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봉은 서울 출신으로 세 살 때 고아원에 버려졌다. 구타를 피하여 다섯 살 때 고아원에서 도망쳐 대전행 버스를 탔고 대전의 유흥가에서 살기 시작했다.
계단이나 공중 화장실에서 잠을 잤고,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 먹고 변기통 물을 마셨으며, 길거리나 나이트 클럽에서 껌과 에너지 드링크를 팔았다.
유흥가에서 살면서 그가 만났던 사람들은 조폭, 양아치, 노점상인들이었다. 그는 일상적인 폭력에 노출되었으며, 일상 언어보다 욕을 먼저 배웠다. 어린 시절 그에게는 알콜 중독, 마약 중독, 강간 등의 매우 나쁜 일들이 벌어졌다. 그는 이곳저곳으로 팔려나갔고 그런 식으로 길거리 생활만 10년 가까이 했다고 말했다.[3]
최성봉은 거리에서 노점상 아주머니가 지어준 이름인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10년여의 거리생활을 하였다. 14살 경 야간학교 선생님의 도움으로 파출소에서 지문검색을 하였고, 그의 진짜 이름과 나이에 대한 기록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최성봉은 거리에서의 이름인 지성을 선호했다. 이 이름은 한국어로 '죄송'처럼 들린다.
최성봉은 껌을 팔러 유흥가에 돌아다니다 조폭들에게 납치를 당했고, 산에 파묻혔다. 그러나 달리 갈 데가 없었기에 다시 유흥가로 돌아와 껌을 팔 수밖에 없었다.
그가 껌을 팔던 나이트클럽에서 성악 음악을 들은 후 그는 음악의 길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 나이트클럽에서 나오는 음악과 대조되는 성악가의 진정성 있는 모습에 매료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런 정보 없이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음악선생님들을 수소문하여 찾아갔으나, 여러 번 거절당했고, 그는 나중에 박정소라는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박정소는 최성봉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가 사는 곳을 방문한 후 –그저 야간학교의 낡은 소파였다– 무료로 그를 가르치고 예고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가 열여섯 살 때였다.
최성봉은 2007년이 되어서야 기초생활 수급권자로 선정되었다. 그 해에 이르러서야 그는 생애 처음으로 집이라는 공간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정부로부터 어떠한 사회적 지원도 받지 못했다. 10여 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번 교통사고를 당하였고 크고 작은 사고로 인해 부상을 입은 적이 많았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입원치료를 전혀 받지 못하였다. 지금까지도 그는 (이명현상과 같은) 신체적, 정신적인 여러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정기적인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14살 경 그는 조폭을 피해 야간학교에 숨었다. 그는 그곳에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검정고시에 응시해서 고등학교 입학 자격을 얻었다. 음악을 배우고 싶었고, 보통사람처럼 친구들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내고 싶다는 소망으로 그는 대전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그가 개인 레슨비를 낼 재정적 여력이 없었기에 어떠한 선생님도 보컬 트레이닝을 해주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등록금과 레슨비를 벌기 위해 택배회사 물류창고에서 일했지만 야간 작업 중 끔찍한 추락사고를 당했다. [7]
그는 자퇴할 것을 고민한 적도 있었고 그의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은 그가 어려운 환경 때문에 자주 결석했다고 증언했다.[8] 그는 한양대학교에 합격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등학교 이후의 교육은 받을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는 건설 노동자나 비슷한 일을 하며 일용직 노동자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는 그 시기에 마음의 병으로 고통 받았으며 오늘 죽어도 내일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