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한 개인의 블로그에서 나온 글이기에
객관성이 결여된 것은 사실이나
한편 공감가는 부분도 있어 같이 읽어보고자 합니다.
연전에 타계한 한글학자 A씨는 부산 태생이다. 그곳에서 나고 그곳에서 이미 청소년기를 보냈으므로 그는 生平 동안 부산 특유의 말투를 고칠 수 없었다.
나는 왜 고칠 수 없었다고 말하는가?
어느 글인지 자세한 기억은 없으나, 그가 살아있을 때, 한창 한글 전용운동을 전개할 당시에 그가 쓴 어떤 글을 읽어보니, 대강 다음과 같이 기억을 정리할 수 있는 구절이 퍽이나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명색이 국어선생이라는 사람이 평생 동안 사투리를 고칠 수 없으니, 국어선생하기가 부끄럽다.”
나는 이 구절을 대하는 순간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했다. 이 순간 이후 나는 그를 언어학자라 부르기를 주저했으며, 그 때나 지금이나 ‘국어학자’로 정의한다. 하지만 앞으로 그에 관한 글이나 기사를 쓸 일이 있다면, 범위를 더욱 좁혀 ‘한글운동가’로 할란다.
저 말이 나에게는 왜 충격이었는가?
명색이 언어학을 전공한다는 분이 표준어와 방언의 관계를 헷갈리고 있기 때문이었으며, 더구나 그렇게 헷갈린 표준어와 방언 사이에서 표준어를 여러 방언 중에 편의로 선택된 일개 방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저 표준어라는 괴물이 수행한 여러 순기능을 부정하고픈 생각이 없다. 하지만 저 표준어라는 괴물은 근대의 국민국가가 그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인자들로 ‘상상된’ 개별 국민을 하나의 집합체로써 묶어내고자 한 강압과 억압과 강제의 기제로 작동한다.
표준어를 발명함으로써 그 국민국가는 그 표준어로 수렴되는 하나의 국민국가를 구성한다. 근대 국민국가는 국경과 표준어가 씨줄과 날줄로 빚어낸 괴물이다.
표준어를 선정하는 까닭이야 말할 것도 없이 소통에 있겠으나, 실은 그 표준어로 상상되고 설정된 일개 방언은 다른 방언을 ‘사투리’라는 이름으로 억압하고 말살하며 나아가 곧잘 박멸하고야 만다. 그런 점에서 견주건대 표준어는 잔디 제초제다. 다른 잡풀을 다 죽여버리고 오직 잔디라는 하나의 생물체만을 살리고자 하는 제초제 말이다.
표준어는 상상된 데 지나지 않으며, 더구나 그런 상상된 허구가 실체로 해체되어 구상화된 것이라 해도 그것은 여전히 특정 언어를 구성하는 일개 지방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가 표준어로 상상하고는 그것을 구형화해 버린 ‘서울 중산층이 쓰는 말’이란 것도, 알고 보면 실체가 전혀 없을 뿐더러, 설혹 그것이 실체가 있다고 해도, 그것 역시 한국어로 통칭될 수 있는 지구상 무수한 언어 중의 한 인자를 구성하는 실로 다양한 스텍트럼(방언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표준어가 억압과 말살과 박멸의 기제로 작동한다는 단적인 증거는 앞서 인용한 A씨의 언급이 여실히 증명하거니와, 묻거니와, 국어선생이 부산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성은 어디에서 말미암는가? 단언하거니와 어디에도 그런 선험적 명령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런 선험적인 명령이 존재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은 도사리고 있다.
나아가 그것은 고사하고, 서울 중산층이 쓰는 말을 쓸 수 없는 그 스스로가 왜 부끄러워야 하는가? 나는 참으로 이 점이 괴이하기 짝이 없으며, 그래서 나는 그를 언어학자라는 범주에서 제외한다.
언어학을 구성하는 상식 중 하나가 개별 언어끼리 우등과 열등의 관념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등과 열등의 관념으로써 민족과 국가의 우등과 열등으로 확대한 것은 19세기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독설로 유명한 19세기 미국의 저명한 文士 마크 트웨인. 그는 영어에 견주어 격변화를 필두로 하는 각종 어미 변화가 극심한 독일어에 대해 독설을 퍼부어 댔다. 그 복잡한 구조로 말미암아 독일어는 사멸하고 말리라는 망언을 일삼았다.
그의 예언 중에서도 결과만큼은 언젠가는 실현될 것이다. 즉, 독일어는 언젠가는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민족 전체가 종멸하는 순간일 수도 있고, 아예 지구 자체가 사라지는 순간이 설정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장담하거니와 트웨인의 예언처럼 독일어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것이 영어에 비해 복잡한 언어이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표준어란 상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지구상 어디에도 표준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그런 표준어가 설혹 존재한다고 해도 그런 표준어에서 사투리라는 이름으로 배제된 다른 방언이 결코 표준어에 비해 열등한 것도 아니다. 나아가 표준어도 엄연히 방언 중의 하나이다.
표준어란 어디까지나 의사 소통의 가능케 하는 임의적인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작금 우리의 언어정책에 통탄하면서, 나아가 거기에서 억압성과 폭압성에 전율하는 까닭은 상상된 표준어, 그런 상상에 끼워 맞춘 서울 중산층이 쓰는 언어가 어느 새 그 본문을 망각한 채, 다른 수많은 언어를 죽여왔고 지금도 죽이고 있으며, 그런 정도는 아니라 해도, 주변부로 밀어낸다는 점에 있다. 사투리를 쓰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고백한 저 ‘한글운동가’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표준어가 억압적이며 강압적이라는 단적인 증거는 무엇인가?
내가 요즘은 하도 공중파 방송을 보지 않은지 오래되어 놔서, 지금도 그런 프로그램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나, 공영방송이라는 kbs라는 곳에서 시도 때도 없이 틀어대던 ‘세뇌’ 프로그램으로 ‘바른말 고운말’이란 게 있다. 이 프로그램은 사라졌다 해도, 그것이 주창한 면면한 정신은 지금도 방송계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확산 일로를 거듭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완연한 흔적을 또 하나 들자면, ‘우리말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아나운서상’이니 뭐니 하는 괴물과도 같은 시상제도가 있다.
나는 묻는다. 설혹 표준어가 있다고 하자. 그런 표준어가 있다고 해도 표준어를 잘 구사한다는 말은 있을 수 있으나, 그런 표준어가 왜 ‘바른말 고운말’이 되어야 하는가?
A씨가 그랬던 것처럼 버리고 싶어도 경북 김천 지방말을 생평토록 버릴 수 없는 이 김태식이라는 인간이 구사하는 김천 지방말은 ‘바른말 고운말’이 아니란 말이더야? 말하거니와 김천말이 ‘바른말 고운말’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표준어로 상상된 서울 중산층 말에 견주어서는 ‘바른 말 고운 말’이 아닐 수 있는 근거는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김천지방말이 바른말 고운말이 아니라 해서, 서울말이 바른말 고운말이 될 수 있는 건덕지 또한 어디에도 없다.
아! 그럼에도 저 표준어라는 괴물은 서울말을 ‘바른말 고운말’로 간주하는 데로 발전해, 거기에서 배제된 김천말을 비롯한 수많은 지방말들을 ‘바른말 고운말’이 아니라는 이유로 억압하며 말살하며, 타멸을 꾀하고 있다.
내가 소위 맞춤범 혹은 표준어라는 괴물을 나름대로 따르려 하는 까닭은 그것이 소통을 위한 임의의 약속임을 어기지 힘들어서지만, 한편에서는 그에 대해 무지막지한 저항심을 발로하는 한 이유가 그런 임의의 약속이 어느새 ‘우등과 열등’의 강압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무가 되건 무우가 되건 무시가 되건, 이들 중 유독 무 하나만을 잘라 그것이 '바른말 고운말'이 되어야 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자장면에 견주어 짜장면이 '틀린말 곱지 않은 말'이 되어야 하는 선험적 절대 도덕률은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언어정책은 변해야 한다. 소위 대한민국의 국어 정책은 변해야 한다. 특정 하나를 선택하여 그것을 바르고 고운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거기에서 배제된 다른 것들을 죽이고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으로, 단순한 다양성이 아니라 그러한 다양성을 구성하는 개별 인자 하나하나가 각각에 대하여 독립성을 갖춘 인격체라는 관점으로 변모해야 한다.
맞춤범은 모르겠으나, 뛰어쓰기 규정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저 표준어 규정은 지금 당장 박멸되어야 한다.
무에 견주어 죽음 일보 직전에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는 무우와 무시 또한 저 벼랑에서 구출해야 한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 시민권까지 우리가 박탈해서야 되겠는가?
죽죽 뻗은 낙엽송만 있는 산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삭만하겠는가? 낙엽송 성장에 방해된다고, 꼴보기 싫다고 다른 잡목과 잡풀들은 자 베어버려야겠는가?
첫댓글 상당히 공감히 가는 글입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표준어규정과 외래어표기법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될 때가 참 많습니다. 서울이라는 한 지역에서 주로 쓰이는 말을 전국에 '표준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다니 참으로 파쇼적이지 않습니까? 방언 역시 우리말이며, 서울 방언 이상의 풍부한 자원일 수 있는데
말이지요. 표준어가 없으면 언어생활에 혼란이 생기고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을 것이나, 그렇다 해도 지금처럼 이것과 이것만 표준어이어서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 중에 이것이 가장 많이 쓰이는 것 정도로만 해두어도 괜찮을 듯 싶네요. 외래어표기법은 정말 기가 막힐 뿐입니다.
외래어와 외국어의 차이점 아시죠? 중학교 1학년 생활국어에서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외래어는 들어온 말 중 우리말로 바꾸기가 어려운 말이고 외국어는 대체할 우리말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외래어표기법의 용례를 보면 대부분이 외국어지요. 애초에 외래어도 아니고 외국어를 표기하는 것까지
어문 규범으로 정해 놓을 필요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액셀러레이터든, 악셀이든, 액셀레이터든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표준어규정에 의하면 영판은 아주의 잘못이죠. 정말 영판 이해가 안 됩니다.
앤더슨에 공감하는 바 있고 허웅 선생 발언도 부적절했다 생각하지만, 글의 흐름이 형태론 중심으로만 이루어지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이 경우, 이형태를 인정하면 그만이니까요. 가령 강냉이 같은 사례를 들 수 있겠습니다. 짜장면의 경우, 아직 규정에는 없겠지만 남기심 국립국어원장도 인정한 사안입니다. (지나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