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의 북벌 정책은 가능한 것이었나
명나라와 후금(뒷날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 외교를 펼쳤던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했다. 인조와 서인 세력은 중립 외교를 버리고 명나라를 가까이 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후금이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침입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9년 뒤 더욱 강력해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나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다. 이를 거절한 조선은 병자호란을 겪게 되었고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자들과 신하들, 그리고 많은 백성들이 머나먼 청나라 땅으로 끌려갔다.
1636년의 병자호란 당시 임금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전을 계속했지만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삼전도에 나아가 청나라 태종 앞에서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라는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삼궤구고두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라고도 하는데 청나라의 예절 의식으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대며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9번 하는 것이었다. 청나라를 무식한 오랑캐라고 생각했던 인조와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는 큰 치욕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의 항복 조건으로 왕자들과 일부 신하들을 요구했다. 그 결과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신하들과 수많은 백성들이 청나라에 끌려갔다.
8년 뒤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오지만 아버지 인조의 견제를 받으며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25세에 부인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8년간 인질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청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청나라의 권력가 도르곤(청 태종의 이복동생)과 가깝게 지내며 기회를 엿보았다. 청나라의 강력한 힘을 실감한 소현세자는 청나라 관리들과 교류하며 독일인 신부 아담 샬을 만나 천문학, 수학 등 서양의 지식을 배우고 서양의 여러 서적을 수집했다.
인조는 청나라의 신임을 받는 소현세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청나라는 수시로 인조 대신 소현세자를 조선의 왕으로 세울 수 있다는 압박을 주었고, 청나라에 항복했던 명나라 신하 범문정은 조선의 왕을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우자고 할 정도였다. 아버지 인조에게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정치적 경쟁자 그 이상이 아니었다. 소현세자는 화포와 망원경, 서양 서적 등을 갖고 귀국했으나, 인조는 세자의 물건들을 모두 불태우게 하고 계속 박대했다. 그리고 불과 두 달 뒤 건강했던 소현세자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는다. 죽은 소현세자에 대한 당시 기록을 보면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인조실록에도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 모두 붉은 피가 나와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곁에 있는 사람도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 마치 약물에 중독이 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은 장자 승계의 원칙이 철저한 성리학의 나라였다. 첫째 소현세자가 죽더라도 소현세자의 아들이 3명이나 있어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은 왕위를 절대 계승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자마자 곧장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인조는 1년 뒤 소현세자 부인 강씨를 역모로 몰아 사약을 내려 죽였고, 강씨를 따르던 여러 궁녀들까지 모진 고문으로 죽였다. 뿐만 아니라 왕족은 죄를 짓더라도 강화도로 유배 보내는 관행을 무시하고 소현세자 아들들을 풍토병이 만연한 제주도로 보내버렸다. 실제 소현세자의 첫째, 둘째 아들은 제주도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
효종이 왕이 되었으나 아직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은 제주도에 살고 있었다. 이와 같이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약점을 갖고 있던 효종은 즉위와 동시에 북벌을 주장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의 은혜를 갚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되갚아주자는 북벌이 시작된 것이다.
효종은 원두표를 병조판서에 임명하고 이완을 훈련대장에 임명하며 본격적으로 북벌을 내걸었다. 당장 청나라와 전쟁을 할 것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어느 누구도 왕의 정통성이나 소현세자의 아들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결국 효종은 죽을 때까지 10년간 북벌의 깃발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북벌은 실현될 수 없는 주장이었다. 효종이 북벌을 추진하던 17세기 중반, 청나라는 순치제에서 강희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였고 점점 강해지는 세계 최강대국이었다. 이러한 형세를 실학자 박지원은 소설 ‘허생전’에서 허생과 어영대장 이완의 대화를 통해 북벌의 허구성과 당시 조정 대신들의 무능을 꼬집어 비판하였다. 그 내용을 잠깐 보자.
변씨로부터 허생 이야기를 듣고 어영청의 이완 대장이 깜짝 놀라 허생을 찾아간다. 이완이 정중히 청나라를 꺾을 방법을 묻자 허생은 세 가지 답을 내놓는다.
“내가 와룡 선생 같은 이를 천거한다면 임금이 삼고초려를 할 수 있겠느냐?”
“종실의 딸들을 명나라 후손에게 시집보내고 훈척(勳戚 나라에 훈공이 있는 임금의 친척)의 세력을 빼앗겠느냐?”
“우수한 자제들을 가려 머리를 깎고 호복(胡服)을 입혀, 선비들은 유학하게 하고 소인들은 강 남에 장사하게 하여 그들의 허실을 정탐하고 그곳의 호걸들과 결탁하여 천하를 뒤엎고 국치 를 설욕할 계책을 꾸미겠느냐?”
하지만 이완은 모두 어렵다고만 했다. 그러자 허생이 이완을 꾸짖으면서 칼로 찌르려고 위협했고 놀란 이완 대장은 뒷문으로 도망갔다. 그다음 날 이완이 다시 찾아가 봤지만, 허생은 이미 사라져 그 행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는 당시 무능하고 위선적인 사대부들의 허세를 날카롭게 꼬집는 부분이다. 이완은 당시로서는 높은 벼슬자리에까지 오른 지배층이다. 그런데 말로만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외치면서, 허생이 제시한 방법들을 모두 예법과 체면을 운운하면서 거절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허위의식만 가지고 있던 기득권층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허위의식만 가졌지 실제로 북벌을 하겠다는 의지는 없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북벌 주장이 한창이던 17세기 중반, 청나라는 도리어 북쪽에서 등장한 러시아 세력을 막기 위해 조선에 병력을 요청했다. 북벌을 주장하던 효종은 나선정벌(羅禪征伐)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조총 부대를 두 차례에 걸쳐 파견하여 오히려 청나라 군대를 도와주었다. 나선(羅禪)은 러시아를 한자어로 음역한 것이다. 따라서 나선정벌이라는 표현은 러시아를 정벌한다는 뜻이 다. 곧 공격할 나라를 위해 군대를 파견한다는 것이 정말 북벌의 의지가 있었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효종이 죽은 뒤 그의 아들 현종이 즉위한다. 효종만큼 왕위 승계의 정통성이 민감하지 않았던 현종은 북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현종의 아들 숙종 때 북벌이 논의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만들어진다. 마침 청나라에서 옛 명나라 장수들의 반란이 크게 일어났던 것이다. 진정한 북벌론자 윤휴는 숙종을 설득하려다 도리어 사약을 먹고 죽게 된다. 청나라에 미움받을 필요가 없었던 숙종에게 할아버지 효종과 달리 북벌이라는 단어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병자호란 때 수도도 지키지 못했던 조선이 수십 배가 넘는 청나라 군대를 제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벌을 조선의 영토가 확장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이 북벌을 통해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으로 확대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효종의 북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성리학적으로 멸망 당한 명나라를 조선은 부모의 나라라 생각했다. 성리학적으로 북벌은 청나라 오랑캐에게 멸망 당한 명나라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희박한 확률이지만 혹시 북벌이 성공했더라도 조선은 청나라를 멸망시킨 뒤 중국 대륙을 다 뒤져 명나라의 마지막 황족 후손을 찾아 다시 명나라를 세우고 조선 땅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것이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생각하는 북벌이었다. 그 북벌 과정에서 많은 조선의 병사와 백성들이 희생되겠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조선의 사상적 흐름을 엿볼 수 있는 만동묘(萬東廟), 대보단(大報壇),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송시열의 만동묘 사례를 보자. 만동묘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파병한 명 신종을 기리고자 1704년 숙종 30년 오늘날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 화양 계곡 내에 세운 사당이다.
인조 때 청나라에서 구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 숭정제의 친필 ‘비례부동(非禮不動)’을 전해 받은 송시열이 그 글씨를 화양동의 암벽에 새기고 현종 15년(1674) 화양리에 운한각, 화양서원 등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다. 이후 송시열은 숙종 15년(1689) 사사될 지경에 처하자, 당시 이미 명나라가 멸망한 지 50여 년이 지났건만,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와 의종 숭정제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라고 제자 권상하에게 유명으로 남겼다. 권상하는 명나라가 멸망한 지 꼭 환갑이 되는 숙종 30년 인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화양서원 내에 만동묘를 창건하고 스승의 유언대로 만력제와 숭정제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냈다. 망한 명나라 황제를 위해서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이후 조선 임금들도 만동묘를 융숭하게 대우하였다. 영조 2년에는 나라에서 만동묘에 제전과 노비를 내려주었고 그 후에도 예조에서 90명이 돌아가며 사당을 지키게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지원했다. 정조는 직접 글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만동묘는 지역의 백성들에게 역(役)을 빼주겠다고 강요하여 돈을 받아내고,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케 하고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만행이 심했다. 심지어 거스르는 백성을 멋대로 사형시켜도 처벌받지 않을 지경이었다. 당시 이 일대에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다. 심지어 젊은 시절 흥선군이 이곳을 참배하려다가 만동묘지기에게 얻어맞는 등 고초를 당했다는 야사도 있다. 같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통치를 했던 망한 명나라만이 조선의 유일한 우방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청나라를 친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다.
다음으로 대보단을 보자.
대보단은 조선 숙종 때, 임진왜란 당시 원병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을 제사하기 위하여 창덕궁 후원에 세운 제단이다. 명나라가 멸망한 지 60년 되는 해인 1704년 숙종이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병해 준 명나라 신종의 은혜와 병자호란의 치욕을 언급하다가, 나라를 다시 세워준 신종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기 위해 그를 위한 새로운 사당을 건립할 것을 주장하면서 대보단이 세워진 것이다. 재조지은은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라는 뜻으로, 주로 임진왜란 때 명의 참전이 조선의 국난 극복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강조할 때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전쟁 초기 조선이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서 명의 군사적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된 뒤, 조선 지배층과 양반 사이에서 명과 조선의 특별한 유대와 은혜를 상징하는 관용어로 널리 퍼졌다. 대보단이 건립된 뒤에는 3월 상순에 한 차례 제사를 지냈는데, 왕이 몸소 주관하였다.
그 뒤 영조와 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명나라의 건국자인 태조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이 제사 대상에 추가되었고, 제사의 횟수도 연 1회에서 7회로 늘어났으며, 왕의 친제 횟수도 증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순조 이후 고종대까지 이어져 오다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없어지게 되었다.
또 조선 후기 신경(申炅)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라는 책을 저술해 명의 재조지은과 선조의 숭명 의지를 기록했다. ‘번방의 나라를 새로 만들어 준 기록’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조선 후기 신경이 임진왜란 전후 명나라 군사와의 관계, 조선의 외교적 상황, 전황 등을 기록한 야사서이다. 1693년(숙종 19년)에 간행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지원과 조선의 생존을 ‘나라를 다시 일으킨 은혜(재조지은)’로 표현한 책이다. 이는 조선이 임진왜란에서 명나라의 도움으로 나라를 보존했다는 ‘재조지은’ 사상을 강조하며, 조선 후기 사대주의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재조번방지”는 조선 후기 외교사와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인식, 그리고 사대주의적 전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결국 효종의 북벌론은 송시열의 만동묘와 대보단 그리고 “재조번방지”로 이어지는 재조지은을 밑바탕에 깔고, 겉으로 내세운 명분론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는 힘이 빠진 나라에는 사대를 하지 않음으로써 침략을 막고 나라를 평안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거란의 힘이 커지자 송에 하던 사대를 거란으로 바꾸었다. 송에서 오히려 사대해 줄 것을 눈물겹게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조선은 명·청 교체에 눈이 어두워 떠오르는 청을 제쳐두고 이미 망한 명을 섬기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북벌론은 오랑캐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공통된 의식을 공중에 내건 하나의 현수막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