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2월 3일자 일요신문)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난 1974년 2월 3일자 일요신문은 충격적인 보도를 했다. 여운형 암살에 공범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암살에 가담했던 공범들은 범행 사실을 떳떳이 시인했다. 살인사건의 공소시효 15년이 이미 넘어선 지 오래였기 때문에 법적으로 거리낄 게 없는 태도였다. 공범들은 모두 4명으로 김흥성,김영성,김훈,유용호였다.(각주-이들 4명은 지금도 잘지내고 있습니다. 암살공범 가운데 한명인 김훈은 서울 영등포구 상도 5동에 거주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서울지검은 이 사건을 재조사했지만 이미 공소시효 완료로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따. 범인들은 "역사를 바로잡고 원통하게 죽은 한동지의 제사라도 떳떳이 지내기 위해 전모를 밝히는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이미 사건 당시부터 한지근의 본명이 '이필형'이란 설이 나돌았지만, 사실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었다. 공범들의 폭로에 따라 사건은 재조명되었다. 이에 따라 재구성된 사건의 개요는 친일파와 극우파,단독정부 수립지지자들이 합작을 해서 여운형을 살해한 것으로 집약된다.
범인 이필형은 평안북도 영변 북신현 갈골에서 태어났다. 지주집안이었지만 아버지 사망후 이복 형에게 심한 학대를 받았다고 한다. 1945년 영변의 용문(龍門)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 재학시절 이필형은 암살공범이 된 동창생 유용호와 김훈을 만나게 된다. 2년간 고향에서 지낸 이필형은 1947년 1월초 유용호와 함께 월남했다. 월남 목적은 서울진학이었다. 월남직후 이들은 연대(延大)를 찾아갔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이들은 우연히 1개월 전 월남한 김훈을 만나, '수산경제신문'배달원을 했지만 먹고 살기조차 어려웠다.
이때 김훈이 "공부도 할 수 있고 국가를 위해 일도 할 수 있는 집"을 알아왔다. 김준도(金俊道)라는 인물의 안내로 세 명이 찾아간 곳은 바로 성동구 신당동 304-243의 한현우의 집이었다.(각주- 한현우는 고하 송진우 암살범입니다. 현재, 재일한국인으로 일본 도쿄에 살고 있습니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송진우 암살의 주범인 한현우는 당시 검거된 상태였고, 집에는 이필형의 부인인 이봉득과 이필형의 추종자이자 테러리스트인 신동운이 있었다. 당시 신동운은 김준도 외에 김춘식,김영석 등의 평양출신의 청년을 데리고 있기도 했다.
신동운이란 인물은 해방정국의 직업적 극우테러리스트였다. 함경남도 홍원이 고향인 신동운은 일본 지원병 출신으로 일본해군에 입대해 항공병으로 제대했다.(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2140032920601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2-14&officeId=00032&pageNo=6&printNo=8733&publishType=00020) 해방 후 한현우의 '격몽의숙'에서 백남석과 함께 지냈다. 한때 송진우의 경호원으로 일했고, 송진우 암살관련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한현우를 존경했고, 특히 그의 파시즘적 우익이론에 공명했다. 1946년 1월에는 일제 때 경찰 앞잡이였고 해방뒤 건청(建靑)을 조직한 오정방을 '친일 기회주의자'로 단정해 권총으로 저격했다. 이 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살인미수 불법무기소지죄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송진우 암살사건으로 한현우 일파 5인이 투옥된 뒤로는 한현우 집에 기숙하면서 그들의 옥바라지를 하고 있는 처지였다.
신동운은 6명의 청년을 감금하다시피 하면서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은채 시국담만 하게 했다. 이때마다 신동운은 '나치스'의 조직체계를 은연히 들려줬다. 이들의 대화가 대체적으로 반공으로 흐르는 데 비해 신동운은 뚜렷한 노선을 밝힘없이 젊은이의 사명감 등을 강조했다. 하루종일 집에 파묻혀 불만이 쌓인 김준도 등 먼저 들어온 청년 3명이 뛰쳐나갔다. 그러나 오갈 데 없는 이필형 등 3인은 2개월 가까이 이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이들은 이 집이 송진우 암살범의 집이며, 자주찾아오는 김흥성이란 인물이 다름아닌 송진우 암살범인 김인성(金仁成)의 친형임을 알게 되었다. 김흥성은 동생의 옥바라지를 하다가 신동운을 만나 그와 교류하기 시작한 인물이다. 그의 동생 김인성은 일본해군지원병 출신으로 해방후 일본해군 출신 김의현,백남석,이창희,신동운 등 한현우 문하생과 교류하다 송진우 암살에 가담했던 것이다. 김인성의 동생 김영성 역시 김흥성과 함께 신동운의 집에 출입했다. 신동운은 한현우의 옥중수기를 읽게 했고 송진우 암살사건 결심공판을 방청시켜 한현우의 최후진술을 듣게 해다.
신동운은 이때 이필형에게 '한지근'(韓智根)이라는 가명을 지어주었다. 신동운은 청년들이 갖추어야 할 것이 인(仁),의(義),예(禮),지(智),충(忠)이라고 강조하면서, 대한민국의 한(韓)을 성으로 안중근(安重根)의 근(根)자를 돌림자로 삼아 가명을 지었다. 신동운 자신은 충(忠)으로 따서 '한충근'(韓忠根)으로, 유용호는 한예근(韓藝根)으로, 김훈은 김인근(金仁根)으로 했다.
극우테러단체의 조직적 연계혐의는 드러나고
이즈음 신동운은 이들의 고향선배인 김영철(金永哲)이란 인물을 소개했다. 평안북도 강계 출신으로 단신 월남한 김영철은 김구의 애국단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와 관련을 맺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나이는 예순을 갓 넘긴 정도였다. 김영철은 여운형의 암살사건뿐만 아니라 송진우의 암살, 그리고 이승만 암살미수사건에도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었다.
직업적인 극우 테러리스트였던 김영철은 김흥성,김영성,이필형,유용호,김훈 일파에게 다른 극우 테러단체를 소개했다. 김흥성은 김영철을 통해 혁신탐정사의 사장인 양근환과 백의사의 사령인 염동진을 알게되었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혁신탐정사와 백의사는 해방정국에서 이름을 떨쳤던 극우 테러단체들이다.
김흥성 일파는 신동운,김영철,양근환,염동진 등과 대화,토론하면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이들은 민족분열의 책임자가 몽양 여운형이라는 방향으로 결론을 몰아갔다. 김흥성 일파의 결론도 그러했고, 김영철,양근환,염동진의 결론도 동일했다. 이들이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은 대체로 1947년 5월 무렵이었다.
이들은 송진우 암살범의 소굴로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던 한현우 집에서 이 같은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경찰은 과연 이같은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까? 테러범의 집에서, 테러조직 '격몽의속'의 조직원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극우 테러단체들과 접촉하고, 테러를 모의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찰의 사찰망을 벗어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1947년 5월초 이들은 신동운의 주선으로 서울 저동 2가 유풍기업 2층으로 이사했다. 2층 벽돌건물인 유풍기업은 당시 극우단체 양호단이 접수한 적산건물로 2층방은 주로 월남민이 세들어 살고 있었다. 김흥성일파의 거주지가 암살범의 집에서 극우단체의 건물로 옮겨진 것이다. 장소를 옮긴 것은 아마도 보안과 비밀유지 때문이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여운형 암살에 관한 구체적 행동계획이 수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암살을 결정하고 나자 경찰의 집중적 감시를 받는 한현우의 집은 구체적 암살계획 실행장소로는 부적절했을 것이다. 만약 아무런 암살계획이 세워지지 않았다면, 경찰 감시를 이유로 아무 거리낌없이 지내오던 한현우의 집을 떠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들에게 암살계획을 입안하고 결심하게끔 만들었는가 하는 점은 밝혀지지 않았다. 어떤 인물이 암살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일과 그 사람을 직접 암살함으로써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엄청난 차이를 지닌다. 이 양자 사이에 놓인 엄청난 간극은 현재로선 분명히 해명될 수 없다. 범인들은 배후세력과 관련된 이 부분에 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지키고 있다. 분명 중간 브로커 역할을 하던 신동운이 매개 역할을 했을것이다.
이들은 유풍기업으로 옮겨온 지 보름 뒤인 5월 중순경 여운형 암살을 결정했다. "민족분열자를 제거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김흥성이 나서서 5월말쯤 혁신탐정사의 양근환으로부터 일본 99식 권총 한자루를 얻어왔다. 그러나 총체가 너무 크고 낡았으며 실탄 5발뿐이었기 때문에 김흥성은 다시 백의사의 염동진으로부터 미제 45구경 권총을 얻어왔다. 권총 두 자루를 입수한 것이다. 그리고 45구경 권총이 여운형살해에 쓰여졌다. 이부분에 관해 신동운과 김흥성 일파의 진술은 차이가 있다. 신동운은 총을 구하기 위해 김영철을 찾아갔지만, 7월초 김영철은 염동진에게서 구한 권총 2자루를 김흥성에게 건네주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김흥성은 사격훈련을 자신이 지도했다고 주장했지만, 신동운은 일본해군 항공병학교 출신인 자신이 7월초 10여 일간 방안에서 사격훈련을 시켰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필형과 김훈,유용호와 김영성으로 2개 조를 짜서, 1개 조가 저격을 하고 1개 조는 망을 보기로 결정했다. 행동은 7월초부터 개시되었다. 당시로서는 여운형을 노리는 다른 손들이 많았기 때문에, '공'을 세우려면 일을 서둘러야 한다는 조바심마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10여 일간 여운형을 노리기 위해 길목을 지켰다. 범행장소로는 광화문 근로인민당 앞(現광화문 동화면세점), 계동의 여운형 자택 앞 등이 검토되었지만 부적절했다. 최종 범행장소로 혜화동이 결정되었다.
범행에 앞서 7월 12일 신동운은 유령단체를 하나 조직했다. 한 사람이 검거되더라도 진술을 일관되게 해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래서 만든 것이 '건국단'이었다. 평양에서 건국단 단장의 지시를 받고 송진우 암살범으로 당시 평양에 있던 백남석의 소개장을 갖고 월남, 한현우를 찾아왔다고 진술하기로 각본을 짰다. 건국단장 김인천(金仁天)은 물론 가공인물이다. 김훈의 가명인 한인근에서 '인'자를, 북한에서의 본명이 김성호의 '호'자에서 '천'자를 빼서 '김인천'이란 이름을 만들었다.
사건 전날인 1947년 7월 18일 신동운이 여운형의 다음날 일정을 정확히 알아냈다. 한독당 계열 인사가 자주 모이는 낙원동 강원여관에서 이 정보를 빼냈다. 여관주인은 송진우 암살사건 공범이자 장덕수 암살에 깊게 관계한 최중하(다른이름으로 최서면)의 어머니였다. 정보내용에 따르면 여운형이 명륜동 정무묵의 집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하오 1시께 서울운동장에서 열릴 예정인 모임에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아주 정확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암살이 벌어졌다.
일제가 남긴 정신적 유산에 충실했던 한현우
총을 쏜 것은 이필형이었지만, 여운형 암살에는 많은 극우테러 관계자들이 등장했다. 테러의 하수인이었던 이필형을 비롯한 4인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이름이 거론되었다. 가장 밀접한 것은 한현우의 추종자인 신동운이며, 그보다 상급에 속하는 김영철,양근환,염동진 등의 이름이 드러났다.
먼저 신동운을 테러에 입문시킨 한현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현우는 여운형 암살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암살자들은 그가 만든 '격몽의숙'에 관계했고, 그로부터 정치,사상적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한현우는 여운형 암살을 직간접적으로 교사한 배후조종자의 한명이기도 하다. 한홍건,한계일,한원률이라는 가명을 썼던 한현우는 평안북도 중간진이 고향으로 강원도 간성에서 소학교를 졸업했다. 4형제의 장남이었다. 1929년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중퇴후 1930년 일본에 건너갔다. 1937년 와세다 대학 제2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여 1941년 동 대학 정치학부를 졸업했다. 한현우의 공판기록에 의하면 그는 1930년 도일직후 읽은 도쿄제국대학 교수 가나카와의 논문을 읽은 후 '민족자결주의에 기초한 민족주의자','급진자유주의자'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처지에 있던 자들이 해방직후 한현우를 만나 단숨에 극우 민족주의자,애국자로 탈바꿈을 시도했던 것이다. 불안정한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지만, 극과 극이 서로 상통하는 이치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일본의 극우파시즘으로 무장한 한현우가 머리가 되고, 일본군대에서 철저히 세뇌된 지원병 출신들이 손발이 되어 극우테러조직 '격몽의숙'을 만들었다. 이 '격몽의숙'을 구성한 사람들의 껍데기는 조선사람이었지만, 그 내용과 중심사상,그리고 그들을 지배했던 정신은 철저히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방식도 일본 극우파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결국 단 한번도 애국활동을 해보지 않은 이들은 일본 극우파시즘의 정치,사상적 세례를 받았고,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군대에서 배운 사격술로 조선의 애국자를 살해했다.
민족의 장래와 운명에 개입할 아무런 권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수직적 신분상승을 위해 가장 비열한 암살행위를 저질렀다. 그 앞에 어떤 미사여구를 붙이던 간에 이는 용서받지 못할 철저한 민족반역행위였다. 이런의미에서 이들은 정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철저히 봉사했던 셈이다. 같은 이유에서 일본이 한반도에 행한 죄악은 패전으로 종식된 것이 아니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오랜기간에 걸쳐 뿌려놓은 사상적이고 정신적인 독소가 한반도에 광범위하게 뿌리깊게 심어졌고, 조선의 가장 중요한 정치지도자들이 그 첫번째 희생물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김영철(金永哲)이다. 1947년 당시 60줄을 넘겼던 김영철은 평안북도 강계 출신으로 20대 때에 독립운동에 투신, 김구의 애국단원 혹은 임시정부 행동대원으로 활약했다고 주장하던 인물이다.(이 김영철이란 인물은 '광복군 결사대'출신으로 1963년 건국훈장 받았습니다.) 김영철은 김구의 산하에 있던 서북청년단(당초 서북청년단은 김구 산하였다가 나중엔 이승만 산하로 옮김) 또는 그와 유사한 단체의 행동대장이었던 사람으로 당시 반공을 모토로 한 테러리스트 단체 주요간부들은 서로 통하는 처지였었고, 여운형 암살 사건 당시 경찰과 거래를 통해 단독범행으로 사건을 조작했다. 해방 후 월남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45년 11월부터 전백과 접촉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영철은 백의사 집행부장이라는 고문직으로도 활동했으며, 한현우 재판정에서 신동운을 알게 되었다.
한현우와 전백이 구속되고 난 뒤 김영철은 신동운과 접촉을 유지하면서, 와해된 '격몽의숙'을 재정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여운형 암살과 관련해 김영철은 암살범들에게 우익테러조직의 거두인 양근환과 염동진을 소개한 바 있다.
먼저 양근환을 살펴보자. 그는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1920년대에 대표적인 친일신문 <시사신문>을 발행하던 친일언론인 민원식을 도쿄의 스테이션 호텔에서 칼로 찔러 죽인 인물이다. 그 대가로 13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당시 송진우가 그의 딸을 거두어 키웠기 때문에 양근환은 송진우에게 호감을 품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국내와 만주지방을 유랑하다가 경기도 파주에 칩거했다. 5척 단신체구였지만 성질이 강직하고 술을 좋아하고 한시를 즐기는 '강직한 선비'였다. 스스로 '국사'(國士)를 자칭했다.
해방 후 양근환은 인민공화국 수립에 반대하면서 부하들과 여운형,허헌,박헌영의 암살을 꾀한 바 있다. 다행히 중재가 되어서 1945년 10월 5일 '각정당수뇌간담회'가 개최되어 당장의 급한 불을 끄기는 했다. 이 자리에는 한민당측의 송진우,백관수,김병로, 국민당의 안재홍, 건국동맹의 최근우,여운형, 인공의 최용달,허헌, 재건파공산당에서 이현상,김형선이 참가했다. 간담회에서 여운형은 '인공을 포기할 수 있다'고 누누이 강조했고, 송진우는 훈정론에 가까운 얘기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양근환은 1946년 7월 12일 송진우암살사건 재판정에 나와 이렇게 증언했다.
=======================
양근환:송씨의 말이 우리조선은 오랫동안 일본의 압박 밑에 있었으므로 정치적 훈련이 너무나 박약하니 앞으로 조선청년들을 독립된 후 미국에 보내어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였소.
재판장:그러면 조선은 인재가 없어서 독립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던가?
양근환:그런 것이 아니오. 만약에 그런 의미에서 말했다면 그 자리에서 송씨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소.
=======================
그러나 이 자리에서 양근환은 그날 송진우의 발언이 담긴 <조선주보> 1945년 10월 15일호를 증거로 제출했다. 한편 해방직후부터 양근환은 테러리스트들을 끌어모아 '혁신탐정사'라는 테러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휘하에는 무등(武藤) 원수 암살미수사건 등으로 알려진 손기업, 동척본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 사건의 생존자인 유남수, 적군(赤軍) 중좌를 지낸일이 있다는 홍(洪)모, 황해도 해주에서 도인민위원회를 습격해 간부 여러 명을 살상하고 월남한 화세다대학 출신의 김인식(金仁植) 등이 있었다. 수송동 46-1번지에 본부를 둔 혁신탐정사는 말 그대로 정탐과 공작이 주요 업무였다. 게다가 극우적이며 국수주의적 테러리스트였던 양근환은 행동방식에 일정한 정형이 없었다. 1946년 12월 3일 경무국 수사국장이었던 최능진이 경무부장 조병옥의 비행을 폭로,비판하다 파면된 사건이 있었다. 이를 본 양근환은 조병옥이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지 않으면 신상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경고를 발표하였다. 양근환이 협박성명을 발표하자 조병옥은 혁신탐정사가 사설탐정으로서 1945년 11월 13일부 군정청법령 제28호 제2조를 위반했기 때문에 해산시킨다고 12월 17일 발표했다. 그러나 혁신탐정사가 해산된 것 같지는 않았다.
양근환은 김영철의 소개로 신동운과 김흥성을 만나게 되었고, 김흥성 등에게 여운형이 민족분열의 책임자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그에게 일본 99식 권총 한 자루를 건네주기도 했다. 물론 여운형을 살해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근환은 여운형 암살과 관련해 얼마나 깊숙히 조직적으로 개입하고 배후조종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