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일까.막연하게는 사료를 판단하는 엄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이려니하고 생각했다.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그런 엄정한 시각 외에 상상력과 문학적인 소양이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한다.역사의 1차적 구실은 사실의 기록과 평가에 있다.다만 그 사실이란 게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요,남아 있는 사료도 전체상을 확연히 보여주는 것이 아닐진대,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것은 객관적 시각 이전에 그 시대를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상상력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기」는 중국 한나라때 사마천이 상고의 전설적인 제왕 황제시대에서 기원전 1세기 초인 전한 무제시대에 이르는 역사를 서술한 1백30권으로 이뤄진 방대한 역사서다. 이 책이 쓰인 것은 지금부터 2천년도 더 된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기」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독서물로서의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장면전환·심리묘사 압권
흔히 한문이 생긴 이래로 「사기」를 능가하는 문장은 나온 적이 없다고들 말한다. 소설만큼이나 박진감 넘치는 장면 전환과 인물들의 심리묘사,간결하고 절제된 문장 속에서 아득한 기원 전의 인물들이 고리눈을 부릅뜨고 수염을 뻗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우리 앞으로 달려나온다. 그 긴박감 넘치고 속도감 있는 기술은 도무지 2천년전의 기록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가.사마천은 그것을 개개인의 능동적인 활동에서 추동되는 것이라고 믿었던 듯하다. 「사기」에는 그 이전 편년체 역사서에서는 볼 수 없던 이른바 열전부분이 들어있다. 이는 평면적 나열에 그친 편년체 역사 기술이 지닌 맹점을 보완하고 그 시대를 보다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사기」와 그 이전의 역사서를 분명하게 구분짓는 가장 정채로운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전체 1백30권 가운데 이 열전에만 70권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단순한 연표에 해당하는 「표」부분을 빼면 전체의 반 이상을 인간 개인의 입신과 출세,실패와 성공담에 주목하였다. 열전 가운데는 사마천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역사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을 이들의 기록이 적지 않다. 사마천은 이러한 인물들에 맞춰 생동하는 붓끝으로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듯 생생하게 그 시대를 재현해 내고 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 하지만,만약 자객 형가가 그때 진시황을 죽였더라면,항우가 조금만 더 아랫사람들에게 너그러웠더라면 중국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사마천의 혼을 담은 역작
왜 백이숙제와 굴원 등은 의로운 길을 갔는데도 불행하게 생을 마치고 말았을까? 역사에는 과연 법칙이 있는가? 세계에는 질서가 있는가? 정의는 언제나 승리하는가? 글을 읽다 보면 역사의 사실을 앞에 두고 이런 물음들을 던지고 있는 사마천의 안타까운 분노와 의문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도 사마천은 정의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는 않는다. 사마천의 집안은 대대로 사관이었다.아버지 사마담은 춘추시대 말기부터 한나라 초에 이르는 4백여년의 역사를 저술하려는 열망을 품고 작업에 착수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일은 아버지의 피맺힌 유언을 받은 아들 사마천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젊은 시절 중국 전역을 여행하며 역사 유적을 답사하고,지리와 풍속을 기록하며 인물들의 일화를 채집했다.
○인간과 역사의 안목 넓혀
그러나 한창 「사기」 집필에 몰두하던 사마천은 악전고투끝에 중과부적으로 흉노에게 투항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가 그만 황제의 노여움을 사 궁형이라는 치욕을 당한다. 감옥에 갇혀 사마천은 옥리만 보면 머리가 땅에 닿을 만큼 절을 하고,심부름하는 아이만 보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인간성이 황폐화되는 것을 경험했다. 그 치욕과 분노를 안으로 곱씹으며 사마천은 마침내 「사기」를 완성했다.
○세상은 돌고 돈다. 아득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은 지금도 그대로 되풀이된다.그 양태와 표현만 달라졌을 뿐 본질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그러므로 역사가 필요한 까닭은 과거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나아가 미래를 위해서다. 「사기」의 열전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읽고 세상을 보는 안목을 길러준다. 난마와도 같이 얽힌 세상에서,약육강식의 생존논리 앞에서 바르게 사는 삶,죽지 않고 사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단호하게 일러준다. 「사기」는 인간학의 보물창고라 할 수 있다.춘추전국시대의 각박한 현실속에서 갖가지 인물군상들이 빚어내는 한편의 장엄한 드라마다.<정민 교수·한양대 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