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軍 지휘부의 自害 행위
추적/ 여수 14연대 반란 진압을 양민학살로 몰고간 영화 「애기섬」 제작에 군 장비가 지원된 과정
여순 14연대 좌익 반란사건을 통일운동의 성격을 띤 것처럼, 그리고 국군의 진압을 양민학살로 부각시키고 국군이 함포사격으로 양민 천 명을 죽였다고 조작한 영화 제작에 헬기, 트럭 등 軍 장비를 지원하다
<나레이터:(그때 당시의 상황처럼 선동가의 억양으로) 지금 경찰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경찰을 타도하자,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병을 반대한다, 반대한다. 우리는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자, 조국을 위해서 가자>
禹鍾昌 月刊朝鮮 취재2팀장(woojc@chosun.com)
6·25 전쟁 2년 前인 1948년 10월19일, 麗水(여수)에 주둔중인 國軍 14연대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장교들을 사살하고 麗水, 順天(순천) 일대를 일시 장악했던 「麗順(여순) 반란사건」을 통일운동의 성격을 띤 것처럼, 그리고, 국군의 진압 작전을 양민학살로 부각시킨 영화 제작에 軍 지휘부가 헬기, 트럭, 소총, 군복 등을 지원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영화는 작년 7월에 촬영을 시작, 1년 후인 지난 8월 초에 촬영을 끝내고, 편집작업을 거쳐 80분짜리 다큐멘터리 劇(극) 영화로 완성되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애기섬」. 여수와 남해 사이에 있는 무인도 이름에서 따왔다.
이 영화를 만든 「미디어 인」의 장현필(36) 감독은 『부산 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에 상영하기 위하여 9월8일 영화를 출품했다』고 밝혔다. 부산 국제영화제 준비위원회 사무국은 「애기섬」이 출품되었음을 확인해 주고, 『3명의 심사위원이 상영 여부를 결정하며, 여기서 통과되면 오는 11월9일부터 열리는 영화제에서 상영된다』고 밝혔다.
「麗順 14연대 반란사건」은, 유엔의 결의와 대다수 국민들의 열망에 따라 1948년 5월10일에 실시되었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을 반대하라는 北의 지령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제주 4·3 무장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麗水 주둔 제14연대 1개 대대에 제주도 출동 명령이 떨어지자, 14연대 내부의 일부 좌익 군인들이 1948년 10월19일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는 구실로 신생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일으켰다(「한국전쟁사」 참조).
麗順 14연대 반란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해 국군 내부에 침투한 일부 좌익 세력이 일으킨 반란에 여수, 순천지역에 잠입해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 기록돼 있으며(국사 교과서 참조), 국방부의 공식 의견도 「14연대 內의 남로당 요원 40여 명이 주동이 되고, 지역 좌익세력이 가담하여 일으킨 6·25 이전 최악의 軍內 반란사건이자 정부를 전복하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일으킨 국가적 大반란 사건」이었다.
이 叛亂으로 14연대 제1대대장 김일수 대위, 제2대대장 김순철 대위, 제3대대장 이봉규 대위, 연대 정보주임 김래수 중위, 연대 작전주임 강성윤 대위 등 20여 명의 장교가 반란 현장에서 죽음을 당했고, 麗水, 順天 지역을 점령한 좌익 군인들에 의해 여수 지역에서만 官民 1200 명이 학살되고 중蟁경상자 1150명, 가옥 소실蟁파괴 1538 棟, 이재민 9800명이 발생하였으며, 순천 지역의 인명 피해도 약 400명에 달하는 처참한 비극을 초래하였다고 국방부 戰史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한국전쟁사」에 기록돼 있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叛亂이라고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이 사건을, 문제의 영화 「애기섬」에서는 「李承晩 정부가 반공주의 국가를 만든다는 미명 아래 수없이 많은 민간인의 죽음을 요구한 사건」이라며 사건의 본질을 왜곡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입수, 분석한 결과, 공산주의자에 의한 반란이란 성격은 희석되었고, 국군에 의한 진압은 양민 학살로 과장돼 있었다. 총 93개의 신(scene·장면) 가운데 20여 개 장면에서 국군과 경찰에 의한 양민 학살을 다루고 있으며, 반란군에 의한 국군과 민간인 학살은 일부 장면에 불과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해 일으킨 무장 폭동」이라고 규정한 제주 4蟁3 사건을 이 영화에서는 4·3 항쟁이라는 용어를 사용, 폭동을 「의거」 수준으로 미화시켰으며 여순 14연대 반란사건도 그냥 여순 사건이라 호칭했다.
非전향 공산주의자 영화에 출연/19개 反共단체의 반대
이 영화가 주는 또 하나의 충격은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非전향 공산주의자를 출연시켜 그의 주장을 그대로 소개한 점이다. 영화 속의 증언자김영만은 軍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로 반란 당시엔 14연대 소속 하사였다.
그는 軍內 좌익들에 대한 肅軍(숙군) 작업이 진행되던 1948년 10월에 체포되었다. 그는 전향 권유를 거부하고 39년간 감옥살이를 했다.영화 출연 후, 김영만은 金大中 정부가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지난해 9월2일 北으로 떠났다. 非전향 공산주의자가 방송과 인터뷰한 적은 있으나 영화에 등장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다큐멘터리물인 이 영화에 劇 전개자로 등장하는 순천대 역사학부 洪英基(홍영기·44) 교수는 劇 중에서 『국가보안법이 여순 사건으로 생겼으니까 이제 여순 사건도 해결되는 시점에서 국가보안법도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영화를 만든 목적은 영화 제작사에서 작성한 팸플릿 「기획의도」에 이렇게 나와 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근대사와 현대사의 모든 역경을 겪으시고 살아오셨습니다. 특히 전라도 지역의 역사의 아픔과 恨을 가슴 가득 담고 사셨습니다. 일제 하의 서러움에서 해방이 되고, 해방 이후 左右 이념 속에서 4·3 항쟁, 지울 수 없는 麗順 사건, 한국전쟁, 국민보도연맹원 사건, 4·19 학생운동, 5·16 군사쿠데타, 광주민주화운동 등 역사의 恨과 분노가 그들의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 다큐멘터리式 劇영화의 의도는 우리 전남 동부지역의 최대의 恨이며, 미궁의 역사인 麗順 사건을 생각하여 올바른 역사를 만드는 데 계기가 되고자 합니다. 한 편의 좋은 영화는 지역을 알리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영화 「애기섬」의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을 맡으며 제작을 총 지휘한 사람은 「미디어 인」의 장현필 감독이다. 장 감독은 光州 출신의 386세대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光州 민주화 운동을 보았다고 했다.
19개 反共단체의 반대
시나리오는 작년 5월에 완성되었다. 장 감독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시나리오 제작 과정을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전남 동부지역사회연구소 소속입니다. 순천대학 역사학부 洪英基 교수가 문화역사분과위 위원장이고 제가 部(부)를 맡고 있었습니다. 연구소를 들락날락하다가 알게 모르게 어깨 너머로 5년 넘게 麗順 사건(기자 注;장현필 감독은 인터뷰 내내 麗順 반란사건을 麗順 사건이라고 말했다)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麗順 14연대 사건을 널리 부각시켜야 한다는 얘기를 洪교수와 많이 나눴습니다. 작년 3월에 영화화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두 달 후인 5월에 시나리오를 완성했습니다』
장 감독은 영화를 만든 목적에 대해 『과거의 모든 사건들에 대해서 서로 화해하고 새로운 역사, 새로운 미래를 만들자는 화해의 뜻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시나리오는 麗水 지역의 향토사 연구소인 「여수지역사회연구소」(약칭 여사연蟁소장 이영일)와 順天의 「전남 동부지역 사회연구소」(약칭 동사연·소장 서희원 변호사)에서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작성되었다고 한다.지역 역사 연구를 위해 1996년에 설립된 「여사연」은 1998년부터 麗順 반란사건 조사에 착수, 「麗順 사건 실태조사집」1,2,3권을 발간했고, 1995년에 설립된 「동사연」은 전남 동부지역(여수, 순천, 보성, 벌교, 하동 일대)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 순천灣(만) 보존운동, 섬진강 수질조사 등을 벌이는 한편으로 麗順 반란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목적 아래 피해 신고 및 증언 접수 창구를 운영하고 있다.
영화 「애기섬」은 작년 7월부터 촬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소식이 알려지자 마자 지역 사회의 반대에 부딪쳤다. 재향군인회, 대한경우회, 무공수훈자회, 6·25 참전자회, 상이군경회, 미망인회, 유족회 등 여수, 순천 지역 19개 단체가 제작에 반대하고 나섰다.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단체의 한 관계자는 이름과 직책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영화 「애기섬」이 촬영을 끝내고 부산 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반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麗順 반란을 진압했던 군인과 경찰이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애기섬」의 시나리오를 보았습니까.
『제작사에서 보여 주지 않아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료 조사와 관련자 증언이 한 쪽에 치우쳐 있고, 영화 촬영 현장 분위기에서 우리가 우려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기획 의도가 순수하다면 시나리오를 공개해야 할 텐데 아예 보여 주지를 않아 더더욱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애기섬」 제작에 반대 분위기가 있다는 것을 여수, 순천 시민들도 알고 있습니까.
『작년 10월, 제작에 반대하는 19단체가 합동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지역 일간지 몇 군데와 지역 MBC 방송에서 기자회견을 보도했기 때문에 지역 사회에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영화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반반이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서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어쩔 수 없지 않느냐며 반대하는 분도 있고, 실제로 무고한 시민이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엔 軍에서도 반대/趙成台 당시 장관:『제작되어선 안 될 영화로 판단』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작은 강행되었고, 영화는 완성되었습니다. 결국 반대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제작사측은 순수한 예술작품이라 주장했고, 시사회할 때 보여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렸으나 시사회 참석 통보도 없고, 시나리오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제작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國軍의 반란군 진압을 비난한 영화 제작에 軍에서 장비를 지원한 사실은 알고 있습니까.
『영화 촬영 초기부터 軍과 긴밀한 협조 아래 대책회의를 가졌습니다. 軍도 강경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국가 안보의 제1보루가 軍이고, 우리 보훈단체는 제2보루입니다. 軍에서 우선적으로 영화 제작을 저지할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2선에 물러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4월인가 5월부터 향토사단에서 장비 지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시나리오의 일부 내용을 삭제, 변경하는 조건으로 軍에서 장비를 지원했다고 들었습니다. 시나리오의 强度(강도), 다시 말해 좌경화 强度가 약화되었다, 軍의 요구로 시나리오 내용 중 일부가 바뀌었다는 말을 軍 관계자로부터 듣고 안심했던 것입니다』
―「애기섬」이란 영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다는 미명 아래 전혀 다른 사실을 갖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잘못되었고, 잘못되었다는 점을 반대를 통해 경고한 것입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일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를 부각시켜 전체를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영화제작사에 「우리도 국가 차원의 재조사를 원한다」는 제의도 하였습니다』
趙成台 당시 장관:『제작되어선 안 될 영화로 판단』
영화 「애기섬」 제작 초기 軍 지휘부는 趙成台(조성태) 국방장관 체제였다. 지난 3월 개각에서 물러난 趙成台 前 장관은 영화 「애기섬」을 기억하고 있었다.
『작년 중반기부터 문제가 된 사건이었습니다. 보고를 받은 저는 제작되어서는 안 될 영화라고 판단했고, 향토 사단장과 지역 기무부대장, 지역의 국가정보원 관계자, 지방자치단체장들이 긴밀하게 협조해서 제작을 저지하라는 단호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麗順 반란이 어떻게 애국운동입니까』
영화 줄거리에 대해 趙成台 前 장관은 『보고를 받아보니까 볼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어서 시나리오를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趙成台 前 장관은 영화 「애기섬」이 軍의 반대에 부딪쳐 제작 중단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軍의 장비 지원을 받아 촬영을 끝내고 부산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주자 그는 깜짝 놀랐다.
향토사단에서 장비 지원이 있었다고 알려 주고, 영화제작을 반대했던 軍이 태도를 바꾸게 된 이유를 물어보자 趙成台 前 장관은 『누군가가 순진한 군대를 이용했거나 아래 사람의 잘못된 보고에 軍 지휘부가 속은 것 같다』고 말했다.
趙 前 장관은 영화 「애기섬」이 제작된 것과 관련, 『親北 좌익세력은 틈만 있으면 비집고 들어간다. 조금만 틈을 주면 나중에는 만회할 수 없을 정도로 당하고 만다』며 최근의 時流를 우려했다.장현필 감독도 영화 제작 과정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저는 작년 7월에 촬영을 시작해 작년 12월이면 작품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반대가 워낙 극심해 촬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촬영이 시작된 후, 「만약 영화 내용 중에 명예훼손 부분이 있으면 모든 민·형사 책임을 져야 한다」는 催告狀(최고장)을 세 번이나 받았습니다.麗順 사건은 여수와 순천시의 공동 문제이기 때문에 두 市에 제작 보조금 지원을 신청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 제작비를 지원했는데, 그 일로 관계당국으로부터 혼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오기도 나고 화도 났습니다. 그 바람에 대본 내용이 좀더 과격해졌습니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는 보도연맹 사건은 다룰 생각이 없었는데 반발 때문에 폭을 넓혀 다루게 되었습니다』
장 감독은 『때리니까 나도 싸운다 하고 맞서면 50년 前의 좌·우익 골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때는 죽창을 들었고, 지금은 펜을 들었다는 양태만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아무 대꾸도, 대응도 하지 않았습니다』고 말했다.
장 감독에 따르면 작년 12월부터 반대 분위기가 약해지기 시작, 올 1월부터 누그러졌다고 한다. 이에 따라 여수, 순천, 광양, 구례, 하동, 보성 등 반란 사건 당시의 무대인 전남 동부지역에서 촬영이 재개되었다.
『국방장관 결재가 떨어진 것으로 안다』
軍의 태도가 반대에서 지원으로 바뀐 것은 지난 4월이었다고 장 감독은 말했다. 국방장관이 趙成台씨에서 金東信(김동신)씨로 교체된 후였다.軍에서는 군용 트럭, 소총, 군복 등을 지원했고, 보도연맹원들이 즉결 처분된 장소라는 애기섬 현지 촬영 때는 軍用 헬기를 제공했다. 6·25 전쟁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모 부대의 軍 막사도 촬영 장소로 제공됐다. 軍의 지원에 힘입어 촬영은 본격화됐다.
기자는 국방부에 『「애기섬」 영화 제작과 관련, 국방부에서 지원한 내용을 알려 달라』고 서면으로 질의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 대변인실은 『영화제작 全과정에 깊숙이 개입해 온 현지 부대장의 건의를 신중히 검토한 결과, 건의 내용(촬영용 헬기 1대, 차량 5대, 장비 100명분)을 조건부로 승인 지시하였다』고 알려왔다.
이 답변서에 따르면 국방부에서 지시한 조건은 「부대운영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지원하되, 보안 및 안전에 최대한 유의하여 사고를 예방하며, 시사회 前, 편집상태 확인 및 시나리오를 면밀히 검토하여 문제의 부분 삭제를 명문화 할 것임」이었다.
장 감독에게 軍의 장비 지원 대가로 시나리오 수정 등의 협상을 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거래는 없었습니다. 서로 간에 이해한다는 차원에서 지원이 이뤄졌습니다』고 말했다.
―軍에서 처음에는 영화제작에 반대하다가 올 4월부터 지원키로 방향이 바뀌는데 이렇게 되려면 軍 최고 지휘부의 결심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여지는데요. 軍의 명예를 실추시킬지도 모르는 일에 軍에서 장비를 지원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니까요.
『저는 국방장관의 결재가 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련의 변화 과정이 빅딜의 요건은 절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쪽에서 봐서 내용상 도와줘도 아무 하자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이 정부 들어와서 시대조류가 바뀌니까 앞서가는 행정을 하기 위해 軍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려고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좋게 말하면 軍이 상당히 앞서가는 행정을 하고 있는 측면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무조건 막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니까 軍의 입장을 정확히 표명할 필요가 있었을 거예요』
이런 과정을 거쳐 영화 「애기섬」은 완성되었다. 시나리오에 따르면 이 영화는 麗順 14연대 반란사건의 의미 설명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설명은 다큐멘터리物에서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흔히 시도하는 字幕(자막)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 字幕은 40초 동안 화면을 지배한다. 내용은 시나리오에 이렇게 적혀 있다.
「동족간 유혈진압을 거부하고 통일조국을 부르짖으며…」
<1948년 10월19일 한반도 최남단 여수에서 제14연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해방이 되어 통일조국을 원했건만 남과 북에 각각의 정부가 생기면서 그토록 원했던 통일조국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48년 4월3일 제주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경찰과 군인의 진압으로 부족하여 제14연대 중 1개 대대에게 진압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남로당 계열의 하사들이 주축이 되어 동족 간의 유혈진압을 거부하고 통일조국을 부르짖으며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켜 14연대 2500명이 인민군으로 변했다.
이승만 정부는 제14연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불안한 정권유지와 政敵(정적) 제거의 기회로 삼고 철저한 반공주의 국가를 만든다는 미명 아래 수없이 많은 민간인의 죽음을 요구했다. 이것이 바로 麗順 사건이다. 그것은 역사 이래 최대의 민간인 학살인 1950년 7월의 보도연맹 사건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 軍警에 의해 무참히 학살된 수많은 사람들은 50여 년이 넘도록 그들의 죽음조차도 감히 말 할 수가 없었다…>
字幕이 사라지면, 애기섬으로 들어가는 파노라마 그림이 나오면서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네 사람의 이름과 신분이 字幕으로 나온다. 「14연대 출신;곽상국, 사찰계 외무주임;박오선, 특무대원;배학래, 비전향 장기수;김영만」인데, 이들은 麗順 반란 사건 당시의 실존 인물이다. 이런 실존 인물의 등장으로 이 영화는 사실에 입각해 제작되었다는 인상을 풍긴다. 장 감독은 등장 인물 「곽상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4연대 출신 생존자는 7, 8명뿐인데 그 중의 한 명입니다. 그는 14연대 의무병이었습니다. 좌우 이념적 색채가 없는 기독교 신자였어요. 여순 사건 발생 이틀 후, 그는 집 뒤의 돌산(여수 소재)으로 도망쳤습니다.
반란이 진압된 후 그는 도망쳤다는 이유로 동사무소, 돌산支署, 여수경찰서, 광주道警, 광주 특무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억수로 맞았습니다. 3개월 동안 고문을 받고, 죽음 일보 직전이었는데 화장실에서 대변 냄새를 맡고 깨어났다고 합니다. 그후 목사 생활을 하다가 정년 퇴직했습니다』
「곽상국」은 이 영화에서 곽목사로 등장한다. 그는 「장면 31」과 「장면 32」에서 자신이 당했던 고문을 증언한다. 곽목사 인터뷰는 1분30초 동안 방영된다. 시나리오를 인용한다.
<곽목사; 물가도 비싸고 살기가 힘들어서 아마도 사람들이 쉽게 동화가 되었지요. 뭔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컸지요. 하지만 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끔찍한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말들을 안해요.
곽목사의 한스러운 인터뷰 계속된다.
곽목사;경찰들이, 特警(특경)들이 서울서 내려와 반란군 소탕한 날, 의용군들과 같이 우리 집에 쳐들어 와서 새벽 2시에 총을 쐈습니다. 손 들고 나오라고 해서 손들고 나가니까 우리 집 사람이랑 부모님을 닥치는 대로 팼습니다. 총 개머리 판으로, 떡매로, 막대기로 유혈이 낭자해 있는데 새벽 5시경 동사무소로 끌고가서 죽인다고 해요.
내가 집에서 끌려 나올 때 피에 낭자한 어머니, 아버지, 집사람이 사립문에서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볼 때에 정말 기가 막혔어요.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헌병대로 넘겼습니다. 나중에 깨어 보니 변소 안에다 갖다 놨어요. 거기 있다가 나중에 사형시킨다고 나가라 하대요. 몇 사람 사형시킨다고 끌고 가서 4연대 사형장에 가서 사형시킨다 하더니 포로수용소로 가래요>
전향 거부 김영만의 北行/여수 시내에 함포사격 있었다?
출연자 「박오선」은 영화에서 박선생으로 나온다. 장 감독에 따르면 박선생은 여순 반란 당시 순천경찰서 사찰계 외무주임이었다. 박선생은 여순 사건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65」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만 해도 어두운 시절이라 진압군(국군)의 말 한 마디로 사람이 죽고 살고 했으니까. 서로 간에 고자질과 밀고로 이유 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너무 많아. 한 동네에서 초상날 같은 집이 얼마나 많은데…. 그때만 해도 부역자나 빨갱이 사상만 있다면 골짜기에 끌고 가서 따따따따 하고 막 쏘았으니까. 억울한 혼령들이 지금도 구천을 떠돌고 있을 겁니다>
그는 또 「장면 76」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역사를 원망하고 싫어할 것입니다. 죄 없는 민간인도 많이 죽어들 갔지만 정부 진압군도 구국의 일념으로 많이 희생되었지요. 그 당시 죽어버린 동료들은 살아서 역사를 뒤돌아보는 아픔과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하루빨리 모든 사람들이 죽기 전에 이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
『박선생이란 사람은 여순 반란을 어떻게 평가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장 감독은 『그 분은 지금도 李承晩 추종자이고 영화에 출연해서도 여순 사건은 좌익의 폭동이라고 증언했다』고 말했는데, 시나리오에는 박선생의 그런 말이 없었다.
등장 인물 「배학래」는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당시 군청 공무원이었다고 장 감독은 말했다. 「배학래」에 대한 장감독의 설명이다.
『반란이 진압되고 좌익 색출 과정에서 배학래씨는 많은 몰매를 맞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집안을 살릴 욕심으로 특무대(지금의 기무부대) 문관을 지원, 6·25 전쟁 초기엔 문관이었으나 그후 정식 특무대원이 되어 여수, 순천, 구례, 하동에서 대단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배씨는 반란이 진압된 후 특무대원으로서 반란 현장 조사에 참여했습니다.
배씨는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다고 말했습니다.애기섬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즉결 처분할 때 특무대 문관 신분으로 현장에 있었던 중요 증인이 배학래씨입니다. 배씨는 여순 사건 진압에 대해 군인으로서 정당한 임무였다고 말했습니다』
장 감독에게 非전향 공산주의자 김영만의 증언을 받게 된 과정을 물어보았다. 장 감독은 『그 분이 작년 8월 麗順 사건 공동 墓(묘)를 찾은 적이 있는데 그때 인터뷰를 땄다』고 말했다.장 감독은 김영만이 北에 간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구례郡 마산面 사람입니다. 구례에는 일가 친척이 아무도 없고, 딸 둘이 있는데 어디 사는지를 모른다고 했어요. 그는 北에 갈 이유가 없는 분이에요. 제가 그 분한테 「굳이 北에 가는 이유가 뭡니까」하고 물었더니 대답이 정말 간단했어요.
「대한민국 정부가 나한테 해 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싫으니까 간다」는 거예요』 이 영화에서 다큐멘터리 부분을 리더하는 사람은 순천대학 사학부 洪英基 교수인데 이 영화에 직접 출연, 麗順 반란 당시의 현장을 안내하고 해설한다. 洪교수를 위시한 실존인물의 증언은 시나리오상 러닝 타임 80분 중 15분을 차지한다.
영화 「애기섬」의 도입부는 이처럼 麗順 반란사건의 발생과 진압 과정을 실존인물들의 증언으로 채우고, 그 다음 장면부터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劇이 등장하며 劇에 이어 다시 다큐멘터리가 등장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劇은 左도 右도 아닌 한 民草(민초)의 가정을 등장시켜 麗順 반란사건이 생김으로 인해서 이 가정이 파괴돼 가는 과정을 그려놓았다. 劇에서의 주인공은 말심이 어머니 역을 하는 조영목씨다.
그녀는 20代 후반으로 순천 시립극단 단원인데, 영화 출연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장 감독은 말했다.이 영화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 제목 「애기섬」은 보도연맹 사건 당시의 민간인 집단학살 장소라는 게 장 감독의 말이다.
여수 시내에 함포사격 있었다?
실존 인물이 등장해 증언하는 다큐멘터리 부분과 배우들의 연기로 이뤄진 劇을 혼재시킨 형식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 장 감독은 『考證(고증)을 거친 사실적인 이야기란 점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건이 考證을 거쳐 사실로 확인된 것처럼 묘사하는 장면이 일부 등장한다. 이는 역사의 왜곡이 아니라 역사의 造作(조작)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국군이 여수市를 탈환하기 위해 여수市에 함포사격을 했다는 장면이다. 여수 진압작전, 불타는 여수 서시장과 중앙시장, 진압 지휘관, 죽음을 쳐다보는 아이들, 손을 든 학생 등의 사진을 빠르게 비쳐 준 뒤, 역사적 考證을 통한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字幕과 함께 나레이션으로 처리되었다. 인용하면 이렇다.
<24일(10월24일) 여수 탈환을 시작하면서 25일 무차별한 함포사격으로 여수 시내가 완전히 불바다가 되었다. 그날만 여수시민 1000여 명이 죽고, 여수는 27일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함포사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국방부에 문의한 결과, 「반란군의 해상 탈출을 봉쇄하기 위해 해군 함정이 출동하였으나 포격 여부는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에 최종 편집과정에서 삭제토록 조치할 예정이다」는 대답을 들었다.
여수 지역 6·25 참전자會의 한 관계자는 『함포사격은 처음 듣는 얘기며, 영화 제작시 그런 얘기가 돌기에 지역 어른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戰史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전쟁사 제1권 「해방과 建軍」편에도 함포사격은 언급돼 있지 않다. 여수市 탈환 작전에서 함포사격이 있었다는 시나리오 내용과 관련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한국전쟁사에 나오는, 함정에서 박격포를 쏘았다는 대목이다. 「한국전쟁사」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여수를 탈환하기 위해 해군의 충무공號를 위시한 7척의 경비정과 부산 5연대의 1개 대대병력을 여수에 敵前(적전) 상륙시켜 海陸(해륙) 양면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부산에서 해군 LST로 여수에 상륙하기로 한 제5연대 1대대(대대장 金宗元 대위)는 10월27일 신항 앞바다에 접근하였으나 부두에서 叛軍들의 총격으로 상륙할 수 없었다.
그래서 500米(미)를 후퇴하여 함상에서 81밀리 박격포 2문으로 갑판 위에서 조준기도 없는 砲(포)를 가지고 사격하니 反動(반동)으로 砲板(포판)이 튀고 탄착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美 고문관의 조언으로 메트리스를 깔고 自測(자측)으로 사격을 하였는데, 수십 발을 쏜 다음에야 탄착이 近似(근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격으로 제12연대의 5중대장과 연대 씨름선수 안성수 하사가 전사하였다. 제12연대는 상륙 병사들에게 죽일 놈들이라고 아우성을 쳤다. 부두의 반군이 소탕되고서야 5연대 1대대는 무혈 상륙했다>
이로 미뤄 박격포 사격을 함포 사격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인 애기섬은 보도연맹원 학살 장소에서 따왔다고 장 감독은 주장하나 국방부는 기자에게 보낸 답변서에서 『그러한 역사적 기록이 없다』고 부인했다. 애기섬 학살은 자료 제시 없이 洪英基 교수의 나레이션으로 처리돼 있다.
<당시에 300여 구의 시신이 대마도까지 떠내려간 공동 묘가 대마도에 있습니다.보도연맹의 집단학살은 軍警 합동작전으로 전국적으로 행해졌습니다. 정부는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만으로 33만명 대부분을 집단 학살했다. 국민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이승만 정권은 국민을 그냥 죽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麗順 사건이 생긴 뒤에 반공체제로 만들기 위해 좌익사람들을 전향할 목적으로 보도연맹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에서 반공단체로 만들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역사 이래 가장 무서운 사건이 되고 말았지요. 부모님들의 묘가 지금까지 어디인지도 모르고 유가족들이 단체로 골짜기를 향해서 절하는 모습을 보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국군과 경찰에 대한 지나친 묘사들/국방부 입장:「軍의 요구와 입장을 충분히 반영 문제 없다」
애기섬에서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다는 주장에 대해 여수에 있는 6·25 참전단체의 한 관계자는 『麗順 14연대 반란사건 무렵, 애기섬에서 희생자가 있었다는 증언은 나오고 있다』며 『여수 사람들도 애기섬이 麗順 반란과 관계가 있지, 보도연맹원 즉결 처분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영화 시나리오에는 반란 진압에 동원된 국군과 경찰이 이런 식으로 묘사돼 있다.
<장면 6. 산속. 정부군이 지나가는 사이에 아이 엄마, 아이가 소리를 지를 수 없도록 입을 막는다. 아이 엄마, 잠시 후에 아이를 보고 놀란다. 아이 엄마, 아이의 죽음을 알고 강하게 슬퍼한다. 아이 엄마의 울음이 퍼지면서 산속으로 그림이 바뀐다> <장면 21. 이른 새벽. (10월)23일 순천이 탈환됐다.
軍警은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이름으로 피의 보복을 시작했다. 그냥 죽어야만 했다. 의심만 가도, 손가락질만 당해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죽어야만 했다. 눈 먼 총부리의 역사. 이것이 한국사의 최대 비극, 집단 민간인 학살의 시작이 될지는 역사도 모르고 있었다.
그 시절의 군인과 경찰은 삶과 죽음의 감별사였다.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神的인 존재였다. 초등학교에 수천명씩을 모은 뒤 정확한 판단도 없이 의심만 가면 그 자리에서 수십명씩 죽였다. 그 참혹한 麗順 사건은 최소 7000여 명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부모 형제를 죽였어도 53년이 지나도록 말도 하지 못했다>
<장면 40. 당산나무 옆. 말심 엄마 급하게 달려 온다. 말심이는 아이들과술래잡기를 하고 있다. 말심 엄마 오다가 말심이 하는 소리를 듣는다.말심 엄마;말심아, 너 맞아 죽을라고 환장했니. 누가 반란군 말 쓰라고 하든. 이것아, 반란군 말 쓰면 支署에 끌려가서 매맞아 죽어>
이 영화에서 다큐멘터리 전개자로 등장하는 洪英基 교수는 여순 14연대 반란의 최대 피해자는 민간인이라고 말한다.
<장면 23. 순천대학교 강의실. 학생들이 강의를 열심히 듣고 있다. 洪교수 강의를 하고 있다.
洪교수; 左도 右도 아닌 대부분의 민간인들이 바로 역사 굴레의 피해자들이지. 그 시절 대표적인 형태가 바로 산꾼이라는 사람이지. 총부리 앞에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반란군에게 끌려갔으나 도망을 와보니 어느 새 자기도 반란군이 되어 있었던 거지. 支署에 가서 신고하면 죽고 해서 동네 큰 뒷산에 숨어서 집안 소식도 듣고, 부부 간에 정도 나누고 그랬지…>
국방부 입장:「軍의 요구와 입장을 충분히 반영 문제 없다」
영화 「애기섬」이 부산 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사실을 확인한 기자는 이 영화에 대한 국방부의 입장을 알아 보기 위해 질문지를 보냈다. 다음은 기자의 질문과 국방부의 답변이다.
―麗順 반란 사건을 다큐멘터리로 극화한 「애기섬」이란 영화의 성격에 대하여 국방부에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제작 초기에는 반란군의 만행을 미화하고 軍警 진압군의 역할을 과잉진압으로 부각시키는 등 麗順 사건의 본질을 왜곡한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현지 부대와 지역 공안기관의 공동 대응 및 4회에 걸친 시나리오 수정과 두 차례의 사전 시연회를 통해 軍의 요구와 입장을 충분히 반영시켰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함』 ―국방부가 영화 「애기섬」의 감독으로부터 영화 대본을 제출받아 검토했는데, 검토 의견은 무엇이었습니까.
『제작 형식이 최초에는 다큐 60%, 극영화 40% 수준으로 기획되었으나 시나리오 수정 과정에서 진압군에 의한 과잉 장면 삭제 및 麗順 사건에 대한 왜곡된 부분을 순화하면서 극영화 70%, 다큐 30%로 구성되어 진보적 시각에서 여순 반란사건이 해석되고 규정됨을 사전에 방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화 줄거리도 좌우익 개념도 모른 채 여순 반란사건에 가담했던 말심이의 가족과 일제 경찰 출신 서필수씨와의 극적인 화해와 용서를 통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유하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어 상영되어도 큰 문제점은 없는 것으로 판단했음』
-麗順 반란사건을 「麗順 軍警에 의한 양민 학살 사건」으로 규정하는 영화가 방영될 예정이라면 국방부는 어떤 조치를 취할 생각입니까.
『국방부는 지금까지 軍의 명예를 실추하거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軍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경우,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가용한 수단을 동원하여 강력 대응하여 왔으며, 여순 반란사건을 「麗順 軍警에 의한 양민 학살 사건」으로 규정하는 영화가 방영된다면 軍은 당연히 방영중단을 요청하거나 문화관광부와 협조하여 방영 前, 「영상물 등급 보류」는 물론,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 등 법적 조치를 강구할 것임』
모두가 피해자, 가해자는 李承晩 정권/『여수 시민 1000명이 함포사격으로 죽었다』
기자는 지난 8월30일 경기도 양수리에 있는 영화종합촬영소에서 장현필 감독을 만났다. 그는 편집 작업으로 바빴다. 촬영시 동시 녹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면에 대사를 넣고, 배경 음악 삽입 등으로 정신 없다고 했다.
밤샘을 해서라도 부산 국제영화제 출품 시한인 9월8일 전엔 완성할 계획이라고 했다. 영화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람은 불가능했다.장 감독은 1965년生이다. 건설업을 크게 하는 집안에서 자랐다고 했다. 광주에서 고교를 마치고 몇 차례 재수 끝에 원광대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나이가 많아 대학 생활에 적응을 못했다고 했다. 그후 연극반에 가입하면서 재미를 붙여, 대학 시절에 라이브 이벤트와 라이브 공연을 주최했다고 한다.
대학 시절 데모에도 가담했지만 앞에 나서지는 않았다고 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집안에서 하는 건설회사에 입사, 기획실 책임자로 5년을 근무했다. 문화 쪽에 관심이 많아 1988년에 「전남 동부지역사회연구소」에 회원으로 가입, 지역사회에서 문화운동을 한다.그는 여수, 순천 지역의 중·고교 학생들에게 지역 사회의 묻혀진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 「애기섬」을 제작했다고 말했다. 출연자들이 거의 無보수 자원봉사자여서 제작비는 많이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애기섬」이란 영화를 통해 던져 주고 싶은 메시지가 뭡니까.
『麗順 사건은 묻혀져 버리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역사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에 관심을 가져 달라는 것이 1차 의도입니다. 영화란 매체가 전파력이 빠르기 때문에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제 역할은 문제제기입니다. 영화를 본 관객 중에 麗順 사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관심을 가져 달라는 것입니다.두 번째 메시지는 여순 사건에서 피해자가 누구고, 가해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 제기입니다.
국군도 피해자이고, 반란군도 피해자이며, 그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은 다 피해자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가해자는 李承晩 정권으로 봅니다』
『여수 시민 1000명이 함포사격으로 죽었다』
―그러한 문제제기는 어떤 식으로 했습니까.
『여순 사건의 발생 과정, 발생 후의 진압 과정, 진압 때 있었던 일 등을 있는 사실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은 왜 발생했다고 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통일을 둘러싸고 信託(신탁)과 反託(반탁)의 대립 속에서 남로당 계열인 지창수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좌익 肅軍대상 1호로서 죽음의 그늘이 자신에게 가까이 왔음을 알고 명분을 찾게 됩니다. 14연대에 근무하던 남로당 계열의 하사 40~50명도 누가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러 돌파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때 14연대에 제주도 출동 명령이 떨어집니다.
이렇게 해도 죽고(가만히 있으면 肅軍작업으로 죽고), 저렇게 해도 죽는(제주도로 출동하면 戰場에서 죽는) 위기에 처한 이들은 제주도 출동 거부를 명분삼아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 명분이 「동족상잔의 죽음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제 개인 생각으로는 지창수 개인이 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저는 麗順 사건이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아서 일으킨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지창수가 道黨(도당) 정도의 가까운 사람과는 연락했을지 모르나 중앙당 지시에 의해 거사일을 잡은 게 아니고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 오니까 제주도 출동을 適期(적기)라고 판단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문제는 여순 사건 발생 후 李承晩 정권이 이를 어떻게 풀어나갔느냐 하는 점에 있습니다. 이 부분은 반드시 짚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李承晩 대통령은 자신의 불안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政敵 제거 차원에서 여순 사건을 이용했다고 봅니다. 이런 개인적인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과잉 진압이 있었다고 봅니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군인들이 민간인을 무차별하게 학살했습니다. 軍 내부의 공산주의자만 죽인 게 아니라 민간인까지도 죽였습니다. 사례도 있습니다. 여수를 진압하기 위해 1차 진압군이 10월24일 여수로 진격하다가 반란군의 기습을 받자 후퇴합니다. 이렇게 되자 10월25, 26일 이틀 간 여수市 전체를 함포사격해 불바다로 만듭니다. 이는 반란군을 잡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좌익의 씨를 없애버리겠다는 발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함포사격은 이해가 안 됩니다』
―여수市를 함포사격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자료가 있습니다. 여수 시민 1000명이 함포사격으로 죽었습니다. 제가 시나리오에도 이 부분에서 「도대체 李承晩이라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는 대사를 넣었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이 만 가지 일을 잘 했다고 할지라도 여순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의 처리를 보면 지탄의 대상입니다』
―여순 반란을 주도한 지창수의 행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시나리오에는 썼다가 지워 버렸는데, 자기 한 목숨 살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지창수는 알고나 시작했을까, 하는 점은 의문입니다. 그는 모르고 한 것 같아요. 지창수는 14연대 내 남로당 군사책임자가 아니고 꼭두각시이며, 진짜 책임자는 따로 있었는데 이 사람이 北으로 올라가면서 지창수에게 역할을 맡겼다는 말도 있습니다』
―지창수는 그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현장에서 없어집니다. 개인적인 궁금증에서 지창수의 흔적을 찾아 보았지만 전혀 나오지가 않습니다. 지창수는 벌교 사람인데 친척도 찾을 수 없었어요.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서도 지창수의 흔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남로당 출신인 朴正熙 대통령의 역할도 나옵니까.
『제가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朴正熙씨가 14연대 인사장교 아니면 교육장교였다고 하는데 사건 당시에는 부대 밖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제가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朴正熙씨가 관련된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洪英基 교수가 영화 속에서 朴正熙씨가 14연대 교육장교라고 언급합니다』
(기자 注;중앙일보에 장기 연재된 예비역 대장 張昌國씨 회고에 따르면 육군본부가 반란 진압을 위해 1948년 10월21일 光州 6여단 본부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했을 때 朴正熙 대위는 작전참모로 종군했다. 麗順 반란 진압 후 肅軍 작업에서 朴正熙 前 대통령은 남로당 계열임이 드러나 예편되었다. 그는 14연대 소속이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 제주 4·3 폭동은 어떻게 다뤘습니까.
『굉장히 빈약합니다. 여순 사건은 제주도 출병과 관련이 있다 보니까 언급 안 할 수는 없죠. 대사 중에 「제주도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경찰이 제주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그것도 3·1절 기념식날, 해방된 조국에서 日帝도 아닌 우리 경찰이 시민을 향해 총을 쏘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4·3 관련 자료 사진들을 보여 주고 4·3 항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정도로 다뤘습니다』
―보도연맹 사건은 영화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영화 제목 애기섬은 보도연맹 사건 이야기입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보도연맹 사건은 여순 사건 끝자락에서 발생했습니다. 그 시대의 4·3, 麗順, 한국전쟁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전부가 연속적인 현상에서 발생되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고, 보도연맹 사건은 여순 사건이 터짐으로 인해서 李承晩 입장에선 좌익에 대한 관리가 필요했었고, 그것이 보도연맹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한국전쟁이 터집니다. 전쟁 때 감옥에 있던 사람들이 좌익인데 좌익들을 그 참에 정리해 버립니다. 그것이 보도연맹 사건입니다』
영화이지 교과서가 아니다』/『軍에서도 검토 결과, 하자 없다고 결론』
―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장 감독의 해석은 개인적인 것입니까, 「여사연」의 공식 입장입니까.
『제 개인의 견해입니다. 「여사연」의 이영일 소장과 洪英基 교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배우고 느낀 생각입니다』
―장 감독이 쓴 시나리오에 대해 洪英基 교수로부터 지적받은 장면은 없었습니까.
『대본을 끝낸 후, 이영일 소장과 洪교수 등 몇 사람에게 보여 주었지만 잘못 표현되었다는 지적은 없었습니다』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 감독 이야기를 들어보면 考證이 안 된 부분은 장 감독 나름의 판단을 한 것 같은데 그럴 경우 역사를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제가 만든 것은 영화이지 역사 교과서가 아닙니다.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내용과는 다를 수가 있겠죠』
―그렇지만 다큐멘터리 영화라면 사실에 접근해야지, 사실과 동떨어지면 잘못된 역사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여순 반란은 제주 4·3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고, 제주 4·3 폭동은 유엔의 결의에 의해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는 5·10 총선거를 반대하라는 北의 지령에 따라 발생했습니다.
여순 반란은 국가에 반기를 든 명백한 반란 사건인데 본질은 접어두고 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만 부각시킨다면 역사를 왜곡한 것입니다. 장 감독은 개인적으로 1948년의 5·10 선거를 어떻게 평가하세요.
『그 시대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판단내리기는 곤란하지만 제 개인 입장은 李承晩 대통령이 거시적인 입장에서 판단을 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봅니다』
―거시적인 판단이라면 북한과 협상해서 통일해야 했다는 것이네요.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金九 선생 암살이 없었다면 우리 백성들은 백범을 따랐을 수도 있을 것 같았고요. 金九 선생은 통일을 위한 협상을 위해 1948년에 北으로 갑니다』
―金九 선생이 협상을 위해 北에 갔지만 金日成에게 이용만 당했다는 게 역사적 사실입니다. 金日成과 협상해서 통일을 한다는 것은 당시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엔 결의에 따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선택했다고 교과서에도 기록돼 있습니다.
『영화에도 좌익, 우익, 民草 세 사람이 친구로 나오는데, 우익성향의 친구는 남한 단독으로도 정부를 수립해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좌익은 「그건 안 된다. 지금 통일해야지 지금 못하면 할 수가 없다」고 주장해요. 이런 대립이 극중에 계속 나옵니다. 저는 누가 잘했나, 못했나 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어요. 결론은 보는 사람이 내리는 겁니다』
『軍에서도 검토 결과, 하자 없다고 결론』
―李承晩 대통령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부릅니다. 이 견해에 대해서 장 감독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맞는 요소도 있지요. 저는 李承晩 대통령의 치적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여순 사건과 보도연맹이란 두 개의 사건 처리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애기섬에서 죽었다는 보도연맹원이 얼마나 됩니까.
『「여사연」의 이영일 소장에게서는 120명 내지 130명이 죽었다고 들었는데, 특무대원 출신 배학래씨 얘기는 70명이라고 합니다. 위에서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지니까 대한청년단원들이 보도연맹원들을 어느 회관에 모아 놓고 밤에 배에 싣고서 애기섬으로 데려가 죽였다는 겁니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여순 반란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일으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 애기섬에서는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을 부각시켜 역사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영화화하기 전에 공론화시킬 필요가 있는 것 아닙니까.
『사실은 애기섬 대본을 제가 모르는 사이에 국방부 산하의 군사연구소 같은 데서 갖고 가 검토했다고 합니다. 검토 결과 하자가 없다고 결론내린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정의로운 군인의 자세에 대해 논란이 있었습니다. 여순 사건에서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 군인을 좋은 군인이라 하면, 광주항쟁에 출동한 군인은 나쁘냐 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행정부 수반의 명령이 떨어지면 출동하는 것이 군인입니다. 정의로운 군인인지, 아닌지는 논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자랄 때 여순 반란사건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까.
『아버님한테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은 여순 사건 이후에 철도 경찰관이었습니다. 지리산 공비 토벌대에 참가했다가 발에 총알을 맞은 이야기, 공비들과 육박전을 벌였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발에 총알을 맞는 바람에 제대했습니다』
―혹시 장 감독 집안에 여순 반란사건 관련자가 있습니까.
『부모님 고향이 순천이지만 저희 집안에는 없어요. 제 큰아버지가 여순 사건 당시 支署에 끌려가 몇 번 맞은 적이 있다는데 그 시절에 끌려가서 맞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흠이 안 되는 일이지요』
―이 영화가 화제가 되리라고 보시죠.
『화제가 될 거예요. 이름 없이 無차별적으로 죽어간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역사를 모르잖아요』
―영화의 흥행성은 어떻게 생각해요.
『상업적 영화가 아니니까 영화관에서 상영할 일은 없겠지요』 장 감독에 따르면 영화 「애기섬」은 부산 국제영화제를 비롯, 광주·전주·서울·부천영화제에 출품할 예정이며 세계 10여 군데 영화제에도 출품하겠다고 한다.
麗順 사건 반란부대인 14연대는 1948년 10월28일자로 해체되었다. 그후 軍은 14연대를 창설하지 않았다. 「14」라는 숫자 자체가 우리나라 軍 부대 이름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創軍(창군) 초창기 軍 지휘부가 받았던 麗順 14연대 반란의 충격은 그만큼 컸다. 그렇기 때문에 趙成台 장관 지휘의 軍 수뇌부는 이 영화의 제작을 막았던 것이리라.
국군의 반란군 진압을 근거도 없이 비방한 이 영화 제작에 소총, 군복, 헬기까지 제공한 金■信 장관 지휘의 軍 수뇌부는 創軍의 역사를 모르고 있는 것인지, 부정하고 싶은 것인지 묻고 싶다.「동족상잔의 비극을 치유하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어 상영되어도 문제가 없다」는 국방부의 공식 답변을 보면서, 감독을 인터뷰하고 시나리오를 분석한 기자는 우리나라 국방부가 과연 대한민국 편인지 의문이 든다.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을 진압한 국군의 행위를 양민 학살로 모는 이 영화 제작에 軍 수뇌부가 지원을 지시했다는 것은 軍 수뇌부 스스로 국군의 가치관과 역사관을 부정한 自害행위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감독은 자라나는 중·고생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 주고 싶다고 했다.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이 왜곡된 영화를 감수성이 예민한 중·고생들에게 보여 준다는 것은 수영을 배우지 못한 학생들을 물 속에 밀어넣는 행위와 다름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종군 기자단을 처음 운영한 것은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때다. 여수市 탈환 작전 때 종군 기자단은 軍을 따르고 있었다. 前 호남신문 사진부장 李坰模(이경모) 기자도 종군 기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찍은 한 장의 사진, 아기를 업은 채 경찰관 남편의 시신을 찾고 있는 사진(기사 첫 페이지에 실린 사진)은 이 사건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영화 시나리오에서는 국군이 여수市 탈환 때 여수市에 함포사격을 해 1000명의 여수 시민을 한꺼번에 죽였다고 묘사돼 있다. 1000명이 죽은 큰 사건이 戰史에도, 종군 기자단의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조작임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진압 과정에 국군의 무리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 국군이 걸음마도 떼지 못한 신생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생존 자체를 말살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비겁한 선제공격으로부터, 이 「아기」를 지켜내려는 몸부림의 결과라고 해석해야지, 반란의 성격을 바꾸고 반란군을 동정·비호할 성격은 아닐 것이다.●
戰史에 기록된 麗順 반란사건의 발생과 경과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반란」
국방부 戰史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전쟁사」에는 여순 반란사건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여수 주둔의 제14연대 반란사건은 同(동) 연대 내에 침투한 남로당系의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건국된 지 불과 2개월밖에 안 되는 신생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전복하려는 반역적인 군내의 쿠데타였다.
제주도에서 야기된 공산주의자들의 이른바 인민해방 투쟁이 軍警부대의 적극적인 토벌로 약화일로를 지향하게 되자 이에 대한 대책이 강구되어 오던 차, 제14연대의 1개 대대가 마침 제주도에 증원부대로 출동하게 된 기밀을 탐지한 지하 남로당에서는 同 연대의 조직책인 지창수 상사에게 출동 직전의 기회를 포착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을 지령하였고, 이리하여 육지에서 제2戰線이 형성되면 제주도의 투쟁은 용이하게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동시에 여수 연대가 반란에 성공하면 全軍과 각 연대의 그들 세포에게 역시 지령하여 대한민국을 일거에 전복하려고 한 것이다.
同 연대의 조직책인 지창수 상사, 金智會(김지회) 중위, 洪淳錫(홍순석) 중위가 주동이 되어 출동 직전에 반란 쿠데타는 차질없이 계획대로 성공하였다.
여수읍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는 제주도 토벌작전에 출동하라는 육군본부 지령에 의하여 1개 대대가 1948년 10월19일 오후 8시 여수항을 출항키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연대 人事係(인사계) 지창수 상사는 부대 내 핵심 세포 40여 명에게 무기고와 탄약소를 점령케 하고 비상소집을 걸었다. 이때 시각이 오후 8시경이었다.
출동대대는 지체없이 연병장에 집결하였다. 池상사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지금 경찰이 우리한테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지금 북조선 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하여 38선을 넘어 남진중에 있다. 우리는 北上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는 등의 선동을 하자 대부분이 『옳소』하면서 찬성하였다.
이를 반대한 3명의 하사관은 즉석에서 사살되었다. 池상사는 『美 제국주의의 앞잡이 장교들을 모조리 죽여라』 하였다. 제1대대장 김일수 대위, 제2대대장 김순철 대위, 제3대대장 이봉규 대위, 연대 정보주임 김래수 중위, 연대 작전주임 강성윤 대위 등 20여 명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이리하여 출동대대는 반란군으로 변하여 반란에 들어갔다. 좌익 세포들이 아닌 대원들도 경찰이 쳐들어오고 북한 인민군이 남진한다는 池상사의 말에 갈피를 못 잡고 추종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叛軍(반군) 3000여 명은 池상사 지휘 하에 모든 차량을 동원하여 여수 시내로 들어오면서 봉산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을 사살하였다.
우익 인사 색출, 총살·燒殺·打殺…
10월20일 새벽 1시경 반란군의 주력부대가 시내에 침입하여 交戰이 개시되었다. 소수의 경찰 병력은 叛軍을 저지할 수 없었다. 叛軍들이 시내로 들어오자 좌익 단체 및 학생단체 600여 명이 합세하여 인민공화국 만세와 인민해방군 만세를 외쳤다.
오전 9시경 여수 시내는 완전히 叛軍 수중에 들어갔다. 체포된 경찰관과 기관장, 우익 단체요원, 有志(유지) 할 것없이 여수경찰서 後庭(후정)에서 집단 총살하였다. 叛軍들과 좌익분자들은 가가호호를 수색하면서 피신한 대상자를 찾기에 혈안이 되었고, 기분나는 대로 殺生을 자행하였다.
여수를 완전 점령한 叛軍의 주력 2개 대대는 20일 오전 9시30분, 여수항에서 통근열차 6개 차량에 분승하여 순천으로 北上하였다. 순천에 주둔 중인 14연대 2개 중대는 洪淳錫 중위 지휘 하에 叛軍에 가담하였다. 오후 3시, 순천은 叛軍에게 점령되었다. 이때 光州 주둔 4연대 소속 1개 중대가 叛軍에 합류했다.
順天을 점령한 叛軍들은 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관을 학살하고, 다음에는 우익진영의 인사, 단체원들을 색출하여 소위 인민재판으로 銃殺(총살), 燒殺(소살), 打殺(타살) 등으로 여수, 순천을 위시한 인접 지역은 피의 바다를 이루게 하였다.
이 결과 사건 1주일 현재, 여수 지역에서만 官民 1200명이 학살당하고 중蟁경상자 1150명, 가옥 소실 파괴 1538桐, 이재민 9800명이 발생하였다. 순천 지역의 인명 피해도 약 400명에 달하는 처참한 비극을 초래하였다.
순천을 점령한 叛軍 주력은 鶴口(학구), 光陽(광양), 筏橋(벌교) 등 3개 방면으로 나눠 진격했다. 육군 총사령부는 10월21일 叛軍 토벌 전투사령관에 宋虎聲(송호성) 준장을 임명했다. 정부는 10월22일 麗順 지구에 대하여 계엄령을 선포했고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10월23일 경고문을 발표했다. 10월21일 오전 順天은 국군의 수중에 들어왔고, 10월27일 오후 麗水도 수복되었다. 여수 탈환작전이 끝나자 국군은 求禮(구례)로 이동한 叛軍 주력인 金智會 부대를 추격했다.
반란을 주동한 洪淳錫 중위는 1949년 4월9일 지리산 인근인 남원군 내산면 반선리 부락에서 사살되었고, 金智會 중위는 4월13일 사살돼 여순 반란사건은 6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반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기록은 이렇다.
<남북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려는 유엔의 결의는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이 반대하였기 때문에 남한에서만 선거가 실시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김구·김규식 등은 남한만의 선거로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 남북의 분단이 계속 될 것을 우려하여 남북한이 협상을 통해서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김구 등은 남북협상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유엔의 결의와 대다수 국민의 열망에 따라 남한에서 5·10 총선거가 실시되었다(1948년). 공산주의자들은 5·10 총선거를 전후해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한다는 구실로 남한 각지에서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발생한 제주 4·3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무장 폭동으로서,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까지도 희생되었으며 제주도 일부 지역에서는 총선거도 실시되지 못하였다.
한편, 새로 창설된 국군 내부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하여 사회혼란을 유발하였다. 특히, 여수蟁순천 10·19 사건은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軍 부대 내의 일부 좌익세력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 지역에 잠입해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여기에 합세하여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는 데 의도가 있었다. 결국 국군과 경찰의 토벌로 이 사건은 진압되었으나 평온과 질서를 되찾기까지에는 상당한 기간이 지나야만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