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생활의 백미/ 진각국사 혜심의 茶詩
久坐成勞永夜中 (구좌성로영야중)
煮茶偏感惠無窮 (자차비감혜무궁)
一盃卷却昏雲盡 (일배권각혼운진)
徹骨淸寒萬慮空 (철골청한만려공)
오래앉아 피곤한 긴긴 밤
차 달이며 무궁한 은혜 느끼네
한잔 차로 어두운 마음 물리치니
뼈에 사무치는 청한(淸寒)모든 시름 스러지네
◈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34) ◈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고려 중기의 고승.
성은 최씨. 자는 영을(永乙), 법휘(法諱)는 혜심(慧諶)이고.
법호는 무의자(無衣子)이다. 나주 화순현에서 고려, 명종 8년.1178년에 태어났다.
완(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배(裵)씨이다.
어머니가 하늘의 문 이 열리는 꿈을 꾼 다음 그를 낳았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출가하기를 청 하였으나 어머니는 허락하지 않고
유학(儒學)에 힘쓰라 하였다. 항상 불경을 생각하고 주문을 외워 힘을 얻었다.
무당집과 사당을 허물기를 좋아 하고, 가끔 사람들의 병을 다스리면 효험이 있었다.
1201년(신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병보(病報)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인척형인 배광한(裵光漢)의 집에서
시병(侍病)할 때 관불삼매(觀佛三昧) 에 들었는데, 어머니는 그 꿈에
여러 부처와 보살들이 사방에 두루 나타나는 것을 보고
꿈을 깨자 병이 나았다고 한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곧 조계산 수선사의 지눌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지눌은 다 해어진 짚신을 가리키며 “신발은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靴在遮裏 人在麽處)?” 하고 물었다. 이에 진각은
“왜 그때 보시지 않았습니까(何不其時相見)?” 라고 대답했다.
이에 지눌 국사는그에게 법을 전수하였다.
지눌국사입적 후 혜심이 수선사를 계승하여 미신적 불교신앙타파교화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고려왕실 주변의 그릇된 신앙 풍조를 타파하는
중대한 교화의 구실을 하였다.
1234년 봄에 월등사(月燈寺)로 옮겼으며, 몸이 많이 불편하였다.
그 해 마지막으로 가부좌한 채 미소를 띠고는 곧 대적삼매(大寂三昧)에 들었다.
왕은 이 소식을 접하자 크게 슬퍼하고는 호를 진각국사(眞覺國師)라 내리고
탑액은 원조지탑(圓照之塔)이라 하사하였으니 그 때
스님의 세수 57세이고, 법랍 32하(夏) 였다.
고종이 사액한 그의 부도 원조지탑은 광원암 북쪽에,
이규보가 찬한 진각국사비는 강진군 월남산 월출사에 각각 세워졌다.
진각국사비는 지금 그 잔비만이 전해 오고 비명은「동국이상국집」,
「동문선」,「조선금석동람」에 전한다. 그의 문인에는
청진국사 몽여, 진훈, 각운, 마곡 등이 있었다.
저서에는 [선문염송집(禪門염頌集)]30권, [심요]1권, [조계진 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1권,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 論)]1편,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2권,
[금강경찬(金剛經贊)]1권, [선문강요(禪門綱要)]1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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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귀 대하니 차향이 그리워 서둘러 찻상 앞에 앉으렴니다. 고맙습니다..()
요즘 여운님 고운글에 차마시는 일을 더가까이 하게 되었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