撰"이다. 앞부분을 풀이하면 "중국에 갔다온 賀正使 겸 皇花(황제의 칙사)迎接使"이고 '奉敎撰'은 "임금의 교서를 받들어 짓다."는 뜻이다. 그 나머지 중간부분은 前職표시이니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대목이므로 논할 것이 없다. 문제는 앞부분의 현직표시와 뒷부분의 "신... 봉교찬"이다. 이런 표현은 은둔이라는 선생의 입장과 맞지 않는 점이 있다.
일부 학자들(김인종 김영두 양기선)은 건립연대만을 보고 이 비명을 선생이 924년에 쓴 것이라 주장한다. 경주최씨 족보들도 대부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이때가 선생의 은둔기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모순이 생겼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선생이 이 비명에서 그 내력을 상세히 적어놓고 있다.
선생이 비명 찬술을 하명 받은 것은 당나라 유학에서 귀국하던 885년 그해 헌강왕으로부터였다. 선생은 이 비명에서 "을사년(885년)에 왕명을 받았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비 건립은 시일을 끌었다. 선생은 이 비명에서 "스님들이 와서 재촉했을 때 고사했으나 참는 것은 뼈를 깎아내는 것보다 고통스럽고 요구는 몸을 새기는 것보다 심했다. 그리하여 그림자는 8冬 동안 함께 짝했다"라고 적었다. 당시의 표현법이라서 그런지 문장이 난해하다. 그러나 뜻은 8년이 걸려 이 비문을 썼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893년에 비문작성을 완료했다는 뜻이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도학). 그런데 당시 전국이 전쟁상태라 비석 건립은 연기를 거듭해서 비문을 쓴 지 31년 만인 924년에야 이루어졌다.
--이 비석은 우리가 선생의 일생을 살피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비명이 쓰여진 것은 앞 항에서 설명한대로 893년이 틀림없다. 따라서 908년 수창군 등루기가 역시 앞 항에서 풀이한대로 선생의 최후 작품이다. 그리고 이후의 것으로 명확히 기록된 작품이나 사적은 단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선생의 생애는 가장 짧게 봐서 908년 52세에 마친 것으로도 볼 수 있다(사실 54세 경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음-後述).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이 비명에 있다.
이 비명은 건립할 때 원문을 고쳐서 새긴 곳이 두 군데 있다.
첫째는 찬술자 명의이다. 선생이 써서 전해 내려오는 비명은 전부 4개로서 이를 '四山비명'이라 하는데 다른 3개의 비석은 887, 890, 896년에 각각 세워졌다. 그런데 이 3개 비명의 명의는 모두 "전 서국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 자금어대"로 되어 있다. 즉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라는 당나라 벼슬이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증대사 비명도 893년에 찬술된 만큼 찬술 당시의 명의는 분명히 다른 비명과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924년 비석이 건립되었을 때는 이 명의에서 당나라 때 것이 빠져 있다. 당나라가 907년에 망했기 때문이다. 삭제한 장본인은 선생 아니면 사찰측일텐데, 정황으로 보면 선생일 듯하다. 나라는 망해도 벼슬 지낸 기록은 없어지지 않는다. 오늘의 우리가 족보에서 신라 고려 조선조의 조상 벼슬 기록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운 것으로 생각해서 그 기록을 계속 傳承해 가는 것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찰측에서 삭제했을 이유는 없다. 다만 선생은 그가 젊음을 바쳤던 당나라가 결국 망하자 허무감과 실망감으로 당나라 때 것은 상기조차 하기 싫다는 심정이 들었을 것이고, 이런 개인적인 정서에서 명의수정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선생이 자신을 가리켜 "한후의 조서를 받들고 회왕의 비단을 가져왔다 [捧漢后龍緘 齎淮王鵠幣]."라고 한 부분이다. 여기서 한후는 당나라 의종황제이고 회왕은 高騈이다 (高騈이 선생에게 비단을 하사한 사실이 계원필경에 있음). 893년 찬술 때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을 리 없다. 선생의 많은 당나라 때 작품 중에서도 그렇게 비유한 예가 없다. 엄연한 국호가 있는데 구태여 漢나라를 들먹이는 것은 무엄한 일이 될 것이고, 또 절도사나 도통을 가리켜 왕에 비유하는 것 역시 황실로 볼 때는 듣기 거북한 외람된 표현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엔 달리 쓰여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나라가 망하게 되자 첫째 이유와 똑 같은 심정에서 이를 수정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사찰측에서 고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같은 물 水 변 글자인 '漢'과 '淮'로 절묘한 對를 이룬 騈儷體의 솜씨로 보아 선생이 직접 수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나라를 망국에 이르게 한 황실은 원망스럽고 망국 전에 非命에 죽은 高騈은 더욱 애석하게만 여겨지는 선생의 감회가 이런 비유를 낳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 이 부분을 여기서 길게 언급한 것은, 위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선생이 적어도 이때까지는, 즉 68세 때까지는 생존했다는 입증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선생 생애의 후반부는 워낙 안개와 신비에 쌓여 있는 까닭에, 이런 한 가닥의 자료도 우리에겐 소중하기 이를 데 없다.
* 여기서 회왕은 신선술을 좋아했던 淮南王 劉安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다(최영성 '사산비명' 290면). 高騈 역시 仙道에 심취했다는 이유에서다. 이것은 우선 논리상의 문제가 있다. "A는 산을 좋아한다. B도 산을 좋아한다. 그러니 A=B이다."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이 이 표현을 쓴 심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선생이 高騈으로부터 받은 비단을 回憶하는 것은 <왕에 비견되는 최고위급 지도자로부터 선물까지 받은> 스스로의 지난날을 아쉬움 겸해 떠올리는 것이지, <仙道를 하는 사람으로부터 선물 받은> 사실을 그리워해서가 아닐 것이다.
----------(三十六) 마지막 은둔지는?------------------
삼국사기는 선생이 순례한 다섯 곳을 예거한 후 "최후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했다[最後帶家隱伽倻山海印寺]... 조용히 쉬면서 노년을 보냈다[棲遲偃仰以終老焉]."고 쓰고 있다.
은둔지에 관해 선생이 직접 언급한 것은 48세 때인 904년에 쓴 법장화상전의 가야산(三十항에 이미 설명) 뿐이다. 삼국사기의 "최후에는 가야산..." 운운은 이때를 말한 것일까.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생애의 남은 부분이 너무나 길다. 또 이 48세 때를 최후의 은거로 본다면, 강원도 북부의 금강산까지 포함(三十二항에 설명)하는 전국의 그 많은 유적지는 어느 기간에 다 둘러볼 수 있었을까 하는 시간적인 難點이 생긴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48세 때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전국 곳곳을 순례한 뒤 다시 가야산에 제2차로 들어간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선후가 맞는 추정일 것 같다.
가야산 해인사로 가는 길 옆 언덕 바위에 선생의 유명한 시 '題伽倻山讀書堂'이 새겨져 있어 이를 題詩石이라 한다.
狂奔疊石吼重巒 미친 듯 바위 위를 내달으며 산을 울리는 물소리에
人語難分咫尺間 사람의 이야기는 지척에서도 알아듣기 어렵다.
常恐是非聲到耳 옳다 그르단 세상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봐
故敎流水盡籠山 흐르는 물을 시켜 온 산을 감쌌다.
'흐르는 물을 시킨' 主語는 하늘일 수도, 時代일 수도, 또 自身일 수도 있는데 어떤 것이건 간에 속세와 절연하려는 선생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최후의 은둔지에 관해서는 지리산 설도 만만찮다. 전해오는 사적은 가야산보다 오히려 훨씬 더 많다고 할 정도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충남 홍성군 설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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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가야산에서 읊은 것이 분명하다. 여름에 비 온 직후 이 題詩石 앞에 서 보면 물소리에 귀가 멍해지는 사실로 이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이곳에 후인들이 시의 끝 두 자를 따서 '籠山亭'이란 정자를 지었다. 바로 옆에는 影堂인 學士堂이 있는데, 다른 음습한 곳에 있던 것을 1937년 최곤술을 비롯한 후손들이 移建한 것이고 이들은 또 1951년에 학사당 齋宿處인 伽倻書堂을 그 곁에 지었다.
* 가야산 유적으로는 이 밖에 해인사 8만 대장경이 있는 건물 옆의 학사대(터만 남아 있음), 그리고 그 옆에 선생이 손수 심었다는 회나무가 있다. 지팡이를 꼽은 것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전설에 걸맞게 나무의 중간 가지들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어 인상적이다. 또 선생이 입산 때 건넜다는 武陵橋, 거처했다는 孤雲庵이 있고 石刻 휘호도 여러 군데 있다.
* 가야산 속에 마을이 있는데 緇仁里라 한다. 원래 致遠里였는데 선생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이 민망하다 하여 致仁里, 治仁里, 緇仁里로 계속 바뀌어왔다고 한다.
* 선생이 글을 읽었다는 독서당은 해인사 서쪽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터를 아는 이가 없다. 또 해인사에 선생의 書岩과 碁閣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했으나 역시 아는 이가 없다.
--지리산은 권역 자체가 넓고 해서 여기 저기에 유적이 산재해 있다.
* 하동군 花開의 쌍계사= 선생이 이곳에서 글을 읽었다 한다. 절로 들어가는 입구의 좌측 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는 '雙磎', 오른쪽 바위에는 '石門'이라고 새겨진 선생의 친필글자가 보인다. 이곳 근처에는 선생과 관련한 地名, 刻字, 說話 등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선생에게서 유래한 지명은 '加灘' '石門' 부락이 있고, 刻字로는 雙磎石門 외에 喚鶴臺, 馬足臺, 翫瀑臺, 吹笛臺 등이 있다. 이 중 환학대는 선생이 학을 불렀다는 곳이다.
* 선생이 머물렀다는 靑鶴洞과 또 三神洞으로 규정지었던 신흥마을이 있다. 삼신동은 선생이 이상향으로 설정했던 곳이라 한다. 선생이 귀를 씻었다는 洗耳岩(二十九항에서 설명)의 건너편에는 선생이 신흥사에 머물 때 꽂아 둔 지팡이에서 싹이 나 자랐다는 팽나무(도나무, 푸조나무라고도 함)가 있는데 높이 22m 둘레 5.7m의 巨木으로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 지리산을 읊은 선생의 글로는 花開洞詩(일명 '지리산 遁世詩')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李 光의 '芝峰類說'이 전하고 있다.
"조선 선조 24년 어느 날, 한 노승이 첩첩산중의 지리산 골짜기를 헤매다가 석굴에서 여러 권의 책을 발견했다. 그 가운데 최치원의 시첩이 하나 있었는데 16수가 수록되어 있었다. 당시 구례군수 閔大倫이 이를 입수하여 나에게 보내주었다. 필적이 분명한 최치원의 것이요, 시 또한 예스럽고 기이하여 그의 작품임을 의심할 바 없었다. 매우 진귀하다 하겠다."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된다.
東國花開洞 우리 나라 화개동은
壺中別有天 항아리 속의 별천지.
仙人推玉枕 신선이 옥베개를 밀치며 잠을 깨보니
身世 千年 세월은 벌써 천년이 지났네.
* 산청군 지리산 고운동 계곡도 선생이 살았다 해서 이름지어진 곳이다.
* 지리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작은 절인 법계사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도 선생이 머물었다는 곳. 이때 책을 읽고 시를 짓고 명상에 잠겼다는 文昌臺가 있는데 문창대의 넓은 반석 앞에는 '孤雲최선생임리지소'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 산청군 단성면 斷俗寺 (丁酉재란 때 소실) 들어가는 동구에 "선생이 쓴 '廣濟 門'이란 네 글자를 쓴 돌이 있으며 또 선생의 독서당이 있었는데 뒤에 大鑑國師의 影堂이 되었다.(동국여지승람)
--이처럼 많은 유적들로 보아 선생이 지리산에 다년간 머물었던 것은 확실하다. 가야산과 이곳을 오가며 여생을 보냈을 수도 있는데 (李重煥 '택리지'), 가야산을 떠나 이곳을 최후의 은둔지로 삼았다는 주장도 있다.(최창규 陶窩崔南復先生筆帖 74면)
--충남 홍성 설은 그간 구전 차원으로 전해져 오다가 최근에는 연구논문까지 나오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 쌍계 계곡 바위에 새겨진 글씨 가운데 龍隱別墅, 楓嶽, 玉龍巖 등 13개가 선생의 친필로 인정받고 있는 眞鑑禪師碑銘과 컴퓨터 정밀 대조작업을 벌인 결과 "대부분 고운 선생의 필체와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홍성군 홍주 향토문화연구회는 주장하고 있으며(경향신문 2000. 6. 6.) 이를 근거로 일부학계서는 선생이 가야산을 떠나 이곳에서 만년을 보낸 것이 확실하다고 동조하고 있다 (연세대 국학연구원 설성경 교수).
--사실 가야산 장기 은둔은 당시의 전쟁상황으로 볼 때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하게도 이 근처에서 싸움이 자주 일어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만도 916년 견훤의 대야성 공격 실패, 920년 견훤의 대야성 함락, 923년 성주의 고려 歸附, 927년 진주 등 4향의 고려 귀부, 견훤의 경주공격, 대구 팔공산 전투, 견훤의 성주 공격, 928년 합천 초계와 陽山 등지서 고려 후백제 군 전투 등이 있다.
------------(三十七) 享年--------------------------
선생의 향년에 관해서는 54세 경(최완수 '신동아' 2001. 10월호), 70세 경(김영두 교수 '고운 최치원' 177면), 72세(남경대학 고전문헌 연구소 1990년 편찬 '唐詩대사전' 421면), 95세 (함양 상림공원 함화루 문창후신도비. 후손 병식 1860년 씀) 등 여러 설이 있다. 또 가장 오래 된 기록으로 1487년 徐居正이 낸 筆苑雜記에는 "927년 71세에 종적을 감추었다."고 되어 있다. 어느 설이나 다 명확한 자료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자료를 제시하기로는 양기선 교수의 80세 생존설이 있다. 그는 "一然이 고운의 帝王年代曆을 참고해 삼국유사를 쓴 것은 이병도 박사, 최남선 선생 등이 입증했다. 삼국유사는 王曆 欄에 후백제와 고려를 다루면서 <병신년(936년)에 고려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썼다. 그러므로 고운이 제왕연대력을 936년까지 기록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고운은 그 때 만 79세 밖에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운 최치원 연구' 7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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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권1의 <王曆>이라는 것은 대개 <최씨의 書>(고운선생의 제왕연대력을 지칭)을 節酌(縮略)하여 만들고 그 書名을 略用한 듯 하다." 略用이라는 뜻은 제왕연대력의 '왕'과 '력'자를 따서 '왕력'이라 줄여 표현했다는 의미이다.
--80세 설이나 또는 95세 설을 따르면 선생이 결국 신라의 망국(935년)을 직접 눈으로 보고야 말았다는 계산이 된다. 선생을 기리는 국민들로서는 선생이 오래 산 것이 흐뭇한 일일 것이나, 통한에 찼을 선생의 赤心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肅然해지는 마음도 없지 않다 할 것이다.
---------(三十八) 신선이 되었다는 설-----------------
그러나 사실 선생을 기리는 일반 국민들은 선생의 享年이 얼마였는지에 대해 아무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따라서 향년에 대한 민간전설도 일체 없다. 그들은 오로지 선생의 신선 설만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신선 설에 관한 공개된 기록으로는 고려 고종 때 학자 이인로(1152-1220)의 '破閑集'이 최초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벼슬에 뜻이 없어서 가야산에 은거하다가 어느 날 아침 일찍 문을 나간 후 간 데를 알 수 없었다. 冠과 신발을 숲 속에 남겨놓은 걸 보면 아마 신선이 되어 올라간 것 같다."
이인로는 유학자이다. 유학자는 대개 신선을 부정하는데도 이런 글을 쓴 것을 보면, 그때 이미 고운선생이 신선으로 되었다는 설이 민간에 넓게 퍼져 있었던 것 같다.
신선 설을 주장하는 민간 설화는 매우 많은데 하나만 예거하면 전술한 바 있는 함양 상림(二十三항)이다. 당시 함양사람들은 선생이 “상림이 잘 자라면 신선이 돼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한 말을 굳게 믿었다고 한다. 선생의 사망연대를 모르는 것도 상림이 잘 자라 신선이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앙일보 1996-11-20) . 해인사 학사대의 노송, 지리산 화개동의 팽나무, 정읍 무성서원 뒷산 모과나무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이 나무들은 지금도 창창하다.
그러나 언젠가 이 나무들이 自然의 理致에 따라 생을 다한다 하더라도 人心의 理致는 결코 선생을 死別하려 하지 않을 것 같다. 또 다른 형식의 전설이 自生하여 선생을 그들의 마음속에 길이길이 모시려 할 것이다. 민중에게는 선생은 百世의 스승, 겨레의 영웅으로서 不死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집념과 염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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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가야산에서 관과 신발을 남겨놓은 곳은 농산정 뒷길로 올라 나오는 치치백이(합천군 가야면 매안리 삼밭골)라는 설이 있다. (중앙일보 1990. 7. 15.)
*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가야산에 들러 쓴 시에서 "갓과 신발을 매미처럼 벗었구나.[巾 同蟬 ]"라 읊었다.
--신선 설에 관한 몇 가지 글.
* "세상에 전해오기로는 선생이 도를 통해 지금도 가야산과 지리산 사이를 왕래한다고 한다."(이중환 1751.'택리지')
* 고운선생이 신선이 되어 나타났다는 기록은 조선시대 1489년 金馹孫(1464-1498)이 화개동 신흥사에 들렀다가 전해들은 얘기를 기록한 續頭流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속두류록에는 고운선생이 신선이 되어 흰 망아지를 타고 신흥마을에 나타났었다고 전해지는 얘기를 기록해 놓고 있다.
* 李栗谷(1536-1584)의 '遊伽倻山賦'
"꿈에 어떤 신선이 학을 타고 훨훨 날아와 내게 말했다.
'내게 신선약이 있는데 한번 배부르면 굶주림을 잊게 되고 그 어떤 신선세계든 마음대로 갈 수 있네. 그대는 내가 누군줄 알겠는가'
나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上界에 계시는 신라학사로서 세상에서 儒仙이라 일컫는 분이 바로 선생님 아니십니까.'
신선이 미소를 지으며 거문고를 당겨 노래했다. 노래가 끝나자 신선은 보이지 않고 온갖 소리가 모두 고요해라. 문을 열고 내다보니 빈 산에 달빛만 휘영청하다."
* 선생을 '儒仙'이라 칭한 이는 이율곡 외에도 많다(동국여지승람 권30에서의 洪侃, 마산 월영대의 鄭以吾詩등). 이와 함께 '仙子'(이은상 노산문선 3부) '仙人'(金德齡 동국여지승람 권23)이라고도 불렸다.
* 李 光 지봉유설(1614)의 기록.
"조선조 중종 때의 문인 남추는 하인에게 편지를 보내어 청학동에서 신선이 된 고운 선생에게서 청옥으로 된 바둑돌을 얻어와 친우들과 즐겨 그 돌로 바둑을 두었다."
* 시인 林億齡(1496-1568) '쌍계사 시'
致遠僊人也 치원은 신선이라
飄然謝世氣 표현히 세상을 버리다.
短碑唯有字 보통 사람의 무덤엔 죽은 사람 이름자가 보이지만
深洞本無墳 깊은 신선 골짜기엔 원래 무덤이 없는 법.
高山安可仰 산을 쳐다본들 어이하랴?
徒此揖淸芬 한갓 청초한 향기만 맡을 뿐.
--신선설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조선시대 실학자 李圭景(1788-?)과 徐有 (1764-1845)의 '五洲衍文長箋散稿' '계원필경序'에는“최치원을 홍산에서 장사지냈으며[葬在湖西之鴻山] 묘가 가야산록 홍산에 있다. 그러므로 신선이 돼 묘가 없다는 항간의 말은 잘못된 말”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설도 고증자료가 없다.
---------(三十九) 모든 계층이 推仰하는 이유
선생을 기리는 데 있어서는 어떤 계층이나 신분이나 종교의 차이가 없다. 민간 설화가 많고 또 전국 곳곳이 그의 遺蹟地임을 내세우고자 하는 것은 그만큼 선생이 대중적인 기림을 받아왔다는 證左이다.
"평생의 발자취가 미친 곳마다 지금껏 나무꾼 목동들이 이를 가리켜 <최고운이 들른 곳>이라 하고, 시골구석의 아녀자들까지 선생의 이름을 다 알고 있다."(東史纂要 1578.吳澐찬)고 한 것이 벌써 5백년 전 기록이다. "백성들이 신열이 나도 물로 씻어줄 수 없고 물에 빠졌어도 건져줄 수 없다[熱無以濯 溺未能援]."(양위표)고 한탄했던 선생이었기에 일반 백성들이 그렇게도 기리는 것인가.
그러나 백성들만이 아니다. 지배층들도 선생을 기리는 열기에 있어서는 별반의 차이가 없다. 고려 정권이 선생에게 증직을 내리고 문묘에 봉헌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1552년 명종이 "선현 문창후는 우리 나라 道學淵源之祖宗이니 그 자손은 귀천이나 적서를 불문하고 비록 먼 지방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대대로 잡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傳敎한 이후 선조 인조 정조가 같은 뜻의 명을 내렸다. 특히 정조는 "이 명을 준행했느냐를 조사해서 안 따른 군수는 나타나는 대로 처벌하라"고 강조했다.
상층의 주류를 이룬 문인 선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선조 성종 때 문인 沈義라는 사람의 소설에 大觀齋夢遊錄이란 것이 있다. 그 내용에 文人王國이 그려져 있는데 그 왕국의 天子는 고운선생이고 首相은 을지문덕(고구려), 그밖에 左相 이규보(고려), 右相 이제현(고려), 각료 金克己(고려) 이인로(고려) 권근(조선) 정몽주(고려) 이숭인(고려) 柳方善(조선) 강희맹(조선) 김종직(조선), 대제학 이색(고려)으로 짜여져 있다. "삼국시대로부터 문인 선비가 대대로 끊이지 않았으나 오직 선생의 이름만이 옛날을 빛내고 후세를 무색케 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東史纂要)는 찬양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선생의 유적지를 들를 때는 예외 없이 선생을 기리는 시를 읊었다. 오죽하면 佛論(뒤에 설명)을 제기했던 이퇴계(1501-1570)도 노년에 경주 西岳精舍의 이름을 지으면서 이런 시를 썼다.
儒宮好闢仙山境 유학자로 신선의 경지 열기를 좋아했으니
老我增恩實 名 늙은 나, 실로 뒤따르고 싶은 마음 더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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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을 찬양한 문사들의 예문
* 정지상(? -1135) "문장으로 중국 땅을 진동시켰다."
* 이승휴(1224-1300) "문장으로 어느 누가 中華를 움직였나. 그가 처음으로 칭찬 받았다."
* 서거정(1420-1488) "우리 나라 시문집으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은 계원필경이 開山의 鼻祖이다. 東方藝苑의 근본이 된다."
* 성 현(1439-1594) "아국의 문장 始發"
* 주세붕(1495-1554) "문장이 神異하고 그 소견이나 행동이 참으로 백세의 스승."
* 연 담(1620-1799) "우리 나라 문장의 시조."
--이런 찬사는 현대 지식인의 경우에도 예외가 없다.
* "그의 得意-능숙한 騈儷體의 형식미와 對仗法의 妙가 한문에 조예가 있는 독자를 놀라게 한다. 이 나라 한문학사에 空前絶後한 巨文 大筆이요 뛰어난 문구들이 수두룩한 만큼 문학적으로 귀중한 작품들이다."(문학박사 양주동 '계원필경집 해제')
* "이 땅에 詩의 씨앗이 뿌려지고 꽃이 피기를 수천 년, 비로소 이 나라에 시인이란 이름의 눈부신 별이 솟아났으니 그가 곧 최치원이다. 이 나라를 시의 나라로 開國한 최치원. 생각해 보라. 이 땅에 아직 整齊된 시가 없던 시대에 그가 驅使한 저 天衣無縫의 名篇들을. 이것들을 그가 아니고 누가 해낼 수 있었겠는가를."(시인 이근배. 1990. 7. 15. 중앙일보)
* "천하의 대문장가 최치원의 글이 이 비문(지증대사비문)보다 더 잘 나타난 것이 없다. 글의 구성은 도도한 강물의 흐름처럼 막힘이 없고 이미지의 구사는 그 스케일이 클 뿐 아니라 비유와 비약이 능란하다. 그 흐름, 그 무게, 그 感性의 번뜩임이 나를 몇 번이고 놀라 자지러지게 한다."(교수 유흥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993. 창작과비평사. 1권241면)
------(四十) 문집------------------------------
선생의 문집으로 전해내려 오는 것은 선생 자신이 신라 헌강왕에게 올렸던 계원필경 밖에 없었다. 그때 계원필경과 함께 당나라 있을 때 지은 다른 글도 많이 바쳤으나(二十一항에서 설명) 하나도 전해오지 않는다. 귀국 후의 작품으로서 문집으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불교관계 글은 萬曆年間(1573-1619)에 鐵面老人(선조때 승려 海眼이라는 설이 있음.)이 선생의 비명 4개를 뽑아 이를 불교 學人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사산비명'이 생겨났다.
서유구(1764-1845) 같은 이는 "선생의 저작이 흩어져 전함이 없고 오직 절간이나 사당, 묘터의 숲을 헤치고 이끼를 긁으면 겨우 수십 편을 얻을 수 있을 뿐"이라고 탄식한 바 있다.
문집과 관련, 현대의 사학자 이기백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최문창후 전집' 해설)
"삼국사기에는 문집 30권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집이 언제 누구에 의해 편찬되었는지 모르나 언제인지 없어져 버리고 조선 세조 5년 1459년에 왕은 崔沆 등에게 명해서 12권의 문집을 편찬케 했었다. 그러나 이것마저 전해오지 못하고 현존하는 문집은 1926년 (이것은 重刊版임-편집자 주) 최국술 (곤술의 초명)이 편찬한 3편 2권으로 된 것이다."
현존 最古의 이 문집은 1925년에 初刊된 것이다 (이 책의 407면 편집서문에 <을축년 6월 10일>이라 명기되어 있음). 이 책은 '고운집 乾'과 '고운집 坤'의 두 권으로 되어 있으며 이미 문집 형태로 확실히 남아 있는 계원필경 외의 모든 작품을 수록했다. 사산비명도 여기 실려 있다. 새로 발견된 시 '姑蘇臺' '碧松亭'이 실려 있고 법장화상전도 일본 자료(大正新修대장경 史傳部 2)에서 뽑아 '賢首傳'이란 제목으로 실었다.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수집한 '고운선생 사적'과 문인들의 고운선생 仰慕詩文도 부록으로 실었다.
이 책은 1972년 '최문창후 전집'(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발행)에 複寫 轉載되었고 이어 1982년의 '국역 고운선생문집'(최준옥 편)에 이 책의 전문과 한글번역이 실리게 됨으로써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 국역문집 발간은 고운연구에 있어 실로 획기적인 이정표가 되었다. 종전의 고운 연구자들은 선생의 글이 난해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정확한 연구를 하는데 많은 애로를 느꼈고 그러다 보니 매우 불완전하고 불충실한 孤雲像을 그리는 등의 결과를 낳기도 했다. 다음에 나오는 論點 一, 二, 三과 같은 錯視현상도 그래서 빚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국역문집 발간을 계기로 선생과 관련한 출판물이 잇달아 나왔고 연구논문들도 이어져 이제는 그것들을 일일이 예거하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만한 역작은 최영성 교수의 문집주해 및 논문인데 그 주요한 내용은 본 기록 곳곳에 인용하였다.
문집 이외의 글로는 '經學隊仗'이 있다. 경학대장은 18세기 말엽에 선생의 후손 致德이 家傳의 낡은 상자에서 처음 발견하여 복사해 둔 것(민족문화대백과사전-오석원)이라 한다. 치덕 자신은 "다만 아쉬운 것은 군자들의 채택을 겪지 않은 것"이라면서 "후손의 고증을 기다린다."고 했다(최준옥 '사적고' 278면). 이에 관해서는 한말의 학자 노상직의 '동국씨족고'(1907)에서 고운의 작품에 이 책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전술한 1925년 최곤술 편 '고운집'에 그 책명이 수록되고 1927년 경주 서악서원에서 목판본으로 발간됐으며 1937년 '自喜翁선생문집'에도 실렸다. 학계 일부에서 이 책은 선생의 작품이 아니고 명나라 학자의 것(이성애. 국회도서관보 17권 3호, 최영성 '역주최치원전집' 2권 32면)이라고 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문체가 騈儷體인 데다가 명나라 학자가 썼다는 확실한 근거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김철희. 1975. '국역 경학대장 해제') 더 연구가 필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論點 一) 鷄林黃葉說----------------------------
삼국사기에 <왕건이 興起할 때 최치원은 비상한 인물이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글을 보내 문안했는데“계림은 누른 잎이고 송악은 푸른 소나무[鷄林黃葉 鵠嶺靑松]”란 구절이 있었다. 고려 顯宗 때 치원이 개국을 은밀히 도운 그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동왕 11년 內史令을 贈職하고 13년에는 文昌侯로 追封하였다.>고 쓰여 있다.
이야말로 고려 건국을 미화-합리화하기 위한 서술이다.(한석수 '최치원전승 연구' 계명문화사 1989. 26면) 이러한 서술은 뒷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낳게 한다. 즉, "계림황엽 곡령청송이란 구절 때문에 신라왕이 미워하므로 치원은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에 숨었다."(崔滋 '보한집', 安廓 '조선문학사 1922.)는 것이다.
왕건은 선생의 20년 연하인 877년생이다. 선생이 42세로 은둔할 때 그는 20대 초반으로 궁예휘하의 미미한 존재로서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최영성 앞책). 선생은 908년 52세 이후 어떤 글을 쓴 일도 없는데, 왕건이 궁예를 타도하고 고려의 왕이 된 것은 918년, 선생의 62세 때이고 곡령(송악산)이 있는 開城으로 천도한 것은 그 이듬해이다.
민중이 선생을 우러르는 것은 선생이 난세 중에서도 左顧右眄하지 않고, 은둔하면서까지 신라인으로 남았다는 이유에서다. 해인사에 은거할 때 친고려-친후백제 승려가 대립하는 데 실망을 느낀 그는 몇 년의 침묵을 깨고 908년 생애의 마지막 글을 쓰는데, 그것은 바로 '신라 수창군 護國城 八角燈樓記'였다. "나라의 경사를 기하겠다"는 그 취지(三十四항에 설명)와 '護國城'이란 그 이름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이것만 봐도 영원한 신라인이고자 했던 선생의 자세를 여실히 알 수 있다. 그야말로 <굶주리되 鵠嶺靑松은 먹지 않았던>(최곤술 1937. '가야산 학사당 이건상량문') 것이다.
고려 때 선생에게 증직이 내려진 것은 "그가 이 나라 학문의 최고봉이요 또 문학의 시조라 존경하여 한 것"이다 (시인 이은상, 1971.'해운대 고운선생동상 비문'). 이러한 당연한 이유 외에, 당시 왕인 8대 현종(재위기간 1009-1031)이 그때까지의 왕 중 유일하게 신라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이라는 점도 얼마간 작용했을 것이다. 즉 왕의 할머니는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4촌 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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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鷄林黃葉 鵠嶺靑松이란 분석 자체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앞을 내다보는 얼마의 안목만 있으면 그런 전망을 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또 선생이 신라조정에 올린 시무십여조에도 표현은 다를지언정 비슷한 분석을 한 구절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즉 국정의 잘못을 시정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롭고 새 나라가 등장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떻게 본다면 鷄林黃葉 鵠嶺靑松의 가능성을 충분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결코 고려에 기웃거리지 않았다는데서 고운선생의 孤高한 節義를 평가할 수 있을지 않을까 한다.
문제는 이런 표현을 담아서 왕건에게 문안의 글을 올렸다는 대목, 그리고 그 보답으로 증직을 받게 되었다는 대목이다. 김부식은 史家였기 때문에 당시 많은 史料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 자료가 약간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고려 왕씨 정권의 정통성 과시를 위해 주저 없이 그 자료를 삼국사기에 인용했을 것인데도, 아무 자료의 제시 없이 이 대목을 기록했다. 그것은 이 대목이 아무런 근거 없는 서술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사실 선생이 진실로 이와 같은 글을 고려측에 보냈다면, 당시 삼한의 인심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것이 후삼국 지도자들의 입장이었던 만큼,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을 뿐만 아니라 선생을 國師나 王師로 초빙하여 극진히 대우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흔적은 역사의 기록에서 寂寞하다. 선생 및 최언위와 함께 '신라 3崔'의 한 사람으로 불리우는 최승우가 견훤 진영에 초빙되어 최고위 간부로 활약하는 것이 당시 人材쟁탈전의 양상이었다. 그런데도 선생의 이름이 고려나 후백제 어느 쪽에서도 거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선생이 비록 신라의 귀족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반란군의 진영에 달려가는 그러한 인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 927년 왕건이 견훤에게 國書를 보냈는데 그 글을 선생이 썼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권2 '후백제견훤'조). 이 해는 선생이 71세 되는 해이다. 이 설은 학계의 그 누구도 진실로 인정하지 않는다. 사극(2001년 10월20일 '태조왕건')에도 이 장면이 나온다. 견훤이 이 글을 선생이 썼다는 말을 듣고 놀라자 최승우가 "고운은 지금 가야산 깊숙이 들어가 몸을 숨기며 살고 있다 들었사옵니다. 그리고 이 글은 잘 짓기는 하였사오나 고운의 글은 아니옵니다."고 설명했고, 그러자 견훤이 "그러면 그렇지. 고운이 고려에 가 있다면 이야말로 天下人心을 흔들 수 있는 이야기지."하며 안도하는 내용이다. 선생에 대한 국민적 신망, 그리고 고려-후백제 어느 편도 들지 않았던 선생의 新羅人像을 적절하게 상징해준 장면이었다.
* 삼국사기가 이런 서술을 한데는 김부식의 개인적인 사정도 작용했을지 모른다. 김부식은 신라가 망할 때 고려에 귀의해서 경주지방 州長에 임명된 魏英의 증손이다 (민족문화대백과서전-정구복). 고운선생도 결국 고려정권을 도왔다고 주장함으로써 자기 증조가 고운선생과 궤를 같이 한 행동을 했다고 합리화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학계의 의견도 거의 일치해서 삼국사기의 서술을 비판하고 있다. 우선 이병도 박사의 주장.
* "나는 일찍부터 이 내용을 의심하여 마지않았다. 신라의 국록을 받다가 난세를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조촐하게 여생을 보내고자 가야산에 들어간 그가 신라의 쇠망과 고려의 흥기를 예언하는 구절을 보냈다는 것은,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이는 혹시 최치원의 제자로서 고려에 벼슬하여 영달을 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를 조작하여 그같이 선전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1983. 삼국사기 역주). "그렇다면 경박한 그들이 스승을 追榮하기 위해 도리어 욕되게 한 것이다. 영혼이 계시다면 얼마나 그들을 책망할 것인가. 생각할수록 불쾌막심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1980. 경주 上書莊유허비명)
* "신라 말기 최치원과 같은 문인 식자층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새로 일어나는 후백제나 태봉-고려에 동조하거나, 아니면 가뭄에 연못물 마르듯 잦아들어가는 신라의 국운을 지켜보며 덧없는 세상을 한탄하고 은둔했다. 최치원은 끝내 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켰다."(안춘배 '역사의 얼굴')
* " 오히려 신라에 대한 충절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더 깊고 깊은 산으로 숨어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시인 이근배, 중앙일보 1990. 7. 15.)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歸附하니 왕건이 장녀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주었고 이에 경순왕은 답례로 백부 金億廉의 딸을 왕건의 아내로 주니 이가 신성왕태후이고 그 사이에 난 손자가 현종이다.
* 고려 8대왕 현종은 19세로 즉위했다. 7대 목종 때 그는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로부터 탄압을 받아 머리를 깎고 승려생활을 해야했다.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사통해 낳은 자기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의도를 드러내자 장군 康兆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과 천추태후 김치양을 몰아내고 현종을 임금으로 추대했다. 왕건은 전국 각지의 많은 호족들이 바치는 여인들을 다 받아들여 아내가 29명이나 되고 또 그 자손들도 많았다. 그러므로 현종이 왕권을 수호하고 유지하는 데는 확실한 지지세력이 필요했을 것인데, 신라출신세력은 그에게 안성맞춤의 울타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또 신라지방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고운선생을 떠받드는 것은 명분이나 실익 면에서 得意의 일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이 글귀를 왕건에게 상서한 곳이 바로 경주의 上書莊이란 주장(1876년 月城府尹李敦相의 '상서장碑文')이 있어 일부 국민들을 미혹시킨 바 있다. 심지어 관광 안내서에도 그런 표현이 있다.
-------(論點 二) 佛論----------------------------
선생은 불교와 관련해서 많은 글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전술한 '四山碑銘'과 법장화상전은 동양불교를 연구하는데 더없이 중요한 名著述로 칭송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조선조 유학자들은 "부처에 아첨[ 佛]했다"며 비판하고 있다. 退溪 李滉(1501-1570)과 星湖 李瀷(1681-1763)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기본적으로 고운선생은 유학자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종교에 대해 넓은 涉獵을 했고 그러한 나머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究極의 지향에 대해 理解를 가지게 됐다. 예컨대 선생이 쓴 鸞郞碑서문(삼국사기 신라진흥왕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이는 실로 3교(儒 佛 仙)를 포함한 것으로서, 뭇 생명들을 접촉하여 교화한다[接化群生].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집 바깥에서는 충성하는 것은 孔子의 가르침이요, 無爲의 일에 처하여 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老子의 취지요, 모든 악을 만들지 아니하고 모든 선을 봉행함은 釋迦의 교화이다."
선생은 이 글에서 풍류는 유, 불, 도 사상이 전개되기 이전에 이미 그 主旨들을 포함하고 있던 우리의 고유 사상이라고 설명했다. 곧 풍류에는 공자의 충효, 노자의 무위, 석가의 선행의 요소가 내재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풍류'가 명산대천을 찾아 시와 가무를 즐기는 놀이의 문화가 아니라 修養과 精進을 요하는 민족문화였음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유, 불, 도 이전에도 우리 나름의 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논리인데도 불구하고 조선조 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우선 李瀷의 주장은 "노자와 석가를 같은 수준으로 높임으로써 異端으로 유교를 해치는 선봉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단이란 말은 용어선택의 오류이다. 당시 신라사회는 불교사회였다. 그리고 고운 가문도 아버지가 대숭복사 건립에 기여하고 친형이 승려가 된 것으로 보아(앞에서 설명) 불교를 믿는 가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고운만이 당나라로 건너가 "오로지 유교를 따르겠다[但遵儒道]"(25세 때 쓴 '제2장계') 맹세하고 그에 정진했다. "먼 지방사람으로서 공자님의 생도라 일컬으니 영광이 바할데 없다[遠人稱尼父之生徒 光輝無比]"고도 했다(賀除吏部侍郞別紙). 그래서 주위로부터 "먼 이국에서 와서 유도에 이렇게 열심이다니[來自異鄕 勤於儒道]"(여객장서)라는 격려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신라의 불교사회- 불교가문이 그를 이단이라 비판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당시 황무지였던 유교가 어찌 그를 이단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유교에 대한 선생의 입장은 귀국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승려나 사찰의 비명 지은 것을 들어 조선조 유학자들은 비판하지만 (이퇴계 언행록 "부처에 아첨한 작품을 보매 매양 마음이 통분하다") 이는 비명의 제목만 보고 내용은 고려하지 않은 소치다. 비문 속에는 공자의 가르침이나 유교 經書의 내용이 곳곳에 소개되어 있어, 과연 이것이 승려 비명이 틀림없는가 의심이 갈 정도이다.
예컨대 '해인사 結界場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대저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齋라 하며 걱정거리를 미리 방지하는 것을 戒라 한다[洗心曰齋 防患曰戒 주역의 注에 나오는 말]. 유교에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거늘, 불교에서 어찌 가만히 있는단 말인가[儒猶若此 釋豈徒然]."
儒者의 입장에서 불교에 충고를 한 것이다.
당시는 출판문화도 대중매체도 없던 시대였다. 타종교의 비문에라도 유교의 가르침 한 구절이나마 전파하려 했던 선생의 고충과 용기가 여실히 드러난다.
오늘에 견주어 생각해보자. 불교방송 출연자가 공자의 가르침을 너무나 자주 소개한다는 일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또 易地思之해서 대유학자의 傳記에 석가의 가르침을 많이 소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이런 여러 가지 경우를 감안해볼 때 儒道唱導에 대한 선생의 집념과 의지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할 정도로 치열했던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선생이 "유교를 해치는 선봉이 되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선생이야말로 유교의 암흑기에 외로이 횃불은 든 <우리나라 道學淵源之祖>(1552. 조선조 명종임금 傳敎) <儒學의 初祖>(1887. 홍문관제학 이재완의 경남거창 手植松遺址비문) <儒宗>(1937. 최곤술. 가야산'학사당 이건상량문')이었다 할 것이다.
선생의 이런 선봉적인 노력이 서서히 결실을 보아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유교가 드디어 국교가 되었다. 그렇다면 조선조 학자들이 선생의 사적과 글을 좀더 치밀히 연구해서 유교창달에 끼친 공적과 은혜를 顯彰하는 것이 後人의 도리일텐데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조선조 정치정세를 회고해 볼 때 유학자들의 입장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당시는 經書의 一條一句를 놓고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고, 그것은 단순한 학술논쟁의 차원을 넘어 선비들의 벼슬과 목숨이 달린 문제로 비화되었다. 심지어는 유교의 禮記 중에서도 지극히 사소한 일부분인 喪服期間을 싸고 의견이 대립되어(현종 때 趙大妃의 복상문제 등) 이것이 정권의 교체, 선비들의 귀양이라는 최악의 사태까지 몰고 올 정도였다. 그러므로 유교 이외의 종교에 대해 약간의 이해라도 가진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고, 하물며 승려 비문을 짓는다는 것은 더더구나 어려운 일이었다. 같은 유학자면서도 약간의 이론차가 있으면 서로 상대를 이단, 즉 斯文亂賊으로 규정하여 치열한 爭論을 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운선생에 대해 的實한 평가가 나올 수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고운선생의 유도창달 노력은 한층 더 돋보인다. 선생은 生殘을 위해, 그리고 나아가 직위를 지키고 상승시키기 위해 유도를 부르짖은 것이 아니다. 유도를 唱導하는 언동은 당시 신라의 불교사회에 대한 일종의 도전으로서, 일신의 安寧이라는 측면에서는 도움이 안 되는 일일 수 있었다. 시무십여조에서 선생이 儒道政治를 건의한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인데(二十六항 참조) 이것이 선생으로 하여금 猜忌와 의심을 더 받게 하고 결국 그의 정계은퇴를 재촉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가능하다.
한마디로 신라 때는 유도를 주장할수록 핍박을 더 받았고, 조선조에서는 유도를 주장할수록 더 명예로울 수 있었다. 그러니 어느 쪽이 더 유도창달에 勞苦가 많았는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지금 일신의 편안함 속에서 反日을 주장하면서, 일정 때의 광복군이 왜 좀더 열심히 싸워서 일본을 쳐부수지 않았느냐고 비판한다면, 그것이 事勢에 맞는 경우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산비명은 경주시 외동면 初月山의 대숭복사 비명, 하동 화개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 비명, 보령 崇嚴山 성주사의 낭혜화상 비명, 문경 가은 원북리 曦陽山 봉암사(일명 양산사)의 지증대사 비명을 말한다. 4개의 산에 있기 때문에 '四山'이라 한 것이다.
* 사산비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찬사가 있다.
"이 비명 속에 神出鬼沒하는 형상과 龍吟虎伏하는 기세를 감추고 있음을 기뻐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이 놀라고 혼이 밝게 하며, 이목을 놀라게 하고 心脾를 씻게 한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 '고운선생문집逸稿' 사산비명跋)
* "그 명문들은 그의 학문이 과연 얼마나 깊었던가를 증거해 보이고도 남음이 있다." (이은상 해운대 고운선생동상비문)
--불교관계 글을 많이 쓴데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신라 말기에는 만나고 대화하는 사람들이 모두 불교를 믿는 인사들인데다가, (1) 임금의 엄중한 명령이 있었다. 선생은 (2)힘써 사양했지만 그것이 용납될 리 없었다. 그리고 그 문장에서 (3) 자신이 유교의 선비임을 솔직하게 밝히면서 두렵고 송구스럽다는 마음을 나타냈고, 아울러 내용상으로도 (4) 불교에 대해 諷諫하는 말을 했다."(최곤술 '고운집' 편집서문)
(1) 사산비명을 보면 전부 奉敎撰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그리고 내용에도 왕명을 받은 경위와 임금의 말이 쓰여 있다.
(2) 글 짓는 걸 사양한 경위는 '낭혜화상비명'에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다.
<임금(진성여왕)이 나를 불렀다. 珠簾(여왕이므로 주렴을 드리웠다.) 밖에 내가 꿇어앉아 명령을 기다리자 임금이 말했다.
"그대는 국사의 비명을 지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라."
내가 사양하며 말했다.
"약한 수레에다 무거운 짐을 싣고 짧은 줄의 두레박으로 깊은 우물의 물을 퍼내려는 것과 같아 글 짓는 것을 피하고자 합니다."
"사양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風度라서 좋은 것이긴 하나, 진실로 비문 짓는 일을 해낼 수 없다면 과거급제한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대는 힘쓸지어다."
그러면서 임금이 갑자기 방망이 만한 두루마리를 내어주시니, 그것은 대사의 行狀이었다.>
(3) '불국사 阿彌陀佛像讚序'에서 "이 못난 유학도[腐儒]..."라 했고 '지증대사 비명'에선 "유교를 매개로 하여[媒儒道] 중국에 갔다온 최치원..."이라 했다.
(4) 諷諫하는 말로는 '지증대사 비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라에서는 불교서적을 중히 여기고 집에서는 승려전기를 간직하여 불교에 관한 碑銘이 여기저기 즐비하다. 그래서 절묘한 글들을 두루두루 찾아보았는데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無去無來]'란 말이 한없이 많고,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不生不滅]'는 말도 수레에 실을 만큼 많았다. 그러나 그 말들엔 春秋에서와 같은 新義가 없었고 간혹 周公의 舊章을 인용했을 뿐이었다."
* 공자가 노나라의 역사에 筆削을 가하여 이룩한 춘추는 '微言大義'를 基底로 삼는데 불교서적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고, 또 춘추에서는 주공의 옛 법도와 같은 과거의 전통을 계승하고 이와 함께 장래의 법을 밝히는 노력을 병행했는데, 불교서적은 과거의 전통만 말하고 장래의 법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참으로 대담한 불교비판이다. 그것도 일반 논저로 한 것이 아니라 스님 비명에다 공개적으로 삽입하다니, 그 용기의 대단함에 입을 다물지 못할 형편이다. 이래도 佛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선생의 불교 관련 글은 '많이 썼다'기 보다는 '많이 남겼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선생은 당나라 때에도 수 만 수의 글을 썼기 때문에 전 생애에 걸쳐 매우 많은 글을 찬술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귀국해서도 수 만 수의 글을 썼을 것이다. 당나라 때 글은 그래도 본인이 챙겨서 신라왕에게 올림으로써 오늘날 세상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귀국 후에 쓴 글은 나중에 선생이 은둔하게 됨에 따라 아무 데도 봉헌할 데가 없었다. 일반 민간에 써 준 글도 물론 있었겠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천년 동안 그것이 민가에 보관되어 전승될 수는 없는 일이다. 국호가 바뀌니 滿月臺도 秋草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니 과거의 그 어떤 高臺廣室도 서책보존을 천년간 한다는 일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예외가 있어 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비석과 사찰이다. 선생이 불교관계 이외에도 많은 글을 썼지만 다른 것은 거의 전하지 않고 불교관계 글만 많이 전해지게 된 것은 그것이 비석에 새겼거나 사찰에 보관되어진 것(승려전기 등)이었기 때문이다.
--함양 上林의 樹林 전설처럼 선생이 健在해 있다면 이 佛論에 대해서 어떤 심정일까. 아마 선생은 빙그레 미소할 것이다. 자신을 비판한 몇몇 후인들의 유교에 대한 애정과 집념이 어쩌면 활동기 때의 자신과 그렇게도 비슷할까 여기면서 흐뭇해할 것으로 생각한다.(1999. 동화출판사 '망국의 한' 410면)
--이 논쟁에 있어서는 다음 글이 결론으로서 참고가 될 것 같다.
"그는 儒者로 자처하면서도 마음은 끝내 불교와 도가사상의 언저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불교와 도가사상에 심취했으면서도 유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송항룡 '최치원사상연구' 333-337면)
* 물론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조동일 교수는 "그는 어정쩡한 儒彿兩役論 같은 것을 전개하면서 자기의 한계를 스스로 노출시켰다"(1995. '한국문학사상사시론' 지식산업사 52-53면)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 든 이른바 兩役論이 진감선사 비명의 "드디어 감히 兩役(두가지 일)을 맡기로 했다[遂敢身從兩役]"는 구절을 두고 한 말이라면 사정이 곤란해진다. 선생이 말한 그 "兩役(두가지 일)"은 유교와 불교가 아니라, 비문도 짓고 글씨도 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산비명 중 이 진감선사 비명과 대숭복사 비명만은 선생이 직접 글씨까지 썼던 것이다. 오역의 문제점을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爭의 논리가 아닌 和에 기반을 둔 선생의 상호일체적이고 보완적인 三敎觀은 多文化-이질화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각 종교간 민족간의 대화를 통한 교섭과 융합, 그리고 공동체의식의 고취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전세계적으로도 민족-종교-문화-체제 등의 차이로 인한 모든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당위성에 대해 큰 示唆를 던지고 있다. 그래서 고운선생은 過去完了型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 그리고 세계인의 곁에서 같이 시대를 고민하는 지성인으로 살아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최영성 앞책 546면)
----------(論點 三) 事大慕華說----------------------
근대 사학자 신채호(1880-1936)가 선생과 김춘추 김부식 등을 사대적이고 중국을 사모한 사람이라고 거론('조선상고사' 삼성문화문고 1980. 73면)한 이후 일부 논자들이 동조하는 추세가 한때 있었다. 사실 이런 주장은 하등 반박할 가치가 없는 것이어서 여기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했으나, 만에 일이라도 이에 迷惑되는 사람이 뒷날 나올지 모르기에 약간의 자료를 들어 논의하고자 한다.
선생을 사대모화로 규정하는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고운 생애의 시간적 단계로 봐서 첫째 당나라 유학부터 생각해 보자. 당시 한민족의 입장에서는 당나라는 단순한 대국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였다. 넓은 세계에 나가 학문과 문물을 배우는 것은 개인적인 소득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민족의 이익과 문화발전에 기여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오늘에 견주어 보아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미국 유학을 事大'慕美'主義者로 볼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둘째 중국의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중국의 벼슬을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당시의 모든 국민들에게 그러했고, 그리고 그 이후 천년을 내려오면서도 선생의 이러한 발자취는 민족의 자긍심을 높인 쾌거로 평가되고 있다. 외국에서 벼슬이든 사업이든 연예체육활동이든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성공을 한다는 것은 事大가 아니라 오히려 겨레를 빛내주는 일이다. 김창준, 박찬호, 박세리, 정경화, 조치훈, 또 최근의 韓流 스타들은 결코 사대주의자가 아니다.
셋째, 선생이 구사한 문장을 얘기해 보자. 논자는 선생이 쓴 글들을 보고 그런 규정을 했을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사대모화 지목을 들을 수 있는 글들은 대부분 代撰한 외교문서들일 뿐 그 밖의 특별한 사례는 없다. 그것은 당시의 외교적인 여건과 환경이 그랬었기 때문이고 또 대부분의 외교문서에서 볼 수 있는 상투적이고 外飾的인 修辭들이었을 따름이다(최영성 앞책 22면).
사대모화설을 제기한 신채호의 충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는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한말의 지배층들이 친일-친청-친로파로 갈려 상쟁하다가 결국 나라를 잃게 하고만 데 대한 통분의 심정이 그러한 표현을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운선생을 그러한 표적 속에 포함시킨 것은 부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선생의 시문을 숙독하면 이 점은 좀더 명료해진다. 계원필경의 시 한 구절을 읽어보자.
年年荊棘侵儒苑 해마다 유교엔 가시덤불만 쌓이고
........
亂時無事不悲傷 난시라 모든 일이 슬프고 상심돼
鸞鳳驚飛出帝鄕 외국 젊은이들이 놀라 제국을 떠난다.(봉화좌주...절구)
선생이 중국에 간 것은 우리 나라보다 발전된 문물을 접하기 위해서인데 지나고 보니 실망투성이었다. 그래서 그도 끝내 중국을 떠난다. 이것을 과연 사대라고 보아야 할 것인지 의아스럽다.
글과 관련해서 또 하나 거론되는 것은 제왕연대력이다. 이 책은 전해오지 않아 그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최치원은 제왕연대력을 지으면서 모두 00王이라고만 일컫고 居西干 등으로 말하지 않았다. 혹시 말이 鄙野해서 족히 부를 것이 못된다는 까닭에서일까. 중국 史書는 匈奴語인 撑 孤塗(황제라는 뜻) 등의 말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이제 신라의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 方言을 그대로 남겨두는 것도 좋은 것이다."(신라본기 지증마립간조)
이 기록을 들어 선생을 사대모화주의자로 규정한다면 이야말로 완전한 逆理다. 당시 중국인들은 외국의 황제를 결코 황제라 부르지 않았다. 흉노에 관해서도 이 기록에서처럼 '탱리고도'라거나 또는 '單于'(발음은 선우)라고만 불렀다(예: 한서 소무전). 주변 민족을 야만으로 보고 그들의 지도자는 酋長 정도로 본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중국 사서의 이 같은 自己傲慢의 典範을 따르지 않았다고 선생을 비판한다.
선생이 박혁거세를 赫居世 居西干이라 부르지 않고 赫居世王이라 부른 것은 의도가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 신라의 임금이 야만족의 추장이 아니라 당당한 한 문명국(선생은 우리 나라를 '군자의 나라'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이다.-예. 제참산신문)의 임금이란 것을 내외에 분명히 하고자 그런 기록을 한 것이다. 특히 주변국을 낮추어 보는 중국인들에게는 더더구나 더 깨우쳐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대가 아니라 오히려 민족자존심의 발로라고 칭송해야 마땅할 일이다.
고운이 민족자존심을 위해 勞心焦思했다는 결정적인 사실로 이제 접근할 때가 되었다. 다음 '西國표기와 東人意識'항에 설명한다.
--신채호의 역사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비판이 있다.
"排他自尊의 선입견에 눌려 그의 저작도 진정한 한국사와는 거리가 있게 되었다. 그는 다분히 감정에 달리는 문장의 소유자이다. 함부로 아무 영역에나 闖入하여 임의의 독단을 내려서는 곤란한 일이다.(정해렴 편역 '홍기문 조선문화론 선집' 1997. 178면)
--신라 왕호 문제와 관련, 문제되는 것은 우리 사학계의 동향이다. 우리 사학계의 일부는 居西干 次次雄 尼師今을 부족국가 시대의 장으로 보고 이 기간을 정식 국가성립이 안된 때로 보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이런 현상이 있을 것을 천년 전 선생은 미리 알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왕' 칭호를 미리 써 둔 것일까.
---------(論點 四) 孤雲硏究의 새 地平 '東人意識'
우리나라는 東國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또는 海東 大東이라고도 했다. 이 용어는 오래 동안 아무런 거부감 없이,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운 정서를 가지고 사용돼 왔다. '東國李相國集' '東國通鑑' '東國與地勝覽' '東國史略' '東國通寶' '海東通寶' '海東孔子(최충을 말함)' '海東高僧傳' '東文選' '東史綱目' '東史簒要' '大東野乘' '大東輿地圖' 등등의 그 많은 이름들은 다 우리들이 즐겨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을 기준으로 해서 그 동쪽에 우리 나라가 위치한다는 것 때문에 이 용어가 쓰인 내력을 생각하면, 주체성의 면에서는 문제가 없지도 않은 표현이다.
그런데 선생은 '사산비명'에서 당나라를 여러 차례 '西國'이라 불렀다. 선생 이전에도 이런 지칭은 없었고 그 이후 천백년이 지난 오늘까지 중국을 이렇게 부른 이는 없다. 선생의 사대모화설을 제기했던 신채호도 포함해서다. 물론 중국인 자신들이 자기 나라를 이렇게 부른 일은 역사상에 단 한 번도 없다. 우리는 고작해서 바다를 가리켜 겨우 西海라고 불렀을 뿐, 선생의 선구적인 西國표기마저 계승 못하는 小心한 後人으로 남고 말았다. 이런 우리 중의 누가 선생을 가리켜 사대라 할 수 있겠는가.
선생을 알려면 선생의 저작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중국은 서국이고 우리는 동국이라는 당당한 對比意識의 表現은 단편적인 1-2回性으로 그치지 않았다. 선생의 많은 글에서는 '동쪽'이 갖는 가치와 철학과 자부심을 매우 진지한 자세로 추구하는 집념이 보인다. 몇 구절을 인용한다.
"빛이 왕성하고 충실하여 온 누리를 비칠 바탕이 있는 것으로는 새벽해보다 고른 것이 없고 氣가 온화하고 무르녹아 만물을 기르는 데 功效가 있기로는 봄바람보다 넓은 것이 없다. 큰바람과 아침해는 모두 동방으로부터 나온 것이다."(낭혜화상비문)
"우리 大王의 나라는 일취월장하며 물은 순조롭고 바람은 온화하니, 어찌 다만 깊숙이 겨울잠을 자던 것이 다시 떨치고 소생하는 것뿐이겠는가. 아마도 싹을 잡아당겨 무성히 자라도록 하니, 생기고 변화하며 생기고 변화하는 것[生化生化]이 동방[震]을 터전으로 하는 것이다."(해인사 선안주원벽기)
"東俗은 비록 칼 차는 것을 숭상하나 <武>는 진실로 <戈의 止>(전쟁의 종식)를 귀히 여긴다."(양위표)
"서쪽은 동쪽으로부터 밝아진다.[西自東明]"(원측화상휘일문)
선생의 이러한 동방예찬에 대해 최근에야 학계에서는 이를 '東人意識'의 개척이라 하여 큰 주목을 하면서 활발한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다. 최영성 교수는 "후삼국 당시의 지식층에서는 사대모화적 성향이 거의 일반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문화민족이고 나아가 세계문화의 밑바탕이 된다고 외쳤던 것은, 후일 고려-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민족주체의식의 한 원동력이 되었으며 사대모화의식이 하나의 시대사조로 굳어져 自卑의 경향이 심각했을 때에도 민족의 자존심과 우월감을 드러내는 데 밑바탕이 되어 연면히 이어지게 되었다."('최치원의 철학사상' 2001. 아세아문화사 427면)고 주장한다. 고운 연구에 있어서 실로 기다리고 기다렸던 새로운 地平이 열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東人의식에 대한 연구가 왜 이렇게 늦게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이래 고운선생을 다룬 책들이 거의 조선조 학자들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조선조 학자들은 선생에 관한 글을 쓰면서 불교관계 글들은 모두 배척했다. 삼국사기나 계원필경을 위주로 글들을 썼는데 그 책들은 동인의식과 관련되는 글들이 등장할 場所가 아니다. 동인의식에 관한 글들은 선생이 귀국 후에 찬술한 글, 특히 불교관계 글에서 주로 나온다. 특히 선생의 불교관계 글은 난해해서 이제서야 제대로 된 번역이 겨우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선생의 동인의식에 관한 학계의 開眼도 뒤늦게 이루어진 것이다. 晩時之歎의 감은 있지만 그래도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다행함이 있다.
--동인의식 연구는 1981년 유승국 교수가 '최치원의 동인의식에 관한 연구'가 발표됨으로써 물꼬를 텄다. 이후 연구들의 몇 예.
* "東土에 대한 애정적 감정의 표출을 심화시킨 흔적은 여러 내용 속에 나와 있다. 이것은 곧 그의 조국에 대한 호칭에서 증명되는데 그는 동방을 가리켜 仁鄕(양위표) 혹은 君子之鄕(지증대사비문) 君子之國(제참산신문)이라 했다. 자긍심에 찬 그의 東土觀은 곧 이상적 정치관과 연결된다. 그는 東人으로서 동인에 대한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다."(유성태 '고운의 정치사회관' 1989. 민음사 '고운최치원' 254-261면)
* "그는 東으로 함축되고 상징되는 것을 가장 먼저 의식하고 인식하고 표출하여 東의 의식과 문화와 인간론을 전개한 초유의 인물이다."(김용구 '동과 서의 사유세계' 1991. 김지견화갑기념사우록)
---------(論點 五) 雙女墳의 說話--------------------
선생이 水縣尉 시절 이 현과 이웃 高淳縣의 경계에 있는 공무 숙소에 들렀다가 무덤에서 나온 두 자매(八娘과 九娘-장사꾼에 시집가라는 아버지의 定婚에 불응하고 죽어 나란히 묻혔다 함)와 시를 주고받으며 정회를 나누었다는 이야기. 이 설화는 우리 나라의 '태평통재'(성임(1421-1484)의 저작. 권60)에 실려 있고 중국의 '六朝事蹟'(張敦 저)에도 올라 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시와 '쌍녀분 記'는 선생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그 동안의 정설이었다. 따라서 현존 最古의 선생 문집인 '고운집'(1925년 간행-前述)과 이후의 문집(대동문화연구소 간행, 최영성 주해서 등)에서 수록을 배제하고 있으며, 고운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를 연구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다만 1982년 刊 '국역 고운선생문집'(최준옥 편)만이 "선생의 저술이 아니라는 설도 있기에 별도로 수록, 후인의 참고에 제공코자 한다"(하권 461면)라는 단서를 붙여 관련 시문을 <雜錄>이란 난에 따로 실었다.
그러나 중국 측에서는 최근 와서 이 설화에 대한 관심이 열기를 띠고 있다. 두 자매의 무덤이라는 쌍녀분이 있는 중국 고순현 당국은 1997년 7월 이 무덤 앞에 '쌍녀분 簡介(소개)'라는 비석을 세운데 이어 1998년에는 중국 측 각종사서와 논문, 무덤 사진 등을 묶어 '쌍녀분과 최치원'이란 책을 간행했다. 그리고 2001년에는 이를 오페라로 극화한 비디오 CD까지 나왔다(江蘇東視TV문화전파공사 제작). 제작사에서는 한글 자막까지 넣은 이 CD를 訪中 한국인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열의도 보였다. 또 高在心이란 화가는 쌍녀분 시와 쌍녀분 記를 새긴 손바닥 크기의 石製기념물을 만들어 방문객들에게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중국 측의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이 무덤을 찾는 한국인들도 최근 늘고 있다고 한다.
경주최씨 족보들은 대부분 이 부분을 기록에서 제외시켜 왔다. 그러나 중국 쪽에서 고운선생 홍보를 이처럼 적극적으로 하고 있음에 따라 宗人들의 중국 유적지 방문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이 쌍녀분에 관해서는 진실 여부를 떠나 그러한 설화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둘 필요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이 난에 저간의 경위를 소개한 것이다.
--2001년 10월 우리 宗人들이 고순현 현지의 비석을 둘러보았다. 陳后翔이란 사람이 쓴 비문에 "이곳의 나무와 돌을 범하는 사람은 반드시 화를 입는다"는 구절이 있었다.
--고순현이 낸 책자에는 송나라 원종 때의 '健康志', 송나라 때의 '육조사적', 원나라 순제 때의 '金陵新志', 청나라 강희제 때의 '高淳縣志'가 복사로 등재돼 있는데 내용은 전부 비슷하다.
--이 설화에는 두 여인과 선생이 주고받았다는 20수 가량의 시가 나오는데 선생이 지었다고 되어 있는 시 한 구절을 보면 설화의 서두를 알 수 있다.
自恨雄才爲遠吏 한스럽다. 웅비의 꿈 지닌 젊은이가 먼 타국의 관리되어
偶來孤館尋幽邃 쓸쓸한 여관에서 유령을 찾다니.
戱將詞句向門題 장난 삼아 시 한 구절 썼는데
感得仙姿侵夜至 선녀가 감동해 깊은 밤에 찾아 오누나.
-----------(結語) 神秘의 靑山----------------------
선생은 스스로의 생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선생의 생애를 되돌아보는 마지막 계제에서 이런 상념이 떠오른다. 그러나 後人의 筆舌로는 아무런 규정도 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 기록을 정리한 입장에서 토로하는 솔직한 고백이다. 그래서 결국 지금까지 이 기록이 취했던 자세대로 또 한번 선생의 親撰을 빌릴 수밖에 없다. 교과서에 실려 젊은 세대들도 잘 아는 絶唱 '秋夜雨中'이다.
秋風惟苦吟 가을바람 맞아 그렇게 괴로이 읊었건만
世路少知音 내 뜻 알아주는 사람, 이 세상에 적구나.
窓外三更雨 창밖에 비 흩뿌리는 이 한밤중
燈前萬里心 등불을 앞에 두고 마음은 만리 저쪽.
이 시를 쓴 시기에 대해서는 귀국 전(許筠 惺 詩話, naramal.com)과 귀국 후(이숙희 ‘한시 바로보기 거꾸로보기’1998..이회, 최영성 '고운문집' 56면)로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나 이 차이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苦吟해도 知音이 드물어 마음이 천리만리 저 먼데로 떠나는" 선생의 처지와 心懷는 당나라에서나 신라에서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선생의 생애와 관련한 기록을 신규 정리하는 것은 선생에 관해 기본적으로 잘못 전해진 것을 시정하자는 것이 당초의 취지였다. 선생의 親撰시문과 중국 현지답사를 기초로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의문과 혼선은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무엇 때문에 선생이 많은 사람의 가슴에 때로는 莊重한 모습으로, 때로는 鬱鬱한 모습으로 이렇게 긴 세월을 자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天衣無縫의 문장 때문인가. 앞 항에서 東史纂要의 기록을 인용한 바 있지만, 5백년 전의 나무꾼과 시골 아녀자가 어려운 선생의 글을 어떻게 해독하여 선생을 기린다는 말인가. 지금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만으로 국민이 선생을 기리는 것은 아님이 명백하다.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不遇했다는 것 때문인가. 불우라면 마의태자도 있고 정몽주도 있다. 功績 때문인가. 그 때문이라면 세종대왕, 충무공이 있다. 山川巡禮 때문인가. 그것이라면 김삿갓과 大東輿地圖의 김정호가 있다. 隱遁 때문인가. 은둔이라면 杜門洞 충신들과 士禍때의 많은 선비들도 있다. 또 節槪라면 사육신과 삼학사가 있고 剛直이라면 성충과 조광조가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을 합친 事蹟보다도 더 많은 고운선생 사적을 백성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줄기차게 가슴에 담아 내려왔다.
참으로 풀리지 않는 의문이고 찾아도 찾기지 않는 해답이다.
선생의 생애와 관련한 의문과 迷路를 찾아 그 해답을 구해보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오늘의 이 기록도 그러나 지엽적이고 표면에 드러난 몇 가지 사실만 더듬었을 뿐, 더 깊은 곳은 알아내지 못한 매우 未盡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참으로 怪異하다.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 조금도 슬프지 가 않다.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는 인물, 그가 바로 고운선생이라는 사실이 도리어 가슴을 설레게 하고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그 어떤 역사상의 우뚝한 인물도 史家의 追跡과 穿鑿에 그 실체를 捕捉당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런데 선생은 수십 수백의 연구자가 천년의 공을 들여 탐색했음에도 결코 그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未知의 존재로 남아 있다.
선생은 천년전의 옛사람으로는 보기 드물게 많은 글과 자취를 남겼다. 그런데도 후인들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글이 없는가, 더 많은 자료가 없는가 하며 목말라 한다. 고려의 대문인 李穡(1328-1396)은 이렇게 읊었다.(동국여지승람)
請君細訪孤雲 그대, 고운의 자취를 자세히 찾아 돌아오거든
歸來洗我塵胸臆 나의 가슴속 티끌을 시원하게 씻어주오.(權史官을 전송하는 시)
그렇다. 선생은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알고싶어지는 분이다. 선생은 알면 알수록 더 알 수 없어지는 분이다. 알고는 싶은데 알 수 없는 것이 신선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선생은 신선이다. 가야산이나 지리산의 신선이 아니라, 수많은 史家와 敬慕者들이 울창한 숲 속을 이리저리 찾아 헤매어도 옷소매를 잡을 수 없는, 가야산이나 지리산보다 더 깊고 험준한 <神秘>라는 靑山의 神仙이다. 그리고 그 청산에서 "한번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三十一항 입산시)고 했던 다짐을 천년이 넘도록 墨守하고 있다.
이러한 선생의 지극한 뜻을 구태여 왜 깨랴. 그래서 많은 未知를 남겨둔 이 기록을 아무 失望이나 遺憾도 느끼지 않은 채 주저 없이 여러분께 바친다.
* 위 내용을 다음 페이지에 年表로 정리했음.
孤雲先生 관련 千年 年表
서기 857년/ 신라 헌안왕 元年/唐宣宗大中11년/丁丑
선생께서 탄생하시다.
ㅇ 12세까지 精敏 好學하시다.
868/ 경문왕 8년/ 懿宗咸通 9년/戊子/12세
당나라에 유학하시다.
ㅇ "네가 10년 공부하여 진사에 급제 못하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말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 하지 않겠다."라는 아버지의 훈계를 명심, <다른 사람이 백의 노력을 할 때 천의 노력을 하여[人百之己千之]> 공부에 정진하시다.
874/ 同 14年/ 僖宗乾符 元年/甲午/18세
進士 科擧에 급제하시다. (아버지가 정해준 시한을 4년 앞당겨 첫 번 응시에 합격하는 壯擧를 이루심)
ㅇ 이 때까지 지은 글이 상자에 가득했으나 모두 버리시다.
875/ 憲康王 元年/ 同 2年/乙未/19세
東都 洛陽에서 문필생활하시다. ㅇ 이 때 저술한 글 賦 5수, 시 百수, 잡시부 30수를 모아 뒷날 3편의 책을 만드시다. (지금은 전하지 않음).
ㅇ 이 때 黃巢의 난이 일어남.
876/同 2年/ 同 3年/丙申/20세
지방 司正기관 책임자인 水縣尉(宣州관내)에 임명되시다. (외국인으로 약관에 이런 관직에 취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
ㅇ 공무 여가에 지은 글이 모두 5권으로 이것이 中山覆 集임. (지금은 전하지 않음).
ㅇ 쌍녀분의 전설은 이 때 일인데 眞僞는 不明임.
877/同 3年/ 同4年/丁酉/21세
겨울에 학문 정진코자 현위를 사임하고 入山修學하시다.
ㅇ 이해 왕건이 출생하다.
879/ 同 5年/同 6年/己亥/22세
6월 12일 황소가 宣州를 함락시키다. ㅇ 戰火를 맞은 선생은 설상가상으로 양식까지 떨어져 공부를 계속하지 못할 苦境에 드시다.
ㅇ 황소 토벌 위해 10월 鎭海節度使 高騈이 선생이 거처하던 淮南지방의 節度使로 부임해오다. ㅇ 12월 高騈이 東面 諸道行營兵馬都統(동부지구 군 총사령관)을 겸하다. ㅇ 高騈의 기용으로 館驛巡官이 되시다.
880/同 6年/僖宗廣明元年/庚子/23세
여름 총사령부 막료로 발탁되어 高騈의 서기 일을 도맡다. 모든 글이 선생의 손으로 이루어지다.
881/同 7年/僖宗中和元年/辛丑/24세
檄黃巢書를 지어 천하에 文名을 떨치시고 超高速 昇進을 하시다. (都統巡官 承武郞 殿中侍御史 內供奉으로 승진하고 緋魚袋를 하사 받으심)
ㅇ 이후 귀국 때까지 公私로 쓴 글이 만 여수가 됨(귀국 후 이를 추려 20권으로 편찬, 임금에게 올린 것이 계원필경임)
884/同 10年/同 4年/ 甲辰/28세
황소가 토벌되어 '賀殺黃巢表'를 쓰신 후 귀국을 결심하시다. ㅇ 황제가 사신의 자격을 주어 귀국하게 하다. ㅇ 8월 회남을 출발, 10월 배를 띄었으나 풍랑이 심해 바닷가에서 겨울을 보내시다.
885/同 11년/同 光啓元年/乙巳/29세
3월 신라에 도착하시다. ㅇ 헌강왕이 侍讀겸 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의 벼슬을 제수하다.
886/定康王元年/同 2年/丙午/30세
1월 헌강왕에 계원필경 등을 바치시다. 그러나 그 반년 뒤 헌강왕이 돌아가고 정강왕이 즉위하다. ㅇ 선생을 좋아했던 헌강왕이 돌아가자 당시 요직을 독점하고 있던 眞骨세력이 기득권을 지키고자 선생을 견제하기 시작하다.
887/眞聖女王元年/同 3年/丁未/31세
정강왕마저 1년만에 돌아가고 여동생 진성이 즉위하다. ㅇ 진성여왕은 美少年을 대궐로 불러들여 그들에게 권력을 주는 등 亂政을 하다.
ㅇ 이 해 당나라 정세도 혼미해져 高騈이 피살당하는 변이 생기다.
ㅇ 선생은 진골의 핍박으로 太山(전북 태인), 天嶺(경남 함양), 富城(충남 서산)태수 등 지방직을 전전하시다. 함양 上林 조성 등 곳곳서 善政을 펼치시다. (함양 재임시 防虜大監 겸 阿 으로 승진하심)
888/同 2年/昭宗文德元年/戊申/32세
여왕의 난정을 비난하는 대자보가 관가 大路에 나붙는 등 심상치 않은 사태가 발생하다.
889/同 3年/同 龍紀元年/己酉/33세
지방에서 조세를 안 바치고 元宗-哀奴가 상주에서 봉기하는 등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나다.
891/同 5년/同 大順2年/辛亥/35세
梁吉의 부하 弓裔가 溟州를 점령하다.
892/同 6年/景福元年/壬子/36세
甄萱이 후백제를 세우는 등 나라가 더욱 위난에 빠지다.
893/同 7년/ 同 2年/ 癸丑/37세
부성태수 재직중인 이때 당나라에 賀正使로 가게 되었으나 도적이 많아 중지했다가 그후 다녀오시다.
894/ 同 8年/同 乾寧元年/甲寅/38세
나라의 천년 사직이 위태로워지자 救國의 直言을 담은 時務十餘條를 여왕에게 올리시다. ㅇ 여기에는 人材의 공정등용 등 획기적인 국정개혁안이 제시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진골세력의 훼방과 음해로 하나도 실시되지 못하다. (따라서 여왕이 嘉納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無實한 것임)
895/同 9년/ 同 2年/乙卯/39세
해인사 묘길상탑기 지으시다. 이 글에서 선생은 "최악의 상태가 벌어지지 않은 곳이 없으니 굶어 죽거나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즐비하게 널려 있다"고 탄식하시다.
ㅇ 왕건이 19세의 나이로 궁예휘하에 들어가다.
897/孝恭王元年/同 4年/ 丁巳/41세
난국이 수습되지 않자 진성여왕이 인책 사임하고 효공왕 즉위하다. ㅇ 선생은 두 왕의 '讓位表'와 '謝嗣位表'를 代撰해주면서 그 글에서 "어진 나라가 병든 나라로 되다니"라고 통탄하시다. 이 글에서 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하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하는 것은 곧 군자의 마음 씀이요, 滅私奉公은 실로 옛사람들이 힘쓴 바인데, 이를 입으로 자랑하는 이는 많아도 몸소 실행하는 이는 드물다."면서 지도층의 無爲無能을 비판하시다. (이 비판으로 진골세력은 선생의 제거에 본격적으로 나섰음.)
898/同 2年/同 光化元年/戊午/42세
간신들의 공세와 방해가 거세지자 아찬 등 모든 공직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은거하시다. ㅇ 해인사 結界場記 지으시다.
ㅇ 이후 해인사를 주 거주지로 하고 틈나는 대로 전국을 순례하며 후학교육과 국토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시다. (紀行年期가 史書에 明記된 것이 없고 민간전설로만 전해오기 때문에 일일이 年表에 細分해서 정확히 기록하지 못하고, 이곳에 뭉뚱거려 이런 식으로 한꺼번에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참으로 애석하고 한스럽다.)
--선생의 紀行地에 대해 삼국사기는 경주의 남산, 剛州(지금의 의성)의 氷山, 합천의 청량사, 지리산의 쌍계사, 合浦(지금의 마산-창원)의 別墅 등 다섯 곳을 예거했다. 이 밖의 기록이나 사적으로 전해지는 순례지는 다음과 같다.
* 경북지방= 안동 청량산의 치원봉, 치원대, 치원암과 聰明水, 봉화 청량산, 문경 희양산 자락의 봉암사, 의성 騰雲山 고운사, 문경시 가은읍 夜遊岩과 백운대, 성주 초전, 고령 벽송정, 김천 梁金洞 학사대
* 부산-경남지역= 부산의 해운대, 수영구 백산사의 玉蓮禪院, 남구의 신선대, 양산 孤雲臺 (일명 임경대), 거창 가조 고견사, 삼천포 남일대 해수욕장, 남해 錦山洞天(택리지에 기록 있으나 발견 안됨), 진해 靑龍臺刻石, (함양에도 사적이 많으나 은둔기 이전의 것임)
* 충청지역= 연기군 조치원읍, 보령군 성주사와 보리섬, 공주 공산성, 보은 속리산, 홍성 장곡면 쌍계 계곡
* 호남지역= 김제시 금산면 歸信寺, 해남군 화원면 瑞洞寺, (태인, 옥구 등에도 사적이 많으나 은둔 이전의 사적이 대부분)
* 지금까지 밝혀진 선생의 紀行地는 영남 호남 충청 등으로 전부 三南지역이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금강산 개방으로 그곳에도 선생이 紀行했다는 자취가 새로 확인되었음.
900/同 4年/同 3年/庚申/44세
해인사 선안주원벽기 지으시다.
ㅇ 견훤이 정식으로 왕을 칭하다.
901/同 5年/同 天復元年/ 辛酉/45세
弓裔가 摩震國을 세우다.
904/同 8年/哀帝天祐元年/甲子/48세
해인사에서 巨作 법장화상전 지으시다. 그 글에서 "이 난세에 무슨 일을 이룰 것인가[亂世成何事]"라고 탄식하시다.
907/同 11年/後粱 開平元年/丁卯/51세
당나라 망하다.
908/同 12年/同 2年/戊辰/52세
이 세상에 남겨진 최후의 글인 新羅壽昌郡(대구) 護國城 八角燈樓記 지으시다. ㅇ "법등을 높이 달아 하루빨리 전쟁을 없애야 되겠다"는 施主者에게 선생은 이 글에서 "사람에게 선한 소원이 있으면 하늘이 반드시 이에 따를 것"이라고 격려하시다.
912/神德王 元年/ 太祖乾化2年/56세
효공왕 죽고 그의 매형인 박씨 신덕왕이 즉위. (이후 신덕왕의 아들인 경명-경애왕까지 세 왕이 박씨였는데 김씨들의 불만이 계속되었음)
916/同 5年/末帝貞明2年/丙子/60세
견훤의 대야성(합천) 공격 실패
918/景明王2年/同 4年/戊寅/62세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즉위
920/同 4年/同 6年/庚辰/64세
견훤이 대야성을 함락
923/同 7年/後唐同光元年/癸未/67세
가야산 인근의 星州가 고려에 歸附
924/景哀王元年/後唐莊宗2年/甲申/68세
선생이 893년에 비문을 써준 지증대사비 건립되다. (이 비문에 선생이 두 군데 수정해준 것이 있음)
ㅇ 이것이 문창후 손길을 예증해 주는 마지막 자취이고 이후는 아무 기록이 없음.
926/同 3年/ 明宗天成元年/丙戌/70세
渤海, 거란에 의해 멸망당하다.
927/敬順王元年/ 明宗天成2年/丁亥/71세
견훤이 경주 공격해 景哀王을 살해하고 김씨계인 敬順王을 즉위케 하다. 직후 대구 팔공산서 왕건과 전투.
928/同 2年/同 3年/戊子/72세
가야산 바로 옆의 陜川 草溪서 고려-후백제 군이 치열한 전투.
935/敬順王9年/廢帝2年/乙未/79세
신라 망하다(고려에 歸附).
936/高麗太祖天授19年/ 天福元年/丙申/80세
후백제도 망해 고려 王建이 후삼국을 통일
ㅇ 이 때까지 문창후가 생존하셨다는 주장 있음.(양기선교수)
951/光宗光德2年/後周廣順元年/辛亥/95세
ㅇ 이 때까지 문창후가 생존하셨다는 주장 있음.(함양 상림공원 함화루 문창후신도비. 1860년)
1009/高麗穆宗12年/宋眞宗大中祥符2年/己酉/
고려에서 처음으로 新羅系인 현종이 즉위. 경순왕 사촌누이의 손자임.
1020/顯宗11年/天禧4年/庚申
8월 內史令을 追增받고 문묘에 從祀됨
1023/同14年/仁宗天聖元年/癸亥
2월 문창후로 追封됨
1074/文宗28年/神宗熙寧7年/甲寅
9월 5대손 善之를 都染署史로 삼다.
1145/仁宗23年/金熙宗皇統5年/乙丑
김부식의 三國史記 간행(史書로서 처음으로 선생의 사적을 기록함)
1200/神宗3年/寧宗慶元6年/庚申
이즈음 간행된 李仁老 '破閑集'서 선생의 신선설을 기록하다.
1459/朝鮮世祖5年/明英宗3年/己卯
왕명으로 崔恒등이 선생의 문집 12권 간행(지금은 전해지지 않음)
1552/明宗7年/世宗嘉靖3年/壬子
왕이 "선현 문창후 최치원은 우리 東方의 理學시조이니 그 자손은 귀천이나 嫡庶를 막론하고 비록 먼 시골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대대로 軍役을 침범하지 말라"고 傳敎하다.
1561/同16年/同40年/辛酉
慶州 西岳 仙桃山下에 書院을 세우다. ㅇ "부윤 귀암 李公禎이 퇴계선생에게 품신하여 계해년에 位版을 봉안했다. 퇴계선생은 서악정사라 이름 짓고 강당은 時習, 동재는 進修, 서재는 誠敬, 동하재는 切磋, 서하재는 雪, 앞 누각은 詠歸, 문은 道東이라 하여 누각 난간에 선생의 필적을 걸어놓았는데 임진왜란 때 전부 불타버리고 위판은 산골짜기로 옮겼다"고 함
1573/宣祖6年/神宗萬曆元年/癸酉
"문창후는 도덕과 문장이 우리 동방에서 第一人이니 그 자손은 비록 미천한 庶孫까지라도 군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전교하다.
1600/同33年/同28年/庚子
경주부윤 李時發이 옛터에 초사를 세우고 위판을 환안하다.
1615/光海主7年/同43年/乙卯
호남 태인현에 무성서원을 건축하다.
1623/仁祖元年/熹宗天啓3年/癸亥
경주 선비진사 崔東彦 등이 상소하여 사액을 청했던바 '서악서원'이란 액자를 내리다.
1626/同4年/同6年/丙寅
"문창후의 후손은 비록 支派서손이라도 군정의 일을 시키지 말라"고 전교하다.
1670/顯宗11年/淸聖祖康熙9年/庚戌
함양에 백연서원을 건축하다.
1696/肅宗22年/同35年/丙子
무성서원을 賜額하고 致祭하다.
1755英祖31年/高宗乾隆20年/乙亥
대구 해안현에 桂林祠를 세우고 영정을 봉안하다. 후에 구회당 후편으로 이건하다.
1796/正祖20年/仁宗嘉慶元年/丙辰
"문창후 자손은 비록 지파서손이라도 군역에 침범하지 말고 汰講(서원을 도태시킴)의 예에 넣지 말라고 열성조의 敎令을 받아온 이래 과연 遵行했느냐 해조에 엄숙히 훈령하고 범하는 수령은 나타나는대로 처벌하라"고 전교하다.
1846/憲宗12年/宣宗道光26年/丙午
창원 월영대에 월영서원을 세우다.
1850/哲宗元年/同30年/庚戌
경주 낭산 독서당에 유허비와 碑閣을 세우다.
1870/高宗7年/穆宗同治9年/庚午
함양 상림에 신도비를 세우다.
1871/同8年/同10年/辛未
경주 상서장에 신도비와 비각을 세우다.
1901/同 光武5年/德宗光緖25年/辛丑
하동 橫川에 影堂을 세우다.(금천서원이 毁撤되자 이곳에 이건하여 영정을 봉안하다)
1902/同6年/同26年/壬寅
창원 두곡에 영당을 세우다.(월영서원이 毁撤되자 이곳에 이건하여 영정을 봉안하다)
1920/庚申
청도 日谷에 영당을 세우다.(1976년 중건하고 鶴南서원으로 개칭하다)
林川에 영당을 세우고 道忠祠라 편액하다.
서산 지곡에 富城祠를 세우다.
옥구에 廉義서원을 復設하다.
1924/甲子
창원 월영대를 개축하고 비각을 건립하다.
1925/乙丑
현재 전해지는 선생문집 중 最古의 것인 '고운집'상-하권(崔坤述編)이 간행되다.(1926년 重刊)
1933/癸酉
익산 웅포에 영당을 세우다.
1937/丁丑
가야산 학사당이 이건되어 영정을 봉안하다.
1949/己丑
경주 상서장에 영당을 세우다.
1951/辛卯
가야산 학사당에 가야서당을 세우다.
1954/甲午
부산 해운대에 신도비를 세우다.
1969/己酉
부산 해운대에 동상을 세우다.
1971/辛亥
가야산 학사당 앞에 신도비를 세우다.
1972/壬子
안동에 影閣을 건축하고 영정을 봉안하다.
1974/甲寅
보령 聖住寺址에 신도비를 세우다.(面刻大字는 박정희대통령 친필)
1976/丙辰
익산 웅포 단동사 추원문 앞에 신도비를 건립하다.
1982/壬戌
선생문집의 한글 번역판 '국역 고운선생문집'(崔濬玉編)이 간행되다.
1996/丙子
2월 문화체육부,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생을 선정하다.
1998/戊寅
중국 高淳縣에 '雙女墳'碑 건립되다
1999/己卯
四山碑銘 最新註解書가 崔英成에 의해 간행되다.
2000/庚辰
중국 水縣에 선생의 동상 건립되다.
2001/辛巳
5월 중국 揚州市 정부서 선생의 재임시절 자주 왕래하시던 곳에 '崔致遠 經行處'란 비석을 건립하다.
10월 同정부와 양주대학이 '韓中 崔致遠 학술세미나'와 '崔致遠 史料陳列展'(동상도 제작 전시)을 개최하다. 이에 한국종친들이 다수 참석, 告由祭를 올리고 遺蹟地를 순례하다.
-끝-
文昌侯 찬술 四山碑銘
<해설> 문창후께서 지으신 비명은 네 개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경주시 외동면 初月山의 대숭복사 비명, 하동 화개 智異山 쌍계사의 진감선사 비명, 보령 崇嚴山 성주사의 낭혜화상 비명, 문경 가은 원북리 曦陽山 봉암사(일명 양산사)의 지증대사 비명으로서 모두 4개의 산에 있기 때문에 '四山비명'이라 한 다. 이를 다년간 연구한 최영성 교수의 소론은 다음과 같다.
"모두 왕명에 의해 찬술되었는데 선생이 귀국한 뒤로부터 은거하기 이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다. 대숭복사비를 제외한 세 비는 지금도 남아 있어 原碑 또는 탑본을 통해 접할 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註解는 1926년(이것은 重刊本이고 初刊은 1925년임-발행자註) 후손 최국술(최곤술의 초명-발행자註)에 의해 간행되고 1972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최문창후전집'을 影印 간행할 때 실렸던 것이다."
이 사산비명은 선생의 역작으로서 후인들로부터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이 비명 속에 神出鬼沒하는 형상과 龍吟虎伏하는 기세를 감추고 있음을 기뻐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이 놀라고 혼이 밝게 하며, 이목을 놀라게 하고 心脾를 씻게 한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 '고운선생문집逸稿' 사산비명跋) "그 명문들은 그의 학문이 과연 얼마나 깊었던가를 증거해 보이고도 남음이 있다." (이은상 해운대 고운선생동상비문)는 말이 이 글의 위대함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 비명은 천백년 전의 비석을 탑본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전하는 각 책자마다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오늘 이 난에는 약간씩의 상위가 있는 책자들을 종합검토해서 가장 최근에 정리한 것(1998. 아세아문화사간)을 싣는다.
그리고 한글번역은 생략한다. 한글번역본은 1982년 최준옥 편 '국역 고운선생문집'(홍진표 성낙훈 변각성 최병헌 역주)과 1999년 최영성 역주 '고운문집'이 대표적이다. 두 책은 내용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본 대동보로서는 어느 한 주해만을 채택하기로 결론을 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고, 그렇다고 두 주해를 倂載하는 것은 體裁上의 문제점과 아울러 지면의 한계라는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역문이 필요한 분들께서는 위 두 책을 참고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