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성조(聖祖) 이 벽의 묘소 생가 수표교 집 터
<이 벽 초상화>
‘나는 이 벽(李 檗)을 추종하였고, 형 정약전(丁若銓)은 일찍이 어려서부터 이 벽을 추종하였으며, 이 벽이 제일 먼저 수령이 되어 성당에 선전하고 다닐 때 권일신(權日身)은 열성적으로 이 벽을 추종하였다.' 녹암 권철신(鹿庵 權哲身)의 묘지명(墓誌銘)에 정약용(丁若鏞)이 쓴 글이다.
‘이 벽은 사특한 무리들의 가장 큰 괴수이니, 우선 그 형 이 격(李 格)이 아직 벼슬에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매우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이니, 그 형제들을 즉시 벌주어 내쫓아야 한다.’ 순조 때의 정언(正言-사간원의 정육품) 이의채(李毅采)가 올린 상소문으로 조선왕조실록 제47권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의 천주교 내부에서나, 정부 내에서나 이 벽은 천주교의 수령으로 자리 잡고 있었으니 우리나라 천주교의 창립자라고 칭하여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이 벽은 1754년 남인 집안인 경주 이(李)씨 부만(溥萬)의 둘째 아들로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가톨릭대사전] 춘천교구 성지 안내 등에는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출생 당시에는 광주군이었으나 후에 포천군으로 행정구역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 벽 생가 터 : 묘소 바로 아랫 마을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문인이었으나 조부 이 달 때부터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 집안으로 유명해졌다. 형 이 격과 남동생 이 석(李 晳)은 무과에 합격하여 황해병마절도사와 좌포장을 역임했다.
이 벽은 키가 8척에 이르고 힘이 장사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부만은 이 벽이 무관으로 출세하길 바랐으나 그는 완강히 거부했으며, 과거도 보지 않고 학문에만 전력함으로 아버지의 미움을 받아 ‘벽(僻)’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僻 : 멋대로 행동하다. 편벽(偏僻-치우치다) 되다.> <두산 백과>
누이가 정약현(丁若鉉)과 결혼하자 그의 동생들인 약전, 약용들과 어울렸으며 이 익(李 瀷)을 스승으로 하여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권철신 권일신 등과 교유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철신 정약전 등이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서 실학적 인식을 깊이 하고 새로운 윤리관을 모색하려는 목적으로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다. 이 때 이 벽이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동료 학자들에게 전하여, 자생적으로 천주교 신앙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고조부인 이경상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수행하여 북경을 다녀온 이후 그의 집안에는 천주교에 관련된 서적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이 벽이 서학과 천주교를 익힌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1784년 이가환의 생질이며 정약현의 매부인 이승훈의 부친이 중국에 서장관(書狀官)으로 가게 되자 이승훈을 함께 보내 세례를 받고 오도록 했다. 이승훈은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중국명 梁棟材 1736~1812) 신부로부터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수표교 이 벽 집 터 - 청계천 수표교 북측에서 국일관으로 향하는 입구에 ‘한국 천주교회 창립터’기념비가 서 있다. 정확한 집터를 고증 중인데, 청계천 남쪽이라는 설이 제기되어, 확인되면 이전할 계획이라고 한다.>
서울 수표교(水標橋)에 집을 마련한 이 벽은 이승훈으로 부터 세례를 받고 천주교를 전교하여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김범우(金範禹) 등이 세례를 받게 했다. 이때 거행된 최초의 세례식이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로 간주된다.
1785년(정조 9) 이 벽의 주도로 모인 신자들의 집회 도중에 형조의 금리들에 적발되어 모두 형조로 압송되는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 발발하여 일부는 귀양을 가고 이 벽은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부친 이부만에 의해 집안에 연금당한 이 벽은 1786년 33세에 전염병으로 요절하였다. <가톨릭 대사전> <춘천교구 홈페이지, ‘한국천주교회 창립 터’기념비 등 여러 곳에는 1785년 사망으로 표기됨.>
이 벽의 묘와 그 후손들의 흔적을 찾아오던 변기영(卞基榮) 베드로 신부(천진암성지 초대 신부. 현 몬시뇰)는 꾸준한 노력 끝에 1979년 2월 15일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산 289-1 번지 갓등산 낮은봉 공동묘지에서 이 벽의 묘를 발견했다.
당시에 이장이 불가피하고 시급한 처지였으므로 1979년 6월 21일 주교, 신부, 수녀, 평신도들이 모여 묘를 발굴하니 “통덕랑 경주 이 벽지묘”라는 지석이 한가운데서, "공인 안동 권씨지묘"와 "공인 해주 정씨묘"라는 두 부인들의 지석이 좌우편에서 나오고 그들의 유해가 완연하게 드러났다. <통덕랑(通德郞) : 조선 시대 정오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品階) - 네이버 지식백과.>
<이 벽 성조 묘소 터>
당일 이 벽 성조(聖祖)의 유해는 혜화동 성당에 안치됐고 23일 오후 명동 성당으로 옮겨졌다. 주일인 24일 이 벽의 본명(세자 요한) 축일을 맞아 한국인 최초의 주교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의 공동 집전으로 이장 미사를 성대히 거행했다. 미사가 끝난 후 유해는 15일 전부터 구축된 천진암 새 묘지로 운구돼 24일 오후 3시 30분 김남수 주교 주례로 하관 예절을 마쳤다. <춘천교구 홈페이지>
<묘소 터 입구>
<신창읍 향원>
묘소 터는 포천 47번 국도를 북상, 화현교차로에서 우회전, 약 850m 가다가 ‘배상면 주가‘ 입구를 지나자마자 좌회전,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민회 묘소인 ‘신창읍 향원’에 있다.
1785년 이 벽의 장례식에 다녀온 정약용은 그 소회를 썼다. ‘신선같은 학이 인간에 내려왔나 높고 우둑한 풍채 절로 드러났네. 날개짓 새하얀 눈과 같아서 닭이며 따오기들 꺼리고 성냈겠지. 울음소리 높은 하늘에 일렁였고 맑고 고와 속세를 벗어났노라. 가을 바람 타고 문득 날아가 버리니 괜스레 빈둥거리는 사람들 슬프게 한다,’ (박석무 정해렴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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