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제세 明濟世(1885~1964)】 「1924년 조선물산장려회 참여, 1927년 신간회 참여」
1885년 2월 4일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봉산면(鳳山面) 망일리(望日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서촉(西蜀)이다.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1905년부터 1908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 외국어학교에서 중국어를 수학하였다.
연해주에서 귀향한 뒤 『대한매일신보』 영변지사원으로 1909년 2월까지 활동하였다. 중국과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10년대 톈진(天津)으로 건너갔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톈진에서 불변단(不變團)을 결성하여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하였다. 창립 당시 부단장을 맡았으며, 그 해 8월 15일 의사부를 신설하고, 군무부를 설치하는 등 조직을 개편하고 임원을 개선할 때 단장을 맡아 부단장 박환(朴桓), 군무부장 신명화(申命和) 등과 조직을 이끌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국내에서의 다양한 활동을 위해 비밀 임무를 부여한 국내특파원을 파견하였다. 8월 25일 서울과 함경남·북도를 관할하는 경원선 연변(沿邊) 특파원에 임명되어 국내로 파견될 때 재무부장 독고감(獨孤堪)과 부단장 박환, 초대 단장 조선홍(趙宣弘)도 함께 국내로 파견되었다. 주 임무는 임시정부의 국내 행정기관인 연통부를 설치하고, 1919년 10월 31일 일왕의 ‘천장절 축일’을 기회로 국내에서 제2차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에 박은식(朴殷植)이 기초하여 발표한 ‘대한민족대표’ 30인 명의의 독립선언서에 불변단 부단장 박환, 초대 단장 조선홍, 초대 서무부장 박세충(朴世忠), 초대 총무부장 김철(金澈) 등과 함께 불변단 단장 자격으로 이름을 올렸다.
서울 관철동 조선여관에 자리를 잡고 1919년 9월 함경북도에 연통부를 설치하기 위해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함경도와 경기도 특파원으로 활동하던 이종욱(李鍾郁)과 의친왕(이강(李堈))의 중국 망명 시도를 도왔다.
10월 31일이 되자 자동차로 서울 시내를 돌며 ‘대한민족대표’ 명의의 독립선언서와 ‘남녀학생에게’,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 등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 명의의 포고문을 살포하고, 제2차 만세시위운동의 봉기를 꾀하였다. 그러나 사전 정보 유출로 3.1운동처럼 대대적으로 봉기하지는 못하였지만,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의주(義州)·선천(宣川)·정주(定州)·영변(寧邊)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후에도 조선홍 등 불변단원들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재차 만세운동을 모색하였다. 1920년 1월 조선홍은 상하이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와 만나, 1920년 3월 1일 독립선언 1주년을 기념하는 만세운동을 일으키고,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공채를 교부하여 군자금을 모집키로 의견을 모았다. 2월 국내로 돌아온 조선홍과 협의하여 동지로 포섭한 류연원의 친족 장례식을 계기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1일 용산정거장에서 거행된 장례식의 참배객과 군중을 모아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상하이로부터 우송되는 선언서와 격문 등이 발각되고 주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봉기에 이르지 못하였다. 또 임시정부 발행의 독립공채가 도착하자, 조선홍·최영만(崔英漫) 등과 1920년 5~6월 서울의 부호 박승빈을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암살단(暗殺團)을 조직 활동하던 김동순(金東淳)·한우석(韓禹錫)·김상옥(金相玉) 등과도 연계하여, ‘대한독립군사령부’를 조직하여 연대 투쟁을 도모하였다. 다시 박승빈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이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할 때를 이용하여 조선총독부 고관 처단을 계획하였다. 불변단원들과 취지서와 경고문의 인쇄와 배포를 맡았고, 김동순·김상옥·한우석 등 암살단원은 조선총독부 고관 처단을 맡았다. 그러던 중 거사 직전 한우석을 비롯한 암살단원과 함께 붙잡혔다.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4년 출옥 후 조선물산장려회에 들어가 1940년 해산 시까지 중앙회 이사와 서울지회 이사장을 지냈다. 한편 1926년 7월 조선물산장려회 대표로 사회주의운동 단체인 서울청년회와 합작하여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를 조직하였다. 이어서 1927년 2월 신간회 창립 발기인으로도 참가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한국독립당 중앙위원·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간부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