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97
2월10일[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연중 제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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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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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HqG72aIpvs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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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와 Touch하시는 하느님!>
공생활 기간 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치유능력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었기에 원격치유까지 가능하셨던 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자가 현재 처해있는 위중한 상황을 예수님께 설명하면서 직접 가주실 것을 청하기도 했지만, 어떤 때 직접 가시지 않고도 원격치유를 하셨습니다. 굳이 가시지 않아도, 굳이 손대지 않아도 치유는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꽤나 특별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려오자 대뜸 그만을 따로 데리고 조용한 장소로 가십니다. 이어서 그의 두 귀에 당신 손가락을 집어넣으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당신 혀에 대시고 침을 발라 환자의 혀에 갖다 대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에 환자는 꽤나 당혹스러웠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냥 치유해 주시지, 남의 귓구멍은 왜 쑤시지? 왜 ‘더럽게’ 자기 침을 내 혀에 묻히냐구?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꽤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자의 귀에 손가락을 집어넣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적극적으로 접촉하시려는 하느님’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침을 환자의 혀에 바르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각자와 하나 되시려는 하느님’의 모습을 확연히 엿볼 수 있습니다.
환자를 사람들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 각자와 일대일의 관계’ ‘절친 관계’를 맺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측에서 바라볼 때 너무나 다행스럽고, 너무나 행복한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따뜻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다정다감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는지 우리와 끊임없이 접촉하길 원하시며, 리와 1대 1로 만나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지속적인 스킨십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이토록 형편없고 허물 많은 우리 인간들의 구차한 일상사에 기꺼이 끼어들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우리와 나누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죄인인 우리와 하나 되기를, 완벽히 우리 안에 사시기를, 우리에게 기쁨과 웃음, 희망과 사랑, 결국 구원을 선사하기 위해 육화하시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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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k-H9V-Qb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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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은총을 언제까지 함구해야 할까?>
백종원의 골목식당 ‘초심 잃은 거제도 도시락집’의 내용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백 대표는 거제도에서 작은 식당을 하며 거의 망해가는 세 집을 살려놓습니다. 특별히 가장 믿은 집은 거제도 도시락집입니다.
손님이 없는 열악한 상권에서 몇 안 되는 낚시꾼들을 위해 새벽부터 일하며 고생하는 도움이 절실한 사장님 부부를 위해 백 대표는 자신의 특별 비법이 들어간 톳김밥과 거미새라면을 만드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러자 가게는 대박을 냅니다.
그런데 10개월 만에 재방문한 상황은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김밥에 톳의 양이 줄었고 맛도 배지 않은 톳을 썼습니다. 거미새라면에는 통새우가 아닌 새우를 갈아서 넣었습니다. 그리고 홀에서 음식을 먹으려면 1인 1라면을 반드시 먹어야만 합니다. 또 김밥 하나는 카드 결제가 불가합니다. 카드 수수료 때문에, 몇 개 안 되는 식탁의 회전율 때문에 등으로 핑계를 대지만 백 대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처음엔 절실했는데, 지금은 욕심이 들어온 거죠.”
주인은 욕심 때문이었다는 말에 반박하지 못합니다.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은 변할까요? 하지만 그 초심을 잃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백 대표는 말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했는데…. 초심을 잃은 가게가 맛이 유지될 리가 없습니다. 초심에 드리워진 욕심을 걷어내야만 멀리 볼 수 있고 오래오래 많은 손님에게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원래대로 돌아가세요. 왜 이 좋은 기회를 발로 차요? 갈게요. 10개월 전의 절실함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갈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하시던 차라 그도 이방지역에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을은 세상은 상징하는데 이 세상은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이 지배합니다. 고쳐진 그를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를 고쳐 주신 예수님은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하지만 이방 민족과 섞여 살던 그는 자기 마을을 지배하던 어둠의 세력의 강력함을 무시하였습니다. 저절로 자신에게 그것이 스며들어 은총을 받고도 상태가 더 안 좋아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하신 일을 알렸습니다.
마치 백종원 대표가 자신들을 찾아와 비법을 알려주었음을 선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백 대표를 위함이 아닌 그것을 위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도 처음엔 사마리아 지방이나 이방 민족들에게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지역을 지배하는 악의 힘이 너무 강력하여 당신 제자들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께 은총을 받고는 바로 복음을 전하는 데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라비아 지방으로 가서 3년을 수련하고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은총을 받고 3년 정도는 함구하며 그 은총의 씨앗을 열매 맺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은혜를 받은 뒤 바오로 사도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봅시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갈라 1,15-18)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뵈옵고 바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3년 동안 아랍 땅에 머물렀습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는 그 시간 동안 수련했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어디로 돌아왔을까요?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을 찾아갔습니다. 수련의 결과는 결국 교회의 수장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만나 다시 교회에서 파견받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돌아가실 때, “결국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여러 체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교회에 온전한 순명이 가능할 수준이 되었을 때면 복음의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신앙 체험을 말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바오로는 신앙 체험 3년 뒤 교회로부터 파견받습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사도 13,1-3)
성령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파견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잘 들어보면 성령께서 안티오키아 교회에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셔서 교회가 그들을 파견한 것입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첫 신앙 체험을 사도행전에만 세 번이나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체험을 전하면서도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에 순종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만해지지 않게 잡아줍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고 교회에 순종할 줄 안다면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주님께 많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수도회 사제까지 되었고 많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에 순종하기까지 그 은총을 키우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 주님의 교회를 둘로 갈라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 종파만 수천, 수만에 이릅니다.
반면 성 프란치스코를 봅시다. 같은 개혁자였지만, 자기가 받은 은총을 전할 수준까지 오른 분은 성 프란치스코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도회를 어렵게 교회의 인가를 받고 세울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순종할 수 있기 전까지는 함구합시다. 오히려 그리스도께 해가 됩니다. 가장 큰 해를 입는 사람은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초심을 잃지 않도록 은혜를 교회를 통해 주시고 교회에 순종하게 하심으로써 그 초심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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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실 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도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처럼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를 1973년 ‘첫 영성체’ 교리를 받으면서 외웠습니다. 어느덧 50년이 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가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준 곳이 있습니다. 지금 그곳에는 각 나라의 언어로 주님의 기도가 벽에 붙어 있습니다. 물론 한국어로 된 ‘주님의 기도’도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입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유혹의 바람에 흔들리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흔들리는 것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유혹에 흔들리더라도 그 유혹에 깊이 빠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혹에 깊이 빠져들면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유혹에 깊이 빠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혹은 ‘교만’입니다. 뱀의 모습으로 온 사탄은 하와에게 이렇게 유혹합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물이 하느님과 같아질 것이라는 유혹입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은 ‘교만’이라는 유혹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존경받던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유혹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교만’이라는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시기와 질투’입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합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아벨’을 들판으로 데려가서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시기와 질투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세 번째 유혹은 ‘욕망’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거인 골리앗을 싸워서 이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욕망’이라는 유혹에 빠졌습니다. 다윗은 바세바의 아름다움에 취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도 잊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우리야가 바세바의 남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덫에 걸려서 넘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직자도, 수도자도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네 번째 유혹은 ‘욕심’입니다. 아합왕은 자신의 포도원이 많았지만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갈증 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재물을 많이 가졌습니다. 창고를 세우고 재물을 채웠지만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가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나에게 벌어진 일 때문에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벌어진 일을 해석하면서 성장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경험이 나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해석하는 마음에 따라서 내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유혹의 바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유혹이 사라지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부정의 문을 열고 긍정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절망의 문을 열고 희망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문을 열고 용서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미움의 문을 열고 사랑의 문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탐욕과 욕망의 문을 활짝 열고 나눔과 봉사의 문으로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병자들, 굶주린 이들에게 그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당신의 권한과 능력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 시대의 ‘에파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교만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욕망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욕심의 바람이 불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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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31-37: 열려라-에파타
예수님은 다시 갈릴래아로 가시자마자 귀먹은 반벙어리를 만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친절하시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신다. 즉 그 귀먹은 반벙어리를 따로 불러 친절하게 손가락을 귀에 넣으시고 그의 혀를 만지셨다. 그리고 그 불구를 완치시켜주는 은혜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에파타!” 곧 “열려라!”(34절) 하신 것이다. 그는 혀가 풀리고 귀의 닫힌 문이 열렸다.
몸을 설계하시고 육신을 지으신 분께서 몸소 그에게 다가가시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닫힌 귀를 아무런 고통 없이 열어주셨다. 한마디 말도 내뱉을 수 없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이 말을 하게 해 주신 분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아담이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그분은(참조: 창세 1,27-28; 2,20), 힘들게 배워야만 하는 말을 귀먹은 이가 쉽게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성령은 “하느님의 손가락”(루카 11,20)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에 넣으시어,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믿음을 향해 열어 주셨다. 그분이 귀를 만지신 것은 그의 귀가 막혔기 때문이고, 입을 만지신 것은 그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파타!”, 즉 “열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입과 귀도 열어 주시기를 청하자.
주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 주셨다. 이런 일은 그 누구도 일찍이 본 적이 없었으나,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진리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이해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거룩한 복음을 듣지 않고 행할 바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말 못 하는 청각장애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능력은 말 못 하는 사람을 제 혀로 다시 말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비록 한 가지 단순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 능력 안에는 미래의 일을 드러내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예전에는 천상의 것에 대해 무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지식과 지혜의 진리를 깨달아 하느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37절) 하고 감탄하였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해 주셨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백성들이 감탄했듯이 오늘의 우리도 다른 이들이 우리의 믿음의 행실을 보고 “참으로 놀랍기만 하구나!” 하며 우리와 같이 신앙을 갖기를 원하게끔 우리의 행위를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도록 고쳐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단번에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조금씩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 그분의 속삭임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묶여있던 혀가 풀려 올바로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꾸준한 노력의 결실로 나에게 돌아오는 결과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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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에파타!>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 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2-37)
여기서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저분은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인데,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라는 말에서 온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이신 분”이라는 증언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들고 고장 난 이 세상을 고쳐서 천지창조 때의 좋았던 세상으로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ㄷ.ㄹ)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에파타!”(열려라!) 라는 말씀은, “빛이 생겨라.”(창세 1,3) 라는 말씀과 같은 ‘새로운 창조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통로가 막혀 있는 것을 뚫어서 원래의 ‘열린 통로’로 회복시키신 말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되었습니다.(창세 3,24) 그 길이 막힌 것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통로가 막힌 것을 상징하기도 하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막힌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길을 복구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고, 구원을 받는 길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된 일에 대해서 혹시라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차단되기 전에 먼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피해서 숨어버렸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 3,8)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피해서 숨은 일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통로를 사람 쪽에서 막은 일입니다. 그것은 죄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된 것은, 사람 쪽에서 먼저 그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자격을 잃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격을 회복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2월 10일의 복음 말씀에서 ‘듣지 못하는 상태’는 인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또 ‘말을 더듬는 상태’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니까 말씀에 따라 살지도 못하고, 그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지도 못합니다. <제대로 알아듣고, 제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만이 그 말씀을 남에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를 고쳐 주신 일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제대로 실천하고, 남에게 제대로 전해 줄 수 있도록 고쳐 주신 일입니다.
따라서 “에파타!” 라는 말씀은, 예수님 쪽에서는 “열려라!”인데, 우리 쪽에서는 “열어라!”입니다. 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듣게 되고, 들은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말씀대로 살게 되고, 남에게 그것을 말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들은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39-41)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먼저 겸손하게 인정하고 고백해야 하고, 그다음에는 ‘능동적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도움이 없어도 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나라에, 즉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 구원과 생명을 받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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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지으신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죄를 짓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뱀의 존재를 말하기에 앞서 뱀의 교활함은 매우 놀랍습니다. 뱀은 주 하느님의 말씀(계명) 가운데 오직 부정적인 말씀만 가져다 씁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뱀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다른 모든 선물에 대하여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한계(금지)의 말씀이 사실은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담고 있음을 망각하게 합니다.
뱀의 질문에 여인이 대답합니다. 언뜻 보면 여인이 뱀의 유혹에 당당히 맞서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여인이 뱀의 논리에 따라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산의 중심에는 생명나무와 뱀이 주장하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함께 있었지만(창세 2,9 참조), 결국 여인의 마음에는 생명나무가 없어지고 금지된 계명만 남습니다. 여기에다 여인은 하느님의 금지 계명을 하나 더 늘립니다. 그 나무 열매를 ‘먹어서도’ 안 되지만 ‘만져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뱀은 분명히 자기 욕망을 분출하려는 사람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그런데 뱀은 언어의 마법사입니다. 말의 모호함을 이용하여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말로는 죽음에서 사람을 구해 줄 것처럼, 그래서 자신이 사람을 지켜 줄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지배하려 합니다. 뱀은 사람에게 친구처럼 다가오지만 오히려 불행의 씨앗을 심고 그 씨앗이 자라게 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여인이 뱀의 제안을 바라고 열망하였음을 드러내려고 반복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선과 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여인의 눈이, 그의 마음이 바라고 탐합니다. ‘바라다’와 ‘탐하다’의 조합은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둘 다 아주 강하게 집착하는 사람의 욕망을 표현합니다.(시편 78[77],29-30; 잠언 7,25; 미카 2,2 참조)
세상에는 우리를 꾀는 뱀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위험한 뱀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끝없는 욕망이 아닐까요? 오늘도 뱀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살피며 하느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말씀에 기대어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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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윤인규 라우렌시오 신부님]
<귀를 닫아야>
귀머거리에 대한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특이하고도 기이하다. 귀를 여시고 혀를 풀어놓으신 후에 침묵을 분부하는 것도 얼른 납득이 안 간다.
숨이 끊어지면 신체기관은 급속도로 기능을 잃는데, 가장 늦게 잃는 것이 귀라고 한다. 그래서 사망한 지 두 시간 이내에는 병자성사를 베푸는 관행이 있다.
마치 귀머거리를 치유하시고 그의 귀를 봉해버리시는 예수님처럼 사제들도 병자성사를 통해 임종자의 귀에 하느님의 말씀을 담아놓고 죽음으로 침묵하도록 한다.
술피스회 묵상 방법처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경을 읽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유익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에 담아두고 잠자리에 들면 말씀은 침묵에 빠진 영혼을 산책하신다.
말씀은 잠으로 침묵에 빠진 사람의 내면 이곳저곳을 방문하시며 교만은 겸손으로, 인색은 자비로, 미색은 정결로, 분노는 온유로, 탐도는 절제로, 질투는 경애로, 나태는 근면으로 치유하신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무의식까지 스며들게 한다.
예수께서 귀머거리를 고치신 다음 당신의 말씀을 그의 귀에 담아두시고 다시 봉해버리신 까닭이 그것이다.
사람의 입과 귀는 태어나자마자 울음과 함께 열리고, 마지막 숨을 거둠으로써 닫힌다. 입과 귀를 닫는 침묵은 귀담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입 닫고 생명 속에서 숙성시키는 것이다. 귀가 멀면 말을 못하듯이 귀를 닫아야 침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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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시는 장면은,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첫 조상들이 유혹에 빠지고 죄를 짓는 상황과 대비됩니다.
듣지 못한다는 신체적 장애로 겪는 고통이 크겠지만, 우리 사회는 제대로 듣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와 편견, 그리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올바른 정보 없이 자기 해석을 덧붙여서 진실을 왜곡하여 ‘말더듬이’처럼 남에게 말을 전해 벌어지는 갈등과 분열의 상처를 더 크게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와는 간교한 뱀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라고 말을 바꾼 뱀의 간교함에 넘어간 것입니다. 왜곡된 정보로 인해 생긴 첫 번째 유혹입니다.
곧이어 선과 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뜻이 ‘하느님처럼’ 될 것을 두려워한 하느님의 숨은 뜻이라고 왜곡합니다.
결국 간교한 뱀의 언어 농단에 말려든 하와는 눈까지 멀어 진실을 잊고,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우며, 슬기롭게 해 줄 것” 같은 열매에 손을 댑니다. 그리고 들어도 제대로 듣지 못한 하와의 말에 동조한 아담의 마음에서조차 하느님의 명령은 잊힙니다.
예수님의 치유 장면은 죄의 근원을 치유하는 상징적 행위들입니다. 진실을 듣지 못하게 하는 왜곡된 공동체로부터 병자를 따로 데리고 나오시고, 당신 손가락과 침을 귀먹은 이의 귀와 혀에 닿게 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창조 손길과 치유의 힘을 전달하십니다.
그리고 “에파타”, 곧 막힌 귀를 열어주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어” 태초에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신 하느님의 숨결을 되돌려주십니다.
치유 기적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우리 안에 닫힌 모든 귀와 입,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며, 교회는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자리가 되어야 함을 되새길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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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정호 요아킴 신부님]
<에파타>
저는 예전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았는데, 병원에 가봐도 별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몇몇 분들이 병을 잘 보신다는 의사분들을 추천해주기도 하셨습니다. 아주 안 들리는 것도 아니고 겉보기 멀쩡하고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다보니까 스스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언제서부터인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듣지 못한다는 것이 삶의 더 큰 어려움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말을 주고 받으면서 다른 이들과 생활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데 듣지 못한다는 것은 다른 이들의 말을 듣고 말을 배울 기회마저도 갖지 못하는 것이며 그래서 나눔이 단절되고 자신 안에 갇혀버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사람과의 단절이 주는 아픔이 클진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적인 귀먹음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에파타’라고 말씀하십니다. 듣고 말하고 사랑을 나누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귀를 열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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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적>
마르코 7,31-37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기적>
듣지 못하는
이에게도
늘 말씀하시어
듣지 못하는
이도
듣게 하시고
말하지 못하는
이에게서도
늘 들으시어
말하지 못하는
이도
말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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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귀를 열어 주시고 입을 풀어주시기를>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귀먹은 사람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없다면 그는 입이 닫힌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은총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나를 사랑하시고 먼저 생각하고 찾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로마10.17)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으로 귀를 열어 주시고, 말할 수 있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있으며 세상 것에 해박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둔한 사람들이 있다면 들을 귀가 없는 그는 귀먹은 사람입니다. 입이 있어도 주님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말 더듬는 이 입니다. 그런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 주시길 청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엘리사벳 자매는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분의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놀라시겠지만 ‘음악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지금도 서예를 가르치고 수필지도를 하시며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열심히 하시며 말씀도 얼마나 이쁘게 잘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는 육체적인 귀는 닫혔지만, 영적인 귀와 입이 열려 있으십니다. 내면의 귀가 열리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서 손가락을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우리도 한적한 곳에서 주님과 따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끝날 수 있음에도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특진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가두어 놓은 주위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발라 혀에 대는 행동으로 당신의 관심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셨듯이 우리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이웃사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고 말하지 않아도 꼭 안아주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그의 손길에 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혀에 대는 것은 비위생적이고 단정치 못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늘 혼자 외롭게 지냈던 그들에게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던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셨다고 하였는데 하늘을 우러러본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였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빵 5개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루카9,16)을 베풀 때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떤 처지나 환경 안에서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 뵐 것이다.”(신명4,29)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귀를 열어 주시고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주님을 뵙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말씀에 열리게 되어 그로 말미암아 위로와 구원을 얻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고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하고 놀라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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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살았던 집에서의 기억이 많습니다. 단층 주택이었고 넓은 마당에는 나무와 꽃도 많았습니다. 형제가 많아서 저녁 식사 때면 늘 북적대던 기억, 겨울에는 너무나 추워서 가족 모두가 함께 이불을 덮고 서로의 체온으로 매서운 추위를 이겨냈던 기억, 마당에서 키우던 동물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려집니다.
언젠가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 이 집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어딘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지역이 개발되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파리를 ‘시간이 멈춘 도시’라고 부릅니다. 100년 전 헤밍웨이가 걷건 거리와 현재의 파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853년 이후 이렇다 할 재개발이 없었다고 합니다.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찾아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 무척 반가울 것 같습니다.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습니다.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행복을 다시금 간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와 비슷한 감사의 인사를 받곤 합니다. 20년 넘게 써 왔던 ‘새벽을 열며’ 묵상 글 때문입니다. 제 글을 보다가 어느 순간 보지 않았는데, 아는 지인이 저의 묵상 글을 보내줘서 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묵상 글을 보면서 예전의 순수했던 마음이 생각나고,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계속 지켜줘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사랑, 평화, 기쁨, 희망, 믿음 등의 소중한 가치가 담긴 마음은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도 늘 그 자리를 지켜주십니다. 특히 당신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변함없이 계속해서 나눠주십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그냥 손만 얹어 주셔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에파타!”라고 말씀하시지요. 손만 얹어도 충분히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행동을 하셨을까요?
계속된 접촉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단순히 말로 위로 하는 것보다,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병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단 일회적인 사랑이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변함없는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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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무엇을 바랄 것인가?>
공교롭게도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열리다’는 말이 같이 나옵니다. 창세기에는 아담과 하와의 눈이 열릴 것이라는 뱀의 유혹이 나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복음은 주님께서 귀먹고 말을 더듬는 이의 귀와 혀를 열어주시는 얘기입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두 ‘열림’을 보고 즉시 정반대의 열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는 열리지 말아야 할 죄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고, 복음에서 장애인의 경우는 열려야 할 은총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반대의 열림이 있게 된 것은, 정반대의 요인 때문임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뱀 곧 사탄의 유혹과 주님의 구원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아담과 하와는 유혹을 받고 복음의 장애인은 구원을 받습니까? 그것은 아담과 하와에게는 욕망이 있었고 복음의 장애인에게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오늘 창세기에는 욕망이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무 열매가 탐스러웠다는 말에서 탐욕을 유추할 수 있고 그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압니다. 욕망이 없으면 유혹도 없다는 것을.
사실 배가 불러 식욕이 전혀 없으면 음식 냄새는 결코, 유혹이 되지 않고, 내 아내를 너무도 사랑하면 어떤 여자의 유혹도 유혹이 되지 않지요.
그러니 욕망이란 결핍을 채워 더 만족하게 되고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인데 이것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자의 배부른 결핍이지요.
아담과 하와는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 외에는 다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 외에는 다 가질 수 있었고 가지고 있었습니다.
딱 하나 못 가진 것이 있었고 그러나 평소에는 쳐다보지 않았는데 뱀이 그것을 가리켜 보게 하자 그만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쳐다보지 않았으면 되는데 쳐다보는 바람에 그리된 것이지요. 홈 쇼핑을 보지 않으면 되는데 보는 바람에 충동 구매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밖에서 사탄이 보라고 해도 보지 않으면 되는데 안에 욕망이 있으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어도 못 가진 것을 보게 하는 것이 욕망이고, 이때 못 가졌다고 느끼는 결핍이 바로 욕망의 결핍입니다.
이런 욕망의 결핍과 반대되는 것이 갈망의 결핍입니다. 욕망은 있는데도 더 바라기에 결핍을 느끼는 것이지만 갈망은 정말 없고 그래서 생존 또는 존립에 결핍이 있는 것입니다.
적절한 예가 될는지 모르지만 욕망은 이미 많이 먹었는데도 더 맛있는 것을 탐하는 것이라면 갈망은 며칠을 한 끼도 먹지 못해 정말 죽 한 그릇이라도 먹고 싶은 겁니다.
갈망은 살기 위한 것이고, 욕망은 만족을 위한 것이며 그것도 끝없는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갈망은 살기를 바람으로써 구원을 받게 하고 욕망은 더 큰 만족을 바람으로써 유혹을 받게 하며, 갈망은 구원자를 만나 은총의 세계에 들게 하고 욕망은 사탄을 만나 죄의 세계에 들게 하는 것이다.
구원과 만족 중에 무엇을 바랄 것인가? 갈망과 욕망 중에 무엇을 가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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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영적 삶>
-경청과 환대, 관상과 활동, 영적우정과 회개-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축일을 지냅니다. 대구 사수동 베네딕도 수녀원에서는 주보 축일이라 대축일로 지낼 것입니다. 무엇보다 베네딕도 오빠와의 오누이 관계가 신비롭습니다. 산같은 정주의 대가,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이자 유럽의 수호자 성 베네딕도 오빠와의 관계도 참 흥미롭습니다. 이들의 주님 안에서 영적 우정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웠는지 서로의 삶을 참으로 풍요롭게 했을 것입니다.
새롭게 확인한 사실은 생몰生沒연대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바로 두분이 쌍둥이였고 두분 다 480년 같은 해에 태어나 547년 같은 해에 선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성녀 사후 얼마 지난 그해에 돌아가셨던 듯 합니다.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에 두분의 영적우정(33장)과 성녀의 죽음(34장)이 참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인의 몬테카시노 수도원 가까이 수녀원에서 살던 쌍둥이 여동생 스콜라스티카 수녀는 일년에 한 번, 오라버지 베네딕도를 만나 영적대화를 나누며 영적우정을 깊이했던 듯 합니다. 죽음을 예감한 성녀는 세상을 떠나던 해, 성인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셨으나 총총히 떠나려는 매몰찬 오라버니가 원망스러워 성녀는 간절히 기도하셨고 갑자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로 인해 성 베네딕도는 수도원에 못 돌아가고 밤새 대화를 나눴다는 전설적인 내용이 베네딕도 전기 33장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거룩한 남매가 만난 삼일후 성녀는 세상을 떠났고, 이어지는 묘사가 아름다워 34장 대부분 그대로 인용합니다.
‘삼일후에 성인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누이의 영혼이 육신에서 나와 비둘기의 형상으로 하늘에 신비롭게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분은 그처럼 영광스런 누이의 모습에 기뻐하시면서 찬송과 찬미가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형제들에게 누이의 임종을 알려 주었다.
그분은 즉시 형제들을 보내어 누이의 시신을 수도원에 모셔와서 당신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둔 무덤에 안장하게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두분의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늘 하나였던 것처럼 그들의 육신도 무덤에서까지 갈라져 있지 않았다.’
얼마나 열린 수도생활에 주님 안에서 아름답고 깊은 영적우정을 나눈 오누이 관계였는지요! 지금은 잘 부르지 않지만 33장과 34장을 바탕한 복음전 라틴어 부속가도 참 아름답습니다. 오늘 시간 되면 번역된 우리말 부속가를 한번 불러 보려합니다. 이런 성녀 축일을 배려한 오늘 말씀의 배치도 참 적절합니다. 저는 오늘 성녀 축일과 말씀들을 통해 참된 영적 삶의 세부분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경청과 환대, 관상과 활동, 영적우정과 회개입니다.
첫째, 경청과 환대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귀 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입니다. 마리아가 주님께 칭찬을 받았던 것은 경청의 환대였습니다. 주님의 우선적인 바람이 바로 경청의 환대였습니다. 주님께서 베타니아 이들의 집에 들르셨을 때 주님의 마음을 알아챈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환대합니다. 마르타의 항의를 일축하시며 마리아를 두둔하십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오늘 화답송 후렴, “들어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여라”는 시편 말씀도 흡사 마르타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베네딕도 규칙 첫 마디 역시, “들어라, 내 아들아, 스승의 가르침을. 그리고 그 가르침에 네 마음의 귀를 기울여라.” '들어라'로 시작되는 규칙서 첫 말마디입니다.
수도원 식탁에도 큰 산봉우리 셋을 배경한 그림의 천에 씌어있는 글자가 “들어라”입니다. 산같은 침묵과 경청의 정주 수도자가 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묵묵히 침묵중에 바라보며 듣는 정주의 불암산은 말그대로 정주의 스승입니다. 새삼 참된 영적 삶에 경청의 환대가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둘째, 관상과 활동입니다.
둘은 참된 영적 삶의 리듬입니다. 둘은 우열관계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관계입니다. 참으로 둘의 균형과 조화가 필수입니다. 그러나 우선적인 것은 관상의 경청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베네딕도회의 모토가 둘 간의 우선순위와 균형을 말해 줍니다. 저는 일컬어 목운동의 영성이라 합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하늘 보고 땅 보고, 하느님 보고 사람 보고, 관상하고 활동하고, 이 우선순위를 절대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환대가 우선이고 음식의 환대는 다음입니다. 이래서 미사구조도 말씀 전례에 이어 성찬전례입니다. 바로 이점을 마르타는 몰랐습니다. 마르타 역시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요! 음식접대 사랑을 통해 주님을 환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실 공동체는 마리아 같은 관상가도, 마르타 같은 활동가도 필수입니다. 마리아만 있어도 안 되고 마르타만 있어도 안 됩니다. 두 부류의 형제자매들의 균형과 조화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둘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밖으로는 활동가 마르타, 안으로는 관상가 마리아의 두 측면을 지니는 것이 이상적일 것입니다. 다음 주님의 죽비 같은 말씀에 마르타는 크게 회개하여 깨닫고 배우며 우선순위를 바로 잡았을 것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는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셋째, 영적우정과 회개입니다.
영적우정에 끊임없는 회개는 필수입니다.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깨달음과 더불어, 배움과 더불어 마음은 순수해지고 겸손해지고 지혜로워질 것이니,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영적우정도, 보이는 도반 형제들과의 영적우정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서 다음 말씀은 광야 인생 여정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으로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덕목들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파트너로, 협력자로 삼아 당신과의 영적우정을 깊이하겠다는 주님 말씀으로 들립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참으로 우리가 주님과의 사이든지 형제간의 사이든지, 참된 영적우정을 위해 배우고 익혀야 할 필수적 덕목이,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임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경책 말씀의 가르침에 마리아는 경청의 중요성을 새롭게 깊이 깨달았을 것이며, 마르타도 활동을 자제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경청의 관상에 각별히 유의해야 함을 배웠을 것입니다. 오늘 앞서 소개한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영적우정은 얼마가 깊고 순수하고 아름다웠는지요!
마리아와 마르타도,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도 주님 안에서 수직적 차원에서 주님과의 영적우정을 깊이하며 더불어 상호간 수평적 차원의 우정도 깊이했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참된 영적 삶을 위해 주님 안에서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간의 우정도 함께 가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우리는 참된 영적 삶을 위한 세 요소를 공부했습니다. 경청과 환대, 관상과 활동, 영적우정과 회개입니다. 이런 참된 영적 삶의 중심에 이 거룩한 미사가 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참된 영적 삶을 훈련, 습관화하여 우리 모두 참된 영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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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오늘 복음(마르7,31-37)은 '예수님께서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립니다. 그래서 제대로 듣게 되고, 제대로 말을 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안에서 꼭 일어나야 할 기적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는 멀쩡한 귀와 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헛것을 듣고,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좋을 대로 듣고, 자기 좋을 대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기적!'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예수님의 몸이 닿으니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제대로 듣고 보고 말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면 죄의 유혹에 빠지게 되고, 죄를 짓게 됩니다. 제대로 듣지 못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오늘은 '성 베네딕도의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어제의 모습은 자비로우신 주님께 모두 내어 드리고, 예수님 마음 안에서 오늘 하루를 기쁘게 다시 시작합시다!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을 씻은 이! 행복하여라, 주님이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영에 거짓이 없는 사람!"(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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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마르 7, 35)
어떻게 사는 삶이
건강한 삶인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하는 삶이
제대로 걸어가는
삶이며
건강한 삶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듣고
잘 말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제대로 듣고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말하는 것이
제대로 지켜나가는
건강한 관계의
참된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여정 또한
제대로 듵으시고
제대로 말씀하시는
사랑의
여정이었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귀먹게 하고
말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거짓 사랑에
사랑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도
귀와 입이
열려야
제대로
깨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자신이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가장 아픈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열리면
예선보다 훨씬
밝아집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건강한 울림이
치유입니다.
기도도 에파타
삶도
에파타입니다.
"에파타!"곧
"열려라!"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열리듯
사람이 열려야 할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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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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