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一松)은 심희수의 아호이며 본관은 청송. 일타홍(一朶紅)은 한양에서 이름난 기생. 두 사람은 조선 명종과 선조 때 인물들이다.
일타홍은 나이에 비해 무척 성숙했으며, 매우 지적이었고, 게다가 미모까지 겸비한 당대의 명기였다. 따라서 그녀는 여기저기 연회에 빠져서는 안 될 감초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식견이 뛰어나 사람들의 관상도 볼 줄 알았다.
그녀에게 있어서의 첫사랑은 이기주였다. 이기주는 같은 고향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그녀와 친하게 지낸 사이로 서로 학문적, 정신적 유대가 깊었다. 그러나 그는 아쉽게도 임꺽정(?-1562년)의 부하가 되어 황해도로 떠나 버렸다.
그는 임꺽정이 잡혀 죽은 뒤 패잔병이 되어 산 속에 숨어 산적 노릇을 하던 중 결국은 관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는 그녀의 가슴에 평생 잊지 못할 그리움의 대상으로 간직할 수 밖에 없었던 존재였다.
하루는 이판서 댁에서 생일 잔치가 열렸다. 많은 선비들과 고관대작들이 모여서 이판서의 생일을 축하하는데 그들 중에 심희수(沈喜壽; 1548-1622년)란 작자도 끼어 있었다.
그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난 탓인지 청소년 시절부터 방탕아요, 왈짜패요, 난봉꾼으로서 빗나간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술과 계집과 먹을 것을 무척이나 밝혔으며 상가 집이나 잔치 집이나 술자리에는 으레 그가 모습을 드러내고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
반미치광이처럼 행세하고 다니는 그를 보고서 사람들은 슬슬 피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체면을 호주머니 속에다 구겨 넣고서 뱃심좋게 연회석에 나타나 그저 술과 안주를 꾸역꾸역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고는 해야 할 말을 다 토해낸 뒤 유유히 사라지곤 했던 것이다.
이 날도 심희수는 이판서의 생일 잔치에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 음식상 앞에 우거지상을 한 채로 쪼그리고 앉아 음식을 마구 먹어댔다. 그것도 음식상에서 맛좋은 산해진미만 골라서 먹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그는 그저 히죽히죽 웃었을 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로 인해서 잔치 집 분위기가 상당히 어색해지자 일타홍이 슬며시 일어나 심희수에게로 다가가 공손히 술을 한 잔 따랐다. 다른 기생들과 손님들이 의아해 하며 그 기이한 광경을 쳐다보았다.
무뢰한에게 천하 절색의 미인이 정중히 술을 따라 올리는 것은 어쩐지 격에 맞지 않았다. 심희수는 힐끗 일타홍을 한번 쳐다보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부어주는 대로 덥석덥석 받아 마셨다. 이윽고 심희수가 얌전해지자, 다시 술자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사람들의 눈길이 심희수에게서 벗어나자. 일타홍은 슬그머니 심희수를 유인하여 밖으로 끌어냈다. 그런 다음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심희수의 집으로 함께 갔다.
심희수의 집에 이르자, 일타홍은 정식으로 심희수에게 인사를 올린 다음, 안방으로 건너가서 그의 모친에게 속에 품은 말을 모두 털어놓았다.
"소첩은 일찍부터 관상술(觀相術)과 길흉화복을 보는 법을 공부하여 대강 알고 있니다만, 오늘 우연한 기회에 도련님의 관상을 뵙게 되었는데, 장차 크게 되실 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첩이 일부러 도련님을 따라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소첩은 비록 기생이오나 이후 힘닿는 데까지 도련님의 길잡이가 되고 싶습니다.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들어서기까지만 그 밑거름이 되고자 합니다. 도련님의 관상대로 장차 대과에 급제하여 인생 대로에 들어서게 되면 그때 소첩은 미련 없이 떠나겠습니다."
"그 동안까지 만이라도 소첩에게 도련님을 훈도하고 글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책임을 맡겨 주십시오. 비록 한 집에 거한다 하더라도 서로 통정치 않겠사옵고 오직 맡은 바 임무만 성실히 수행해 나가겠습니다. 그에 따른 모든 비용은 소첩이 감당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심희수의 모친은 이미 길바닥에 내다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자기 아들을 올바로 인도하겠다는 여인의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일타홍의 간청을 쾌히 수락해 주었다.
이후, 일타홍의 심희수에 대한 사람 만들기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심희수가 대과에 급제한다면 자기 몸을 기꺼이 허락하겠다는 달콤한 미끼를 내걸고 그에게 기초부터 글을 가르쳤다.
한동안 열심히 학문을 탐구하던 심희수가 간혹 반발하여 말을 듣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그를 잘 달래고 설득하여 공부를 지속하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희수가 다시 난봉꾼으로 행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이웃 마을의 참한 규수를 중매하여 장가를 들도록 했다. 그가 안정을 되찾아 학문 탐구에 정진하게 하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는 날이 갈수록 공부에는 무관심했으며 딴전을 피웠다. 그녀의 간섭을 싫어하여 매사에 투덜거렸으며 시간이 나면 안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아내의 치마폭을 감싸고서 히히덕거리며 놀기만 했다. 일타홍은 여러 궁리 끝에 극약 처방을 쓰기로 했다.
"대과에 등제치 못하면 다시는 그이를 다시 만나지 않겠어요!" 이렇게 그의 모친에게 말하고서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쪽지를 한 장 남겨 둔 채로 훌쩍 집을 떠나 버렸다.
"일타홍은 떠나갑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라고 사료됩니다. 떠나가는 제 마음도 편치 않사옵니다. 선비님께서 과거에 급제하시는 날 저는 돌아오겠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제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서야 정신을 바짝 차린 심희수는 그 날부터 두문불출하고 무려 4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드디어 마침내 1572년에 이르러 병과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심희수는 귀향 길에 문안인사 차 이웃 마을에 사는 나이 많은 달마 노인 댁에 들렀다. (달마 노인은 조광조 일파의 후예로서 산골에 묻혀 성리학에 심취하여 살아가는 학자였다. 그는 일타홍이 심희수의 집을 나와 갈 곳이 없어 난처한 지경에 처해 있을 때 그녀를 집에 데려가 거처를 마련해 준 고마운 노인이었다. 그는 심희수의 부친의 친구이기도 했다.)
바로 그곳에 일타홍이 기거하고 있었다. 극적으로 재회하게 된 두 사람은 뜨거운 포옹을 했다. 이후 일타홍은 심희수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내조하며 그가 우의정, 좌의정에까지 이르게 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심희수는 처음에 승문원에 등용되고 그 후 헌납으로 있을 때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자. 조정에서 의견 충돌로 한때 사임했다가 이듬해 부응교가 되었고, 선위사를 거쳐 간관으로서 수차 직언을 하다가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사성(司成)으로 전임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왕을 의주로 모시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도승지로 승진하였다가, 이어 대사헌, 형조판서, 호조판서를 거쳐, 한때 접반사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했으며, 1599년에는 이조판서에다 대제학까지 겸임하였고, 한때 좌찬성, 우찬성으로 있다가, 이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일타홍은 심희수가 비굴하지 않고 떳떳한 삶을 살도록 곁에서 줄기차게 조언하였으며, 심희수도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고자 꿋꿋이 인생 길을 걸어갔다. 그래서 그는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이이첨 등이 국권을 좌지우지하며 임해군을 해하려 할 때 그 부당함을 담대히 상소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탄핵을 받은 처지에 이르기도 했지만 그의 뜻을 결코 굽히지는 않았다. 1614년에는 영창대군의 신원(伸寃)을 상소했다가 사형을 당하게 된 정온을 구하여 유배에 그치게 했던 것도 일타홍의 조언에 힘입은 바 컸다.
1616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허균 일당과의 논쟁으로 정계에서 밀려난 심희수는 일타홍과 함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오직 독서와 시로 소일하며 한가하고도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
일타홍은 죽는 날까지 그의 곁에서 온 정성을 다하여 섬겼으며, 친구요 연인이며 동반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註>
*심희수(沈喜壽)*
본관 청송(靑松). 자 백구(伯懼). 호 일송(一松). 수뢰누인(水雷累人). 시호 문정(文貞). 1568년(선조 1) 성균관에 입학,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 대표로 제사에 참여, 1572년(선조 5)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로 사직하였다. 1591년 응교(應敎)로서 동래(東萊)에서 일본 사신을 맞았다. 한때 직언하다 선조의 미움을 샀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로 왕을 호종, 중국 사신을 만나 능통한 중국어로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을 맞았다. 1606년 좌의정, 1608년 광해군 때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의 정권에서 우의정을 지냈다. 저서에 《일송문집(一松文集)》이 있다.
첫댓글 감동 감동...상대방의 장점을 볼수 있는 좋은 능력이 부럽다... 나를 믿고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는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