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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풍수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불교와 풍수)
1. 여러 견해
* 대체로 3개의 견해가 있다.
①신라말 도선국사가 당나라에서 도입하여 전파시켰다는 견해
②신라중기 자장율사와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가서 풍수를 배우고 귀국하여 여러 사찰터를 잡았다는 견해.
③신라 유리자가 당나라 풍수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풍수를 깨치고 삼의록을 남겨 우리나라 풍수의 원조가 되었다는 견해.
* 우선 인문사회학에서 체계적인 지식은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깨처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제기한 지식이 집대성되고 정리되어 발전하는 것이다. 풍수의 이론적 체계를 확립한 당나라 양균송도 그때까지 제기된 여러 견해를 참고하였다고 한다. 풍수이론이 제기된 바 없는 사회에서 유리자가 이론을 창안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고 유리자가 풍수행을 하였다는 설화도 없다. 물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기록이 없으므로 유리자의 실존을 주장하는 일부의 통맥법회는 근거가 없다.
* 자장율사와 의상대사 설(說)은 자장율사가 건립한 적멸보궁과 의상대사가 건립한 영주 부석사와 양산 통도사 등 여러 사찰이 풍수상 명당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분들이 당나라에 유학가서 풍수를 배웠다고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풍수를 배우지 않고는 명당을 잡을 수 없다는 전제가 인정되어야 성립할 수 있다.
* 자장과 의상외에도 풍수설화 중 병든 스님을 구해주었더니 보은으로 명당을 잡아주어 부자가 되었다는 등 스님이 풍수고수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 부분은 불교와 풍수라는 항목으로 다시 보기로 한다.
* 도선국사설은 국사가 왕건의 탄생지를 잡아주고 임금이 될 것을 예언하였고 풍수책을 남겨 중국의 풍수를 전파하였으므로 풍수 도입자라 할 수 있다. 도선비기등 국사의 저술은 비록 국사가 직접 저작하지 않고 후학들이 구전해 오다가 발간한 것으로 다소 변질된 부분 예컨대 중국에 유학하여 일행선사로부터 풍수를 배웠다는 등의 부분이 있지만 도선국사와 무관한 책은 아니다.
2. 풍수이론을 배우지 않으면 명당을 잡을 수 없는가?
* 최창조 교수는 풍수이론을 배우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동물적 감각으로 땅을 선정하였다고 주장하나 그렇지 않다. 득도한 고승은 6통(六通; 天眼 天耳 他心 宿命 身足 漏盡)의 능력을 터득한다고 한다. 땅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아는 경지를 地通이라 한다면 지통은 육통의 경지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터득할 수 있고 길지와 흉지를 판별하는 기감과 풍수감정은 지통의 경지에 오르지 않아도 터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풍수이론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수련으로 가능하다고 본다. 전국을 다녀보면 교회건물이 비교적 괜찮은 곳에 자리잡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목사님의 기도정진 덕이라 생각되고 초등학교 건물의 위치가 대체로 길지급에 자리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터가 주인을 불러들인 결과라 생각한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묘는 경주 노곡리산193 백운대에 있는 정씨 도시조 지백호 묘(기원전 50년)이고 그 다음이 경주 오릉에 있는 박혁거세(서기4년) 배동3릉중 아다라이사금(184년) 김해 김수로왕릉(199년)의 順인데 이들은 모두 대명당이다. 중국풍수의 비조는 곽박(276~324 금낭경)이고 시조는 양균송(834~900, 당희종때 사람, 감룡경 의룡경을 저술, 현대의 형세론 이기론 현공이론의 토대를 마련하였다)임에 비추어 위의 묘들은 중국풍수이론을 원용한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 그렇다고 신라초기에 자생적으로 풍수이론이 형성되어 있은 것도 아니고(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기록이 없다) 단순히 동물적 본능의 소산으로 보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명당은 풍수이론을 습득하지 않아도 지통한 도인이나 이론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수련한 지사 또한 잡을 수 있다고 보아야 된다.
더우기 왕을 화장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있는 점으로 보아 신라에서는 매장문화가 확립되어 있었는지 의문이다.
3. 불교와 풍수
도선국사, 무학대사, 학조, 성지, 진묵대사(1562~1633), 일이승, 홍성문대사, 민일스님등 신안으로 이름난 승려들이 많다. 불교는 탐욕을 억제하고 수행하여 해탈하는 것을 이념으로 하는 종교이다. 이에 대하여 풍수발복은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것이므로 불교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승려 중에 풍수고수가 많은 것은 무슨 연유인가? 예전에는 수행 중에 지통한 경우도 많았고 근세에는 조계종 총무원에서 포교와 생계의 수단으로 명리학과 풍수를 가르쳤다. 그러나 명리학은 몰라도 음양택을 소점해주는 지사의 길로 간다면 풍수는 불교에서 정도(正道)는 아니라고 본다. 도선국사는 고려의 건국에 기여하는 대승적 풍수행을 하였고 옥룡사를 지어 승려제자를 600명 양성하였으되 풍수제자를 양성하지 않았다.
일이승은 수 많은 결록과 산도를 작성하였음에도 결록지를 판매하지 않았고
홍대사는 회문산 명혈을 노래한 회문산 만음 24가(歌)를 지어 유명한데 제자를 데리고 길거리에서 학사려 토끼사려라고 외치고 다녀서 명당을 팔았으나 생계수단이었을 뿐 축재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물론 묘청과 같이 일신의 부귀를 위하여 풍수를 악용한 경우도 있다. 풍수는 팔만대장경에 없는 말이고 교리에 부합되지 아니 하므로 승려가 제자에게 가르쳐 주는 과목이 아닐 뿐더러 성격상 불법(佛法)과 풍수는 결국은 스스로 깨쳐야 되는 것이다. 무학대사가 도선국사의 제자이라든지, 자신은 도선의 3십몇대 제자라는 주장 등은 허무맹랑한 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불교에서 풍수는 정도는 아니지만 포교수단으로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포교가 아닌 개인을 구제하는 수단으로는 효용이 떨어진다. 양균송이 陽救貧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지만 몇 사람이나 구제하였을까? 부자가 더 많은 빈민을 구제할 수 있다.
4. 자장율사와 의상대사
* 자장율사(590~658 당태종 때), 의상대사(625~702), 원효대사(617~686)는 모두 비슷한 연대에 살았다. 의상대사는 자장율사 보다 20년 뒤(650년) 당에 유학하였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으로 유학길을 가던 중 밤에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 이에 중국에 불법(佛法)이 있다면 신라에 불법이 없을 리 없다고 깨닫고 되돌아 와서 득도하고 요석공주와 혼인하여 설총을 낳았다. 전국에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알려진 사암(寺庵)이 2백여개 된다. 물론 원효가 대처승이라는 이유로 대처승들이 원효대사를 시조로 모시면서 원효를 빙자한 경우도 많지만 실제 원효가 창건에 관련된 경우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원효대사는 중국에 유학가지 않았고 풍수공부를 하였다는 말도 없는데 어찌하여 사찰터를 선정할 수 있었을까? 득도하고 육통을 하였다면 식은 죽먹기이었을 것이다.
* 위 세 고승은 모두 명당인 사찰터를 잡았으나 개인의 음양택을 잡아주는 풍수행을 하였다는 말은 없다. 김유신(595~673)장군 묘를 의상대사의 소점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문무왕(김춘추의 장남)은 성골이 아닌 김춘추가 왕이 된 것은 오로지 김유신 장군의 덕택임을 알았던 까닭에 장사 때에 곡식과 체백을 하사하고 군악대 100명을 보내었고 관리인을 두게 하였다는 자세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의상대사가 관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병도박사는 김유신장군 묘로 알려진 지금의 묘에 관하여 김춘추의 차남 김인문(현재 서악 왕릉군에 있다)의 묘라고 주장하나 기록상 김유신장군 묘는 경주 서쪽에 있다고 하는데 경주 서쪽에 지금의 김장군 묘가 제일의 명당이고 왕족(160년 뒤 왕으로 추증)이 아닌 김유신장군이 왕족들의 공동묘지인 서악 왕릉군에 묻히는 것은 오히려 어색하다.
5. 끝 맺음
* 자장율사와 의상대사가 당에 유학가서 풍수를 공부하였다는 견해는 ①풍수를 공부하지 않아도 명당을 잡을 수 있다. 중국의 풍수비조 곽박이 서기300년경 금낭경을 쓰기 전에도 신라는 많은 대명당 음택을 썼다. ②풍수는 불교교리에 부합되지 아니하므로 자장과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풍수를 배웠을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치 않다.
* 설령 자장과 의상대사가 풍수를 공부하였다고 하더라도 가슴에 묻고 제3자에게 펼치지 아니하였음에 대하여 도선국사는 후학에게 도선비기 도선답사기를 구전하여 최초로 세상에 전파하였으니 풍수를 도입한 시조로 보아야 된다. 끝으로 우리나라 제일의 음택명당인 김수로왕릉은 아이러니하게도 곽박이 중국풍수의 기초를 세우기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지(大地)는 지사의 능력보다는 땅이 주인을 불러 들였다는 느낌이 든다.(2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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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경북 구미 도리사
417년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때 창건.
대부분 풍수사들이 인정하는 절터
원효대사(617~686)
의상대사(625-702)
도선국사(827-898)
나옹선사(1320~1376)
무학대사(1327~1405)
예, 구미 도리사도 명당이지요, 그리고 보니 중국풍수가 들어오기 이전에 자생적 지사(승려)가 잡은 것 같군요,
의상보다 원효대사가 절을 더 많이 지었는데 원효는 그 당시에 이미 대중적 인기가 있었고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상류층의 지지를 받았지요. 현대에 와서는 이승만대통령의 대처승 축출정책에 의하여 대처승이 기댈 언덕은 원효대사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처승 절은 원효사라는 명칭을 많이 쓰는 것입니다.
의상대사가 귀국하여 사찰을 건축하려고 하니까 원효에게 밀려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험지 밖에 없었던 같아요. 그래서 영주부석사(도적무리를 순화시켜 절터를 구했다) 양산 통도사(잡룡들을 굴복시켜 절을지었다)를 지었습니다.
이미 삼국시대에 풍수개념이 있었듯 합니다
신라 석탈해의 경주 관련설도 있고, 백제의 공주 무령왕릉의 풍수적 요소도 보면 이미 삼국시대에도 풍수에 입각한 입지개념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이후 자장율사, 의상대사가 사찰을 세웠다는 기록과 창건한 사찰의 풍수적 요소를 보면 분명 당나라 유학과 관련 풍수적요소가 적용된것 같고 도선국사는
당나라에서 유학간 기록이 없으니 다만 선배 스님으로 부터 배워 풍수와 관련 크게 활동한 스님인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풍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소규모의 풍수적 사고가 있다가 고려시대에 당나라 유학 불교 스님들을 주축으로 크게 발달 유행하였던거 같고 오히려 조선시대에 유학의 효와 관련 민간인까지 성행했으나 풍수의 질적 사고는 저하 퇴보되고 불신화 된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