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문 / 손미
초희楚姬*
붉게 터진 네 아기를 찾으러 갈 시간 너는 맨몸으로 딱딱한 무덤을 나와 우주에 떠 있는 고아원으로 가자 측백나무 가지가 길게 삐져나온 별 하나를 찾자 언젠가 지나오는 길에 노란 손수건을 매어둔 것 같은 나무가 있다
스물 일곱 송이 꽃이 폈고 비로소 우리는 가장 아픈 꼭짓점에 섰지 토성의 달들이 우리의 소풍을 반겨줄 것이다
초희, 달아나자 우주를 향해 네 것인지 내 것인지 머리카락 뜯으며....가는 길 어디쯤 앉아 단 한 번만 춤을 추자 네 시를 비웃던 남자와 내 삶을 비웃던 애인이 모퉁이에서 만나 웃거나 혹은 외면하겠지
문밖에서 우주가 울고 있다
문을 열면 고아처럼 버려진 것들이 젖을 찾아 온몸을 파고들어 초희, 우리는 가서 이름 없는 것들의 어미가 되자
우리, 가는 길 어디쯤 앉아 별의 꼭지를 잡고 단 한 번만 웃거나 울자 스물일곱 송이 꽃이 졌고
사자가 먹은 제 새끼를 생각하는 기린 한 마리가 우리를 배웅해줄 때 미리 와서 떠돌던 스푸트니크의 개가 마중 나오는 그림자가 보인다
자, 이제
*초희楚姬: 허난설헌의 이름
- 2009년 <문학사상> 상반기 신인상 당선작
■ 손미 시인
- 1982년 대전 출생
- 한남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 2009년 <문학사상> 등단
- 시집 <양파 공동체>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출판사 리뷰》
양파 하나가 쪼개지는 사건 속에서 우주를 보여 주는 시인 손미의 첫 시집
사물이 영혼이 되어 흐르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마이너스 우주의 세계
2013년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양파 공동체』가 출간되었다. 2009년 《문학사상》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손미 시인은 최근 활동하는 젊은 시인 가운데 놀랍고 신선한 자신만의 언어를 가진 시인으로 주목을 받아 왔다. “조용하고 깨끗한 풍경 속에서 사물이 영혼이 되어 흐르는 이야기, 그 영혼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또 다른 이야기라 부를 만큼 시적 언술을 증발시키는 방법이 남다른” 『양파 공동체』는 “영혼 안에 생기는, 요란스럽지는 않으나, 작으면서도 무시무시한 동요動搖를 가시화하는, 유리의 실금과도 같은 세계를 잘 구현”하고 있으며, “한 개의 길을 찾으려고 했는데 무수한 미로들”이 나타나고, “한 개의 열쇠를 찾으려고 했을 뿐인데 열쇠들은 무한 변용되고 증식”하는 시 세계를 보여 준다. 이번 시집은 1986년 고은의『전원시편』을 시작으로 28년간 한국 시단을 이끌어 온 [민음의 시] 200번째 시집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깊다. [민음의 시]와 [김수영 문학상]의 정신이 오롯이 녹아 있는 이 시집 안에는 섬뜩하고 생경한 이미지, 놀랍고 신선한 언어들이 꽉 찬 양파 속처럼 단단히 들어차 있다.
살아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소멸하는 존재들의 세계
32번째 김수영이 탄생했다. 2013년 제32회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손미 시인은 2007년『검은 표범 여인』의 문혜진 시인 이후 6년 만에 여자 시인의 수상이라 더욱 반갑다.
손미 시인의 낮과 밤은 다르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시를 쓴다. 얼마 전 한 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는데, 다니는 직장에서 그 사실을 알고는 “네가 그렇게 잘났어?”라는 말과 함께 앞으로 글을 발표할 땐 회사의 허락을 받으라며 사유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회사 동료들과 술을 먹다가 “나는 시인이다.” 소리치며 펑펑 울기도 했다. 그런 밤들에 손미 시인은 시를 썼다.
“시를 쓸 땐 죽었던 심장과 눈동자와 입술과 손가락에 다시 생기가 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 순간만큼 나는 고체가 아닌 생체가 됩니다. 시간과 공간은 사라지고 먼지 한 톨까지 내게 귀를 기울여 줍니다.”([김수영 문학상] 수상 소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