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의 원래 이름은 앵속이다.
양귀비라고 부르게된 사연은 두가지다.
첫째는 이꽃이 중국 4대 미녀중의 하나인 당현종 양씨 귀비의 미모 처럼 예뻐서 이고, 또하나는 이꽃의 아편 성분이 나라를 망치는 것이 귀비 양씨 닮았다고 해서 양귀비이다.
양귀비의 원래 이름은 태진이나, 태어 날때 옥가락지를 끼고 나왔다고 옥환이라 했다.
고아이던 옥환은 양씨가문에 입양되어 양옥환이 되었고 어려서 부터 미모가 출중해서 17세에 당현종의 18번째 아들 수왕에게 시집을 갔다.
얼마후 수왕의 어미이자 현종의 후궁이 죽자 신하들이 황제의 후궁을 물색 하던중 양옥환의 미모가 뛰어난 걸 알고 현종에게 추천하였다.
현종도 맘에 들었으나 이미 자신의 아들과 결혼한 상태라 바로 취하기는 찝찝했는지 아들과 갈라 놓은 후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냈다가 옥현의 나이22세때 후궁으로 맞아 드리고 귀비로 삼았다.
이때 현종의 나이 55세로 귀비에게 홀딱 빠져 정신을 못차렸다.
귀비는 겨드랑이 암내가 극심해서 시녀들이 솜으로 코를 막고 다니며 시중을 들었고 귀비는 호화로운 목욕과 겨드랑이 향주머니를 달고 살았는데 황제는 축농증 때문인지 이냄새도 못 맞고 귀비에게 푹 빠져 정사를 돌보지 못하였다.
귀비의 권력은 황후를 넘어 친정의 언니 3명및 친정 식구 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무소 불휘의 권력을 휘둘러 백성들의 원성이 들 끓었다.
이 때문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현종은 서천으로 피신을 하였고 이때 신라에서 사신으로 와 있던 허기가 황제의 시중을 들어 황제의 성인 이씨성을 제수 받아 인천 이씨 시조의 조상이 되었다.
안록산의 란으로 양귀비의 친족은 몰살 되었고 난이 진압된 후에는 황제의 호위 무사들이 양귀비의 처단을 요구하며 대치를 하였다.
이에 황제의 묵인하에 양귀비는 시중의 안내를 받아 한사찰에서 목을 매어 자결 하였고 사찰은 불태위 졌다.
이때 양귀비나이 38세였다.
얼마전 일본의 유명가수 야마구치모모에가 자신의 조상이 양귀비라며 양씨 족보를 들고 나오기도 했었다.
그에 따르면 당나라에서 목매어 죽은후 불태워진 것은 시녀이며 양귀비는 돚없는 배를 타고 탈출하여 일본 야마구치현에 도착하여 해안에 쓰러져 있던 것을 주민들이 구하여 자신들의 조상이 되었다는것이다
아편은 덜익은 양귀비의 열매에 상처를 내어 흐르는 진액을 긁어 모아 말린 것이다.
양귀비의 꽃과 잎에는 아편 성분이 없어 식용 하기도 하였으나 국내에서는 재배하는 곳이 없다.
나 어렸을 적에 우리 밭에는 비상 응급용으로 해마다 5포기 정도의 흰꽃이 피는 양귀비를 재배 했었는데 1960년대 까지만 해도 한집에 5포기 까지는 재배가 허용 됐었다.
양귀비 열매에는 진딧물이 들 끓었는데 이 진딧물을 다려 먹어도 이유 없이 아픈배가 낳았다.
잎과 줄기도 말려 놓았다가 배 아플때 다려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