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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시편 23:1-6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제7주일이다. 가족예배로 드린다. 가족예배는 사실 집에서 식구끼리 함께 드리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이다.
색동교회 한 어린아이는 집에서 예배드리는 놀이를 한다. 엄마가 “하늬는 집에서 예배 드리며 놀아요”한다. “찬송가 203장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장난감을 켜면 ‘나비야 나비야’가 흘러나옵니다. 예배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아기가 가르쳐 주었다.
오늘 세계성찬주일 성찬식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교회가, 모든 나라, 민족, 교파를 초월해 다 같은 믿음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나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가.
존 옥센헴의 말이다.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묻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주님의 식탁에서 우리 모두를 부르셔서 빵과 포도주를 주시고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경건한 사람인지 죄인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노예와 자유인을 동일하게 상속자로 받아들이십니다.”
우리는 성찬을 받으면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구원하신, 그 신비한 은총에 대해 감사한다. 오직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목자, 선한 목자이심을 고백한다.
1)
시편 23편의 배경은 짐짓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로워 그저 목가적인 노래라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 시편 23편이 사랑받는 이유는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위험과 위협 가운데에서 뜻밖에 구원받은 경험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이 시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시편 23편은 지상최대의 시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그 유명세 때문에 사실 시편 23편의 주인공에게 닥친 어려운 현실을 그냥 지나쳐 보기가 쉽다.
시인은 자기 경험을 두 가지 비유로 표현한다. 곧 하나님은 선한 목자(1-4절)이고, 손님을 친절하고 안전하게 대접하는 친절한 주인(5-6절)이시다.
인생은 얼마나 고달픈가? 전반부에서는 양 떼가 겪는 위험에 대해서 말하고, 후반부에서는 나를 뒤쫓아 오는 원수들에 대해서 말한다.
오죽하면 자기 현실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4) 혹은 “원수의 목전”(5)이라고 비유하였을까? 누구도 자기 인생에 대해 자만할 수 없고, 아무도 위기 앞에서 예외는 없다. 따라서 누구도 닥쳐올 미래에 대해 장담할 수 없으며, 아무도 쉽게 건너뛸 수 없는 두려운 함정이 있다.
시편 23편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있다. 나의 목자이신 하나님이 그럴 때마다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지켜주신다는 믿음과 고백 때문이다. 주님은 양 떼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는 목자 중의 목자요, 원수가 쫓아오는 상황에서 친절히 맞아 주시는 주인 중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좋은 목자와 친절한 주인은 위험을 물리쳐 주고 평화를 주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과 위협에 맞서서 목자는 ‘지팡이와 막대기’(4)로 양을 돌본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도구이다.
시편 23편은 지팡이와 막대기의 쓸모를 구분한다. ‘지팡이’(미쉬에네트)는 양을 인도할 때 사용하는 것이고, ‘막대기’(쉐베트)는 맹수를 막는 무기로 몽둥이에 쇠조각을 박았다. 그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돌보신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고난당하는 사람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는 구체적이다. ‘안위하다’로 옮긴 히브리 낱말은 불안에 떠는 자들이나,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격려가 되는 분명한 도움을 뜻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언제나 변함없다.
지금 중동지역은 큰 위험에 직면해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에게 큰 비극이고 아픔이다. 이스라엘은 선제 공격을 당한 피해자이다. 그리고 피의 보복을 통해 비극을 더 큰 재앙으로 바꾸려고 한다.
세계가 두 편으로 나뉘어졌다. 우리는 지금 고통을 겪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과연 둘 사이에 화목할 날이 올까. 모두가 만족할 그 날을 위해 인류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2)
누구에게나 지팡이와 막대기가 필요하다. 지금 위험한 현실은 매우 긴박하고, 위협은 구체적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공격받았고, 가자지구는 두려움에 떤다. 그들에게는 무차별 살상무기가 아니라 지팡이와 막대기가 필요하다.
성경 66권을 통틀어서 ‘지팡이’란 낱말이 모두 68회 나온다. 막대기. 몽둥이, 작대기, 홀, 채찍, 방망이, 지휘봉, 쇠막대기, 철퇴 등 지팡이와 유사한 낱말(53회)까지를 합하면 무려 121건이다.
이러한 지팡이는 지도자, 우두머리, 예언자, 의로운 사람, 나그네, 목자, 용사, 말 타는 사람들의 용구였다. 상징적 의미가 여러가지다.
첫째, 지팡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이 사실은 주로 예언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이때에는 지팡이 대신 주로 몽둥이, 작대기, 막대기, 쇠막대기, 홀 같은 것이 등장했다.
둘째, 지팡이는 생명과 부활을 상징한다. 민수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 지파 아론의 지팡이에서는 움이 돋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었다.
셋째, 지팡이는 치유를 상징한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한 여인의 외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밭에 가을걷이를 나갔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죽었다. 비보를 전해들은 선지자 엘리사는 자기의 지팡이를 죽은 아이의 얼굴 위에 놓음으로써 살아나게 했다.
넷째, 지팡이는 나그네, 고달픈 자, 약한 자들에게 도움을 상징한다. 나그네 신세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지팡이와 같은 신의 돌보심이 필요하였다.
다섯째, 지팡이는 예배와 축복을 상징한다. 지팡이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야곱은 지팡이를 짚고 서서 애굽의 바로와 자기 12아들을 축복하였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 11:21).
지도자는 누구인가? 자신에게 위임된 권력을 선한 지팡이로 사용하도록 그 역할을 잘 해내는 사람이다. 의로운 지팡이, 정직한 지팡이, 희망의 지팡이, 섬기는 지팡이, 그 지팡이를 통해 평화와 위로를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유명한 지팡이로 성 안스가르(St. Ansgar) 십자가가 있다. 그는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이다. 그는 혼란과 무지의 시대에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한 선한 목자로 평가를 받는다.
당시 절망과 어둠으로 상징되는 중세시대의 문턱에서 복음은 빛을 잃고, 성직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영적 권위인 교황의 권력은 세속 권세의 몰락과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러한 때, 오히려 성 안스가르는 복음 전도의 소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복음을 전한 스웨덴, 유틀란트 반도 등은 당시 세상의 땅 끝인 유럽의 최북단 지역이었다. 그는 ‘북부의 사도’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성 안스가르의 심벌은 십자가를 둥글게 감싼 지팡이 머리부분이다. 이를 지팡이 십자가라고 부른다. 그러기에 지팡이는 십자가이다.
3)
시편 23편은 뭐니 뭐니해도 좋은 목자, 선한 목자에 대한 이야기다. 목자는 양을 돌본다. 성경에는 지팡이 숫자보다 양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더 많이 기록되었다. 무려 5백 회 이상 등장한다.
성경에서 양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은 그 배경이 된 중동지방과 관련이 있다. 양은 그 시대 그곳 주민들에겐 기름진 음식 거리이고, 재산이었다. 자본이라는 뜻의 영어 ‘캐피탈’도 원래 양의 머리에서 비롯된 낱말이다.
머리에 뿔이 있는 양이 있다. 그런데 그 뿔은 자기를 보호하지 못한다. 맹수들이 달려들면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양은 겁쟁이의 대명사처럼 불린다. 양들에게 유일한 방어무기가 있다면 상호부조하는 정신이다. 양은 혼자 다니지 않고 군집성이 강해 떼를 지어 행동한다. 길 잃은 양이 위험한 이유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헤매는 배경이다.
가장 미련한 짐승을 양이라고 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사 53:6)라고 하였다. 양은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에서는 양 200마리에 꼭 염소 1마리씩 섞어서 기른다. 움직이기 싫어하는 양을 뿔로 받아 움직이게 한다.
이솝 이야기에도 양은 등장한다. 하루는 양 한 마리가 늑대를 피해 수도원 부엌으로 도망갔다. 뒤쫓아온 늑대는 양에게 수도원의 제물이 되지 말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 지른다. 이때 양은 늑대에게 죽는 것보다는 명예로운 제물이 되겠다고 대꾸한다. 착하다고 모두 바보는 아니라는 것을 이솝은 교훈하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누구나 양과 같은 존재다. 마치 하나님의 어린 양이 예수 그리스도이듯,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어린 양과 같다.
내 인생은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선한 목자를 만났는가?
시편 23편은 내 인생이 쫓기는 상황에서 친절한 주인을 만나야 한다고 일깨워 준다. 친절한 주인되신 하나님은 나를 뒤쫓던 원수들을 향해 여보란 듯 귀한 손님으로 대접해 주신다.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는 것과 잔이 넘치도록 따라 주는 것은 최상의 손님을 대접하는 모습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
손님을 친절하게 맞이하는 좋은 주인 노릇이 쉽지 않다. 지난 1주일 동안 핀란드 소년 캐스퍼(17)가 우리 집에서 함께 지냈다. 가끔 아이의 행동이 낯설고, 불편하였다. 잠시라도 어울려 지내려면 노력을 해야 하였다.
가장 거스르는 것이 반말이다. “어?”, “어.” 햐 이놈 봐라. 설익은 한국어가 너무 짧아 더욱 낯설었다.
교목으로 있는 어느 목사가 그런다. 학생 하나가 상담하러 왔다.
“목사님, 저는 남한테는 잘하는데 부모님한테는 자꾸 화를 내요. 어떻게 하죠?”
교목은 아이에게 실은 그런 아이들이 많이 있다고 아이에게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차라리 부모님을 남이라고 생각해라.”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선한 목자와 친절한 주인이 필요하다. 그 지팡이는 내게 희망과 기쁨을 준다.
몇 해 전에 독일 복흠교회를 방문했을 때, 김대천 형제가 내게 자기 집으로 가자고 손을 끌었다. 그 분은 지금 고인이 되셨는데, 남들과 달리 은퇴할 때까지 광산에서 일했다. 남들은 3년 근무를 마치고 다른 일자리를 찾았는데, 그에게는 그럴 능력이 부족하였다.
나는 태백 석탄박물관에 소개하여 그가 입고 신던 광부복과 작업화를 파독광부의 삶의 현장 코너에 진열하도록 의뢰한 적이 있다. 지금도 태백에 가면 김대천 형제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김대천 형제가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간 것은 선물을 주려고한 때문이다. 그의 선물은 지팡이였다. 전형적인 독일식 지팡이인데, 쇠로 된 손잡이 부분은 광부의 곡갱이 모양이고, 거기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Glück Auf.”
그뤽 아우프는 광산 갱도 입구에 커다랗게 쓰여있는 문구다. 광부들은 일하러 가면서 서로 그뤽 아우프라고 인사한다. ‘오늘도 무사히’란 의미인데 직역하며 ‘행운으로 올라 오라’는 뜻이다. 지하 천 미터 갱도에서 일하는 광부는 서로 행운이 있기를 빌며, 안전하게 지상으로 올라 올 것을 기원한다.
나는 그 지팡이를 잘 보관하고 있다. 그 지팡이의 중간 이음새 부분에는 행여 산책 중에 쓰러질 때 그 사람에게 필요한 비상약을 넣어두는 아주 작은 공간이 있다.
나는 김대천 형제님의 권고를 잊지 않는다.
“송 목사님, 한때 새파랗던 당신도 늙을 것이요. 결코 자신 만만해 하지 말고 지팡이를 의지하시오. 우리가 밤낮 ‘그뤽 아우프!’를 외치듯,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며, 은총의 힘으로 사시라.”
얼마나 고마운 마음 씀씀이인가?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은 나의 선한 목자이시고, 친절한 주인이심을 고백한다. 누구나 은총의 힘이 필요하다. 항상 시편 23편을 암송하고, 주기도문 외듯 시시때때로 고백하는 일을 잊지 말라.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하나님께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런 믿음과 고백으로 살아가는 내게 하나님께서 언제나 은혜를 베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