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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5년 무자(1888) 6월 4일(갑신) 흐림
25-06-04[20] 문정공 이색을 문묘에 다시 배향할 것을 청하는 전라도 유생 이동협 등의 상소
○ 전라도 유생 이동협(李東莢)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우리 동방(東方)이 비록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작은 나라이지만, 전장(典章)과 법도(法度)는 중화(中華)에 비길 만하니, 이는 기자(箕子)가 팔조(八條)로 가르침을 세우고 현성(賢聖)한 군주가 서로 전수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 현철(賢哲)한 사람으로 말하자면, 홍유(弘孺) 설총(薛聰)과 문창(文昌) 최치원(崔致遠)이 신라(新羅)에서 창도(倡道)하였고, 문성(文成) 안유(安裕)와 문충(文忠) 이제현(李齊賢)이 고려(高麗)에서 흥기시켰습니다.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은 문충 이제현에게 배웠고, 그의 아들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문효공에게 사숙(私淑)하였으며,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는 선생 문하의 제자였으니, 선생의 도통(道統)과 도설(圖說)은 역사책에 분명히 게재되어 있습니다. 공자, 맹자, 안자(顔子), 증자(曾子),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도통을 거슬러 올라가 탐구하여 동방의 학문이 끊어진 뒤를 계승하였으며, 삼년상(三年喪)을 행하고 또 관복(冠服)을 한결같이 선왕이 제정한 예(禮)에 따를 것을 청하였습니다. 참된 사문(斯文)을 도와주고 이단인 불교(佛敎)를 배척하여 중국으로부터 정통(正統)을 계승하여서 동방의 선각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소중화(小中華)’라 불리운 것이니, 소중화의 사람으로서 어찌 선생의 성대한 덕을 흠모하여 찬미하는 자가 있지 않겠습니까.
공민왕(恭愍王)이 찬배(贊拜)하고 이름 부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사부(師傅)를 높이고 중히 여기는 것은 사도(斯道)를 위해서이고, 덕을 숭상하고 공에 보답하는 것은 후대의 사람들을 권면하고자 해서이다. 선생은 학문이 천인(天人)에 통달하였고, 식견이 고금(古今)을 꿰뚫었다. 정사를 도와 토론하고 윤색하여 나라의 아름다움을 드날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염락(濂洛)의 학문을 알게 하였고 추로(鄒魯)의 풍속으로 바뀌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태조(太祖) 강헌 대왕(康獻大王)의 치제문(致祭文)에 이르기를, ‘기품(氣稟)은 맑고 밝았으며 경술(經術)은 넓고 우아하였다.’ 하였고,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치제문에 이르기를, ‘문장이 찬란하여 더욱 간절히 흠모한다.’ 하였으니, 열성조(列聖朝)가 선생을 공경하고 존중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선정(先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동방에도 공자와 맹자의 심학(心學)과 기자의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잘 아는 자가 있는가?’라는 중국 사신의 질문에 답하면서 선생의 일을 기록하여 보여 주고, ‘선생은 사문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으므로 학자들이 모두 우러러 흠모한다.’ 하였고,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이 상소하기를, ‘옛날 우리나라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이 먼저 전해졌는데 설총과 우탁(禹倬)이 풍속을 따라 해석하여 강론하였고, 《소학(小學)》과 《가례(家禮)》가 나중에 전해졌는데 선생과 정몽주가 오랑캐의 가르침을 바꾸고 성학(聖學)을 분명하게 드러내어서 위급했던 고려 말을 더 지탱하게 하였고 이어 우리나라의 기강을 세웠으니,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늠름하여 후세까지도 빛나고 있습니다.’ 하였으니, 명덕(明德)의 현자들이 찬미한 것을 일일이 나열하기가 어렵습니다.
신과 팔도의 유생들이 갑신년에 똑같이 억울한 마음을 품고서 한 목소리로 대궐에 나아가 호소하였는데, 삼가 성상의 비답을 읽어 보니, 이르시기를, ‘공자의 사당에 배향하는 것을 대번에 실시할 수 없으니, 이는 곧 그 예(禮)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성상이 예를 중시하는 마음에 대하여 신 등이 어찌 감히 다시 번거롭게 아뢸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선생이 무고를 받아 출향(黜享)된 것은 실로 나라의 흠전(欠典)이고 바로 사림(士林)들이 억울하게 여기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신과 방외 유생(方外儒生) 등이 또 기유년에 한 목소리로 대궐에 나아가 호소하였는데, 삼가 성상의 비답을 읽어 보니, 이르시기를, ‘현자를 숭상하고 도를 높이는 것을 어찌 그대들이 아뢰기를 기다려서 하겠는가. 대번에 윤허하지 못하는 것은 사체가 매우 신중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 등은 답답한 마음에 배회하면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번거롭게 아뢰는 것을 두려워해서 물러나 침묵한다면, 후학(後學)이 도를 향하는 성의와 조정에서 현자를 존중하는 의리를 장차 어떻게 감동시켜 일으키며, 어떻게 높여 장려하겠습니까.
아, 선생이 무고를 받아 출향된 것은 그 당시 사관(史官)들이 시기하고 미워해서 ‘불법(佛法)을 숭상하여 믿었고 크게 건백(建白)한 것도 없는데,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졌다.’고 지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펴보건대, 고려 역사의 잘못된 부분은 전배(前輩)들이 참으로 이미 논의를 했는데, 자기들 호오(好惡)에 따라서 일일이 흠을 잡았으니, 그런 내용을 읽으면 사람들의 마음이 민망스러워집니다. 당시에는 불법(佛法)이 성행했으니, 위로 왕후(王侯)로부터 아래로 공경(公卿)에 이르기까지 사원(寺院)의 비문(碑文)과 찬사(讚辭)를 지은 것은 군주가 엄히 명한 것이 아니면 친우(親友)가 간절히 부탁한 것이었기 때문에 굳이 거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임진년에 올린 상소에서, 새로 창건된 절을 모두 철거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중은 곧 충군(充軍)하고, 심부름꾼이나 양민들은 중이 되지 않게 하소서.’ 하였고, 문수회(文殊會)에서 왕공(王公)들이 부처에게 절했지만 공만 절하지 않았으며, 국인(國印)을 봉하는 데에 이르도록 왕의 뜻을 거스르며 간쟁한 일과 임종할 때에 손을 내저으면서 한 말을 가지고 보면, 또한 평소에 지니고 있던 마음을 징험하기에 충분하니, 불법을 숭상하여 믿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예방(禮防)을 엄히 지키고 백성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서 여러 번 임금의 노여움을 사면서까지 선한 부류들을 도와 보호하였고, 성균관의 직책을 맡아서는 사문을 흥기시키고 한 시대를 훈도하여서 동방(東方) 이학(理學)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대제학이 되어서는 변고(變故)가 생겨 어려울 때에 외교 문서를 잘 지어 글을 초하고 윤색하는 일을 맡았는데, 실력이 충분하여서 여러 번 중국 조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니, 위로는 왕의 계책을 잘 표현하였고 아래로는 이륜(彝倫)을 따랐습니다. 낭묘(廊廟)에 있게 되어서는 새로 시작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대체(大體)를 유지해서 국세(國勢)를 안정되게 유지하여 백성들이 혼란스럽지 않았으며, 심지어 위태롭고 어려운 때에 군주를 도와 극복하는 공을 이루었고, 신하에게 좌지우지되어 종사(宗社)가 위험할 때에 어린 임금을 세워 종사를 안정시켰습니다. 국난을 바로잡고 평정할 것을 도모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형벌도 달게 여기고 멸족되는 것도 편안히 받아들였으니, 건백(建白)한 것치고 이보다 큰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말을 해서 유지할 수 없는 형세를 유지하였습니다. 이리저리 떠돌다 거의 죽을 지경이었는데도 충의의 성품은 확고부동하여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려에 대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떠난 뒤에도 있는 힘을 다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만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포은(圃隱) 정몽주가 죽을 때에 함께 죽지 않은 것은 특별히 천지(天地)와 같은 도량을 가진 태조께서 옛 친구에 대한 의리를 온전히 하고자 했기 때문이니, 또한 선생의 성대한 덕과 큰 명망은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며, 태조께서도 평소 신복(信服)했던 것입니다. 선생의 정충(精忠)과 대절(大節)은 수십 년 동안 나라를 유지하게 하였는데, 덕이 성대할수록 마음이 더욱 겸손하고 관직이 높을수록 집이 더욱 가난하게 된 것을 보면, 그의 학문은 심(心), 신(身), 성(性), 정(情)에서 근본하여 집, 고을, 나라에까지 이른 것이니, 체(體)와 용(用)을 갖춘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조(聖朝)에 이르러 태조께서 왕위에 오른 뒤, 옛 친구를 대우하는 예로 대우하면서 신하로 삼지 않고 가르침 한 조항을 받고자 원했는데, 공이 말하기를, ‘노부(老夫)는 자리가 없고, 망한 나라의 대부는 살기를 도모해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끝내 여강(驪江) 청심루(淸心樓)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다가 태연스럽게 배 가운데에서 죽어가며 선온주(宣醞酒)를 기울여 마시고는 술병 마개로 쓴 대나무 잎을 강안(江岸)에 던지며 말하기를, ‘충성으로 군주를 섬겼으면 이 대나무가 살 것이고, 간사한 마음으로 군주를 망치게 했으면 이 대나무가 말라 죽을 것이니, 나의 일생은 오직 후대 사람들이 평가하는 데에 달려 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대나무가 과연 뿌리를 내려 잘 자랐으니, 창천(蒼天)이 공의 충성에 감응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백(伯)으로 봉한 것을 의례적인 예(禮)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미자(微子)를 송(宋) 나라에 봉하고,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한 것도 모두 새 조정에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의 문집 가운데 시(詩)에 이르기를, ‘맹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배척하였으니, 그 공이 삼재와 짝할 만하네. 눈물이 나도록 슬프구나, 공묘(孔廟)에는 이끼만 많이 끼었네.[孟氏闢楊墨 其功配三才 傷哉可流涕 闕里多莓苔]’ 하였고, 선정 정몽주가 준 시에 이르기를, ‘선생은 일찍이 드넓은 학문의 세계를 보았으니, 지금 우리 도를 어찌 저버리겠는가.[函丈曾窺學海寬 祗今吾道豈盟寒]’ 하였는바, 사우(師友)에게 매우 기대하고 바란 것을 볼 수가 있으니, 이는 학술(學術)이 정미(精微)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서방(西方)에 성인(聖人)이 있다.’ 하였는데, 이는 오도(吾道)의 성인이 아니라 저 도[佛敎]가 지극한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선생이 부처에 대해서 또한 성인이라고 말한 것은 근거할 만한 것이 없지 않지만, 풍간(諷諫)하여 사찰 짓는 것을 그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정 부자(程夫子)가 절에 가서 방정하게 식사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삼대(三代)의 위의(威儀)가 모두 여기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 가령 사관(史官)이 선생을 무고한 것과 같이 한다면 현자이신 정자도 불교를 숭상하였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선정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에 이르기를, ‘나를 알아줄 것도 《춘추(春秋)》이고 나를 죄줄 것도 《춘추》이다.’라고 하여 공자의 도통(道統)을 계승시켜 동방 성리(性理)의 조종(祖宗)으로 삼았으니, 그렇다면 선생을 무고한 것은 실로 자신들의 덕이 하찮다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공의(公議)가 수백 년 뒤에 정해진 것은 어째서입니까? 더구나 지금까지도 다시 배향되는 은전을 입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조정의 흠전이 아니겠으며 사림(士林)들이 억울해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천지와 같고 부모와 같으신 주상 전하께서는 삼대(三代)의 해와 달 같은 밝음을 계승하시고 백왕(百王)의 정비된 제도를 통솔하시니, 덕음(德音)을 내시어 속히 윤허하소서. 그리하여 문정공 이색을 공자의 사당에 다시 배향하여 백세토록 천향(遷享)하지 않을 종통(宗統)에 대한 제사를 잇게 한다면, 국가에도 매우 다행이고 사문에도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 등은 지극히 두렵고 간절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전후로 비답을 내렸으니, 그대들도 사체가 지극히 중대함을 의당 헤아려서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고 물러가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주-D001] 염락(濂洛)의 학문 : 염계(濂溪)에 있던 주돈이(周敦頤)와 낙양(洛陽)에 있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등이 주창한 송학(宋學)을 가리킨다.[주-D002] 추로(鄒魯)의 풍속 : 추(鄒)는 맹자의 출생지이고 노(魯)는 공자의 출생지이니, 공자와 맹자를 따르는 유학적인 풍속을 말한다.[주-D003] 국인(國印)을 …… 간쟁한 일 : 공민왕(恭愍王)이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을 왕륜사(王輪寺) 동쪽 언덕에 수년 동안 지었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다시 마암(馬巖)의 서쪽 땅에 으리으리하게 지으려고 하자, 시중(侍中) 유탁(柳濯) 등이 상서하여 정지하도록 간하였다. 이에 왕이 유탁 등을 하옥시키고 죽이려고 하면서 공에게 여러 사람에게 유시하는 글을 지으라고 명하였으나, 공은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 왕이 몹시 노하여 국인(國印)을 봉(封)하게 하였는데, 공은 왕이 더욱 노할까 염려하여 국인을 봉하고 거기에 쓰기를, “신(臣) 색(穡)은 삼가 봉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더욱 노하여 덕 있는 사람을 찾아서 섬기라고 하며 정비궁(定妃宮)으로 거처를 옮기고 진선(進膳)도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돈(辛旽)이 왕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왕명(王命)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공을 하옥시켰다가 나중에 풀어 준 일을 가리킨다. 《牧隱集 行狀》[주-D004] 임종할 때에 …… 한 말 : 선생의 병이 위독할 때에, 어떤 중이 불도(佛道)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자, 선생이 손을 내저으면서 “사생(死生)의 이치에 대하여 나는 의심이 없다.” 하였는데, 이 내용을 말한 것이다. 《牧隱集 神道碑》
ⓒ 한국고전번역원 | 임희자 (역) |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