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페미니스트
그의 두 눈 속에는 우주가 있었다. 그 우주 구석의 구석, 작고 작은 푸른 점 위에 너와 나는 만났다. 후- 불면 흩어져 먼지가 될 듯한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옹’ 우리를 태우고 광안대교를 달리던 택시가 바닥으로부터 15cm쯤 몽글몽글 떠올랐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세상의 모든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날 밤, 불 꺼진 방 안에서 내 가슴을 밟고 고양이가 비행을 했다. ‘와다다- 와다다-’ 방안 가득한 정적의 틈으로 울리는 엔진 소리에 나의 세계도 따라 흔들렸다. 첫 번째 야간비행을 마친 고양이는 ‘와다’라는 이름을 얻었다. 우연찮게도 ‘와다다’는 자메이카 파투아어로 ‘사랑’이라는 뜻이다. 관념이 언어가 되기 이전의 시대. 이를테면 8,500만 년 전, 고양이와 인간의 공통조상 ‘북방진수류’가 지구에 살던 시절부터. 나는 너를 사랑하기 위해 존재했다.
나까의 씨앗
어제 통영에서 파티가 있었다. 우리의 비건 파티를 좋게 보셨던 고깃집 사장님이 바다가 보이는 고깃집의 테라스에서 파티를 열었다. 사장님이 여러 번 참여를 제안했지만 아무래도 가고 싶지 않았다. 비건 파티도 아니고 준비한 메뉴들에도 고기가 있었다. ‘비건’ 파티에서 영감을 받았다면 비건에 방점이 갔으면 좋았을 걸 너무 '파티’에 힘이 실려버렸다. 아무것도 아쉽지가 않았다.
마침 나까님의 수업을 떠올려보니 다음에는 참석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까님이 비거니즘을 위해 뿌렸던 씨앗처럼. 내 손에는 가득 씨앗이 있지만 비옥한 땅에만 그것을 뿌리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 땅이든 저 땅이든 뿌려 놓으면 싹을 틔우는 건 씨앗의 몫이지 나의 영역이 아닌데 말이다. 언젠가 알맞은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씨앗은 발아할 것이다. 고깃집 사장님도 '비건 파티'에 관심을 가졌다면, 어젠가 비건'파티'에서 '비건'파티로 방점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대체육 (식물성 고기)
비건을 선언하시 전, ‘풀은 불쌍하지 않냐?’ ‘식물은 생명이 아니냐?’는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공부를 했었다. 일단 이러한 질문들은 진짜 궁금해서라기 보다 채식인에게 비아냥과 흠집내기를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식물이 불쌍해서 물어보는 경우는 없다. 물론 진짜 궁금해할 사람들도 존재한다. 어쨌든 친구에게 들었던 '풀은 불쌍하지 않냐?'는 질문은 썩 유쾌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 질문의 이면에는 질문자의 불편함과 죄책감이 존재한다. ‘식물도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데 왜 내가 동물의 고통에 반응해야 하지?’ 그래 너도 동물이 고통받는 다는 사실을 알고 있잖아.
'식물이 고통을 느끼는가'는 아직 논쟁적인 부분이 있지만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나도 동물이라서 안다.) 식물이 생명이냐 아니냐 묻는다면 당연히 지구에서 우리와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소중한 생명이다. 그 소중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채식이 필요하다. 소고기 1kg을 얻기 위해서 16kg의 곡물이 필요하다. 또한 과도한 현대의 공장식 사육은 사육당하는 동물에게는 끔찍한 고통을, 환경에는 심각한 피해를 준다. 그러니 식물을 사랑한다면 더 많은 식물을 구하기 위해 채식을 하자.
식물성 고기는 비건을 위한 음식인지 논비건을 위한 음식인지 생각해 보면 논비건을 위한 음식에 가깝다.(물론 많은 비건인들도 좋아한다.) 거부감 없이 채식에 진입하기 위한 방법으로 식물성 대체육을 소비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고기를 소비하는 것 보다 도덕적이고 친환경적이다. 물론 ‘비건 치킨’, ‘비건 탕수육’ 등 맛의 정답이 있는데 꼭 기존의 이름에 비건만 붙인 음식에 약간의 소심한 거부감은 있다. ‘비건 치킨’이 아니라 ‘콜리플라워 튀김’이라고 하면 맛이 더 직관적이고 치킨의 맛을 따라 할 필요도 없는데 ‘비건 치킨’이라고 하면 치킨이라는 것에 정답을 두고 음식이 평가당한다.
공룡과 닭뼈 (그리고 인류세)
1억 년 전, 공룡이 지배하던 땅에서 공룡의 후예들은 다른 형태로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생명체이지만 동시에 음식으로 지칭되는 아이러니한) 치킨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퍼져 인간의 혀끝 감각을 지배한다. 닭은 1년간 약 650억 명이 도살될 정도로 전 세계에 흔하게 사육되고 소비된다. 수치적으로 단순 계산을 하면 80억 인구 1인당 8명의 닭을 소비하는 것이다. 예전의 나를 생각한다면 납득이 가지 않는 수치다. 일 년에 50명의 닭은 너끈히 먹어치운 것 같은데.
아주 먼 미래, 인류의 후예들은 어떻게 지구상에서 존재하고 현재의 우리들은 어떻게 기억될까? 미래의 내가 맛있게 사육되어 고양이에게 튀겨질 운명이라면 기꺼이 ‘프라이드(fried) 사피엔스’가 되겠다. '내가 먹는 것이 나'라면 '나를 먹는 것 또한 내가 될 것‘이다. 나를 먹을 누군가에게 ‘방사능에 절인 플라스틱 치킨’으로 남고 싶지는 않다. 인류는 사라져도 닭뼈는 기억될 것이다.
첫댓글 어쩜 이어져왔던 생각들이 잘 정리되고 나에게 위로가 되주는 글인 것 같아요. 프라이드 사파엔스...ㅠㅠ 갑자기 가사가 적고싶어지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